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중단됐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오늘부터 금강산 면회소에서 1년 만에 다시 열립니다.
헤어진 지 60년 만에 혈육을 만나는 이산가족들은 기대와 설렘으로 들떠있습니다.
올해 91살인 한신옥 할머니는 며칠 뒤면 금강산에서 북한에 있는 큰 아들을 만납니다.
죽기 전에 헤어진 아들을 꼭 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할머니는 아흔이 넘어서야 소원을 이루게 됐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벌써 죽었으면 못 볼 건데 90이나 되도록 살다보니 만나게 돼서 기쁘기도 하고 허튼 게 아닌가 또 이런 생각도 들고…."
할머니는 지난 10년 동안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왔지만 추첨에서 번번이 떨어진데다 최근에는 남북관계 경색으로 상봉행사가 중단돼 생전에 아들을 볼 수 있을까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아이고 내가 누굴 만나는 거야. 내 아들이 일곱 살 돼서 나왔는데 이렇게 크고 늙었나 하고 내가 놀랄 정도라고요."
할머니는 평안남도 순안에서 남편과 양복점을 운영하다, 전쟁이 터지자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할머니는 두 살배기 작은 아들을 업고, 다섯 살 난 큰아들은 남편의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하지만 황해도에 다다랐을 때,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남편과 큰 아들과 잃어버렸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사람들이 다 해주로 가야 되느냐 신막으로 가야 되느냐 그래서 나도 글자는 아니까 그런 소리 하면서 (같이) 보다가 식구하고 말하려고 보니까 싹 없어지지 않았어.“
어린 아들과 단 둘이 남겨진 할머니는 남편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거란 생각에, 서둘러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시신과 부상자들의 울음소리로 뒤덮인 길을 되짚어가던 할머니는 문득 작은 아들이라도 살려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가족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남쪽으로 피난을 온 할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아들을 키우다 같은 실향민이었던 남편과 재혼해 다복한 가정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전쟁통에 잃어버린 큰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새끼가 요만한 거 걸어오다가 어디 가서 어떠한 일을 당했는지, 사는지…. 잘됐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어디 가서 사는지 밤낮으로 울면서 지금까지 살았죠."
북한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경기도 의정부에 터를 잡았습니다.
실향민 부모 밑에서 태어난 두 딸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인터뷰> 노연숙(한신옥 씨 맏 딸) :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북에 있는) 그 따님들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참 사랑도 못 받는 애들인 줄 알았어요. 근데 우리가 엄마․아빠가 되고 나이가 먹다보니까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고요."
오매불망 그리던 큰아들을 만나게 돼 기쁘지만, 또 다시 생이별을 해야 하기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섭니다.
<녹취> "(큰 아들 만날 생각하니까 기분 좋죠?) 죽기 전에 만난다니까 감사하고 기쁘긴 기쁜데. 헤어질 생각부터 자꾸 앞서나가잖아."
그래도 아들을 만나면 긴 세월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어볼 말이 많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네가 진짜 광훈이가? 광훈이가 살았네? 네가 어떻게 살았니. 어디 가서 뭘 먹고 살았니. 어떻게 살았니."
김재명 할아버지는 북한에 어머니와 세 자녀, 그리고 임신 중인 아내를 두고 남으로 피난 왔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북한에 살아있는 사람은 딸 하나와 헤어질 때 뱃속에 있어 얼굴도 보지 못했던 막내아들뿐입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거기 가족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았을 거라는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거든요. 두 사람이 살아있다고 해도 내가 만나보기 전에는 전부 다 헛소리다."
함경남도 풍산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1.4후퇴 때 혼자 집을 나왔습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오래 있을 줄은 생각도 안 했어요. 그저 일주일 있다가 도로 들어갈 줄 알고 쌀 네 줌, 다섯 줌 이렇게 쥐고 나오고."
가족들이 지낼 곳을 알아보려고 잠깐 나온다는 것이 생이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자리 잡고 생활하다보니 이래선 안 되겠다. 고향 가족들이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르고. 이러다가 대가 끊기겠다 싶어서 결혼을 하고…."
부산에서 재혼해 아들 둘과 손자․손녀까지 뒀지만, 피난 때 어머니가 줬던 쌀자루를 지금까지 간직할 정도로 두고 온 가족들을 잊지 못했습니다.
혼자만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죄책감은 사는 내내 할아버지의 가슴을 짓눌러온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아버지가 그 당시에 너희들 버리고 나온 거. 너희들한테 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처지를 네가 이해해달라고 그걸 제일 먼저 말할 겁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선 북측 대상자들이 먼저 2박 3일 동안 남측의 가족을 만나고, 하루 뒤인 다음달 3일부터 남측의 이산가족들이 북한의 가족과 상봉합니다.
