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되고, 아빠는 안 되나요?”…갈 길 먼 ‘태아산재’

입력 2024.03.25 (16:46) 수정 2024.03.2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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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임신 중 유해환경에 노출됐던 삼성 반도체 공장 여성 근로자 3명의 자녀가 이른바 '태아 산재'를 인정받았습니다.

지난해 1월 '태아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이 시행된 뒤 두 번째 공식 인정 사례로, 반도체 분야에서 처음으로 '태아 산재'가 인정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며 누구보다 기뻐했던 이가 있습니다. 한때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검사설비 담당 엔지니어로 근무했던 42살 정 모 씨입니다. 정 씨는 '태아 산재'를 신청한 첫 '아빠'입니다.


■ LCD 생산 공정에서 일한 뒤 자녀 '희귀병'…"우리 아이도 어쩌면"

정 씨는 2004년부터 7년가량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임신한 2007년 8월 전까지의 근무 기간은 3년입니다.

주로 LCD를 구동시키기 위한 기판을 만드는 공정에서 일했는데, 세정, 증착, 포토, 식각, 검사 등으로 이뤄져 있어 반도체 웨이퍼 생산 라인과 비슷하고, 투입하는 화학 물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08년 5월 태어난 정 씨 아들은 '차지증후군'이라고 불리는 희귀병을 앓고 있습니다. C(눈), H(심장), A(후비공), R(발달), G(생식기), E(귀) 등 여러 장기에 동시다발적으로 기형이 나타나는 병입니다.

▶ C(눈) : 왼쪽 눈 시신경이 없고, 안검하수가 있음
▶ H(심장) : 방실중격결손, 대동맥 축착, 승모판 기형 등으로 인해 어릴 때 수술을 2
차례 진행함. 현재 약한 수준이지만 판막 문제가 남아있음
▶ R(발달) : 키가 또래보다 많이 작음 (14살 기준 / 132cm)
▶ G(생식기) : 잠복고환으로 어릴 때 수술을 받았으나, 다른 문제가 남아있음
▶ E(귀) : 왼쪽 귀로는 듣지 못하고, 오른쪽 귀의 청력도 많이 약해 인공와우 착용

정 씨는 자신이 일했던 환경이 영향을 준 것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설비 내부의 먼지를 청소하기 위해 독한 약을 썼던 기억, 심하면 구토 증세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정 씨는 "반도체 라인에서 일했던 여성 사원들이 안 좋은 환경에 노출돼 암도 걸리고, 백혈병도 걸리는 일이 많지 않았냐"며 "그럼 우리 애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다가 '태아 산재' 관련 뉴스를 접하게 됐다"고 산재 신청 계기를 전했습니다.

특히,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2022년 발표한 '근로자 생식보건 역학연구'를 보면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의 업무로 인해서도 유산이나 태아 선천성 기형 발생이 증가할 수 있다는 내용이 확인됐습니다.

[관련 연구] 산업안전보건연구원 > 전문사업 > 역학조사 > 역학조사 자료실 게시판 읽기(2022년 근로자 생식보건 역학연구(2))
https://oshri.kosha.or.kr/oshri/professionalBusiness/occupationalDiseaseReferenceRoom.do?mode=view&articleNo=438585&article.offset=0&articleLimit=10&srSearchVal=%EC%83%9D%EC%8B%9D%EB%B3%B4%EA%B1%B4&srSearchKey=article_title

정 씨는 "일반 사람들은 엄마와 태아가 가장 밀접한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하지만 생식보건 역학연구를 보면, 오히려 남성 근로자가 여성 근로자보다 유해환경에 노출됐을 때 태아 선천성 기형 발생 가능성이 크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당연히 산재가 인정돼야 하고, 아버지도 충분히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 아빠의 유해환경 노출도 '태아 산재' 인정될까?

하지만 현행 산재보험법상 '아버지'가 유해요인에 노출된 경우는 태아 산재 인정 대상에서 빠져 있습니다. 지금의 태아 산재는 말그대로 태아, 임신 기간 중 엄마의 노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21년 법 개정 과정에서도 '아버지'에 관한 문제는 따로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수정 전 정자나 난자의 변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91조의12(건강손상자녀에 대한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기준) 임신 중인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제37조제1항제1호ㆍ제3호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유해인자의 취급이나 노출로 인하여, 출산한 자녀에게 부상, 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그 자녀가 사망한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정 씨 사례에 대해서도 2022년 4월 19일부터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에서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지금으로선 법 개정이 선행돼야 하는 셈입니다.

아버지의 유해환경 노출에 대해서도 태아 산재가 인정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근로복지공단은 "일단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므로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명확한 입장을 내기가 곤란하다"고 밝혔습니다.

삼성 반도체 공장 여성 근로자 자녀들의 산재 인정 소식을 접한 정 씨는 "이제 법 적용 대상이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뿐 아니라 '부모'로 확대돼야 한다"며 "빨리 아버지에 대한 산재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을 대리한 조승규 노무사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일하다 유해요인에 노출되면 아이에게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데, 산재보험은 그중 하나만 보호하고 있다"며 "연구를 통해 아버지 업무의 영향이 확인된 만큼 산재보험법이 속히 개정돼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연관 기사] ‘태아산재’ 연이어 인정…여성 근로자 3명 동시에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21202

현재 근로복지공단은 정 씨 사례와 제조업 근무 외국인 여성 근로자 사례 등 2건의 태아 산재 신청 건에 대해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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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4-03-25 16: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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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임신 중 유해환경에 노출됐던 삼성 반도체 공장 여성 근로자 3명의 자녀가 이른바 '태아 산재'를 인정받았습니다.

