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건건] 두 쪽으로 갈린 광복절

입력 2024.08.16 (16:42) 수정 2024.08.1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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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시간 : 8월 16일(금) 16:00~17:00 KBS1
■ 진행 : 송영석 기자
■ 출연 : 김명구 / 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교수


https://youtube.com/live/Qzr9A99fDq4

◎송영석: 이념과 정파 구분 없이 국민통합 경축의 장이 돼야 할 광복절 날 여야가 따로따로 기념식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광복 이후 79년이 지난 지금도 해방 직후와 같은 극심한 진영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독립기념관장 인사를 놓고 촉발된 역사 논쟁이 왜 또 정치 쟁점화 될 수밖에 없는 건지 김명구 전 연세대 교수와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올해 광복절 경축식 정부와 광복회가 따로 치렀습니다. 역사학자로서 지금 상황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김명구: 많이 안타깝죠. 광복절은 우리가 다시 나라를 세우고서 아주 기뻤던 날이고 감격에 겨웠던 날이고 그래서 그때를 다짐하고 통합을 다시 함께 외쳐야 하는데 통합을 외쳐야 하는 현장이 이렇게 나뉘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불행하죠. 그래서 역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송영석: 독립기념관장 인사로 촉발됐습니다. 이번 사태 그런데 이제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에 대한 논쟁으로 지금 이어지고 있거든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김명구: 제가 보기에는 이게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송영석: 왜 수십 년 동안 왜 정리가 안 될까요? 이게

▼김명구: 1945년 4월 11월 28일 날 정동 제일 감리교회에서 임시정부 영수 환영대회가 열려요. 그때 세 사람이 초대가 됐는데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그리고 김규식 선생이 초대됐는데 이승만 박사는 그날 참석을 못 했고요. 두 분이 참석을 했죠. 그런데 김구 선생이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 우리가 건국 이게 성서와 기독교인들이니까 우리가 성서의 바탕 위에 건국과 건설을 하자라고 연설을 하세요. 그리고 이 건국이라고 하는 표현이 그 김구 주석을 사모해서 오는 그 많은 청년들이나 조직의 장들 앞에서 이제 한국이 건국을 해야 한다라고 하는 건국의 표현들을 쓰거든요. 그 제가 그 해방의 공간에서 지도자들이나 한국 사람들이 썼던 그 단어에 건국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건국이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그 1919년 4월 11일이 건국일이다.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닌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1948년 나라를 세울 때 제헌헌법의 헌법의 전문을 봐야 되는데 그 헌법의 전문에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대한 국민들은 하면서 대한민국이 언제 세워졌냐면 기미 3.1 독립운동으로 인해서 대한민국이 시작되었다라고 표현이 되어 있고요.

◎송영석: 전 국회 헌법 전문에 그렇게 나와 있죠.

▼김명구: 그리고 우리 독립 정신을 이어받았고 1948년에 이 건국은 재건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송영석: 그런데 당시 이제 재헌국회 헌법에는 임시 정부라는 표현이 빠졌잖아요.

▼김명구: 임시정부라고 하는 표현을 그래서 이제 1987년에 이종찬 씨가 이분이 임시정부와 관계되어 있는 분이니까...

◎송영석: 지금 광복회장을 말씀하시는 거죠.

▼김명구: 그분이 이것을 바로 그러한 문제 때문에 이걸 확실히 해야 한다라고 하는 주장 때문에 그것을 넣기는 했지만, 이거는 누가 봐도 그 당시에 누구도 이거는 임시정부를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다 인정을 했고요. 그건 대통령 이승만도 인정을 했고 제1공화국 모두가 인정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1948년과 1911년이 따로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논쟁이 촉발된 게 건국절이라고 하는 논쟁 이게 1948년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논쟁이 촉발됐던 게 2016년 새누리당의 그 모임에서 연세대학교 류석춘 교수가 왜 건국절이어야 하는가라고 하는 제목의 강연을 했거든요. 그러고 나서 이게 1948년을 강조했는데 이 건국에 대한 문제는 날짜의 문제가 아니고요. 이게 그리고 1919년과 1948년이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소모적인 논쟁을 해야 할까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 좀 많이 아쉽죠.

