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멘트>
6,70년대 군사 정부 시절 나라에 뺏긴 땅을 되찾고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정부를 상대로 수십 년 동안 싸워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출 공단 1호라는 구로공단 터가 문제의 땅인데, 최근 법원의 재심 개시결정도 나왔습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자세한 내용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흔 살 한동익 씨는 평생을 구로에서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는 논과 밭이 전부였던 땅, 이제는 농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녹취> 한동익(70세) : "산을 일궈서 밭을 만들면 따비밭이라고 했어요, 그런 게 있었고. 저 아래쪽은 전부 밭, 그리고 저 아래는 논입니다. 대림역 있는 데 거기가 냇가였거든요."
옛날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인터뷰> "저한테 유언하고 돌아가셨어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니까, 네가 제일 많이 아니까 명심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그런 때가 오면 내 허물을 벗겨다오, 유언하셨습니다."
구로 땅에 한이 맺힌 사연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됐습니다.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군사력 강화와 경제 재건을 강조했습니다.
<녹취> 故 박정희 대통령(1961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우리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자면 경제가 희생돼야 되겠고, 경제 재건을 하자면 군대, 군사력의 강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희생이 돼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한국으로서는 이 모순된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을 해야 되겠다."
그리고 구로는 국가 재건의 전초기지가 됐습니다. 우리나라 공업단지 1호인 구로공단이 이때 들어섰습니다.
<녹취>대한뉴스(1965년 구로공단 기공식) :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서 공업단지의 발족은 중소기업 지대를 조성하려는 첫 시도로서, 이 기공식을 기점으로 더 많은 공업단지 개발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공단 인근에는 청계천 피난민들을 위한 집단 정착촌도 지어졌습니다.
이 시기부터 25만 평에 이르던 구로동 논과 밭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밤에 사람들을 동원해가지고 (농사를 못 짓게 하려고) 유리, 깨진 유리, 병을 깨가지고 화물차에 그걸 싣고 그냥 논에다가 다 뿌려놓은 거예요. 그걸 모르고 그냥 논에 모 심으러 들어갔다가 맨발로 하니까 다 베이고."
하지만, 농사지을 땅을 잃어버린 구로동 주민 200여 명은 정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이 땅이 나라 땅, 즉 국유지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주민들은 이 땅이 자신들 소유라고 반박하면서 다툼이 시작됐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 주장이 맞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 시절인 소화 3년, 즉 1928년에 만들어진 토지대장에는 주민들의 이름이 땅주인으로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소화 17년, 즉 1942년 땅 주인은 일본국 육군성으로 바뀝니다.
<녹취> 한동문(61세) :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면서 (구로땅) 전체를 먹으려고 군사용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강제매수, 이 일대 임야까지 합쳐서 35만 평을 일괄 강제 매수 한 거예요."
이때 일본 육군성이 지급한 돈은 땅 한 평에 1원 50전.
1940년 쌀 100kg의 가격이 약 30원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1원 50전은 당시 쌀 5kg에 해당합니다. 구로동 땅 한 평 당 쌀 5kg씩 주고 사들인 셈입니다.
일본군은 이후 이 땅 일부에 기마부대를 설치했지만 나머지 땅은 그대로 농경지로 남아있었고 주민들도 계속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했고 이승만 정권은 1949년 농지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경자유전, 즉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땅을 돌려준다는 원칙에 따라 농지를 분배했습니다.
당시 분배 서류인 농지소표에는 구로동 땅이 분배된 것으로 나타나있고, 상환대장에는 땅을 분배받은 대가로 정부에 곡식을 상환한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녹취> "(아버지께서) 좋아하셨죠. 갖다주고 오면서도, 이제 세 번 부었으니까 두 번만 더 부으면 이제 내 땅이 된다. 희망을 가지고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3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구로동 땅에 대한 상환절차를 중단시켰습니다.
일본 육군성 땅이었으니 이제 한국 국방부 소유가 됐다며 농지분배의 취소를 주장했습니다.
