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해보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최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장손으로 추정되는 김한솔의 사진이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됐는데요.
김한솔은 아버지 김정남이 권력투쟁에서 밀려나면서 함께 해외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복 동생인 김정은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해나가면서 김정남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장남인 김정남이 왜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는지 분석하고, 앞으로 김정남의 운명도 전망해봅니다.
<리포트>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쓴 사진.
파티장에서 여자친구와 자세를 취한 사진.
김정일 위원장의 맏손자로 추정되는 김한솔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들이다.
이 계정은 김한솔이 보스니아 국제학교 입학을 앞둔 지난 달 말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보스니아 언론이 김한솔의 입학예정 사실을 보도한데 이어, 김한솔이 이 학교 페이스북 계정에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이 곧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올해 16살로 알려진 김한솔은 아버지 김정남, 할아버지 김정일과 닮은 모습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김한솔은 다른 나라 친구들과 영어로 스스럼 없이 대화하는 것은 물론, 여자친구에게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현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김한솔의 페이스북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아버지 김정남으로 추정되는 '김철'과 안부를 주고받은 글이다.
김철의 페이스북에는 김정남의 사진이 여러 장 올려져 있었다.
한국 언론이 이런 사실을 집중 보도하자 두 사람의 계정은 곧 폐쇄됐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과거에 가명을 몇 개 쓰기는 하는데 페이스북 이나 IT에서는 주로 김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3051특히 아들 김한솔군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나왔기 때문에 제 3의 인물을 거기서 거론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정황상으로 김철은 김정남이 아니겠느냐 라고 관측이 됩니다."
김정남이 국제사회에 처음 공개된 것은 지난 2001년이다.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도미니카 공화국 위조여권으로 입국하려다 체포된 것이다.
여성 2명과 남자아이 1명을 동행한 그는 일본 당국 조사에서 도쿄 디즈니랜드 관광을 왔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김정남 일행을 베이징으로 추방했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들은 당시 김정남 관련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김정남이 김정일 위원장의 맏아들이라는 점에서 후계자 여부와 일본 방문 목적에 초점이 맞춰졌다.
동행인물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당시 김정남이 일본 디즈니랜드에 가기 위해서 데리고 왔던 아들의 사진을 보고서 김정남의 이모인 성애랑은 그 아이가 김정남의 어릴 때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라고 증언한바 있습니다.그 아이가 계속 성장했다면 지금 김한솔의 나이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아이가 성장해서 최근에 김한솔이란 이름으로 페이스 북에 등장을 한 것으로 그렇게 판단됩니다."
김정남은 1971년 김정일과 영화배우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한 출신인 성혜림은 1948년 때 월북해 북한 최고의 여배우가 됐다.
그녀는 월북 작가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결혼한 상태였지만 김정일이 강제로 이혼시킨 뒤 1970년부터 비밀동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 주석은 두 사람의 관계는 물론 김정남도 인정하지 않았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이 김일성의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김정남은 김정일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서장자처럼 성장을 했습니다."
김정일은 1974년,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 타자수인 김영숙과 결혼했다.
첫 번째 공식결혼으로 이 사이에서 딸 설송이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른 형식적인 부부관계였다.
김정일은 2년 뒤인 1976년 재일교포의 딸이자 무용수인 고영희와 동거를 시작했다.
고영희는 1981년 정철, 1983년 정은, 1989년 딸 여정을 낳았다.
성혜림이 동거녀, 김영숙이 형식적인 부인이었다면 고영희는 2004년 암으로 숨질 때까지 28년 동안 북한의 실질적인 퍼스트 레이디였다.
고영희는 1994년 시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숨지자 국모 반열에까지 올랐다.
김정남은 어머니 성혜림이 김정일의 부인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야했다.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데 이어 고영희와 동거를 하자 성혜림은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성혜림이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에 자주 머물면서 김정남은 외할머니 김원주와 이모 성혜랑 손에서 컸다.
성혜랑은 자서전에서 서자로서 김정남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상세히 묘사했다.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단 한명의 친구도 없이 기형적으로 키워졌다“고 밝혔다.
다만 김정일은 맏아들 정남을 끔찍이 사랑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9살이던 1980년 북한을 떠나 스위스와 러시아에서 10년 가깝게 유학생활을 했다.
그사이 고영희는 정철과 정은, 여정을 차례로 낳았다.
