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범 ‘혀 깨문 죄’ 59년…정당방위 인정, 어디까지? [주말엔 전문K]

입력 2023.05.27 (21:20) 수정 2023.05.27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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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59년 전의 일이죠.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잘랐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던 소녀, 최말자 씨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제 70대가 된 최 씨는 재심을 요청해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심 전망과 최 씨 사건 후 59년 동안, 정당방위 인정 범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백인성 법조전문기자와 알아보겠습니다.

백 기자, 먼저 어떤 사건인지, 들어볼까요?

[기자]

네, 언론 등에서 접한 분들도 있으실텐데요.

형법학 교과서엔 정당방위를 다룬 대표적 판례로 소개된 사건입니다.

1964년 경남 김해에서 21살 남성 노모 씨가 18살 최말자 씨에게 성폭행을 시도했는데요.

최 씨는 이 남성의 혀를 깨물었고, 노 씨는 혀 1.5cm가 잘려 봉합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재판에서 성폭행을 시도한 노 씨는 징역 6개월의 집행유예, 최 씨는 중상해죄가 적용돼 징역 10개월의 집행유예가 선고됐습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겁니다.

[최말자/5월 2일 : "말이 안 되죠, 앞뒤가 안 맞잖아요.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한데,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잖아요. 내가 피해자인데 형량이 무겁고, 가해자는 가볍고. 앞뒤가 맞습니까?"]

[앵커]

최말자 씨의 말에 공감도 가는데... 판결의 근거가 뭐였습니까?

[기자]

혀를 자른 건 너무 과했단 겁니다.

최 씨는 정당 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성이 성범죄 원인을 제공했을 거란 59년 전의 성 차별적 인식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법원은 처음 보는 남성을 따라간 건 '이성에 대한 호기심'의 소치였고, 남성이 입을 맞추게끔 한 데 최 씨가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고, 범행 직후 최 씨가 친구를 만났을 때 당황하거나 괴로워하는 표정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앵커]

59년이란 시간이 지났는데, 이런 사건이 요즘 일어난다면, 같은 판결이 나오진 않겠죠?

[기자]

지금은 무죄 판결이 나올 가능성, 있어 보입니다.

그동안 성 범죄 사건에서 사안별로 정당방위가 인정된 사례들이 나타났는데요.

대표적으론 남성 두 명에게 둘러싸여 추행당하던 주부가 가해자의 혀를 깨문 사건에서 다른 수단이 없었다며 정당방위가 인정돼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최근에는 헌법재판소가 고시원에서 성추행을 시도한 남성에게 들고 있던 사기그릇을 휘두른 사건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해 검찰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앵커]

최말자 씨가 3년 전에 재심을 청구했잖아요?

이것도 인정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기자]

재심 자체는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입니다.

재심은 확정된 사실관계를 뒤집는 예외적 절차여서 법에 정해진 사유, 무죄를 증명할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당시 판검사가 직무상 범죄에 가담한 경우같은 한정된 이유로만 청구할 수 있거든요.

최 씨는 검사가 영장없이 구속했고, 진술 거부권, 변호인 선임권 등을 보장하지 않았다면서 직무상 범죄가 있었다고 주장했는데요.

너무 오래된 사건이라 수사나 재판기록이 보존돼 있지 않아 1,2심 법원에선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의 판단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앵커]

최말자 씨 사건이 아까 형법학 교과서에도 정당방위 관련 판결로 소개됐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선 정당방위가 잘 인정이 안 된다면서요?

[기자]

'싸움이 나면 무조건 맞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법원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경우가 드물단 평인데요.

상대방의 위법한 공격이 '지금' 가해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고 자기나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한 행위여야 하고, 그 정도가 너무 과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완전히 도둑을 제압한 상태인데도 계속 공격을 가해 죽인다든가 하면 정당방위가 아닌 살인이나 상해치사가 되고요.

먼저 때렸다고 나도 때린다, 이런 것도 '싸움'으로 보고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디까지를 '과도한 대응'이라고 볼거냐가 문젠데요.

현행법상으로 야간에 공포,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경우엔 처벌을 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준이 국민 법 감정과 괴리된 거 아니냐는 지적은 계속 나왔는데요.

강력범죄에 대해선 과한 대응을 했더라도 형을 면제해주자는 내용의 법 개정안이 발의된 적도 있지만 정당방위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국회 통과가 되지 않았습니다.

