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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한반도] 남북관계의 窓, 남북축구
입력 2010.11.13 (09:23) 수정 2010.11.13 (11:41) 남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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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지난 8일, 우리 축구 대표팀은 북한을 상대로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예선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경기장 분위기는 최근의 남북관계를 보여주듯 냉랭했는데요.



남북관계를 알려면 남북 축구를 보라는 말처럼 남북 축구는 우리 현대사에서 언제나 남북관계를 비춰주는 창이었습니다.



<리포트>



우리 대표팀은 아시안게임 첫 경기에서 만난 북한팀을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전반 36분. 골키퍼의 실수를 북한의 주장 리광천은 놓치지 않고 골로 연결시켰습니다.



이후 북한 선수의 퇴장으로 수적인 우위를 점한 대표팀은 끝까지 북한의 골문을 두드렸지만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남북한 형제간의 대결이었지만 그라운드나 관객석의 분위기는 여느 경기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남한의 관객들은 태극기를 들었고, 북한의 관객들은 인공기를 들고 각각 응원전을 펼쳤습니다.



한반도기나 남북한 공동응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도 짧게 악수만 하고 경기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인터뷰> 홍명보(아시안게임 축구 대표팀 감독) : "아시안게임 첫 경기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감정은 없었습니다."



남북 축구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시대 경평축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9년, 경성중학이 주축이 된 경성팀과 숭실학교가 주축이 된 평양팀이 서울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첫 경기를 가졌습니다.



이후 경평축구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21차례 경기가 열렸습니다.



지역대항전 성격을 띄었던 경평축구는 관객이 2만 명 이상 몰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습니다.



<인터뷰> 조영증(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 : "축구를 통해서 남북한이 합쳐서 일제를 일본을 압도해야겠다는 그런 어떤 원동력이 아닌가…. "



6.25 전쟁 이후 남북은 치열한 체제 경쟁에 돌입했고 남북 축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1970년 때까지는 국제경기에서조차 남북이 맞붙는 것을 꺼릴 정도였습니다.



<인터뷰> 조영증(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 ) : "북한 축구가 상당히 한국 축구보다 셌을 때에요. 져서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보다는 되도록 피하는 경향이 많았었죠."



분단 이후 남북 최초의 국가대표 경기는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이었습니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대에 첫 남북대결인 만큼 선수들은 극도로 긴장한 채 경기에 나섰습니다.



<인터뷰>이영무(1978 아시안게임 출전/안산 할렐루야 축구단 단장) : "반드시 이겨야 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긴장이 돼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높은 분들이 오셔서 잘 싸우라고 격려를 많이 해주니까 오히려 그것도 부담이 됐던 것 같아요."



남북 모두 ‘절대 질 수 없는’ 경기였던 만큼 격렬한 몸싸움과 신경전이 펼쳐졌습니다.



<인터뷰>이영무(1978 방콕 아시안게임 출전/안산 할렐루야 축구단 단장) : "상대 수비가 거칠게 좀 들어오기도 하고. 파울도 가장 많이 있었던 경기였기 때문에…."



전후반 90분 대결에서 남과 북은 득점 없이 비겨 공동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치열한 신경전은 시상대에서까지 이어졌습니다.



<인터뷰>이영무(1978 방콕 아시안게임 출전/안산 할렐루야 축구단 단장) : "김호곤 주장하고 상대팀 주장하고 시상대에 오르게 됐는데 같이 이렇게 서서 있어야 되는데 북한 주장이 그냥 우리 김호곤 선배님을 밀어서 떨어지게 됐어요."



2년 뒤인 1980년, 남북은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다시 맞붙었습니다.



<인터뷰> 조영증(1980 쿠웨이트 아시안컵 출전/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 : "운동장 전체가 우리 근로자로 꽉 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 근로자들의 구호 자체가 상당히 투쟁적이었어요. 남북한 관계가 거의 그 운동장에 반영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한국팀은 전반전에 먼저 한 골을 내줬지만, 후반 10분을 남겨놓고 동점골과 역전골을 연이어 터트렸습니다.



<녹취> "2대 1로 역전시킨 가운데 북한팀을 당당히 눌러 이겼습니다!"



이렇게 6.25 전쟁 이후 40여 년 동안 남북의 축구경기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인터뷰> 조영증(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 : "북한한테 지면 상당히 여러 가지 선수생활이나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는 게 우리도 마찬가지고, 북한도 마찬가지였던 시절이 아닌가…."