김정남은 1980년대 후반 북한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설자리는 없었다.
이에 대해 이모 성혜랑은 1989년, 김정일의 김정남에 대한 사랑은 고영희의 자식들에게로 옮겨가 김정남은 버리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증언했다.
김정남은 북한으로 돌아온 이후 고영희의 견제로 극도로 통제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혜랑은 이런 이유로 자서전에서 탈북한 뒤 남한에서 총에 맞아 숨진 아들 이한영보다 조카 김정남이 더 불쌍하다고까지 말했다.
김정남은 장남이지만 서자인데다 어머니인 성혜림의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했다.
반면 김정철과 김정은은 적자인데다 퍼스트레이디였던 고영희의 그늘 아래서 후계자로 성장했다.
김정남의 북한 내 위상은 1989년부터 12년 동안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활동했던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김정남의 존재조차 몰랐으며 북한 고위층이 참석하는 연회에 참석한 것을 단 한차례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장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일의 숨겨진 아들로 태어나서 김정일이 김정남에게 아무런 직책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 체류한다 하더라도 김정남이 할 수 있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과거 2004년까지 고영희가 살아있을 때에는 고영희 세력이 김정남을 철저하게 견제를 했고 고영희 사망 이후에는 김정철과 김정은 세력이 김정남을 견제 하고 있기 때문에 김정남은 해외 유랑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김정남이 해외생활을 시작한 건 일본에서 나리타공항에서 추방된 2001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때만 해도 원하면 언제든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된 이후에는 발조차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이 북한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도 이동이 자유롭지 않고 여러 가지 감시를 받기 때문에 김정남으로서는 해외를 떠돌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김정남은 평양에 계속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과 마카오, 싱가포르 등을 왔다갔다하는 걸로 그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정남은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지난 2009년 4월에는 마카오에서 일본 TBS와 인터뷰에서 후계자 여부를 묻는 질문에 ‘후계자가 이런 캐주얼 차림을 하고 있겠느냐‘ 말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일본 아사히 tv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3대 세습에 반대하지만 동생이 필요하다면 해외에서 도울 것' 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에는 일본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이 3대 세습에 반대했지만, 국가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김정남의 언론 인터뷰는 치밀한 계산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분석된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한 위해를 하지 말라는 하나의 메시지죠. 왜냐하면 공개적으로 그렇게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만약 위해가 가한다면 그것은 평양당국의 소행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다라는 측면이 하나고, 두 번째는 자신 말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김정은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해서 이것은 바르지 않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라는 메시지죠.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고 또 김정은에 대한 무언의 자신의 요구죠."
권력의 세계는 냉혹하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지명되자 삼촌 김영주와 의붓 어머니 김성애를 곁가지로 분류해 권력에서 밀어냈고, 이복동생 김평일은 해외로 쫓았다.
김평일은 현재 폴란드 대사로, 20년째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김평일이 공식 직책을 부여받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김평일과 김정남은 매우 비슷한 처지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김정은이 권력을 내년에 공식화하면서 세습이 확정되면 김정남의 위상이나 입지는 더욱더 좁아져서 평양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결국은 중국 땅에서 계속 사는 것이 과거에 김평일의 운명을 볼 때 짐작해볼 수 있는 하나의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남은 현재 중국 베이징과 마카오에서 여러 채의 고급 주택을 소유한 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직업이 없는 그가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 덕분이다.
<인터뷰> 장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은 김정일의 지시하에 그의 고모와 고모부에 김경희와 장성택이 보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남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조달하는 것도 장성택이 맡고 있고 과거 김정남의 교육도 장성택이 맡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김정남을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국가안전보위부를 관장하는 장성택이 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김정남을 비록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진 못했지만 그에 대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북한은 최고 권력자 가계나 사생활의 노출을 극도로 꺼려왔다.
따라서 김정남의 돌출행동이나 이번과 같은 김한솔의 페이스북 노출은 김정일 위원장과 김정은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김정남과 김한솔의 공개활동은 크게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궁극적으로 보호막인 김정일 위원장이 숨지게 되면 김정남의 신변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장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은 김정일의 아들로서 계속 해외에서 특권적인 생활을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만약 김정일이 사라진다고 했을 때 김정남의 신변은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김정남의 고모부인 장성택까지 사망한다고 하면 김정남에 대한 보호막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해보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최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장손으로 추정되는 김한솔의 사진이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됐는데요.
