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군도에도 한인 강제 징용 첫 확인

입력 2010.02.25 (22:09) 수정 2010.02.25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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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 만행이 또 드러났습니다.

한국이 5천여 명이 '남양군도'에 강제 징용됐는데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태반입니다.

임주영 기자입니다.

<리포트>

허허벌판이 된 활주로와 정글 속 폐허로 버려진 건물들.

태평양전쟁 때 징용된 한국인들이 피땀 흘려 지은 군사기지입니다.

당시 일제가 장악한 사이판과 팔라우 등 태평양 서북부의 '남양군도'에도 한국인이 강제 징용됐던 사실이 정부 차원에서 공식 확인됐습니다.

1939년부터 3년 동안에만 5천여 명이 남양군도에 끌려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터뷰> 김명환(강제징용피해 규명위) : "당시 자료 등을 비교해 확인한 결과 적어도 5천여 명이 징용됐던 것으로 추정...."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당시 남양군도 인구연감에는 1939년부터 3년 동안 해마다 조선 사람이 천여 명 이상씩 늘었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대부분 강제 징용 피해자들로 비행장 같은 군사시설을 짓거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폭탄이 쏟아지는 격전지에서 피해자들은 혹독한 더위와 영양 부족에 시달리다 10명 중에 6명은 살아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생존자들도 해방 이듬해인 46년에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박흥래(남양군도 징용피해자) : "그때는 돌아갈 생각도 못했지. 죽더라도 고향 쪽 바라보고 죽겠다고..."

위원회는 이번 조사는 1942년 이후 징용 피해는 빠져 있다며, 일제의 수탈이 극심했던 이 시기에 대해 진상 조사가 시급하다고 설명했습니다.

KBS 뉴스 임주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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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군도에도 한인 강제 징용 첫 확인
    • 입력 2010-02-25 22:09:49
    • 수정2010-02-25 22: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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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 만행이 또 드러났습니다. 한국이 5천여 명이 '남양군도'에 강제 징용됐는데 살아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태반입니다. 임주영 기자입니다. <리포트> 허허벌판이 된 활주로와 정글 속 폐허로 버려진 건물들. 태평양전쟁 때 징용된 한국인들이 피땀 흘려 지은 군사기지입니다. 당시 일제가 장악한 사이판과 팔라우 등 태평양 서북부의 '남양군도'에도 한국인이 강제 징용됐던 사실이 정부 차원에서 공식 확인됐습니다. 1939년부터 3년 동안에만 5천여 명이 남양군도에 끌려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터뷰> 김명환(강제징용피해 규명위) : "당시 자료 등을 비교해 확인한 결과 적어도 5천여 명이 징용됐던 것으로 추정...."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당시 남양군도 인구연감에는 1939년부터 3년 동안 해마다 조선 사람이 천여 명 이상씩 늘었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대부분 강제 징용 피해자들로 비행장 같은 군사시설을 짓거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폭탄이 쏟아지는 격전지에서 피해자들은 혹독한 더위와 영양 부족에 시달리다 10명 중에 6명은 살아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생존자들도 해방 이듬해인 46년에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박흥래(남양군도 징용피해자) : "그때는 돌아갈 생각도 못했지. 죽더라도 고향 쪽 바라보고 죽겠다고..." 위원회는 이번 조사는 1942년 이후 징용 피해는 빠져 있다며, 일제의 수탈이 극심했던 이 시기에 대해 진상 조사가 시급하다고 설명했습니다. KBS 뉴스 임주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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