주민들이 반발하자 서울시는 당시 서울지구 계엄사령부와 농림부 장관 등에게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대독>"토지 경작자 등에게 이미 농지분배를 마치고 3년 동안 상환을 실시해 왔으며, 양곡 수급계획에 비추어 상환을 중단할 수 없는 사정이니 각별히 선처해주길 바랍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1961년부터 구로공단과 정착촌이 지어지자 주민들은 결국 1964년 나라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대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인터뷰> 김정진(변호사) : "대법원 판례도 있는데, 육군성 소유 토지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귀속 재산이라고 해서 농민들에게 분배되는 게 원칙이고요, 만약에 국가가 그걸 쓸 필요가 있다고 하면 분배되지 않은 예외사유가있어서 예외사유에 의해서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게 있습니다. 이관 절차라고 하는데요, 그런 절차를 밟은 흔적이나 근거가 없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 민사소송에 의해서도 농민들이 승소한 부분이었거든요."
구로공단 사업에 차질이 예상되자 정부는 다급해졌습니다. 1970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으로 하여금 정부측이 패소되지 않도록 가능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며 친필로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검찰은 구로동 주민과 토지 담당 공무원 등 68명을 체포하고 240명을 수배했습니다. 농민들이 서류를 위조해 농지를 분배받은 것처럼 꾸몄다며 사기와 위증 혐의를 적용했고 이런 사실은 당시 신문에 기사로 실렸습니다.
<인터뷰> 안동학(68세) : "그야말로 구속영장도 없이 그냥 강제로 끌려간 거지."
<인터뷰> 박준용(73세) : "그 당시에 보면 한 10명 정도 들어갈 만한 정도 되는데 그 당시 4,50명을 거기에 집어넣는데 7월이니까 얼마나 더워요. 그러니까 사람이 숨을 쉴 수가 없는 거야, 노인네들이. 그러니까 막 그 안에서 구토를 하고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거예요."
그런데 수사관들의 태도는 이상했다고 합니다. 사기나 위증에 대한 조사에 집중하지 않고,대신 주민들에게 민사소송을 취하하고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압박하는 데 치중했습니다.
<인터뷰> "종이짝을 하나 내밀면서 이게 석방증이야. 너희들, 왜 사기를 치고 자빠졌어? 이게 석방증이니까 너희 포기만 해, 그럼 내가 내보내 줄게."
결국, 주민 140여 명은 소송을 취하하고 땅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버틴 주민들은 서울 시내의 한 호텔 등에서 계속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습니다.
<인터뷰> 한무섭(군용지명예회복추진위원장) : "(호텔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보니까 동네 노인들이야, 전부. 벌거벗고 있는 거야. 그냥 가죽띠로 얻어맞고, 구둣발로 무릎 까고, 슬리퍼로 뺨을 때리고..."
이런 수난을 겪으면서도 일부 주민들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20여 명이 구속 기소됐습니다.
검찰은 영등포구청 공무원이 식량을 확보할 목적으로 곡식을 수납했을 뿐인데, 주민들은 이를 이용해 농지분배 받아 상환곡을 납부한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는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수사 결과에 대해 지금도 자신하고 있으며, 가혹행위나 상부의 압력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황재택(변호사 / 당시 수사 검사) : "책임과 절차, 결과는 검사가 져야돼. 내가 한 거야. 박정희 대통령이 한 것 아니야. 천만의 말씀."
정부는 이후 형사재판 결과를 근거로 주민들이 승소했던 민사재판에 대해 재심까지 신청했습니다.
1992년까지 계속된 소송에서 결국 주민들은 패소했습니다. 땅을 잃고 사기죄를 얻은 주민들은 홧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그 가운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인터뷰> "(아버님 말씀이) 농지분배 받아서 3년 4년에 걸쳐서 당신 마차에 싣고 가서 상환곡을 납부를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농지 분배가 아니라 사기라고 이렇게 하니 나는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던 뜻은 후손들이 이어받았습니다. 결국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무리한 강압수사로 구로동 주민들의 인권이 침해됐다며 형사재판에 대한 재심을 권고했습니다. 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지난달 형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습니다.
앞서 지난 8월에는 강제로 빼앗은 구로동 땅 가운데 일부를 주민의 유족에게 돌려주라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습니다.
<인터뷰> 이동근(대법원 공보판사) : "국가기관이 공권력을 남용해서 불법적인 체포 감금을 하고, 가혹행위를 하는 등 소 취하를 강요했다면, 그 소 취하는 무효라는 판결입니다."