김한솔은 아버지 김정남이 권력투쟁에서 밀려나면서 함께 해외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복 동생인 김정은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해나가면서 김정남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장남인 김정남이 왜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는지 분석하고, 앞으로 김정남의 운명도 전망해봅니다.
<리포트>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쓴 사진.
파티장에서 여자친구와 자세를 취한 사진.
김정일 위원장의 맏손자로 추정되는 김한솔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들이다.
이 계정은 김한솔이 보스니아 국제학교 입학을 앞둔 지난 달 말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보스니아 언론이 김한솔의 입학예정 사실을 보도한데 이어, 김한솔이 이 학교 페이스북 계정에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이 곧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올해 16살로 알려진 김한솔은 아버지 김정남, 할아버지 김정일과 닮은 모습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김한솔은 다른 나라 친구들과 영어로 스스럼 없이 대화하는 것은 물론, 여자친구에게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현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김한솔의 페이스북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아버지 김정남으로 추정되는 '김철'과 안부를 주고받은 글이다.
김철의 페이스북에는 김정남의 사진이 여러 장 올려져 있었다.
한국 언론이 이런 사실을 집중 보도하자 두 사람의 계정은 곧 폐쇄됐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과거에 가명을 몇 개 쓰기는 하는데 페이스북 이나 IT에서는 주로 김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3051특히 아들 김한솔군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나왔기 때문에 제 3의 인물을 거기서 거론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정황상으로 김철은 김정남이 아니겠느냐 라고 관측이 됩니다."
김정남이 국제사회에 처음 공개된 것은 지난 2001년이다.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도미니카 공화국 위조여권으로 입국하려다 체포된 것이다.
여성 2명과 남자아이 1명을 동행한 그는 일본 당국 조사에서 도쿄 디즈니랜드 관광을 왔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김정남 일행을 베이징으로 추방했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들은 당시 김정남 관련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김정남이 김정일 위원장의 맏아들이라는 점에서 후계자 여부와 일본 방문 목적에 초점이 맞춰졌다.
동행인물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당시 김정남이 일본 디즈니랜드에 가기 위해서 데리고 왔던 아들의 사진을 보고서 김정남의 이모인 성애랑은 그 아이가 김정남의 어릴 때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라고 증언한바 있습니다.그 아이가 계속 성장했다면 지금 김한솔의 나이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아이가 성장해서 최근에 김한솔이란 이름으로 페이스 북에 등장을 한 것으로 그렇게 판단됩니다."
김정남은 1971년 김정일과 영화배우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한 출신인 성혜림은 1948년 때 월북해 북한 최고의 여배우가 됐다.
그녀는 월북 작가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결혼한 상태였지만 김정일이 강제로 이혼시킨 뒤 1970년부터 비밀동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 주석은 두 사람의 관계는 물론 김정남도 인정하지 않았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이 김일성의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김정남은 김정일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서장자처럼 성장을 했습니다."
김정일은 1974년,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 타자수인 김영숙과 결혼했다.
첫 번째 공식결혼으로 이 사이에서 딸 설송이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른 형식적인 부부관계였다.
김정일은 2년 뒤인 1976년 재일교포의 딸이자 무용수인 고영희와 동거를 시작했다.
고영희는 1981년 정철, 1983년 정은, 1989년 딸 여정을 낳았다.
성혜림이 동거녀, 김영숙이 형식적인 부인이었다면 고영희는 2004년 암으로 숨질 때까지 28년 동안 북한의 실질적인 퍼스트 레이디였다.
고영희는 1994년 시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숨지자 국모 반열에까지 올랐다.
김정남은 어머니 성혜림이 김정일의 부인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야했다.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데 이어 고영희와 동거를 하자 성혜림은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성혜림이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에 자주 머물면서 김정남은 외할머니 김원주와 이모 성혜랑 손에서 컸다.
성혜랑은 자서전에서 서자로서 김정남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상세히 묘사했다.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단 한명의 친구도 없이 기형적으로 키워졌다“고 밝혔다.
다만 김정일은 맏아들 정남을 끔찍이 사랑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9살이던 1980년 북한을 떠나 스위스와 러시아에서 10년 가깝게 유학생활을 했다.
그사이 고영희는 정철과 정은, 여정을 차례로 낳았다.
