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탈북 화가 송벽
입력 2011.01.29 (10:36)
수정 2011.02.14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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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탈북화가 송벽 씨가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인사동의 갤러리인데요.
‘영원한 자유’를 주제로 한 작품 30여점이 전시돼있습니다.
북한의 실상과 송벽 씨가 꿈꾸는 북한의 미래를 그린 작품들입니다.
전시회가 열리기 전날.
송벽 씨는 생애 첫 개인전 준비로 분주합니다.
지난 3년 동안 준비해왔던 전시회인 만큼 작품 배치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쏟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가고 작품 자체 하나하나가 과거와 현재 생활상을 지금 작품화해놨거든요.”
지난 2002년에 남한으로 온 올해 42살의 송벽 씨, 북한 황해도에 살던 송 씨는 탈북 하기 전에 7년 동안 선전화를 그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데 재주가 있던 송 씨는 당국의 눈에 띄어 선전일꾼으로 발탁됐습니다.
김정일을 찬양하거나 체제를 선전하는 그림이 매일 그에게 할당됐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으니까 이게 진정한 이것이 행복이구나. 우리 사회가 제일 좋고 조선노동당이 제일 좋고 수령님, 장군님 덕분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이런 것만 마음에 생기고, 이렇게 포스터 그림 그려도 그게 진짜 긍지 높은 거예요.”
남한에서 찾은 자유는 잠들었던 그의 예술혼을 깨웠습니다.
북에서는 고정된 것만 그것만 도안대로 그렸는데, 여기 와서는 흰 종이에 캔버스에 내 마음을 그리고 있다는 게 그게 기분이 진짜 그림하고 나하고 연애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상가들 틈에 자리 잡고 있는 송벽 씨의 작업실.
그는 이곳에서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염원을 화폭에 담습니다.
송벽 씨가 그림으로 북한의 실상을 알리려는 것은 비참했던 자신의 삶 때문입니다.
그의 가족들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90년대 후반의 극심한 식량난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이러다 가족이 다 굶어죽겠다. 마지막 결정내린 것이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서 두만강 넘어서 중국 친척을 찾아가지고 쌀을 좀 구해오자.”
2000년 여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중국을 향해 무작정 떠났고 보름 만에 두만강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장마로 강물이 크게 불어난 사실을 몰랐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녹취> "아차 하는 생각 들면서 딱 돌아보니 물살에 휘말려가는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중국 쪽에 바라보니 중국엔 사람이 없고, 북쪽에 바라보니 북한의 경비대들이 손전등을 가지고 비추고 내려오더라고요.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사람 빠졌으니 건지자."
하지만 북한의 국경경비대원들은 아버지를 구해주기는커녕, 탈북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송벽 씨를 그 자리에서 체포해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수용소에 갇힌 송벽 씨는 화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손가락마저 잃게 됩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일하는데 추워가지고 손은 막 부어오르지. 손가락 자체가 부어올라서 움직이질 못해요. 거기에 땔나무를 구하다가 가시가 박혔어요. 근데 그 가시 박힌 게 곪아 들어간 거예요. 소독약만 바르고 치료했으면 낫을 걸 썩어 들어가더라고요.”
결국 송 씨는 오른쪽 검지 두 마디를 잘라냈고, 북한 당국은 반년 만에 송씨를 병보석으로 풀어줬습니다.
풀려난 그의 머릿속에는 북한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집을 찾아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인사를 한 뒤 홀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이번 개인전은 나 하나만의 개인전이 아니라, 우리 관객분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개인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에선 북한의 실상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구성했습니다.
탈북 후 북에 남겨진 여동생과 주고받았던 애끊는 사연의 편지들도 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녹취> "철사는 분단된 우리 장벽을 상징하고요. 편지들은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마음, 형제를 그리는 마음 그 마음을 담아서."
송벽 씨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나비는 자유를 상징합니다.
<녹취> "나비는 이 철책선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왔다 갔다 하고. 근데 인간이라는 자체는 왜 갈라져가지고 마음대로 못가고 편지글도 못하고 이렇게 됐는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에 오히려 안도하는 대중에게 작가는 자신이 존재했던 그곳, 북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인터뷰> 김영순(경기 화성시 동탄동) : “보다보니까 고통 속에서 많이 살아온 듯한, 저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자유라든가 그런 갈망을 많이 하는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한진만(홍익대 동양화과 교수) : "본인이 얻은 자유에 대한 갈망, 목숨을 걸고까지 이렇게 왔을 때에는 대단한 용기가 있지 않았나 고통스러운 걸 작품에 이렇게 담으려고 하는 흔적들이 보이기 때문에 앞으로 좀 더 많은, 현대 속에서의 한국화의 가능성이라고 할까요. 또 다른 면을 제시해주는 그러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선전화를 그리다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화가로 극적인 변신을 한 송벽 씨.
그는 작품을 통해 영원한 자유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며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하는데요.
