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망향가

입력 2006.03.0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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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어제가 87주년 3.1절이었습니다만 망국의 한을 안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던 우리 동포, 고려인들에게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겁니다. 모진 고난과 역경, 차별을 이겨낸 우리 고려인들은 이제 한민족의 자긍심을 토대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특파원 현장보고 팀이 처음으로 입수한 70년 전 강제 이주당시의 화면과 함께 고려인들의 오늘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박장범 순회특파원입니다.

<리포트>

<녹취>김 안나(93살/우즈베키스탄 거주): "살 길 찾아 고려에서 떠나서 러시아에 당도하여서 어머니가 나를 위해 눈물지으며 나도 부모위하여서 눈물 지었소 이내 몸이 갈 길은 어느 나라 어느 길이며 이내 몸이 묻힐 곳은 어느 나라 무덤인가 .. "

1937년 소련 공산당은 연해주 지방에 살던 한 민족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킵니다. 일본 간첩의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소수 민족 탄압이었습니다.

<인터뷰> "고려사람들 원도(연해주)서 막 실어왔지. 그저 막 실어다가 다 뿌려댔지. 오고 싶어 온게 아니라 막 실어왔지."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내팽겨쳐진 우리 조상들에게 하루하루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인터뷰> 엄 계단(78살): "깔(갈대)밭에 물이 차있고 모기도 많고, 이리가 마당 문 앞에 와서 엉엉 울었어요."

<인터뷰>허 마리아(77살): "37년에 왔을 적에 다른데서 온 사람들이 홍진을 막 가져왔지. 그렇게 한데 섞이니까 아이들을 막 쓸어내갔어(죽어나갔어). "

당시 고려인들의 피눈물나는 정착 과정을 생생하게 담은 화면입니다. 고려인들에게 주어진 땅은 온통 갈대만 무성한 못쓸 땅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이주로 변변한 농기구마저 없었습니다. 소나 말도 귀해서 맨 몸으로 쟁기를 둘러메고 땅을 일궜습니다.

<인터뷰> 최춘봉 (79살): "깔(갈대)밭을 두드려서 조금 조금 일궈서 40년도까지 적지 않게 다 일궜지."

<인터뷰>김 니콜라이 (80살): "새벽에 아침 싸서 이고 나가서 새까만 5시에 걸어 나가서 어두우면 들어오고 일 되게 모질게 했어."

그러나 고려인들은 한민족 특유의 근면함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 나갑니다. 지난 6,70년 대 중앙아시아 목화 산업의 중흥기를 이끈 주역은바로 강제 이주됐던 고려인들이었습니다.

<인터뷰> 장 에밀리아 (김병화박물관 안내인): "소련을 다 통틀어서 우리처럼 영웅 많은 조합이 없었어요."

구 소련시절 최고의 집단농장으로 꼽힌 김병화 농장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냉전의 종식,, 고려인들은 또 한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지난 91년 소련 붕괴로 러시아 시장을 잃어버리면서 중앙아시아 농촌의 사정은 급속히 악화됩니다. 특히 집단농장의 해체로 고려인들의 경제적 기반과 함께 한민족 전통문화를 이어갈 기반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분리 독립한 국가들에선 배타적 민족주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칩니다.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고려인들이 반세기 동안 피와 땀으로 일궜던 농장들은 모두 현지 민족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인터뷰> 엄 계단(78살): "우즈벡사람들이 주인이 됐는데 그 사람들이 제 하고 싶은 대로하지 우리 조선사람들은 권리없어요 우리는 우즈벡 땅에 와서 살잖아요 손님들과 한 가지지요."

공용어도 러시아어에서 현지 민족어로 빠르게 대체됐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즈벡어를 모르는 고려인들은 대거 공직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고위 통상 관료였던 김 알렉산드라 역시 고려인이란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비교적 민족차별이 덜한 키르기즈스탄으로 이주했습니다.

<인터뷰> 김 알렉산드라 (공직에서 추방): "내가 우즈벡사람이면 이렇게 안 되지 우즈벡사람들은 자기 땅에 살지 나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지만 같은 대접은 못받는다."

사업하던 아들 내외를 교통사고로 잃은 이 할머니는 아들이 모아놓은 돈을 찾지 못해 한 순간에 무일푼으로 전락했습니다. 현지인들이 고려인이란 이유로 아들과의 거래 내용을 모두 감추고, 아들의 재산도 빼돌렸습니다.

<인터뷰>이 슈라 (78살): "아무 것도 몰라요 친척도 없지 아무 것도 몰라요 그 돈은 다 어디갔는지 아무 것도 몰라요."