이산가족면회소에서 단체상봉이 먼저 이뤄지고, 이어 금강산호텔에서 개별상봉이 이뤄집니다.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로 선정된 사람은 남과 북 각각 100명으로, 나이는 모두 일흔이 넘었습니다.
남측의 경우 최고령자인 97세 김부랑 할머니를 비롯해 90세 이상이 21명, 80세 이상 52명, 70세 이상 27명으로 80대가 제일 많고, 북측은 최고령자인 90세 1명, 80세 이상 30명, 70세 이상 69명으로 대다수가 70대입니다.
북측에서 가족의 생존이 확인된 우리 측 상봉 신청자는 모두 112명이었으나, 일부는 건강이나 가족의 반대 같은 이유로 상봉을 포기했습니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남측에서는 북측 상봉 신청자의 가족 4백여 명과 남측 신청자 본인과 가족 백여 명 등 모두 5백여 명이 금강산으로 떠납니다.
상봉행사가 다시 열리게 됐지만, 헤어진 혈육을 만날 수 있는 우리 측 이산가족은 한 번에 수백 명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8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들은 북한에 있는 혈육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남과 북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거나, 적어도 상봉 정례화만이라도 이뤄져 이산가족들이 마지막 한을 풀 수 있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헤어진 지 60년 만에 혈육을 만나는 이산가족들은 기대와 설렘으로 들떠있습니다.
올해 91살인 한신옥 할머니는 며칠 뒤면 금강산에서 북한에 있는 큰 아들을 만납니다.
죽기 전에 헤어진 아들을 꼭 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할머니는 아흔이 넘어서야 소원을 이루게 됐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벌써 죽었으면 못 볼 건데 90이나 되도록 살다보니 만나게 돼서 기쁘기도 하고 허튼 게 아닌가 또 이런 생각도 들고…."
할머니는 지난 10년 동안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왔지만 추첨에서 번번이 떨어진데다 최근에는 남북관계 경색으로 상봉행사가 중단돼 생전에 아들을 볼 수 있을까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아이고 내가 누굴 만나는 거야. 내 아들이 일곱 살 돼서 나왔는데 이렇게 크고 늙었나 하고 내가 놀랄 정도라고요."
할머니는 평안남도 순안에서 남편과 양복점을 운영하다, 전쟁이 터지자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할머니는 두 살배기 작은 아들을 업고, 다섯 살 난 큰아들은 남편의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하지만 황해도에 다다랐을 때,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남편과 큰 아들과 잃어버렸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사람들이 다 해주로 가야 되느냐 신막으로 가야 되느냐 그래서 나도 글자는 아니까 그런 소리 하면서 (같이) 보다가 식구하고 말하려고 보니까 싹 없어지지 않았어.“
어린 아들과 단 둘이 남겨진 할머니는 남편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거란 생각에, 서둘러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시신과 부상자들의 울음소리로 뒤덮인 길을 되짚어가던 할머니는 문득 작은 아들이라도 살려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가족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남쪽으로 피난을 온 할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아들을 키우다 같은 실향민이었던 남편과 재혼해 다복한 가정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전쟁통에 잃어버린 큰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새끼가 요만한 거 걸어오다가 어디 가서 어떠한 일을 당했는지, 사는지…. 잘됐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어디 가서 사는지 밤낮으로 울면서 지금까지 살았죠."
북한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경기도 의정부에 터를 잡았습니다.
실향민 부모 밑에서 태어난 두 딸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인터뷰> 노연숙(한신옥 씨 맏 딸) :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북에 있는) 그 따님들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참 사랑도 못 받는 애들인 줄 알았어요. 근데 우리가 엄마․아빠가 되고 나이가 먹다보니까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고요."
오매불망 그리던 큰아들을 만나게 돼 기쁘지만, 또 다시 생이별을 해야 하기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섭니다.
<녹취> "(큰 아들 만날 생각하니까 기분 좋죠?) 죽기 전에 만난다니까 감사하고 기쁘긴 기쁜데. 헤어질 생각부터 자꾸 앞서나가잖아."
그래도 아들을 만나면 긴 세월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어볼 말이 많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네가 진짜 광훈이가? 광훈이가 살았네? 네가 어떻게 살았니. 어디 가서 뭘 먹고 살았니. 어떻게 살았니."
