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맥] 가창골 유해 발굴 ‘빈 손’…역사적 과제로

입력 2023.06.12 (19:19) 수정 2023.06.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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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흐름, 사안의 맥을 짚어보는 쇼맥뉴스 시간입니다.

가창골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유해 발굴에 나선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뼛조각 하나 건지질 못했습니다.

이번 발굴은 6.25 때 가창골과 경산 코발트 광산, 달서구 본리동 빨래터 등지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비롯됐습니다.

지난달 25일부터 가창면 용계리 일대에서 진행된 유해 발굴 작업은 복토 작업과 함께 사실상 마무리됐습니다.

애초에는 인근 주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가창골 희생자 유해 약 30여 구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예상됐었죠.

하지만 단추와 쇠붙이, 겨울옷 등 희생자와의 관련성이 명확하지 않은 물품 10여 점만 발굴됐을 뿐 별다른 성과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온 데에는 1980년대 가창댐 확장 공사로 주변 지형이 바뀐 점, 그리고 산지라는 지형적 특성상 증언 만으로 장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점 등이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그럼 가창골 민간인 학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이 사건이 일어난 건 1950년 7월입니다.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10월 항쟁과 제주 4.3항쟁 등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 중인 재소자가 많았습니다.

군 헌병대와 경찰이 이 수감자들을 적법한 절차도 없이 가창골로 끌고 가 처형한 겁니다.

이 사건에 대해 2010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 조사가 처음 이뤄졌고요.

2020년 2기 위원회에 들어서서야 본격적인 유해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그렇다면 이 수감자들은 재판 절차도 없이 즉결 처형될 만큼 중죄를 지었던 걸까요?

대구형무소 수감의 빌미가 된 10월 항쟁으로 거슬러 가봅니다.

10월 항쟁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운동입니다.

'대구 10·1사건', '대구 10월 항쟁'으로도 불리죠.

미 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에 항의하던 대구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당시 시위는 무장 항쟁으로 확산했습니다.

이어, 미 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며 무력으로 개입하면서 1946년 말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던 시민 항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군사정권 등 권위주의 정부 시대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령과 선동으로 시위가 일어났다고, 그 의미를 왜곡하면서 ‘대구폭동’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재조사가 이루어져 지금의 '10월 항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해방 이후 사회적 혼란기에 미 군정의 강압에 항의하다 제대로 항변도 못 해보고 무차별적으로 처형됐으니, 유족들의 아픔은 어떠했을지 짐작하기조차 힘듭니다.

4.3 항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수감 인원이 많아 대구형무소에는 제주 항쟁 관련 수감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림잡아 두 항쟁 관련 수감자만 천 4백 명이 넘었습니다.

좌우 이념 갈등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 이 사건들은 유족들의 가슴에 오랜 한으로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평생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쓴 채 숨죽여 살아야 했죠.

비로소 2000년이 지나서야 빛을 찾기 시작한 두 항쟁의 유족들.

이번 유해 발굴로 유품 하나라도 찾을까 기다렸지만, 수십 년 세월의 풍파 속에 드러난 결과는 씁쓸함만 안겼습니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정부가 진실 확인 의지를 밝힌 것은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이미 고령이 된 채 얼마 남지 않은 목격자와 흩어져 있는 사료를 근거로 학살의 장소를 다시 조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대구 10월 항쟁 당시 경상북도에서만 전체 인구의 25% 정도인 77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남한 전체에서는 2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산됩니다.

3.1 운동과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등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불의와 강압에 맞서 싸웠습니다.

비교적 우리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구 10월 항쟁과 그로 인한 가창골 학살 사건, 감춰진 역사에 대한 진실 규명과 화해, 국가의 책임있는 사죄와 배상만이 역사적 해법임을 간과해선 안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쇼맥뉴스 곽근아입니다.

그래픽:인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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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12 19:19:16
    • 수정2023-06-12 19:54:00
    뉴스7(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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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골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유해 발굴에 나선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뼛조각 하나 건지질 못했습니다.

이번 발굴은 6.25 때 가창골과 경산 코발트 광산, 달서구 본리동 빨래터 등지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비롯됐습니다.

지난달 25일부터 가창면 용계리 일대에서 진행된 유해 발굴 작업은 복토 작업과 함께 사실상 마무리됐습니다.

애초에는 인근 주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가창골 희생자 유해 약 30여 구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예상됐었죠.

하지만 단추와 쇠붙이, 겨울옷 등 희생자와의 관련성이 명확하지 않은 물품 10여 점만 발굴됐을 뿐 별다른 성과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온 데에는 1980년대 가창댐 확장 공사로 주변 지형이 바뀐 점, 그리고 산지라는 지형적 특성상 증언 만으로 장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점 등이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그럼 가창골 민간인 학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이 사건이 일어난 건 1950년 7월입니다.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10월 항쟁과 제주 4.3항쟁 등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 중인 재소자가 많았습니다.

군 헌병대와 경찰이 이 수감자들을 적법한 절차도 없이 가창골로 끌고 가 처형한 겁니다.

이 사건에 대해 2010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 조사가 처음 이뤄졌고요.

2020년 2기 위원회에 들어서서야 본격적인 유해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그렇다면 이 수감자들은 재판 절차도 없이 즉결 처형될 만큼 중죄를 지었던 걸까요?

대구형무소 수감의 빌미가 된 10월 항쟁으로 거슬러 가봅니다.

10월 항쟁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운동입니다.

'대구 10·1사건', '대구 10월 항쟁'으로도 불리죠.

미 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에 항의하던 대구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당시 시위는 무장 항쟁으로 확산했습니다.

이어, 미 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며 무력으로 개입하면서 1946년 말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던 시민 항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군사정권 등 권위주의 정부 시대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령과 선동으로 시위가 일어났다고, 그 의미를 왜곡하면서 ‘대구폭동’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재조사가 이루어져 지금의 '10월 항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해방 이후 사회적 혼란기에 미 군정의 강압에 항의하다 제대로 항변도 못 해보고 무차별적으로 처형됐으니, 유족들의 아픔은 어떠했을지 짐작하기조차 힘듭니다.

4.3 항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수감 인원이 많아 대구형무소에는 제주 항쟁 관련 수감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림잡아 두 항쟁 관련 수감자만 천 4백 명이 넘었습니다.

좌우 이념 갈등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 이 사건들은 유족들의 가슴에 오랜 한으로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평생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쓴 채 숨죽여 살아야 했죠.

비로소 2000년이 지나서야 빛을 찾기 시작한 두 항쟁의 유족들.

이번 유해 발굴로 유품 하나라도 찾을까 기다렸지만, 수십 년 세월의 풍파 속에 드러난 결과는 씁쓸함만 안겼습니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정부가 진실 확인 의지를 밝힌 것은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이미 고령이 된 채 얼마 남지 않은 목격자와 흩어져 있는 사료를 근거로 학살의 장소를 다시 조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대구 10월 항쟁 당시 경상북도에서만 전체 인구의 25% 정도인 77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남한 전체에서는 2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산됩니다.

3.1 운동과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등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불의와 강압에 맞서 싸웠습니다.

비교적 우리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구 10월 항쟁과 그로 인한 가창골 학살 사건, 감춰진 역사에 대한 진실 규명과 화해, 국가의 책임있는 사죄와 배상만이 역사적 해법임을 간과해선 안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쇼맥뉴스 곽근아입니다.

그래픽:인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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