김정남은 1980년대 후반 북한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설자리는 없었다.
이에 대해 이모 성혜랑은 1989년, 김정일의 김정남에 대한 사랑은 고영희의 자식들에게로 옮겨가 김정남은 버리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증언했다.
김정남은 북한으로 돌아온 이후 고영희의 견제로 극도로 통제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혜랑은 이런 이유로 자서전에서 탈북한 뒤 남한에서 총에 맞아 숨진 아들 이한영보다 조카 김정남이 더 불쌍하다고까지 말했다.
김정남은 장남이지만 서자인데다 어머니인 성혜림의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했다.
반면 김정철과 김정은은 적자인데다 퍼스트레이디였던 고영희의 그늘 아래서 후계자로 성장했다.
김정남의 북한 내 위상은 1989년부터 12년 동안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활동했던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김정남의 존재조차 몰랐으며 북한 고위층이 참석하는 연회에 참석한 것을 단 한차례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장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일의 숨겨진 아들로 태어나서 김정일이 김정남에게 아무런 직책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 체류한다 하더라도 김정남이 할 수 있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과거 2004년까지 고영희가 살아있을 때에는 고영희 세력이 김정남을 철저하게 견제를 했고 고영희 사망 이후에는 김정철과 김정은 세력이 김정남을 견제 하고 있기 때문에 김정남은 해외 유랑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김정남이 해외생활을 시작한 건 일본에서 나리타공항에서 추방된 2001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때만 해도 원하면 언제든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된 이후에는 발조차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이 북한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도 이동이 자유롭지 않고 여러 가지 감시를 받기 때문에 김정남으로서는 해외를 떠돌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김정남은 평양에 계속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과 마카오, 싱가포르 등을 왔다갔다하는 걸로 그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정남은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지난 2009년 4월에는 마카오에서 일본 TBS와 인터뷰에서 후계자 여부를 묻는 질문에 ‘후계자가 이런 캐주얼 차림을 하고 있겠느냐‘ 말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일본 아사히 tv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3대 세습에 반대하지만 동생이 필요하다면 해외에서 도울 것' 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에는 일본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이 3대 세습에 반대했지만, 국가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김정남의 언론 인터뷰는 치밀한 계산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분석된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한 위해를 하지 말라는 하나의 메시지죠. 왜냐하면 공개적으로 그렇게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만약 위해가 가한다면 그것은 평양당국의 소행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다라는 측면이 하나고, 두 번째는 자신 말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김정은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해서 이것은 바르지 않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라는 메시지죠.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고 또 김정은에 대한 무언의 자신의 요구죠."
권력의 세계는 냉혹하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지명되자 삼촌 김영주와 의붓 어머니 김성애를 곁가지로 분류해 권력에서 밀어냈고, 이복동생 김평일은 해외로 쫓았다.
김평일은 현재 폴란드 대사로, 20년째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김평일이 공식 직책을 부여받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김평일과 김정남은 매우 비슷한 처지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김정은이 권력을 내년에 공식화하면서 세습이 확정되면 김정남의 위상이나 입지는 더욱더 좁아져서 평양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결국은 중국 땅에서 계속 사는 것이 과거에 김평일의 운명을 볼 때 짐작해볼 수 있는 하나의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남은 현재 중국 베이징과 마카오에서 여러 채의 고급 주택을 소유한 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직업이 없는 그가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 덕분이다.
<인터뷰> 장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은 김정일의 지시하에 그의 고모와 고모부에 김경희와 장성택이 보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남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조달하는 것도 장성택이 맡고 있고 과거 김정남의 교육도 장성택이 맡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김정남을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국가안전보위부를 관장하는 장성택이 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김정남을 비록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진 못했지만 그에 대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북한은 최고 권력자 가계나 사생활의 노출을 극도로 꺼려왔다.
따라서 김정남의 돌출행동이나 이번과 같은 김한솔의 페이스북 노출은 김정일 위원장과 김정은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김정남과 김한솔의 공개활동은 크게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궁극적으로 보호막인 김정일 위원장이 숨지게 되면 김정남의 신변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장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은 김정일의 아들로서 계속 해외에서 특권적인 생활을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만약 김정일이 사라진다고 했을 때 김정남의 신변은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김정남의 고모부인 장성택까지 사망한다고 하면 김정남에 대한 보호막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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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즈업 북한] 김정남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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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1-10-08 10:22:48

<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해보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최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장손으로 추정되는 김한솔의 사진이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됐는데요.