◎송영석: 제헌국회 헌법 전문 관련해서 저희 임시정부라는 표현이 빠진 걸 제가 질문드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걸 지금 1919년 건국설이냐 1948년 건국설이냐 이렇게 충돌하고 있잖아요. 지금? 이 독립기념관장 임명 문제 때문에 좀 거슬러 올라가 보니까 해방 이후에 임시 정부의 지위 그리고 정통성을 두고서 국론이 분열했더라고요. 심각하게 분열돼서 그 당시에 정리가 안 된 채로 지금까지 쭉 오다 보니까 지금까지 이런 역사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여쭤본 거거든요.

▼김명구: 제가 보기에는 국론 임시 정부를 두고 국론이 분열됐다라기보다는 그... 그 당시에 미 군정이 임시정부를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 임시정부를 정부로 보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게 했거든요. 그런데 그 역할을 개인, 왜 그러냐 하면 그 당시에 임시 정부라고 주장하는 그런 그룹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일단 그것들을 용납하기가 좀 어려웠죠. 그런 정도였지 그걸 가지고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분열을 했다 그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송영석: 그렇군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반대하면서 현 사태의 어떤 논란의 당사자 중에 한 명이죠. 이종찬 광복회장. 짧게 언급했습니다마는 최근에 결국 이승만이냐 김구냐 결국 이 논쟁을 던진 발언을 했었거든요.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녹취> 이종찬 / 광복회장 (그제)
그분(김형석 관장)의 목적은 뭐냐. 이승만 대통령 훌륭한 분인데 그분은 이용을 해서 마치 건국 대통령으로 아주 신격화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백범 김구 선생이 고하 송진우를 죽인,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려는 이 거대한 작업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송영석: 지금 이종찬 회장 얘기 들었는데 일단 고하 송진우 선생이 소환됐거든요. 그러면 국민들께서 좀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신데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이번에 언급됐을까요?

▼김명구: 고하 송진우 선생을 보려면 사실은 3.1운동을 빼놓고 이 분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3.1운동을 처음 기획했던, 최초의 기획했던 3.1운동의 책원지, 책원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랬고 또 두 번째는 이 한국의 민족운동, 동아일보 사장이 되고 주필이 되면서 동아일보를 주축으로 해서 한국의 민족운동이 거족적 민족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이끌으셨던 분이고요. 한민당의 수석 총무셨고요. 또 이분이 그 수석 총무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친일에 대해서 민족주의, 민족주의자들 민족 지도자들이 일제 말에 일본으로 전향을 하거나 변절을 하는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꽤 많았는데 이분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본이, 일본도 굉장히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분을 두려워했던 그런 인물이세요. 그리고 또 우리가 좀 기억을 좀 해야 될 것은 그 경제민주주의라고 하는 한국의 정치사에서 경제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을 이게 1920년대에 서울 YMCA에서 YMCA 출신들이 주장하던 그러한 그 일원이었는데 이것을 한민당의 정강 정책으로 끌어들인 인물이 이분이세요. 바로 이제 그리고 그 이종찬 회장이 송진우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분이 처음으로 임정봉대론을 얘기를 했고요. 그리고 헌법 전문에 구체적으로 이름이 명기되지는 않았지만 임시 정부가 한국의 건국의 출발이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내신 분이 이분이세요.

◎송영석: 그것이 임정봉대론입니까?

▼김명구: 임정봉대론이죠. 이게 뭐냐 하면 그 여운형이 이제 그 총독부 엔토라고 하는 사람이 여운형에게 치안권 하면서 그 전권을 맡기겠다라고 했을 때 여운형은 그것을 허락을 했는데 사 은 여운형을 만나기 전에 그 제안을 처음 받았던 인물이 송진우였거든요. 그런데 송진우는 그것을 거절을 했죠. 왜냐하면, 지금 일본으로부터 그것을 인수받겠다. 그것을 허락한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일본의 괴뢰가 되는 게 아니냐 그러니까 이거 안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고 이미 조선에는 미 군정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미 군정이 한반도의 남한의 통치자인데 미 군정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임시정부 봉대론을 그때 얘기하는 거예요. 그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 때 이분은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서 거기에 취지서에 이렇게 돼 있어요. 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가대표는 기미 독립 이후로 구현된 대한 임시정부가 최고요 유일한 주체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임시 정부여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얘기했던 최초의 인물이 바로 이 고하 송진우죠.

◎송영석 : 해방 이후에는 이제 신탁이냐 반탁이냐 이 논쟁도 뜨거웠잖아요. 그때는 어떤 입장을 갖고 계셨죠?

