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으로 징용 나갔던 조선인들의 흔적

입력 2009.08.15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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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2차대전의 포화속에 희생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KBS 취재팀이 멀리 남태평양에서 스러져간 조선인 징용자들의 흔적을 찾아봤습니다.

강민수 기자입니다.

<리포트>

1944년, 일본군 태평양 사령부에 대한 미군의 대공습, 한국인 징용자 등 수 만명과 일본 전투기와 선박 수백 대가 수장됐습니다.

남태평양 푸른 바다 위 점점이 박힌 옥색 산호섬, 마이크로네시아 정중앙에 위치한 축섬 군도입니다.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고스란히 바닷속에 남았습니다.

이곳은 일제 군용 수송선 후지까와 마루호가 침몰한 곳입니다.

조선인 징용자 상당수가 함께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곳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바다속에 직접 들어가 봤습니다.

수심 30미터, 뱃머리의 포신이 온통 산호로 뒤덮혀 산호 바위처럼 보입니다.

선실 안, 일본군이 즐겨 마시던 맥주병이 나뒹굽니다.

의무병이 쓰던 구급약통과 유사시 사용했던 방독면이 침몰 당시의 급박함을 보여줍니다.

후지까와 마루에서 2백여 미터 떨어진 곳, 일본 폭격기 '베티'가 추락했습니다.

추락 당시의 충격에 심하게 부서진 조종석, 이제는 열대어들의 안식처가 됐습니다.

조선인 징용자들의 한은 육지 곳곳에 서려있습니다.

산 중턱에 이르자 65년 전 일본군이 설치한 해안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터뷰>추장 : "(이걸 뭐라고 불러요?) 다이호."

해안포 옆 탄약고엔 제 6탄약고라는 한자가 선명합니다.

이런 군사시설을 짓는 건 조선인 징용자들의 몫이었습니다.

<녹취> 데리우오 아치 : "뭐 하라고 해서 안하면 때리고..죽이고.. 근데 많이 말하면 안돼요.지금도 겁이나요."

농장일도 조선인 몫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 뒤로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을 위한 채소 농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농장 근로자 대다수는 조선인들이었습니다.

이젠 잡초만 무성한 이 곳을 주민들은 뜻도 모른 채 난타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녹취> 카지나 프랜시스 : "(뭐라고 불러요?) 난타쿠.(뜻은?) 몰라요."

남태평양에 징용된 조선인 군속이나 노무자는 만여 명,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3천 5백 명에 불과합니다.

대공습 후엔 먹을 것이 없어 상당수가 굶어 죽었습니다.

<녹취> 다니아꼬 시삼 : "조선인들은 매우 마르고, 배고팠어요. 그래서 병이 걸렸던 것 같아요."

어렵게 수소문해 찾은 조선인 징용자의 후손 요하네스 킴,

<녹취> 요하네스 김 : "(아버지 이름이 머예요?) 김필상."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술 한잔에 부르던 콧노래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녹취> 요하네스 김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버지는 맥주 마시면 이렇게 노래했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나오는 길, 집 앞마당에 남태평양엔 자생하지 않는 하얀색 봉선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전쟁 통에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이 심었다는 봉선화, 한 많은 조선 여인의 손끝을 물들인 봉선화는 남태평양 섬 곳곳에 피어 있었습니다.

남태평양에서 KBS 뉴스 강민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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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태평양으로 징용 나갔던 조선인들의 흔적
    • 입력 2009-08-15 21:17:10
    뉴스 9
<앵커 멘트>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2차대전의 포화속에 희생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KBS 취재팀이 멀리 남태평양에서 스러져간 조선인 징용자들의 흔적을 찾아봤습니다. 강민수 기자입니다. <리포트> 1944년, 일본군 태평양 사령부에 대한 미군의 대공습, 한국인 징용자 등 수 만명과 일본 전투기와 선박 수백 대가 수장됐습니다. 남태평양 푸른 바다 위 점점이 박힌 옥색 산호섬, 마이크로네시아 정중앙에 위치한 축섬 군도입니다.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고스란히 바닷속에 남았습니다. 이곳은 일제 군용 수송선 후지까와 마루호가 침몰한 곳입니다. 조선인 징용자 상당수가 함께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곳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바다속에 직접 들어가 봤습니다. 수심 30미터, 뱃머리의 포신이 온통 산호로 뒤덮혀 산호 바위처럼 보입니다. 선실 안, 일본군이 즐겨 마시던 맥주병이 나뒹굽니다. 의무병이 쓰던 구급약통과 유사시 사용했던 방독면이 침몰 당시의 급박함을 보여줍니다. 후지까와 마루에서 2백여 미터 떨어진 곳, 일본 폭격기 '베티'가 추락했습니다. 추락 당시의 충격에 심하게 부서진 조종석, 이제는 열대어들의 안식처가 됐습니다. 조선인 징용자들의 한은 육지 곳곳에 서려있습니다. 산 중턱에 이르자 65년 전 일본군이 설치한 해안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터뷰>추장 : "(이걸 뭐라고 불러요?) 다이호." 해안포 옆 탄약고엔 제 6탄약고라는 한자가 선명합니다. 이런 군사시설을 짓는 건 조선인 징용자들의 몫이었습니다. <녹취> 데리우오 아치 : "뭐 하라고 해서 안하면 때리고..죽이고.. 근데 많이 말하면 안돼요.지금도 겁이나요." 농장일도 조선인 몫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 뒤로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을 위한 채소 농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농장 근로자 대다수는 조선인들이었습니다. 이젠 잡초만 무성한 이 곳을 주민들은 뜻도 모른 채 난타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녹취> 카지나 프랜시스 : "(뭐라고 불러요?) 난타쿠.(뜻은?) 몰라요." 남태평양에 징용된 조선인 군속이나 노무자는 만여 명,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3천 5백 명에 불과합니다. 대공습 후엔 먹을 것이 없어 상당수가 굶어 죽었습니다. <녹취> 다니아꼬 시삼 : "조선인들은 매우 마르고, 배고팠어요. 그래서 병이 걸렸던 것 같아요." 어렵게 수소문해 찾은 조선인 징용자의 후손 요하네스 킴, <녹취> 요하네스 김 : "(아버지 이름이 머예요?) 김필상."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술 한잔에 부르던 콧노래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녹취> 요하네스 김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버지는 맥주 마시면 이렇게 노래했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나오는 길, 집 앞마당에 남태평양엔 자생하지 않는 하얀색 봉선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전쟁 통에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이 심었다는 봉선화, 한 많은 조선 여인의 손끝을 물들인 봉선화는 남태평양 섬 곳곳에 피어 있었습니다. 남태평양에서 KBS 뉴스 강민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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