이런 시련 속에서 고려인들끼리 단결하고 민족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90년대 초반부터 각 나라별로 고려인협회가 결성됐고, 강제 이주 60주년이었던 97년에는 고려인 신문도 창간됐습니다.

<인터뷰> 김 부트르 (고려신문 편집장): "고려인으로서 정체성을 확산시키기 위해 신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와 함께, 정치 참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고려인들의 정계 진출도 늘었습니다.

<인터뷰> 장 르보미르 (고려인 최초 러시아하원의원): "많은 고려인들이 잃어버린 문화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고 저는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고려인들에게 까맣게 잊혀졌던 조국은 21세기와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세기 전 자신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팽개쳤던 힘없던 조국은 첨단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만드는 잘사는 나라, 강한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교육원의 한글수업에는 고려인보다 현지인 학생 수가 더 많습니다.

<인터뷰>이크롬 (한글교사): "처음엔 이렇게 학생들 많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학생들 많이 안온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무시하던 고려인의 말이 이제는 성공의 필수조건이 됐습니다.

<인터뷰> 마하롬: "정보통신을 전공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앞선 한국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인터뷰>딜오름: "한국에서 기술 배워서 좋은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중앙아시아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꿈의 나라로 통합니다. 한국기업의 진출과 한류 열풍은 이 곳 고려인들에게 한민족으로서 자부심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 고려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잃어버린 모국어를 되찾는 것입니다. 고려인 가정에서 3개 국어 교육은 기본이 됐습니다.

<인터뷰>위 스케트라나(고려인 4세): "우즈벡키스탄어는 국어이기 때문에, 러시아어는 이 곳에서 많이 쓰기 때문에, 한글은 민족의 언어이기 때문에 배워야 합니다."

고려인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서 한국으로의 유학이나 취업이 훨씬 수월한 탓에 경제적 위상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신 블라드미르(고려인협회 회장): "한국이 이룬 업적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 정부의 지원에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인터뷰> 장 알렉: "한국 정체성을 되찾고 이 곳에서 성공할 것...”