▼김명구 : 그러니까 1945년 12월 중순부터 모스크바에서 영국 미국 소련 외무상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죠. 그러면서 이제 신탁 통치를 한다라고 하는 것 결정을 하겠다라고 하는데 그것을 좀 자세히 보면 어떻게 되어 있냐면 5년간 신탁 통치를 하겠다라고 하는데 그게 무조건 5년간 신탁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에 조선 임시 민주공화국을 세우겠다. 그리고 임시공화국을 도와서 그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겠다. 그리고 임시공동회와 협의를 해서 신탁 통치를 의논하겠다라고 했는데 그 조선의 임시 민주 임시공화국을 만들겠다라고 하는 것은 빠지고 신탁 통치만 하겠다는 것이 알려져요. 그러니까 이 인적 요인들이 굉장히 불길같이 화를 냈죠. 그랬을 때 송진우가 이거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혀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을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그리고 미 왜냐하면 그때 임정에서는 미 군정을 그러면 우리들이 미 군정이 갖고 있는 모든 행정기관을 우리가 접수하겠다. 그래서 국자 1호 국자 2호 이런 성명서를 내요. 그랬을 때 그것을 진정시키고자 왜냐하면 현실을 무시할 수 없고 우리가 미 군정을 현실적으로 이길 수 없고 그리고 미 군정이 만약에 우리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미 군정이 없으면 그 자리를 공산주의자들이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직은 느슨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그 조직이 굉장히 촘촘히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위험이 있다라고 해서 말렸죠.

◎송영석 : 지금 말씀하신 그 논쟁이 이제 뜨거운 그 상황에서 반탁론자들에게 이제 송진우 선생이 암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앞서 이종찬 회장이 한 얘기 중에 김구 선생을 고하 송진우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대목이 나와요. 이런 얘기를 왜 한 걸까요?

▼김명구 : 그 이 경교장에서 그 논란이 있었는데 굉장한 논쟁이 있었죠. 그랬을 때 김구를 비롯한 임종의 요인들이 고하 송진우를 당신은 그 찬탁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해서 그렇게 주장을 해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 날 그리고 나서 돌아갔는데 그다음 날 새벽에 암살 당했거든요. 그 암살 당했을 때 그 이게 김구 쪽에서 죽인 거다 뭐 이런 소문이 퍼졌어요. 시카고 대학에 있는 그 뭐 하여간 뭐 그런 제가 여기까지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도 그렇게 얘기를 했고 그랬는데 그 역사가들은요. 알려진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 그렇다라고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송영석 : 이종찬 회장의 일단 주장이니까요. 일단 현재로서는.

▼김명구 : 그는 그거는 이종찬 회장이 그러한 소문들이 있어 과거에 있었는데 그래서 그 기자들이 김구 주석에게 물어보죠. 그 김구 주석에게 왜 죽였냐라고 하니까 내가 정치자금을 송진우로부터 받는데 왜 내가 죽이겠냐라고 해서 그래서 죽이지 않았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확실히 하지 않은 걸 가지고 자꾸 이러쿵저러쿵 세간의 그런 것들을 이종찬 회장이 끌어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송영석 : 예. 지금 어제 광복절 경축식 참석 여부 독립 유공자 후손들도 둘로 갈렸다고 해요. 그래서 이제 해방 직후 갈등이 재연된 것 아니냐는 그런 우려가 나오거든요. 지금의 이 상황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김명구 : 많이 안타깝죠. 이게 저는 이제 고하를 존경하는 게 뭐냐 하면 고하의 고하가 자유민주주의를 얘기하고 그 정신 아래 3.1운동의 철학을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3.1운동의 철학은 식민지 근대주의를 거절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하가 그 자유민주주의의 폭을 넓혀요. 넓혀서 경제민주주의도 자유민주주의 안에 들어오게 해요. 그런데 그 고하가 죽은 이후에 이 다시 그 폭이 좁아졌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그 이념의 폭을 우리가 좀 넓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역사를 오도하고 왜곡하고 지우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송영석 : 예.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은 진작에 하나가 됐어야 되는데 해방되자마자 나라가 갈라진 바람에 오늘날까지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역사적인 비극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산업화 민주화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는 동안 풀지 못했던 미뤄뒀던 과제를 우리 세대에 꼭 풀어낸다면 대한민국을 강대국으로 도약시키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입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네. 사사건건 오늘 준비한 소식은 모두 전해드렸는데요. 다음 주 더 알찬 소식 갖고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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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사건건] 두 쪽으로 갈린 광복절
    • 입력 2024-08-16 16:42:28
    • 수정2024-08-16 17:45:44
    사사건건
■ 방송시간 : 8월 16일(금) 16:00~17:00 KBS1
■ 진행 : 송영석 기자
■ 출연 : 김명구 / 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교수