관련자가 많고 소송도 복잡하기 때문에 모든 피해자들의 사건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또 개인간 거래를 통해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땅은 되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초를 겪은 주민이나 그 후손들은 50년 동안 응어리진 한을 이제야 풀 수 있게 됐다며 법원의 재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70년대 군사 정부 시절 나라에 뺏긴 땅을 되찾고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정부를 상대로 수십 년 동안 싸워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출 공단 1호라는 구로공단 터가 문제의 땅인데, 최근 법원의 재심 개시결정도 나왔습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자세한 내용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흔 살 한동익 씨는 평생을 구로에서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는 논과 밭이 전부였던 땅, 이제는 농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녹취> 한동익(70세) : "산을 일궈서 밭을 만들면 따비밭이라고 했어요, 그런 게 있었고. 저 아래쪽은 전부 밭, 그리고 저 아래는 논입니다. 대림역 있는 데 거기가 냇가였거든요."
옛날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인터뷰> "저한테 유언하고 돌아가셨어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니까, 네가 제일 많이 아니까 명심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그런 때가 오면 내 허물을 벗겨다오, 유언하셨습니다."
구로 땅에 한이 맺힌 사연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됐습니다.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군사력 강화와 경제 재건을 강조했습니다.
<녹취> 故 박정희 대통령(1961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우리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자면 경제가 희생돼야 되겠고, 경제 재건을 하자면 군대, 군사력의 강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희생이 돼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한국으로서는 이 모순된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을 해야 되겠다."
그리고 구로는 국가 재건의 전초기지가 됐습니다. 우리나라 공업단지 1호인 구로공단이 이때 들어섰습니다.
<녹취>대한뉴스(1965년 구로공단 기공식) :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서 공업단지의 발족은 중소기업 지대를 조성하려는 첫 시도로서, 이 기공식을 기점으로 더 많은 공업단지 개발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공단 인근에는 청계천 피난민들을 위한 집단 정착촌도 지어졌습니다.
이 시기부터 25만 평에 이르던 구로동 논과 밭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밤에 사람들을 동원해가지고 (농사를 못 짓게 하려고) 유리, 깨진 유리, 병을 깨가지고 화물차에 그걸 싣고 그냥 논에다가 다 뿌려놓은 거예요. 그걸 모르고 그냥 논에 모 심으러 들어갔다가 맨발로 하니까 다 베이고."
하지만, 농사지을 땅을 잃어버린 구로동 주민 200여 명은 정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이 땅이 나라 땅, 즉 국유지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주민들은 이 땅이 자신들 소유라고 반박하면서 다툼이 시작됐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 주장이 맞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 시절인 소화 3년, 즉 1928년에 만들어진 토지대장에는 주민들의 이름이 땅주인으로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소화 17년, 즉 1942년 땅 주인은 일본국 육군성으로 바뀝니다.
<녹취> 한동문(61세) :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면서 (구로땅) 전체를 먹으려고 군사용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강제매수, 이 일대 임야까지 합쳐서 35만 평을 일괄 강제 매수 한 거예요."
이때 일본 육군성이 지급한 돈은 땅 한 평에 1원 50전.
1940년 쌀 100kg의 가격이 약 30원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1원 50전은 당시 쌀 5kg에 해당합니다. 구로동 땅 한 평 당 쌀 5kg씩 주고 사들인 셈입니다.
일본군은 이후 이 땅 일부에 기마부대를 설치했지만 나머지 땅은 그대로 농경지로 남아있었고 주민들도 계속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했고 이승만 정권은 1949년 농지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경자유전, 즉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땅을 돌려준다는 원칙에 따라 농지를 분배했습니다.
당시 분배 서류인 농지소표에는 구로동 땅이 분배된 것으로 나타나있고, 상환대장에는 땅을 분배받은 대가로 정부에 곡식을 상환한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녹취> "(아버지께서) 좋아하셨죠. 갖다주고 오면서도, 이제 세 번 부었으니까 두 번만 더 부으면 이제 내 땅이 된다. 희망을 가지고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3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구로동 땅에 대한 상환절차를 중단시켰습니다.
일본 육군성 땅이었으니 이제 한국 국방부 소유가 됐다며 농지분배의 취소를 주장했습니다.