[앵커]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백인성 법조전문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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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폭행범 ‘혀 깨문 죄’ 59년…정당방위 인정, 어디까지? [주말엔 전문K]
    • 입력 2023-05-27 21:20:37
    • 수정2023-05-27 2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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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59년 전의 일이죠.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잘랐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던 소녀, 최말자 씨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제 70대가 된 최 씨는 재심을 요청해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심 전망과 최 씨 사건 후 59년 동안, 정당방위 인정 범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백인성 법조전문기자와 알아보겠습니다.

백 기자, 먼저 어떤 사건인지, 들어볼까요?

[기자]

네, 언론 등에서 접한 분들도 있으실텐데요.

형법학 교과서엔 정당방위를 다룬 대표적 판례로 소개된 사건입니다.

1964년 경남 김해에서 21살 남성 노모 씨가 18살 최말자 씨에게 성폭행을 시도했는데요.

최 씨는 이 남성의 혀를 깨물었고, 노 씨는 혀 1.5cm가 잘려 봉합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재판에서 성폭행을 시도한 노 씨는 징역 6개월의 집행유예, 최 씨는 중상해죄가 적용돼 징역 10개월의 집행유예가 선고됐습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겁니다.

[최말자/5월 2일 : "말이 안 되죠, 앞뒤가 안 맞잖아요.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한데,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잖아요. 내가 피해자인데 형량이 무겁고, 가해자는 가볍고. 앞뒤가 맞습니까?"]

[앵커]

최말자 씨의 말에 공감도 가는데... 판결의 근거가 뭐였습니까?

[기자]

혀를 자른 건 너무 과했단 겁니다.

최 씨는 정당 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성이 성범죄 원인을 제공했을 거란 59년 전의 성 차별적 인식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법원은 처음 보는 남성을 따라간 건 '이성에 대한 호기심'의 소치였고, 남성이 입을 맞추게끔 한 데 최 씨가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고, 범행 직후 최 씨가 친구를 만났을 때 당황하거나 괴로워하는 표정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앵커]

59년이란 시간이 지났는데, 이런 사건이 요즘 일어난다면, 같은 판결이 나오진 않겠죠?

[기자]

지금은 무죄 판결이 나올 가능성, 있어 보입니다.

그동안 성 범죄 사건에서 사안별로 정당방위가 인정된 사례들이 나타났는데요.

대표적으론 남성 두 명에게 둘러싸여 추행당하던 주부가 가해자의 혀를 깨문 사건에서 다른 수단이 없었다며 정당방위가 인정돼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최근에는 헌법재판소가 고시원에서 성추행을 시도한 남성에게 들고 있던 사기그릇을 휘두른 사건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해 검찰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앵커]

최말자 씨가 3년 전에 재심을 청구했잖아요?

이것도 인정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기자]

재심 자체는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입니다.

재심은 확정된 사실관계를 뒤집는 예외적 절차여서 법에 정해진 사유, 무죄를 증명할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당시 판검사가 직무상 범죄에 가담한 경우같은 한정된 이유로만 청구할 수 있거든요.

최 씨는 검사가 영장없이 구속했고, 진술 거부권, 변호인 선임권 등을 보장하지 않았다면서 직무상 범죄가 있었다고 주장했는데요.

너무 오래된 사건이라 수사나 재판기록이 보존돼 있지 않아 1,2심 법원에선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의 판단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앵커]

최말자 씨 사건이 아까 형법학 교과서에도 정당방위 관련 판결로 소개됐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선 정당방위가 잘 인정이 안 된다면서요?

[기자]

'싸움이 나면 무조건 맞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법원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경우가 드물단 평인데요.

상대방의 위법한 공격이 '지금' 가해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고 자기나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한 행위여야 하고, 그 정도가 너무 과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완전히 도둑을 제압한 상태인데도 계속 공격을 가해 죽인다든가 하면 정당방위가 아닌 살인이나 상해치사가 되고요.

먼저 때렸다고 나도 때린다, 이런 것도 '싸움'으로 보고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디까지를 '과도한 대응'이라고 볼거냐가 문젠데요.

현행법상으로 야간에 공포,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경우엔 처벌을 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준이 국민 법 감정과 괴리된 거 아니냐는 지적은 계속 나왔는데요.

강력범죄에 대해선 과한 대응을 했더라도 형을 면제해주자는 내용의 법 개정안이 발의된 적도 있지만 정당방위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국회 통과가 되지 않았습니다.

[앵커]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백인성 법조전문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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