남북관계는 1990년대 들어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해빙기를 맞았고 남북 축구에서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습니다.



1990년에 열린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북측의 제의로 남북이 첫 공동응원을 펼쳤습니다.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남북 통일축구경기가 열렸습니다.



평양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북한팀이, 서울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남한이 승리했지만,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녹취> 당시 북한관객 : "이것은 승부를 가르는 경기보다도 통일을 위한 북남 축구 선수들의 통일축구 경기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이겨도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듬해 포르투갈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는 남북이 ‘코리아’ 단일팀을 구성해 8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2000년대 들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는 등 한반도에 유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남북 축구 교류는 절정에 이릅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2002년에는 12년 동안 중단됐던 남북통일축구가 다시 열렸습니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지만,남과 북의 관중들은 한반도기를 손에 들고 조국통일을 목청껏 외쳤습니다.



<녹취> "남북이 같이 했다는 것 그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고 통일로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남북관계는 2008년 북한의 2차 핵실험과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등으로 다시 경색 국면을 맞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열렸던 남북의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전.



선수들의 얼굴은 다시 굳어졌고, 관람석의 한반도기도 사라졌습니다.



올 들어 천안함 사태로 한반도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자 정치권 일각에서 남북관계를 전환하는 의미에서 경평축구를 재개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다음 달 2일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2022년 월드컵 개최지를 결정하는 집행위원회가 열립니다.



미국 카타르 호주 일본 등과 개최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나라는 남북공동개최 가능성을 열어놓고 유치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남북이 월드컵을 공동개최한다면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지난 8일 방한한 제프 블래터 FIFA 회장 역시 남북 공동개최를 지지했습니다.



<인터뷰> 블래터(FIFA 회장) : "축구는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입니다. 한반도에서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을 축구가 한다면 모두가 행복하겠죠. 월드컵과 축구가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남북에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남북관계를 보여주는 창이자, 화합과 소통의 장이었습니다.



블래터 FIFA 회장의 말처럼 축구가 남북을 연결하는 매개가 돼서 한반도 평화, 더 나아가 통일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 [이슈&한반도] 남북관계의 窓, 남북축구
    • 입력 2010-11-13 09:23:09
    • 수정2010-11-13 11:41:41
    남북의 창
<앵커 멘트>



지난 8일, 우리 축구 대표팀은 북한을 상대로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예선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경기장 분위기는 최근의 남북관계를 보여주듯 냉랭했는데요.



남북관계를 알려면 남북 축구를 보라는 말처럼 남북 축구는 우리 현대사에서 언제나 남북관계를 비춰주는 창이었습니다.



<리포트>



우리 대표팀은 아시안게임 첫 경기에서 만난 북한팀을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전반 36분. 골키퍼의 실수를 북한의 주장 리광천은 놓치지 않고 골로 연결시켰습니다.



이후 북한 선수의 퇴장으로 수적인 우위를 점한 대표팀은 끝까지 북한의 골문을 두드렸지만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남북한 형제간의 대결이었지만 그라운드나 관객석의 분위기는 여느 경기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남한의 관객들은 태극기를 들었고, 북한의 관객들은 인공기를 들고 각각 응원전을 펼쳤습니다.



한반도기나 남북한 공동응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도 짧게 악수만 하고 경기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인터뷰> 홍명보(아시안게임 축구 대표팀 감독) : "아시안게임 첫 경기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감정은 없었습니다."



남북 축구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시대 경평축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9년, 경성중학이 주축이 된 경성팀과 숭실학교가 주축이 된 평양팀이 서울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첫 경기를 가졌습니다.



이후 경평축구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21차례 경기가 열렸습니다.



지역대항전 성격을 띄었던 경평축구는 관객이 2만 명 이상 몰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습니다.



<인터뷰> 조영증(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 : "축구를 통해서 남북한이 합쳐서 일제를 일본을 압도해야겠다는 그런 어떤 원동력이 아닌가…. "



6.25 전쟁 이후 남북은 치열한 체제 경쟁에 돌입했고 남북 축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1970년 때까지는 국제경기에서조차 남북이 맞붙는 것을 꺼릴 정도였습니다.



<인터뷰> 조영증(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 ) : "북한 축구가 상당히 한국 축구보다 셌을 때에요. 져서 국민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보다는 되도록 피하는 경향이 많았었죠."