https://youtube.com/live/Qzr9A99fDq4

◎송영석: 이념과 정파 구분 없이 국민통합 경축의 장이 돼야 할 광복절 날 여야가 따로따로 기념식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광복 이후 79년이 지난 지금도 해방 직후와 같은 극심한 진영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독립기념관장 인사를 놓고 촉발된 역사 논쟁이 왜 또 정치 쟁점화 될 수밖에 없는 건지 김명구 전 연세대 교수와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올해 광복절 경축식 정부와 광복회가 따로 치렀습니다. 역사학자로서 지금 상황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김명구: 많이 안타깝죠. 광복절은 우리가 다시 나라를 세우고서 아주 기뻤던 날이고 감격에 겨웠던 날이고 그래서 그때를 다짐하고 통합을 다시 함께 외쳐야 하는데 통합을 외쳐야 하는 현장이 이렇게 나뉘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불행하죠. 그래서 역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송영석: 독립기념관장 인사로 촉발됐습니다. 이번 사태 그런데 이제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에 대한 논쟁으로 지금 이어지고 있거든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김명구: 제가 보기에는 이게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송영석: 왜 수십 년 동안 왜 정리가 안 될까요? 이게

▼김명구: 1945년 4월 11월 28일 날 정동 제일 감리교회에서 임시정부 영수 환영대회가 열려요. 그때 세 사람이 초대가 됐는데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그리고 김규식 선생이 초대됐는데 이승만 박사는 그날 참석을 못 했고요. 두 분이 참석을 했죠. 그런데 김구 선생이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 우리가 건국 이게 성서와 기독교인들이니까 우리가 성서의 바탕 위에 건국과 건설을 하자라고 연설을 하세요. 그리고 이 건국이라고 하는 표현이 그 김구 주석을 사모해서 오는 그 많은 청년들이나 조직의 장들 앞에서 이제 한국이 건국을 해야 한다라고 하는 건국의 표현들을 쓰거든요. 그 제가 그 해방의 공간에서 지도자들이나 한국 사람들이 썼던 그 단어에 건국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건국이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그 1919년 4월 11일이 건국일이다.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닌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1948년 나라를 세울 때 제헌헌법의 헌법의 전문을 봐야 되는데 그 헌법의 전문에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대한 국민들은 하면서 대한민국이 언제 세워졌냐면 기미 3.1 독립운동으로 인해서 대한민국이 시작되었다라고 표현이 되어 있고요.

◎송영석: 전 국회 헌법 전문에 그렇게 나와 있죠.

▼김명구: 그리고 우리 독립 정신을 이어받았고 1948년에 이 건국은 재건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송영석: 그런데 당시 이제 재헌국회 헌법에는 임시 정부라는 표현이 빠졌잖아요.

▼김명구: 임시정부라고 하는 표현을 그래서 이제 1987년에 이종찬 씨가 이분이 임시정부와 관계되어 있는 분이니까...

◎송영석: 지금 광복회장을 말씀하시는 거죠.

▼김명구: 그분이 이것을 바로 그러한 문제 때문에 이걸 확실히 해야 한다라고 하는 주장 때문에 그것을 넣기는 했지만, 이거는 누가 봐도 그 당시에 누구도 이거는 임시정부를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다 인정을 했고요. 그건 대통령 이승만도 인정을 했고 제1공화국 모두가 인정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1948년과 1911년이 따로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논쟁이 촉발된 게 건국절이라고 하는 논쟁 이게 1948년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논쟁이 촉발됐던 게 2016년 새누리당의 그 모임에서 연세대학교 류석춘 교수가 왜 건국절이어야 하는가라고 하는 제목의 강연을 했거든요. 그러고 나서 이게 1948년을 강조했는데 이 건국에 대한 문제는 날짜의 문제가 아니고요. 이게 그리고 1919년과 1948년이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소모적인 논쟁을 해야 할까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 좀 많이 아쉽죠.