주민들이 반발하자 서울시는 당시 서울지구 계엄사령부와 농림부 장관 등에게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대독>"토지 경작자 등에게 이미 농지분배를 마치고 3년 동안 상환을 실시해 왔으며, 양곡 수급계획에 비추어 상환을 중단할 수 없는 사정이니 각별히 선처해주길 바랍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1961년부터 구로공단과 정착촌이 지어지자 주민들은 결국 1964년 나라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대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인터뷰> 김정진(변호사) : "대법원 판례도 있는데, 육군성 소유 토지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귀속 재산이라고 해서 농민들에게 분배되는 게 원칙이고요, 만약에 국가가 그걸 쓸 필요가 있다고 하면 분배되지 않은 예외사유가있어서 예외사유에 의해서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게 있습니다. 이관 절차라고 하는데요, 그런 절차를 밟은 흔적이나 근거가 없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 민사소송에 의해서도 농민들이 승소한 부분이었거든요."
구로공단 사업에 차질이 예상되자 정부는 다급해졌습니다. 1970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으로 하여금 정부측이 패소되지 않도록 가능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며 친필로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검찰은 구로동 주민과 토지 담당 공무원 등 68명을 체포하고 240명을 수배했습니다. 농민들이 서류를 위조해 농지를 분배받은 것처럼 꾸몄다며 사기와 위증 혐의를 적용했고 이런 사실은 당시 신문에 기사로 실렸습니다.
<인터뷰> 안동학(68세) : "그야말로 구속영장도 없이 그냥 강제로 끌려간 거지."
<인터뷰> 박준용(73세) : "그 당시에 보면 한 10명 정도 들어갈 만한 정도 되는데 그 당시 4,50명을 거기에 집어넣는데 7월이니까 얼마나 더워요. 그러니까 사람이 숨을 쉴 수가 없는 거야, 노인네들이. 그러니까 막 그 안에서 구토를 하고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거예요."
그런데 수사관들의 태도는 이상했다고 합니다. 사기나 위증에 대한 조사에 집중하지 않고,대신 주민들에게 민사소송을 취하하고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압박하는 데 치중했습니다.
<인터뷰> "종이짝을 하나 내밀면서 이게 석방증이야. 너희들, 왜 사기를 치고 자빠졌어? 이게 석방증이니까 너희 포기만 해, 그럼 내가 내보내 줄게."
결국, 주민 140여 명은 소송을 취하하고 땅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버틴 주민들은 서울 시내의 한 호텔 등에서 계속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습니다.
<인터뷰> 한무섭(군용지명예회복추진위원장) : "(호텔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보니까 동네 노인들이야, 전부. 벌거벗고 있는 거야. 그냥 가죽띠로 얻어맞고, 구둣발로 무릎 까고, 슬리퍼로 뺨을 때리고..."
이런 수난을 겪으면서도 일부 주민들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20여 명이 구속 기소됐습니다.
검찰은 영등포구청 공무원이 식량을 확보할 목적으로 곡식을 수납했을 뿐인데, 주민들은 이를 이용해 농지분배 받아 상환곡을 납부한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는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수사 결과에 대해 지금도 자신하고 있으며, 가혹행위나 상부의 압력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황재택(변호사 / 당시 수사 검사) : "책임과 절차, 결과는 검사가 져야돼. 내가 한 거야. 박정희 대통령이 한 것 아니야. 천만의 말씀."
정부는 이후 형사재판 결과를 근거로 주민들이 승소했던 민사재판에 대해 재심까지 신청했습니다.
1992년까지 계속된 소송에서 결국 주민들은 패소했습니다. 땅을 잃고 사기죄를 얻은 주민들은 홧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그 가운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인터뷰> "(아버님 말씀이) 농지분배 받아서 3년 4년에 걸쳐서 당신 마차에 싣고 가서 상환곡을 납부를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농지 분배가 아니라 사기라고 이렇게 하니 나는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던 뜻은 후손들이 이어받았습니다. 결국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무리한 강압수사로 구로동 주민들의 인권이 침해됐다며 형사재판에 대한 재심을 권고했습니다. 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지난달 형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습니다.
앞서 지난 8월에는 강제로 빼앗은 구로동 땅 가운데 일부를 주민의 유족에게 돌려주라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습니다.
<인터뷰> 이동근(대법원 공보판사) : "국가기관이 공권력을 남용해서 불법적인 체포 감금을 하고, 가혹행위를 하는 등 소 취하를 강요했다면, 그 소 취하는 무효라는 판결입니다."