그의 바람처럼 북한 주민들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해봅니다.
‘영원한 자유’를 주제로 한 작품 30여점이 전시돼있습니다.
북한의 실상과 송벽 씨가 꿈꾸는 북한의 미래를 그린 작품들입니다.
전시회가 열리기 전날.
송벽 씨는 생애 첫 개인전 준비로 분주합니다.
지난 3년 동안 준비해왔던 전시회인 만큼 작품 배치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쏟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가고 작품 자체 하나하나가 과거와 현재 생활상을 지금 작품화해놨거든요.”
지난 2002년에 남한으로 온 올해 42살의 송벽 씨, 북한 황해도에 살던 송 씨는 탈북 하기 전에 7년 동안 선전화를 그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데 재주가 있던 송 씨는 당국의 눈에 띄어 선전일꾼으로 발탁됐습니다.
김정일을 찬양하거나 체제를 선전하는 그림이 매일 그에게 할당됐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으니까 이게 진정한 이것이 행복이구나. 우리 사회가 제일 좋고 조선노동당이 제일 좋고 수령님, 장군님 덕분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이런 것만 마음에 생기고, 이렇게 포스터 그림 그려도 그게 진짜 긍지 높은 거예요.”
남한에서 찾은 자유는 잠들었던 그의 예술혼을 깨웠습니다.
북에서는 고정된 것만 그것만 도안대로 그렸는데, 여기 와서는 흰 종이에 캔버스에 내 마음을 그리고 있다는 게 그게 기분이 진짜 그림하고 나하고 연애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상가들 틈에 자리 잡고 있는 송벽 씨의 작업실.
그는 이곳에서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염원을 화폭에 담습니다.
송벽 씨가 그림으로 북한의 실상을 알리려는 것은 비참했던 자신의 삶 때문입니다.
그의 가족들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90년대 후반의 극심한 식량난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이러다 가족이 다 굶어죽겠다. 마지막 결정내린 것이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서 두만강 넘어서 중국 친척을 찾아가지고 쌀을 좀 구해오자.”
2000년 여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중국을 향해 무작정 떠났고 보름 만에 두만강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장마로 강물이 크게 불어난 사실을 몰랐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녹취> "아차 하는 생각 들면서 딱 돌아보니 물살에 휘말려가는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중국 쪽에 바라보니 중국엔 사람이 없고, 북쪽에 바라보니 북한의 경비대들이 손전등을 가지고 비추고 내려오더라고요.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사람 빠졌으니 건지자."
하지만 북한의 국경경비대원들은 아버지를 구해주기는커녕, 탈북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송벽 씨를 그 자리에서 체포해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수용소에 갇힌 송벽 씨는 화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손가락마저 잃게 됩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일하는데 추워가지고 손은 막 부어오르지. 손가락 자체가 부어올라서 움직이질 못해요. 거기에 땔나무를 구하다가 가시가 박혔어요. 근데 그 가시 박힌 게 곪아 들어간 거예요. 소독약만 바르고 치료했으면 낫을 걸 썩어 들어가더라고요.”
결국 송 씨는 오른쪽 검지 두 마디를 잘라냈고, 북한 당국은 반년 만에 송씨를 병보석으로 풀어줬습니다.
풀려난 그의 머릿속에는 북한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집을 찾아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인사를 한 뒤 홀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이번 개인전은 나 하나만의 개인전이 아니라, 우리 관객분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개인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에선 북한의 실상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구성했습니다.
탈북 후 북에 남겨진 여동생과 주고받았던 애끊는 사연의 편지들도 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녹취> "철사는 분단된 우리 장벽을 상징하고요. 편지들은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마음, 형제를 그리는 마음 그 마음을 담아서."
송벽 씨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나비는 자유를 상징합니다.
<녹취> "나비는 이 철책선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왔다 갔다 하고. 근데 인간이라는 자체는 왜 갈라져가지고 마음대로 못가고 편지글도 못하고 이렇게 됐는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에 오히려 안도하는 대중에게 작가는 자신이 존재했던 그곳, 북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인터뷰> 김영순(경기 화성시 동탄동) : “보다보니까 고통 속에서 많이 살아온 듯한, 저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자유라든가 그런 갈망을 많이 하는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한진만(홍익대 동양화과 교수) : "본인이 얻은 자유에 대한 갈망, 목숨을 걸고까지 이렇게 왔을 때에는 대단한 용기가 있지 않았나 고통스러운 걸 작품에 이렇게 담으려고 하는 흔적들이 보이기 때문에 앞으로 좀 더 많은, 현대 속에서의 한국화의 가능성이라고 할까요. 또 다른 면을 제시해주는 그러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선전화를 그리다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화가로 극적인 변신을 한 송벽 씨.
그는 작품을 통해 영원한 자유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며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하는데요.