◎송영석: 제헌국회 헌법 전문 관련해서 저희 임시정부라는 표현이 빠진 걸 제가 질문드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걸 지금 1919년 건국설이냐 1948년 건국설이냐 이렇게 충돌하고 있잖아요. 지금? 이 독립기념관장 임명 문제 때문에 좀 거슬러 올라가 보니까 해방 이후에 임시 정부의 지위 그리고 정통성을 두고서 국론이 분열했더라고요. 심각하게 분열돼서 그 당시에 정리가 안 된 채로 지금까지 쭉 오다 보니까 지금까지 이런 역사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여쭤본 거거든요.

▼김명구: 제가 보기에는 국론 임시 정부를 두고 국론이 분열됐다라기보다는 그... 그 당시에 미 군정이 임시정부를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 임시정부를 정부로 보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게 했거든요. 그런데 그 역할을 개인, 왜 그러냐 하면 그 당시에 임시 정부라고 주장하는 그런 그룹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일단 그것들을 용납하기가 좀 어려웠죠. 그런 정도였지 그걸 가지고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분열을 했다 그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송영석: 그렇군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반대하면서 현 사태의 어떤 논란의 당사자 중에 한 명이죠. 이종찬 광복회장. 짧게 언급했습니다마는 최근에 결국 이승만이냐 김구냐 결국 이 논쟁을 던진 발언을 했었거든요.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녹취> 이종찬 / 광복회장 (그제)
그분(김형석 관장)의 목적은 뭐냐. 이승만 대통령 훌륭한 분인데 그분은 이용을 해서 마치 건국 대통령으로 아주 신격화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백범 김구 선생이 고하 송진우를 죽인,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려는 이 거대한 작업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송영석: 지금 이종찬 회장 얘기 들었는데 일단 고하 송진우 선생이 소환됐거든요. 그러면 국민들께서 좀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신데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이번에 언급됐을까요?

▼김명구: 고하 송진우 선생을 보려면 사실은 3.1운동을 빼놓고 이 분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3.1운동을 처음 기획했던, 최초의 기획했던 3.1운동의 책원지, 책원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랬고 또 두 번째는 이 한국의 민족운동, 동아일보 사장이 되고 주필이 되면서 동아일보를 주축으로 해서 한국의 민족운동이 거족적 민족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이끌으셨던 분이고요. 한민당의 수석 총무셨고요. 또 이분이 그 수석 총무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친일에 대해서 민족주의, 민족주의자들 민족 지도자들이 일제 말에 일본으로 전향을 하거나 변절을 하는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꽤 많았는데 이분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본이, 일본도 굉장히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분을 두려워했던 그런 인물이세요. 그리고 또 우리가 좀 기억을 좀 해야 될 것은 그 경제민주주의라고 하는 한국의 정치사에서 경제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을 이게 1920년대에 서울 YMCA에서 YMCA 출신들이 주장하던 그러한 그 일원이었는데 이것을 한민당의 정강 정책으로 끌어들인 인물이 이분이세요. 바로 이제 그리고 그 이종찬 회장이 송진우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분이 처음으로 임정봉대론을 얘기를 했고요. 그리고 헌법 전문에 구체적으로 이름이 명기되지는 않았지만 임시 정부가 한국의 건국의 출발이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내신 분이 이분이세요.

◎송영석: 그것이 임정봉대론입니까?

▼김명구: 임정봉대론이죠. 이게 뭐냐 하면 그 여운형이 이제 그 총독부 엔토라고 하는 사람이 여운형에게 치안권 하면서 그 전권을 맡기겠다라고 했을 때 여운형은 그것을 허락을 했는데 사 은 여운형을 만나기 전에 그 제안을 처음 받았던 인물이 송진우였거든요. 그런데 송진우는 그것을 거절을 했죠. 왜냐하면, 지금 일본으로부터 그것을 인수받겠다. 그것을 허락한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일본의 괴뢰가 되는 게 아니냐 그러니까 이거 안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고 이미 조선에는 미 군정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미 군정이 한반도의 남한의 통치자인데 미 군정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임시정부 봉대론을 그때 얘기하는 거예요. 그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 때 이분은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서 거기에 취지서에 이렇게 돼 있어요. 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가대표는 기미 독립 이후로 구현된 대한 임시정부가 최고요 유일한 주체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임시 정부여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얘기했던 최초의 인물이 바로 이 고하 송진우죠.

◎송영석 : 해방 이후에는 이제 신탁이냐 반탁이냐 이 논쟁도 뜨거웠잖아요. 그때는 어떤 입장을 갖고 계셨죠?