김재명 할아버지는 북한에 어머니와 세 자녀, 그리고 임신 중인 아내를 두고 남으로 피난 왔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북한에 살아있는 사람은 딸 하나와 헤어질 때 뱃속에 있어 얼굴도 보지 못했던 막내아들뿐입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거기 가족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았을 거라는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거든요. 두 사람이 살아있다고 해도 내가 만나보기 전에는 전부 다 헛소리다."
함경남도 풍산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1.4후퇴 때 혼자 집을 나왔습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오래 있을 줄은 생각도 안 했어요. 그저 일주일 있다가 도로 들어갈 줄 알고 쌀 네 줌, 다섯 줌 이렇게 쥐고 나오고."
가족들이 지낼 곳을 알아보려고 잠깐 나온다는 것이 생이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자리 잡고 생활하다보니 이래선 안 되겠다. 고향 가족들이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르고. 이러다가 대가 끊기겠다 싶어서 결혼을 하고…."
부산에서 재혼해 아들 둘과 손자․손녀까지 뒀지만, 피난 때 어머니가 줬던 쌀자루를 지금까지 간직할 정도로 두고 온 가족들을 잊지 못했습니다.
혼자만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죄책감은 사는 내내 할아버지의 가슴을 짓눌러온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아버지가 그 당시에 너희들 버리고 나온 거. 너희들한테 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처지를 네가 이해해달라고 그걸 제일 먼저 말할 겁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선 북측 대상자들이 먼저 2박 3일 동안 남측의 가족을 만나고, 하루 뒤인 다음달 3일부터 남측의 이산가족들이 북한의 가족과 상봉합니다.
이산가족면회소에서 단체상봉이 먼저 이뤄지고, 이어 금강산호텔에서 개별상봉이 이뤄집니다.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로 선정된 사람은 남과 북 각각 100명으로, 나이는 모두 일흔이 넘었습니다.
남측의 경우 최고령자인 97세 김부랑 할머니를 비롯해 90세 이상이 21명, 80세 이상 52명, 70세 이상 27명으로 80대가 제일 많고, 북측은 최고령자인 90세 1명, 80세 이상 30명, 70세 이상 69명으로 대다수가 70대입니다.
북측에서 가족의 생존이 확인된 우리 측 상봉 신청자는 모두 112명이었으나, 일부는 건강이나 가족의 반대 같은 이유로 상봉을 포기했습니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남측에서는 북측 상봉 신청자의 가족 4백여 명과 남측 신청자 본인과 가족 백여 명 등 모두 5백여 명이 금강산으로 떠납니다.
상봉행사가 다시 열리게 됐지만, 헤어진 혈육을 만날 수 있는 우리 측 이산가족은 한 번에 수백 명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8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들은 북한에 있는 혈육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남과 북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거나, 적어도 상봉 정례화만이라도 이뤄져 이산가족들이 마지막 한을 풀 수 있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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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한반도] 이산가족 상봉
-
- 입력 2010-10-30 10:11:58
그동안 중단됐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오늘부터 금강산 면회소에서 1년 만에 다시 열립니다.
헤어진 지 60년 만에 혈육을 만나는 이산가족들은 기대와 설렘으로 들떠있습니다.
올해 91살인 한신옥 할머니는 며칠 뒤면 금강산에서 북한에 있는 큰 아들을 만납니다.
죽기 전에 헤어진 아들을 꼭 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할머니는 아흔이 넘어서야 소원을 이루게 됐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벌써 죽었으면 못 볼 건데 90이나 되도록 살다보니 만나게 돼서 기쁘기도 하고 허튼 게 아닌가 또 이런 생각도 들고…."
할머니는 지난 10년 동안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왔지만 추첨에서 번번이 떨어진데다 최근에는 남북관계 경색으로 상봉행사가 중단돼 생전에 아들을 볼 수 있을까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아이고 내가 누굴 만나는 거야. 내 아들이 일곱 살 돼서 나왔는데 이렇게 크고 늙었나 하고 내가 놀랄 정도라고요."