그의 바람처럼 북한 주민들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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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한반도] 탈북 화가 송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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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1-01-29 10:36:44
- 수정2011-02-14 19:39:07
이곳은 탈북화가 송벽 씨가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인사동의 갤러리인데요.
‘영원한 자유’를 주제로 한 작품 30여점이 전시돼있습니다.
북한의 실상과 송벽 씨가 꿈꾸는 북한의 미래를 그린 작품들입니다.
전시회가 열리기 전날.
송벽 씨는 생애 첫 개인전 준비로 분주합니다.
지난 3년 동안 준비해왔던 전시회인 만큼 작품 배치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쏟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가고 작품 자체 하나하나가 과거와 현재 생활상을 지금 작품화해놨거든요.”
지난 2002년에 남한으로 온 올해 42살의 송벽 씨, 북한 황해도에 살던 송 씨는 탈북 하기 전에 7년 동안 선전화를 그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데 재주가 있던 송 씨는 당국의 눈에 띄어 선전일꾼으로 발탁됐습니다.
김정일을 찬양하거나 체제를 선전하는 그림이 매일 그에게 할당됐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으니까 이게 진정한 이것이 행복이구나. 우리 사회가 제일 좋고 조선노동당이 제일 좋고 수령님, 장군님 덕분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이런 것만 마음에 생기고, 이렇게 포스터 그림 그려도 그게 진짜 긍지 높은 거예요.”
남한에서 찾은 자유는 잠들었던 그의 예술혼을 깨웠습니다.
북에서는 고정된 것만 그것만 도안대로 그렸는데, 여기 와서는 흰 종이에 캔버스에 내 마음을 그리고 있다는 게 그게 기분이 진짜 그림하고 나하고 연애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상가들 틈에 자리 잡고 있는 송벽 씨의 작업실.
그는 이곳에서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염원을 화폭에 담습니다.
송벽 씨가 그림으로 북한의 실상을 알리려는 것은 비참했던 자신의 삶 때문입니다.
그의 가족들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90년대 후반의 극심한 식량난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이러다 가족이 다 굶어죽겠다. 마지막 결정내린 것이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서 두만강 넘어서 중국 친척을 찾아가지고 쌀을 좀 구해오자.”
2000년 여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중국을 향해 무작정 떠났고 보름 만에 두만강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장마로 강물이 크게 불어난 사실을 몰랐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녹취> "아차 하는 생각 들면서 딱 돌아보니 물살에 휘말려가는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중국 쪽에 바라보니 중국엔 사람이 없고, 북쪽에 바라보니 북한의 경비대들이 손전등을 가지고 비추고 내려오더라고요.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사람 빠졌으니 건지자."
하지만 북한의 국경경비대원들은 아버지를 구해주기는커녕, 탈북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송벽 씨를 그 자리에서 체포해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수용소에 갇힌 송벽 씨는 화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손가락마저 잃게 됩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일하는데 추워가지고 손은 막 부어오르지. 손가락 자체가 부어올라서 움직이질 못해요. 거기에 땔나무를 구하다가 가시가 박혔어요. 근데 그 가시 박힌 게 곪아 들어간 거예요. 소독약만 바르고 치료했으면 낫을 걸 썩어 들어가더라고요.”
결국 송 씨는 오른쪽 검지 두 마디를 잘라냈고, 북한 당국은 반년 만에 송씨를 병보석으로 풀어줬습니다.
풀려난 그의 머릿속에는 북한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집을 찾아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인사를 한 뒤 홀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인터뷰> 송벽(탈북화가) : “이번 개인전은 나 하나만의 개인전이 아니라, 우리 관객분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개인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에선 북한의 실상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구성했습니다.
탈북 후 북에 남겨진 여동생과 주고받았던 애끊는 사연의 편지들도 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녹취> "철사는 분단된 우리 장벽을 상징하고요. 편지들은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마음, 형제를 그리는 마음 그 마음을 담아서."
송벽 씨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나비는 자유를 상징합니다.
<녹취> "나비는 이 철책선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왔다 갔다 하고. 근데 인간이라는 자체는 왜 갈라져가지고 마음대로 못가고 편지글도 못하고 이렇게 됐는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에 오히려 안도하는 대중에게 작가는 자신이 존재했던 그곳, 북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인터뷰> 김영순(경기 화성시 동탄동) : “보다보니까 고통 속에서 많이 살아온 듯한, 저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자유라든가 그런 갈망을 많이 하는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한진만(홍익대 동양화과 교수) : "본인이 얻은 자유에 대한 갈망, 목숨을 걸고까지 이렇게 왔을 때에는 대단한 용기가 있지 않았나 고통스러운 걸 작품에 이렇게 담으려고 하는 흔적들이 보이기 때문에 앞으로 좀 더 많은, 현대 속에서의 한국화의 가능성이라고 할까요. 또 다른 면을 제시해주는 그러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선전화를 그리다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화가로 극적인 변신을 한 송벽 씨.
그는 작품을 통해 영원한 자유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며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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