▼김명구 : 그러니까 1945년 12월 중순부터 모스크바에서 영국 미국 소련 외무상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죠. 그러면서 이제 신탁 통치를 한다라고 하는 것 결정을 하겠다라고 하는데 그것을 좀 자세히 보면 어떻게 되어 있냐면 5년간 신탁 통치를 하겠다라고 하는데 그게 무조건 5년간 신탁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에 조선 임시 민주공화국을 세우겠다. 그리고 임시공화국을 도와서 그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겠다. 그리고 임시공동회와 협의를 해서 신탁 통치를 의논하겠다라고 했는데 그 조선의 임시 민주 임시공화국을 만들겠다라고 하는 것은 빠지고 신탁 통치만 하겠다는 것이 알려져요. 그러니까 이 인적 요인들이 굉장히 불길같이 화를 냈죠. 그랬을 때 송진우가 이거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혀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을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그리고 미 왜냐하면 그때 임정에서는 미 군정을 그러면 우리들이 미 군정이 갖고 있는 모든 행정기관을 우리가 접수하겠다. 그래서 국자 1호 국자 2호 이런 성명서를 내요. 그랬을 때 그것을 진정시키고자 왜냐하면 현실을 무시할 수 없고 우리가 미 군정을 현실적으로 이길 수 없고 그리고 미 군정이 만약에 우리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미 군정이 없으면 그 자리를 공산주의자들이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직은 느슨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그 조직이 굉장히 촘촘히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위험이 있다라고 해서 말렸죠.

◎송영석 : 지금 말씀하신 그 논쟁이 이제 뜨거운 그 상황에서 반탁론자들에게 이제 송진우 선생이 암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앞서 이종찬 회장이 한 얘기 중에 김구 선생을 고하 송진우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대목이 나와요. 이런 얘기를 왜 한 걸까요?

▼김명구 : 그 이 경교장에서 그 논란이 있었는데 굉장한 논쟁이 있었죠. 그랬을 때 김구를 비롯한 임종의 요인들이 고하 송진우를 당신은 그 찬탁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해서 그렇게 주장을 해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 날 그리고 나서 돌아갔는데 그다음 날 새벽에 암살 당했거든요. 그 암살 당했을 때 그 이게 김구 쪽에서 죽인 거다 뭐 이런 소문이 퍼졌어요. 시카고 대학에 있는 그 뭐 하여간 뭐 그런 제가 여기까지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도 그렇게 얘기를 했고 그랬는데 그 역사가들은요. 알려진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 그렇다라고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송영석 : 이종찬 회장의 일단 주장이니까요. 일단 현재로서는.

▼김명구 : 그는 그거는 이종찬 회장이 그러한 소문들이 있어 과거에 있었는데 그래서 그 기자들이 김구 주석에게 물어보죠. 그 김구 주석에게 왜 죽였냐라고 하니까 내가 정치자금을 송진우로부터 받는데 왜 내가 죽이겠냐라고 해서 그래서 죽이지 않았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확실히 하지 않은 걸 가지고 자꾸 이러쿵저러쿵 세간의 그런 것들을 이종찬 회장이 끌어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송영석 : 예. 지금 어제 광복절 경축식 참석 여부 독립 유공자 후손들도 둘로 갈렸다고 해요. 그래서 이제 해방 직후 갈등이 재연된 것 아니냐는 그런 우려가 나오거든요. 지금의 이 상황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김명구 : 많이 안타깝죠. 이게 저는 이제 고하를 존경하는 게 뭐냐 하면 고하의 고하가 자유민주주의를 얘기하고 그 정신 아래 3.1운동의 철학을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3.1운동의 철학은 식민지 근대주의를 거절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하가 그 자유민주주의의 폭을 넓혀요. 넓혀서 경제민주주의도 자유민주주의 안에 들어오게 해요. 그런데 그 고하가 죽은 이후에 이 다시 그 폭이 좁아졌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그 이념의 폭을 우리가 좀 넓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역사를 오도하고 왜곡하고 지우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송영석 : 예.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은 진작에 하나가 됐어야 되는데 해방되자마자 나라가 갈라진 바람에 오늘날까지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역사적인 비극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산업화 민주화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는 동안 풀지 못했던 미뤄뒀던 과제를 우리 세대에 꼭 풀어낸다면 대한민국을 강대국으로 도약시키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입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네. 사사건건 오늘 준비한 소식은 모두 전해드렸는데요. 다음 주 더 알찬 소식 갖고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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