지난해 1월 '태아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이 시행된 뒤 두 번째 공식 인정 사례로, 반도체 분야에서 처음으로 '태아 산재'가 인정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며 누구보다 기뻐했던 이가 있습니다. 한때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검사설비 담당 엔지니어로 근무했던 42살 정 모 씨입니다. 정 씨는 '태아 산재'를 신청한 첫 '아빠'입니다.


■ LCD 생산 공정에서 일한 뒤 자녀 '희귀병'…"우리 아이도 어쩌면"

정 씨는 2004년부터 7년가량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임신한 2007년 8월 전까지의 근무 기간은 3년입니다.

주로 LCD를 구동시키기 위한 기판을 만드는 공정에서 일했는데, 세정, 증착, 포토, 식각, 검사 등으로 이뤄져 있어 반도체 웨이퍼 생산 라인과 비슷하고, 투입하는 화학 물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08년 5월 태어난 정 씨 아들은 '차지증후군'이라고 불리는 희귀병을 앓고 있습니다. C(눈), H(심장), A(후비공), R(발달), G(생식기), E(귀) 등 여러 장기에 동시다발적으로 기형이 나타나는 병입니다.

▶ C(눈) : 왼쪽 눈 시신경이 없고, 안검하수가 있음
▶ H(심장) : 방실중격결손, 대동맥 축착, 승모판 기형 등으로 인해 어릴 때 수술을 2
차례 진행함. 현재 약한 수준이지만 판막 문제가 남아있음
▶ R(발달) : 키가 또래보다 많이 작음 (14살 기준 / 132cm)
▶ G(생식기) : 잠복고환으로 어릴 때 수술을 받았으나, 다른 문제가 남아있음
▶ E(귀) : 왼쪽 귀로는 듣지 못하고, 오른쪽 귀의 청력도 많이 약해 인공와우 착용

정 씨는 자신이 일했던 환경이 영향을 준 것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설비 내부의 먼지를 청소하기 위해 독한 약을 썼던 기억, 심하면 구토 증세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정 씨는 "반도체 라인에서 일했던 여성 사원들이 안 좋은 환경에 노출돼 암도 걸리고, 백혈병도 걸리는 일이 많지 않았냐"며 "그럼 우리 애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다가 '태아 산재' 관련 뉴스를 접하게 됐다"고 산재 신청 계기를 전했습니다.

특히,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2022년 발표한 '근로자 생식보건 역학연구'를 보면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의 업무로 인해서도 유산이나 태아 선천성 기형 발생이 증가할 수 있다는 내용이 확인됐습니다.

[관련 연구] 산업안전보건연구원 > 전문사업 > 역학조사 > 역학조사 자료실 게시판 읽기(2022년 근로자 생식보건 역학연구(2))
https://oshri.kosha.or.kr/oshri/professionalBusiness/occupationalDiseaseReferenceRoom.do?mode=view&articleNo=438585&article.offset=0&articleLimit=10&srSearchVal=%EC%83%9D%EC%8B%9D%EB%B3%B4%EA%B1%B4&srSearchKey=article_title

정 씨는 "일반 사람들은 엄마와 태아가 가장 밀접한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하지만 생식보건 역학연구를 보면, 오히려 남성 근로자가 여성 근로자보다 유해환경에 노출됐을 때 태아 선천성 기형 발생 가능성이 크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당연히 산재가 인정돼야 하고, 아버지도 충분히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 아빠의 유해환경 노출도 '태아 산재' 인정될까?

하지만 현행 산재보험법상 '아버지'가 유해요인에 노출된 경우는 태아 산재 인정 대상에서 빠져 있습니다. 지금의 태아 산재는 말그대로 태아, 임신 기간 중 엄마의 노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21년 법 개정 과정에서도 '아버지'에 관한 문제는 따로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수정 전 정자나 난자의 변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91조의12(건강손상자녀에 대한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기준) 임신 중인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제37조제1항제1호ㆍ제3호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유해인자의 취급이나 노출로 인하여, 출산한 자녀에게 부상, 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그 자녀가 사망한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정 씨 사례에 대해서도 2022년 4월 19일부터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에서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지금으로선 법 개정이 선행돼야 하는 셈입니다.

아버지의 유해환경 노출에 대해서도 태아 산재가 인정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근로복지공단은 "일단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므로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명확한 입장을 내기가 곤란하다"고 밝혔습니다.

삼성 반도체 공장 여성 근로자 자녀들의 산재 인정 소식을 접한 정 씨는 "이제 법 적용 대상이 임신 중인 여성 근로자뿐 아니라 '부모'로 확대돼야 한다"며 "빨리 아버지에 대한 산재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을 대리한 조승규 노무사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일하다 유해요인에 노출되면 아이에게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데, 산재보험은 그중 하나만 보호하고 있다"며 "연구를 통해 아버지 업무의 영향이 확인된 만큼 산재보험법이 속히 개정돼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연관 기사] ‘태아산재’ 연이어 인정…여성 근로자 3명 동시에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21202

현재 근로복지공단은 정 씨 사례와 제조업 근무 외국인 여성 근로자 사례 등 2건의 태아 산재 신청 건에 대해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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