할머니는 평안남도 순안에서 남편과 양복점을 운영하다, 전쟁이 터지자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할머니는 두 살배기 작은 아들을 업고, 다섯 살 난 큰아들은 남편의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하지만 황해도에 다다랐을 때,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남편과 큰 아들과 잃어버렸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사람들이 다 해주로 가야 되느냐 신막으로 가야 되느냐 그래서 나도 글자는 아니까 그런 소리 하면서 (같이) 보다가 식구하고 말하려고 보니까 싹 없어지지 않았어.“
어린 아들과 단 둘이 남겨진 할머니는 남편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거란 생각에, 서둘러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시신과 부상자들의 울음소리로 뒤덮인 길을 되짚어가던 할머니는 문득 작은 아들이라도 살려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가족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남쪽으로 피난을 온 할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아들을 키우다 같은 실향민이었던 남편과 재혼해 다복한 가정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전쟁통에 잃어버린 큰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새끼가 요만한 거 걸어오다가 어디 가서 어떠한 일을 당했는지, 사는지…. 잘됐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어디 가서 사는지 밤낮으로 울면서 지금까지 살았죠."
북한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경기도 의정부에 터를 잡았습니다.
실향민 부모 밑에서 태어난 두 딸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인터뷰> 노연숙(한신옥 씨 맏 딸) :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북에 있는) 그 따님들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참 사랑도 못 받는 애들인 줄 알았어요. 근데 우리가 엄마․아빠가 되고 나이가 먹다보니까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고요."
오매불망 그리던 큰아들을 만나게 돼 기쁘지만, 또 다시 생이별을 해야 하기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섭니다.
<녹취> "(큰 아들 만날 생각하니까 기분 좋죠?) 죽기 전에 만난다니까 감사하고 기쁘긴 기쁜데. 헤어질 생각부터 자꾸 앞서나가잖아."
그래도 아들을 만나면 긴 세월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어볼 말이 많습니다.
<인터뷰>한신옥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네가 진짜 광훈이가? 광훈이가 살았네? 네가 어떻게 살았니. 어디 가서 뭘 먹고 살았니. 어떻게 살았니."
김재명 할아버지는 북한에 어머니와 세 자녀, 그리고 임신 중인 아내를 두고 남으로 피난 왔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북한에 살아있는 사람은 딸 하나와 헤어질 때 뱃속에 있어 얼굴도 보지 못했던 막내아들뿐입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거기 가족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았을 거라는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거든요. 두 사람이 살아있다고 해도 내가 만나보기 전에는 전부 다 헛소리다."
함경남도 풍산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1.4후퇴 때 혼자 집을 나왔습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오래 있을 줄은 생각도 안 했어요. 그저 일주일 있다가 도로 들어갈 줄 알고 쌀 네 줌, 다섯 줌 이렇게 쥐고 나오고."
가족들이 지낼 곳을 알아보려고 잠깐 나온다는 것이 생이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자리 잡고 생활하다보니 이래선 안 되겠다. 고향 가족들이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르고. 이러다가 대가 끊기겠다 싶어서 결혼을 하고…."
부산에서 재혼해 아들 둘과 손자․손녀까지 뒀지만, 피난 때 어머니가 줬던 쌀자루를 지금까지 간직할 정도로 두고 온 가족들을 잊지 못했습니다.
혼자만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죄책감은 사는 내내 할아버지의 가슴을 짓눌러온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인터뷰> 김재명 (91세/이산가족 상봉자) : "아버지가 그 당시에 너희들 버리고 나온 거. 너희들한테 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처지를 네가 이해해달라고 그걸 제일 먼저 말할 겁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선 북측 대상자들이 먼저 2박 3일 동안 남측의 가족을 만나고, 하루 뒤인 다음달 3일부터 남측의 이산가족들이 북한의 가족과 상봉합니다.
이산가족면회소에서 단체상봉이 먼저 이뤄지고, 이어 금강산호텔에서 개별상봉이 이뤄집니다.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로 선정된 사람은 남과 북 각각 100명으로, 나이는 모두 일흔이 넘었습니다.
남측의 경우 최고령자인 97세 김부랑 할머니를 비롯해 90세 이상이 21명, 80세 이상 52명, 70세 이상 27명으로 80대가 제일 많고, 북측은 최고령자인 90세 1명, 80세 이상 30명, 70세 이상 69명으로 대다수가 70대입니다.
북측에서 가족의 생존이 확인된 우리 측 상봉 신청자는 모두 112명이었으나, 일부는 건강이나 가족의 반대 같은 이유로 상봉을 포기했습니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남측에서는 북측 상봉 신청자의 가족 4백여 명과 남측 신청자 본인과 가족 백여 명 등 모두 5백여 명이 금강산으로 떠납니다.
상봉행사가 다시 열리게 됐지만, 헤어진 혈육을 만날 수 있는 우리 측 이산가족은 한 번에 수백 명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8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들은 북한에 있는 혈육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령의 이산가족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남과 북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거나, 적어도 상봉 정례화만이라도 이뤄져 이산가족들이 마지막 한을 풀 수 있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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