관련자가 많고 소송도 복잡하기 때문에 모든 피해자들의 사건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또 개인간 거래를 통해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땅은 되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초를 겪은 주민이나 그 후손들은 50년 동안 응어리진 한을 이제야 풀 수 있게 됐다며 법원의 재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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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맺힌 땅 찾기
-
- 입력 2010-10-04 07:21:05

<앵커 멘트>
6,70년대 군사 정부 시절 나라에 뺏긴 땅을 되찾고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정부를 상대로 수십 년 동안 싸워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수출 공단 1호라는 구로공단 터가 문제의 땅인데, 최근 법원의 재심 개시결정도 나왔습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자세한 내용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흔 살 한동익 씨는 평생을 구로에서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는 논과 밭이 전부였던 땅, 이제는 농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녹취> 한동익(70세) : "산을 일궈서 밭을 만들면 따비밭이라고 했어요, 그런 게 있었고. 저 아래쪽은 전부 밭, 그리고 저 아래는 논입니다. 대림역 있는 데 거기가 냇가였거든요."
옛날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인터뷰> "저한테 유언하고 돌아가셨어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니까, 네가 제일 많이 아니까 명심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그런 때가 오면 내 허물을 벗겨다오, 유언하셨습니다."
구로 땅에 한이 맺힌 사연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됐습니다.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군사력 강화와 경제 재건을 강조했습니다.
<녹취> 故 박정희 대통령(1961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우리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자면 경제가 희생돼야 되겠고, 경제 재건을 하자면 군대, 군사력의 강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희생이 돼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한국으로서는 이 모순된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을 해야 되겠다."
그리고 구로는 국가 재건의 전초기지가 됐습니다. 우리나라 공업단지 1호인 구로공단이 이때 들어섰습니다.
<녹취>대한뉴스(1965년 구로공단 기공식) :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서 공업단지의 발족은 중소기업 지대를 조성하려는 첫 시도로서, 이 기공식을 기점으로 더 많은 공업단지 개발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공단 인근에는 청계천 피난민들을 위한 집단 정착촌도 지어졌습니다.
이 시기부터 25만 평에 이르던 구로동 논과 밭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밤에 사람들을 동원해가지고 (농사를 못 짓게 하려고) 유리, 깨진 유리, 병을 깨가지고 화물차에 그걸 싣고 그냥 논에다가 다 뿌려놓은 거예요. 그걸 모르고 그냥 논에 모 심으러 들어갔다가 맨발로 하니까 다 베이고."
하지만, 농사지을 땅을 잃어버린 구로동 주민 200여 명은 정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이 땅이 나라 땅, 즉 국유지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주민들은 이 땅이 자신들 소유라고 반박하면서 다툼이 시작됐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 주장이 맞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 시절인 소화 3년, 즉 1928년에 만들어진 토지대장에는 주민들의 이름이 땅주인으로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소화 17년, 즉 1942년 땅 주인은 일본국 육군성으로 바뀝니다.
<녹취> 한동문(61세) :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면서 (구로땅) 전체를 먹으려고 군사용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강제매수, 이 일대 임야까지 합쳐서 35만 평을 일괄 강제 매수 한 거예요."
이때 일본 육군성이 지급한 돈은 땅 한 평에 1원 50전.
1940년 쌀 100kg의 가격이 약 30원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1원 50전은 당시 쌀 5kg에 해당합니다. 구로동 땅 한 평 당 쌀 5kg씩 주고 사들인 셈입니다.
일본군은 이후 이 땅 일부에 기마부대를 설치했지만 나머지 땅은 그대로 농경지로 남아있었고 주민들도 계속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했고 이승만 정권은 1949년 농지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경자유전, 즉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땅을 돌려준다는 원칙에 따라 농지를 분배했습니다.
당시 분배 서류인 농지소표에는 구로동 땅이 분배된 것으로 나타나있고, 상환대장에는 땅을 분배받은 대가로 정부에 곡식을 상환한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녹취> "(아버지께서) 좋아하셨죠. 갖다주고 오면서도, 이제 세 번 부었으니까 두 번만 더 부으면 이제 내 땅이 된다. 희망을 가지고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3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구로동 땅에 대한 상환절차를 중단시켰습니다.
일본 육군성 땅이었으니 이제 한국 국방부 소유가 됐다며 농지분배의 취소를 주장했습니다.