백여 년 전 ,,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절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던 고려인들.. 역사의 전환기마다 나라 잃은 소수민족으로써 희생양이 됐던 슬픈 역사는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이제 중앙아시아의 50만 고려인들은 절망과 한숨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뒤를 하고 미래를 향해 한민족의 무한한 잠재력을 마음껏 펼쳐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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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망향가
    • 입력 2006-03-03 10:28:55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어제가 87주년 3.1절이었습니다만 망국의 한을 안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던 우리 동포, 고려인들에게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겁니다. 모진 고난과 역경, 차별을 이겨낸 우리 고려인들은 이제 한민족의 자긍심을 토대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특파원 현장보고 팀이 처음으로 입수한 70년 전 강제 이주당시의 화면과 함께 고려인들의 오늘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박장범 순회특파원입니다. <리포트> <녹취>김 안나(93살/우즈베키스탄 거주): "살 길 찾아 고려에서 떠나서 러시아에 당도하여서 어머니가 나를 위해 눈물지으며 나도 부모위하여서 눈물 지었소 이내 몸이 갈 길은 어느 나라 어느 길이며 이내 몸이 묻힐 곳은 어느 나라 무덤인가 .. " 1937년 소련 공산당은 연해주 지방에 살던 한 민족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킵니다. 일본 간첩의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소수 민족 탄압이었습니다. <인터뷰> "고려사람들 원도(연해주)서 막 실어왔지. 그저 막 실어다가 다 뿌려댔지. 오고 싶어 온게 아니라 막 실어왔지."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내팽겨쳐진 우리 조상들에게 하루하루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인터뷰> 엄 계단(78살): "깔(갈대)밭에 물이 차있고 모기도 많고, 이리가 마당 문 앞에 와서 엉엉 울었어요." <인터뷰>허 마리아(77살): "37년에 왔을 적에 다른데서 온 사람들이 홍진을 막 가져왔지. 그렇게 한데 섞이니까 아이들을 막 쓸어내갔어(죽어나갔어). " 당시 고려인들의 피눈물나는 정착 과정을 생생하게 담은 화면입니다. 고려인들에게 주어진 땅은 온통 갈대만 무성한 못쓸 땅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이주로 변변한 농기구마저 없었습니다. 소나 말도 귀해서 맨 몸으로 쟁기를 둘러메고 땅을 일궜습니다. <인터뷰> 최춘봉 (79살): "깔(갈대)밭을 두드려서 조금 조금 일궈서 40년도까지 적지 않게 다 일궜지." <인터뷰>김 니콜라이 (80살): "새벽에 아침 싸서 이고 나가서 새까만 5시에 걸어 나가서 어두우면 들어오고 일 되게 모질게 했어." 그러나 고려인들은 한민족 특유의 근면함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 나갑니다. 지난 6,70년 대 중앙아시아 목화 산업의 중흥기를 이끈 주역은바로 강제 이주됐던 고려인들이었습니다. <인터뷰> 장 에밀리아 (김병화박물관 안내인): "소련을 다 통틀어서 우리처럼 영웅 많은 조합이 없었어요." 구 소련시절 최고의 집단농장으로 꼽힌 김병화 농장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냉전의 종식,, 고려인들은 또 한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지난 91년 소련 붕괴로 러시아 시장을 잃어버리면서 중앙아시아 농촌의 사정은 급속히 악화됩니다. 특히 집단농장의 해체로 고려인들의 경제적 기반과 함께 한민족 전통문화를 이어갈 기반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분리 독립한 국가들에선 배타적 민족주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칩니다.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고려인들이 반세기 동안 피와 땀으로 일궜던 농장들은 모두 현지 민족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인터뷰> 엄 계단(78살): "우즈벡사람들이 주인이 됐는데 그 사람들이 제 하고 싶은 대로하지 우리 조선사람들은 권리없어요 우리는 우즈벡 땅에 와서 살잖아요 손님들과 한 가지지요." 공용어도 러시아어에서 현지 민족어로 빠르게 대체됐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즈벡어를 모르는 고려인들은 대거 공직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고위 통상 관료였던 김 알렉산드라 역시 고려인이란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비교적 민족차별이 덜한 키르기즈스탄으로 이주했습니다. <인터뷰> 김 알렉산드라 (공직에서 추방): "내가 우즈벡사람이면 이렇게 안 되지 우즈벡사람들은 자기 땅에 살지 나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지만 같은 대접은 못받는다." 사업하던 아들 내외를 교통사고로 잃은 이 할머니는 아들이 모아놓은 돈을 찾지 못해 한 순간에 무일푼으로 전락했습니다. 현지인들이 고려인이란 이유로 아들과의 거래 내용을 모두 감추고, 아들의 재산도 빼돌렸습니다. <인터뷰>이 슈라 (78살): "아무 것도 몰라요 친척도 없지 아무 것도 몰라요 그 돈은 다 어디갔는지 아무 것도 몰라요." 이런 시련 속에서 고려인들끼리 단결하고 민족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90년대 초반부터 각 나라별로 고려인협회가 결성됐고, 강제 이주 60주년이었던 97년에는 고려인 신문도 창간됐습니다. <인터뷰> 김 부트르 (고려신문 편집장): "고려인으로서 정체성을 확산시키기 위해 신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와 함께, 정치 참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고려인들의 정계 진출도 늘었습니다. <인터뷰> 장 르보미르 (고려인 최초 러시아하원의원): "많은 고려인들이 잃어버린 문화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고 저는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고려인들에게 까맣게 잊혀졌던 조국은 21세기와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세기 전 자신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팽개쳤던 힘없던 조국은 첨단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만드는 잘사는 나라, 강한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교육원의 한글수업에는 고려인보다 현지인 학생 수가 더 많습니다. <인터뷰>이크롬 (한글교사): "처음엔 이렇게 학생들 많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학생들 많이 안온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무시하던 고려인의 말이 이제는 성공의 필수조건이 됐습니다. <인터뷰> 마하롬: "정보통신을 전공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앞선 한국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인터뷰>딜오름: "한국에서 기술 배워서 좋은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중앙아시아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꿈의 나라로 통합니다. 한국기업의 진출과 한류 열풍은 이 곳 고려인들에게 한민족으로서 자부심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 고려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잃어버린 모국어를 되찾는 것입니다. 고려인 가정에서 3개 국어 교육은 기본이 됐습니다. <인터뷰>위 스케트라나(고려인 4세): "우즈벡키스탄어는 국어이기 때문에, 러시아어는 이 곳에서 많이 쓰기 때문에, 한글은 민족의 언어이기 때문에 배워야 합니다." 고려인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서 한국으로의 유학이나 취업이 훨씬 수월한 탓에 경제적 위상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신 블라드미르(고려인협회 회장): "한국이 이룬 업적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 정부의 지원에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인터뷰> 장 알렉: "한국 정체성을 되찾고 이 곳에서 성공할 것...” 백여 년 전 ,,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절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던 고려인들.. 역사의 전환기마다 나라 잃은 소수민족으로써 희생양이 됐던 슬픈 역사는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이제 중앙아시아의 50만 고려인들은 절망과 한숨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뒤를 하고 미래를 향해 한민족의 무한한 잠재력을 마음껏 펼쳐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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