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人] “나의 인생 나의 그림”…할머니들을 화가로 만든 화가

입력 2023.05.23 (19:36) 수정 2023.05.23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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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붓이나 색연필 한번 잡아본 적 없는 구순, 팔순 할머니들을 화가로 만든 화가가 있습니다.

고령화된 농촌의 작은 마을에서 어르신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화가를 경남인에서 만납니다.

[리포트]

그림을 배운 적 없는 할머니들이 마음가는대로 그린 그림이 작품으로 걸리는 순간입니다.

["나이 든 사람의 어떤 살아온 여정을 진솔하게 그 무엇에 의하지 아니하고 표현해 낼 수 있었다는 게 참 좋아 보이고 너무나 진지하게 보이더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서 갤러리를 만들면서 이걸 한번 해보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갤러리로 이준일 작가가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부러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외진 시골 미술관.

이준일 작가는 지리산 둘레길로 스케치여행을 다니다 곰실마을 식구가 됐습니다.

지리산의 자연은 마르지 않는 소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이어온 회화 작업은 간결하면서 자유롭습니다.

미술교육자로, 화가로 산 그에게 특별한 감동을 안긴 그림은 뜻밖에도 구순 할머니의 그림입니다.

[이준일/화가 : "사실상 부끄럽더라고요. 내가 이때까지 그림을 그렸지만 이게 그림이고, 나는 그림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순전히 할머니가 살아오면서 생각하고 느꼈던 부분을 가지고 그냥 진솔하게 작업한 것이거든요."]

["할머니 안녕하세요."]

이웃 할머니들에게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건넨 지 1년.

거동이 힘든 할아버지를 돌보며 부지런히 그린 그림엔 다정한 얼굴들이 담겼습니다.

["너무 잘 하셨어요."]

["재미로 했어. 우리는 장난으로 한 거라 이게."]

자매처럼 지내는 배순자 할머니도 틈틈이 채운 스케치북이 여러 권입니다.

["형님이 몇 개 그려놨더라고. 나보고도 그려보라고 해."]

["저녁으로 생각나는 대로 하나하나, 나는 주로 꽃을 많이 그렸지. 꽃 같은 것 그런 것."]

자식들 돌보랴, 농사와 집안일로 당신을 위한 시간이 없었던 할머니들이 작품 앞에 섰습니다.

나의 인생 나의 그림. 전시회 제목처럼 지난 여정과 있는 그대로의 삶이 담겼습니다.

[장복임/함양군 죽곡리 : "유진이, 경란이, 서울 딸 둘이. 노모당. 회장이고 회원들, 총무 그래. 이건 밥 먹는 것. 젓가락 놓고 이건 반찬. 그런데 그림이 이게 뭐이라. 너무 기뻐요. 전화가 오더라고 손자들이. 할머니 그림 잘 그렸어."]

딸 여덟에 막둥이 아들을 둔 9남매의 엄마 그림엔 꽃이 만발한데요. 평생 그림 속의 집을 지킨 엄마는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배순자/함양군 죽곡리 : "현재 우리 집 모양인데 문 두 짝만 달았어. 토끼가 걸어와서 따먹는 거고. 여기는 이제 장미꽃인데 이제 피려고 맺은 거고. 이건 뻐꾸기."]

꾸밈없는 날 것의 그림은 어떤 명화보다도 뭉클한 여운과 감동을 전합니다.

[김상희/함양군 함양읍 : "대단한 의욕으로 그렸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무도 미술 공부도 안 하신 분들이... 관장님이 어떻게 이런 걸 기획했는지 모르겠네요. 대단합니다."]

[이준일/화가 : "그림을 배웠던 사람이 이 지붕 위에 새를 이렇게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죠. 색의 대비 같은 건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안중에 없어요. 배우질 않았으니까. 이 그림들이 화장기가 없는 생얼입니다. 본래 모습이거든요."]

평생 그림을 가르친 화가는 그림을 배우지 않은 할머니들의 그림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뭔가 지도 받지 않고 배우지 않았던 그런 그림 속에서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있다는 거죠. 인간의 어떤 본래의 모습 같은..."]

