[이석재의 사건파일]지강헌은 왜 탈주범이 됐나

입력 2004.10.04 (20:37) 수정 2005.01.0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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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지난 1988년 10월 이맘때쯤 서울 북가좌동의 한 주택가.
탈주범 4명이 일가족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강영일, 안광술, 한의철, 그리고 지강헌 등 모두 4명으로 호송 도중 탈주한 미결수들이었습니다.
탈주극은 이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지만 당시 인질들이 탈주범을 보호하려 했고 지강헌이 팝송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요구한 것 등이 세간에 화제가 됐습니다.
이곳이 바로 16년 전 지강헌과 3명의 탈주범들이 인질극을 벌였던 장소입니다.
당시 사건의 파문이 컸던 이유는 지강헌이 외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외침 속에는 지강헌이 탈주라는 극한 방법을 택한 이유도 담겨 있습니다.
처음 탈주사건이 일어난 것은 10월 8일.
영등포 교도소에서 지방교도소로 이감되던 미결수 12명이 호송버스를 탈취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탈주범들은 곧 경찰에 검거되거나 자수했습니다.
하지만 지강헌을 포함한 일당 4명은 9일 동안 가정집 6군데를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하면서 경찰의 눈을 피했습니다.
⊙고영서(당시 인질 탈주범 신고자): (탈주범들이 나에게) 내일 일요일이니까 나갈 테니까 신고만 하지 말라, 그것만 협조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기자: 이들이 당시 인질들에게 밝힌 탈주 이유는 과중한 형량.
지강헌 일당은 강절도범이기는 했지만 5공 들어 만들어진 사회보호법 때문에 본형보다 긴 보호감호를 선고받았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탈주를 감행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안광술(당시 탈주범): 치안에 대해서 불만이 많아 어떻게 판검사를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야?
⊙기자: 또한 지강헌은 전경환과 같은 인물과 상대적 불평등을 느꼈다고 주장했습니다.
전경환은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비리로 70억을 횡령, 탈세했지만 징역 7년에 그쳤고 잡범인 자신은 556만원 강, 절도에 17년을 선고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지강헌은 인질들에게 자신이 왜 전경환보다 더 많은 형을 받아야 하느냐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박원탁(덕성여대 교수/당시 인질 협상위원) 지강헌의 기본 생각은 사회의 지도층들이 또 부유한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 교도소에 와서 형을 가볍게 재판받고 있다는 데 대해서 사회의 불신감이 많았었습니다.
⊙기자: 탈주극은 결국 유혈참사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강헌(당시 탈주범): 안광술, 한의철 두 명 다 자살했다.
마지막 남은 건 나 한 사람이다.
⊙기자: 안광술과 한의철이 먼저 권총으로 자살했고 지강헌도 유리창을 깨 자해하던 중 경찰특공대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강영일은 현장에서 붙잡힌 뒤 지금까지 교도소에 수감중입니다.
지강헌 사건 이후에도 지존파와 신창원 등 사회를 놀라게 한 범죄자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가진 자에 대한 분노를 범죄 이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강헌은 마지막까지 이 창틀을 붙잡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더 이상 불공평한 사회를 핑계 삼을 수 없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사라지는 날은 언제쯤일까 생각해 봅니다.
사건파일 이석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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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석재의 사건파일]지강헌은 왜 탈주범이 됐나
    • 입력 2004-10-04 20:27:50
    • 수정2005-01-04 16: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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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지난 1988년 10월 이맘때쯤 서울 북가좌동의 한 주택가. 탈주범 4명이 일가족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강영일, 안광술, 한의철, 그리고 지강헌 등 모두 4명으로 호송 도중 탈주한 미결수들이었습니다. 탈주극은 이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지만 당시 인질들이 탈주범을 보호하려 했고 지강헌이 팝송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요구한 것 등이 세간에 화제가 됐습니다. 이곳이 바로 16년 전 지강헌과 3명의 탈주범들이 인질극을 벌였던 장소입니다. 당시 사건의 파문이 컸던 이유는 지강헌이 외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외침 속에는 지강헌이 탈주라는 극한 방법을 택한 이유도 담겨 있습니다. 처음 탈주사건이 일어난 것은 10월 8일. 영등포 교도소에서 지방교도소로 이감되던 미결수 12명이 호송버스를 탈취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탈주범들은 곧 경찰에 검거되거나 자수했습니다. 하지만 지강헌을 포함한 일당 4명은 9일 동안 가정집 6군데를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하면서 경찰의 눈을 피했습니다. ⊙고영서(당시 인질 탈주범 신고자): (탈주범들이 나에게) 내일 일요일이니까 나갈 테니까 신고만 하지 말라, 그것만 협조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기자: 이들이 당시 인질들에게 밝힌 탈주 이유는 과중한 형량. 지강헌 일당은 강절도범이기는 했지만 5공 들어 만들어진 사회보호법 때문에 본형보다 긴 보호감호를 선고받았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탈주를 감행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안광술(당시 탈주범): 치안에 대해서 불만이 많아 어떻게 판검사를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야? ⊙기자: 또한 지강헌은 전경환과 같은 인물과 상대적 불평등을 느꼈다고 주장했습니다. 전경환은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비리로 70억을 횡령, 탈세했지만 징역 7년에 그쳤고 잡범인 자신은 556만원 강, 절도에 17년을 선고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지강헌은 인질들에게 자신이 왜 전경환보다 더 많은 형을 받아야 하느냐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박원탁(덕성여대 교수/당시 인질 협상위원) 지강헌의 기본 생각은 사회의 지도층들이 또 부유한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 교도소에 와서 형을 가볍게 재판받고 있다는 데 대해서 사회의 불신감이 많았었습니다. ⊙기자: 탈주극은 결국 유혈참사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강헌(당시 탈주범): 안광술, 한의철 두 명 다 자살했다. 마지막 남은 건 나 한 사람이다. ⊙기자: 안광술과 한의철이 먼저 권총으로 자살했고 지강헌도 유리창을 깨 자해하던 중 경찰특공대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강영일은 현장에서 붙잡힌 뒤 지금까지 교도소에 수감중입니다. 지강헌 사건 이후에도 지존파와 신창원 등 사회를 놀라게 한 범죄자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가진 자에 대한 분노를 범죄 이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강헌은 마지막까지 이 창틀을 붙잡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더 이상 불공평한 사회를 핑계 삼을 수 없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사라지는 날은 언제쯤일까 생각해 봅니다. 사건파일 이석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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