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이토 히로부미 ‘판이한 사후’

입력 2010.03.26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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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그 사후는 어땠을까요?

이토 히로부미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성대한 묘역까지 조성돼있지만, 안중근 의사는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박에스더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혼을 담은 총격은 일제 침략의 원흉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응징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게는 일본의 근대화와 아시아 진출을 이끈 대정치인이었습니다.

이토의 장례식은 저격 9일 뒤인 11월 4일 도쿄에서 일본 최초의 국장으로 치러졌습니다.

도쿄 시나가와 인근에 단독으로 마련된 특별묘지는 마치 왕릉처럼 각종 석물과 우람한 나무들에 둘러싸여있고, 일본 최고의 정치인들이 그곳에서 그를 기려왔습니다.

효창공원의 소박한 무덤, 이 곳은 아직 주인을 맞지 못하고 있습니다.

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를 포함해 독립 열사 4분의 묘역을 조성하고 일본 각지로부터 유해를 찾아 모셨지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지 못했습니다.

1993년에야 유해를 찾기 위한 협상이 이뤄졌지만, 일본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할 뿐입니다.

<인터뷰> 김용삼 :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건 정말 도리가 아니다, 좀더 일찍 협상을 했더라면..."

안중근 의사의 가묘임을 알리는 비석은 순국 100주년이 되기 고작 이틀 전에 세워졌습니다.

일제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역을 공원으로 바꾼 이 곳에서, 안중근 의사의 가묘는 지나가는 산책객들의 무심한 눈길 속에서 100년을 지내왔습니다.

KBS 뉴스 박에스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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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 의사-이토 히로부미 ‘판이한 사후’
    • 입력 2010-03-26 07: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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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그 사후는 어땠을까요? 이토 히로부미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성대한 묘역까지 조성돼있지만, 안중근 의사는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박에스더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혼을 담은 총격은 일제 침략의 원흉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응징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게는 일본의 근대화와 아시아 진출을 이끈 대정치인이었습니다. 이토의 장례식은 저격 9일 뒤인 11월 4일 도쿄에서 일본 최초의 국장으로 치러졌습니다. 도쿄 시나가와 인근에 단독으로 마련된 특별묘지는 마치 왕릉처럼 각종 석물과 우람한 나무들에 둘러싸여있고, 일본 최고의 정치인들이 그곳에서 그를 기려왔습니다. 효창공원의 소박한 무덤, 이 곳은 아직 주인을 맞지 못하고 있습니다. 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를 포함해 독립 열사 4분의 묘역을 조성하고 일본 각지로부터 유해를 찾아 모셨지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지 못했습니다. 1993년에야 유해를 찾기 위한 협상이 이뤄졌지만, 일본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할 뿐입니다. <인터뷰> 김용삼 :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건 정말 도리가 아니다, 좀더 일찍 협상을 했더라면..." 안중근 의사의 가묘임을 알리는 비석은 순국 100주년이 되기 고작 이틀 전에 세워졌습니다. 일제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역을 공원으로 바꾼 이 곳에서, 안중근 의사의 가묘는 지나가는 산책객들의 무심한 눈길 속에서 100년을 지내왔습니다. KBS 뉴스 박에스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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