할머니 화가를 더 많이 만나고 싶은 화가의 꿈이 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처럼 넉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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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人] “나의 인생 나의 그림”…할머니들을 화가로 만든 화가
    • 입력 2023-05-23 19:36:27
    • 수정2023-05-23 19:53:32
    뉴스7(창원)
[앵커]

붓이나 색연필 한번 잡아본 적 없는 구순, 팔순 할머니들을 화가로 만든 화가가 있습니다.

고령화된 농촌의 작은 마을에서 어르신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화가를 경남인에서 만납니다.

[리포트]

그림을 배운 적 없는 할머니들이 마음가는대로 그린 그림이 작품으로 걸리는 순간입니다.

["나이 든 사람의 어떤 살아온 여정을 진솔하게 그 무엇에 의하지 아니하고 표현해 낼 수 있었다는 게 참 좋아 보이고 너무나 진지하게 보이더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서 갤러리를 만들면서 이걸 한번 해보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갤러리로 이준일 작가가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부러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외진 시골 미술관.

이준일 작가는 지리산 둘레길로 스케치여행을 다니다 곰실마을 식구가 됐습니다.

지리산의 자연은 마르지 않는 소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이어온 회화 작업은 간결하면서 자유롭습니다.

미술교육자로, 화가로 산 그에게 특별한 감동을 안긴 그림은 뜻밖에도 구순 할머니의 그림입니다.

[이준일/화가 : "사실상 부끄럽더라고요. 내가 이때까지 그림을 그렸지만 이게 그림이고, 나는 그림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순전히 할머니가 살아오면서 생각하고 느꼈던 부분을 가지고 그냥 진솔하게 작업한 것이거든요."]

["할머니 안녕하세요."]

이웃 할머니들에게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건넨 지 1년.

거동이 힘든 할아버지를 돌보며 부지런히 그린 그림엔 다정한 얼굴들이 담겼습니다.

["너무 잘 하셨어요."]

["재미로 했어. 우리는 장난으로 한 거라 이게."]

자매처럼 지내는 배순자 할머니도 틈틈이 채운 스케치북이 여러 권입니다.

["형님이 몇 개 그려놨더라고. 나보고도 그려보라고 해."]

["저녁으로 생각나는 대로 하나하나, 나는 주로 꽃을 많이 그렸지. 꽃 같은 것 그런 것."]

자식들 돌보랴, 농사와 집안일로 당신을 위한 시간이 없었던 할머니들이 작품 앞에 섰습니다.

나의 인생 나의 그림. 전시회 제목처럼 지난 여정과 있는 그대로의 삶이 담겼습니다.

[장복임/함양군 죽곡리 : "유진이, 경란이, 서울 딸 둘이. 노모당. 회장이고 회원들, 총무 그래. 이건 밥 먹는 것. 젓가락 놓고 이건 반찬. 그런데 그림이 이게 뭐이라. 너무 기뻐요. 전화가 오더라고 손자들이. 할머니 그림 잘 그렸어."]

딸 여덟에 막둥이 아들을 둔 9남매의 엄마 그림엔 꽃이 만발한데요. 평생 그림 속의 집을 지킨 엄마는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배순자/함양군 죽곡리 : "현재 우리 집 모양인데 문 두 짝만 달았어. 토끼가 걸어와서 따먹는 거고. 여기는 이제 장미꽃인데 이제 피려고 맺은 거고. 이건 뻐꾸기."]

꾸밈없는 날 것의 그림은 어떤 명화보다도 뭉클한 여운과 감동을 전합니다.

[김상희/함양군 함양읍 : "대단한 의욕으로 그렸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무도 미술 공부도 안 하신 분들이... 관장님이 어떻게 이런 걸 기획했는지 모르겠네요. 대단합니다."]

[이준일/화가 : "그림을 배웠던 사람이 이 지붕 위에 새를 이렇게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죠. 색의 대비 같은 건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안중에 없어요. 배우질 않았으니까. 이 그림들이 화장기가 없는 생얼입니다. 본래 모습이거든요."]

평생 그림을 가르친 화가는 그림을 배우지 않은 할머니들의 그림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뭔가 지도 받지 않고 배우지 않았던 그런 그림 속에서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있다는 거죠. 인간의 어떤 본래의 모습 같은..."]

할머니 화가를 더 많이 만나고 싶은 화가의 꿈이 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처럼 넉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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