분단 이후 남북 최초의 국가대표 경기는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이었습니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대에 첫 남북대결인 만큼 선수들은 극도로 긴장한 채 경기에 나섰습니다.



<인터뷰>이영무(1978 아시안게임 출전/안산 할렐루야 축구단 단장) : "반드시 이겨야 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긴장이 돼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높은 분들이 오셔서 잘 싸우라고 격려를 많이 해주니까 오히려 그것도 부담이 됐던 것 같아요."



남북 모두 ‘절대 질 수 없는’ 경기였던 만큼 격렬한 몸싸움과 신경전이 펼쳐졌습니다.



<인터뷰>이영무(1978 방콕 아시안게임 출전/안산 할렐루야 축구단 단장) : "상대 수비가 거칠게 좀 들어오기도 하고. 파울도 가장 많이 있었던 경기였기 때문에…."



전후반 90분 대결에서 남과 북은 득점 없이 비겨 공동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치열한 신경전은 시상대에서까지 이어졌습니다.



<인터뷰>이영무(1978 방콕 아시안게임 출전/안산 할렐루야 축구단 단장) : "김호곤 주장하고 상대팀 주장하고 시상대에 오르게 됐는데 같이 이렇게 서서 있어야 되는데 북한 주장이 그냥 우리 김호곤 선배님을 밀어서 떨어지게 됐어요."



2년 뒤인 1980년, 남북은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다시 맞붙었습니다.



<인터뷰> 조영증(1980 쿠웨이트 아시안컵 출전/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 : "운동장 전체가 우리 근로자로 꽉 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 근로자들의 구호 자체가 상당히 투쟁적이었어요. 남북한 관계가 거의 그 운동장에 반영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한국팀은 전반전에 먼저 한 골을 내줬지만, 후반 10분을 남겨놓고 동점골과 역전골을 연이어 터트렸습니다.



<녹취> "2대 1로 역전시킨 가운데 북한팀을 당당히 눌러 이겼습니다!"



이렇게 6.25 전쟁 이후 40여 년 동안 남북의 축구경기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인터뷰> 조영증(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 : "북한한테 지면 상당히 여러 가지 선수생활이나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는 게 우리도 마찬가지고, 북한도 마찬가지였던 시절이 아닌가…."



남북관계는 1990년대 들어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해빙기를 맞았고 남북 축구에서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습니다.



1990년에 열린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북측의 제의로 남북이 첫 공동응원을 펼쳤습니다.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남북 통일축구경기가 열렸습니다.



평양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북한팀이, 서울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남한이 승리했지만,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녹취> 당시 북한관객 : "이것은 승부를 가르는 경기보다도 통일을 위한 북남 축구 선수들의 통일축구 경기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이겨도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듬해 포르투갈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는 남북이 ‘코리아’ 단일팀을 구성해 8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2000년대 들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는 등 한반도에 유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남북 축구 교류는 절정에 이릅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2002년에는 12년 동안 중단됐던 남북통일축구가 다시 열렸습니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지만,남과 북의 관중들은 한반도기를 손에 들고 조국통일을 목청껏 외쳤습니다.



<녹취> "남북이 같이 했다는 것 그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고 통일로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남북관계는 2008년 북한의 2차 핵실험과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등으로 다시 경색 국면을 맞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열렸던 남북의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전.



선수들의 얼굴은 다시 굳어졌고, 관람석의 한반도기도 사라졌습니다.



올 들어 천안함 사태로 한반도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자 정치권 일각에서 남북관계를 전환하는 의미에서 경평축구를 재개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다음 달 2일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2022년 월드컵 개최지를 결정하는 집행위원회가 열립니다.



미국 카타르 호주 일본 등과 개최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나라는 남북공동개최 가능성을 열어놓고 유치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남북이 월드컵을 공동개최한다면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지난 8일 방한한 제프 블래터 FIFA 회장 역시 남북 공동개최를 지지했습니다.



<인터뷰> 블래터(FIFA 회장) : "축구는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입니다. 한반도에서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을 축구가 한다면 모두가 행복하겠죠. 월드컵과 축구가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남북에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남북관계를 보여주는 창이자, 화합과 소통의 장이었습니다.



블래터 FIFA 회장의 말처럼 축구가 남북을 연결하는 매개가 돼서 한반도 평화, 더 나아가 통일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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