주민들이 반발하자 서울시는 당시 서울지구 계엄사령부와 농림부 장관 등에게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대독>"토지 경작자 등에게 이미 농지분배를 마치고 3년 동안 상환을 실시해 왔으며, 양곡 수급계획에 비추어 상환을 중단할 수 없는 사정이니 각별히 선처해주길 바랍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1961년부터 구로공단과 정착촌이 지어지자 주민들은 결국 1964년 나라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대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인터뷰> 김정진(변호사) : "대법원 판례도 있는데, 육군성 소유 토지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귀속 재산이라고 해서 농민들에게 분배되는 게 원칙이고요, 만약에 국가가 그걸 쓸 필요가 있다고 하면 분배되지 않은 예외사유가있어서 예외사유에 의해서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게 있습니다. 이관 절차라고 하는데요, 그런 절차를 밟은 흔적이나 근거가 없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 민사소송에 의해서도 농민들이 승소한 부분이었거든요."
구로공단 사업에 차질이 예상되자 정부는 다급해졌습니다. 1970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으로 하여금 정부측이 패소되지 않도록 가능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며 친필로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검찰은 구로동 주민과 토지 담당 공무원 등 68명을 체포하고 240명을 수배했습니다. 농민들이 서류를 위조해 농지를 분배받은 것처럼 꾸몄다며 사기와 위증 혐의를 적용했고 이런 사실은 당시 신문에 기사로 실렸습니다.
<인터뷰> 안동학(68세) : "그야말로 구속영장도 없이 그냥 강제로 끌려간 거지."
<인터뷰> 박준용(73세) : "그 당시에 보면 한 10명 정도 들어갈 만한 정도 되는데 그 당시 4,50명을 거기에 집어넣는데 7월이니까 얼마나 더워요. 그러니까 사람이 숨을 쉴 수가 없는 거야, 노인네들이. 그러니까 막 그 안에서 구토를 하고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거예요."
그런데 수사관들의 태도는 이상했다고 합니다. 사기나 위증에 대한 조사에 집중하지 않고,대신 주민들에게 민사소송을 취하하고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압박하는 데 치중했습니다.
<인터뷰> "종이짝을 하나 내밀면서 이게 석방증이야. 너희들, 왜 사기를 치고 자빠졌어? 이게 석방증이니까 너희 포기만 해, 그럼 내가 내보내 줄게."
결국, 주민 140여 명은 소송을 취하하고 땅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버틴 주민들은 서울 시내의 한 호텔 등에서 계속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습니다.
<인터뷰> 한무섭(군용지명예회복추진위원장) : "(호텔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보니까 동네 노인들이야, 전부. 벌거벗고 있는 거야. 그냥 가죽띠로 얻어맞고, 구둣발로 무릎 까고, 슬리퍼로 뺨을 때리고..."
이런 수난을 겪으면서도 일부 주민들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20여 명이 구속 기소됐습니다.
검찰은 영등포구청 공무원이 식량을 확보할 목적으로 곡식을 수납했을 뿐인데, 주민들은 이를 이용해 농지분배 받아 상환곡을 납부한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는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수사 결과에 대해 지금도 자신하고 있으며, 가혹행위나 상부의 압력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황재택(변호사 / 당시 수사 검사) : "책임과 절차, 결과는 검사가 져야돼. 내가 한 거야. 박정희 대통령이 한 것 아니야. 천만의 말씀."
정부는 이후 형사재판 결과를 근거로 주민들이 승소했던 민사재판에 대해 재심까지 신청했습니다.
1992년까지 계속된 소송에서 결국 주민들은 패소했습니다. 땅을 잃고 사기죄를 얻은 주민들은 홧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그 가운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인터뷰> "(아버님 말씀이) 농지분배 받아서 3년 4년에 걸쳐서 당신 마차에 싣고 가서 상환곡을 납부를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농지 분배가 아니라 사기라고 이렇게 하니 나는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던 뜻은 후손들이 이어받았습니다. 결국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무리한 강압수사로 구로동 주민들의 인권이 침해됐다며 형사재판에 대한 재심을 권고했습니다. 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지난달 형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습니다.
앞서 지난 8월에는 강제로 빼앗은 구로동 땅 가운데 일부를 주민의 유족에게 돌려주라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습니다.
<인터뷰> 이동근(대법원 공보판사) : "국가기관이 공권력을 남용해서 불법적인 체포 감금을 하고, 가혹행위를 하는 등 소 취하를 강요했다면, 그 소 취하는 무효라는 판결입니다."
관련자가 많고 소송도 복잡하기 때문에 모든 피해자들의 사건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또 개인간 거래를 통해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땅은 되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초를 겪은 주민이나 그 후손들은 50년 동안 응어리진 한을 이제야 풀 수 있게 됐다며 법원의 재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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