김한솔은 아버지 김정남이 권력투쟁에서 밀려나면서 함께 해외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복 동생인 김정은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해나가면서 김정남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장남인 김정남이 왜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는지 분석하고, 앞으로 김정남의 운명도 전망해봅니다.
<리포트>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쓴 사진.
파티장에서 여자친구와 자세를 취한 사진.
김정일 위원장의 맏손자로 추정되는 김한솔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들이다.
이 계정은 김한솔이 보스니아 국제학교 입학을 앞둔 지난 달 말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보스니아 언론이 김한솔의 입학예정 사실을 보도한데 이어, 김한솔이 이 학교 페이스북 계정에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이 곧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올해 16살로 알려진 김한솔은 아버지 김정남, 할아버지 김정일과 닮은 모습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김한솔은 다른 나라 친구들과 영어로 스스럼 없이 대화하는 것은 물론, 여자친구에게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현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김한솔의 페이스북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아버지 김정남으로 추정되는 '김철'과 안부를 주고받은 글이다.
김철의 페이스북에는 김정남의 사진이 여러 장 올려져 있었다.
한국 언론이 이런 사실을 집중 보도하자 두 사람의 계정은 곧 폐쇄됐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과거에 가명을 몇 개 쓰기는 하는데 페이스북 이나 IT에서는 주로 김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3051특히 아들 김한솔군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나왔기 때문에 제 3의 인물을 거기서 거론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정황상으로 김철은 김정남이 아니겠느냐 라고 관측이 됩니다."
김정남이 국제사회에 처음 공개된 것은 지난 2001년이다.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도미니카 공화국 위조여권으로 입국하려다 체포된 것이다.
여성 2명과 남자아이 1명을 동행한 그는 일본 당국 조사에서 도쿄 디즈니랜드 관광을 왔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김정남 일행을 베이징으로 추방했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들은 당시 김정남 관련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김정남이 김정일 위원장의 맏아들이라는 점에서 후계자 여부와 일본 방문 목적에 초점이 맞춰졌다.
동행인물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당시 김정남이 일본 디즈니랜드에 가기 위해서 데리고 왔던 아들의 사진을 보고서 김정남의 이모인 성애랑은 그 아이가 김정남의 어릴 때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라고 증언한바 있습니다.그 아이가 계속 성장했다면 지금 김한솔의 나이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아이가 성장해서 최근에 김한솔이란 이름으로 페이스 북에 등장을 한 것으로 그렇게 판단됩니다."
김정남은 1971년 김정일과 영화배우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한 출신인 성혜림은 1948년 때 월북해 북한 최고의 여배우가 됐다.
그녀는 월북 작가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결혼한 상태였지만 김정일이 강제로 이혼시킨 뒤 1970년부터 비밀동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 주석은 두 사람의 관계는 물론 김정남도 인정하지 않았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이 김일성의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김정남은 김정일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서장자처럼 성장을 했습니다."
김정일은 1974년,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 타자수인 김영숙과 결혼했다.
첫 번째 공식결혼으로 이 사이에서 딸 설송이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른 형식적인 부부관계였다.
김정일은 2년 뒤인 1976년 재일교포의 딸이자 무용수인 고영희와 동거를 시작했다.
고영희는 1981년 정철, 1983년 정은, 1989년 딸 여정을 낳았다.
성혜림이 동거녀, 김영숙이 형식적인 부인이었다면 고영희는 2004년 암으로 숨질 때까지 28년 동안 북한의 실질적인 퍼스트 레이디였다.
고영희는 1994년 시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숨지자 국모 반열에까지 올랐다.
김정남은 어머니 성혜림이 김정일의 부인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야했다.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데 이어 고영희와 동거를 하자 성혜림은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성혜림이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에 자주 머물면서 김정남은 외할머니 김원주와 이모 성혜랑 손에서 컸다.
성혜랑은 자서전에서 서자로서 김정남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상세히 묘사했다.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에서 단 한명의 친구도 없이 기형적으로 키워졌다“고 밝혔다.
다만 김정일은 맏아들 정남을 끔찍이 사랑했다고 한다.
김정남은 9살이던 1980년 북한을 떠나 스위스와 러시아에서 10년 가깝게 유학생활을 했다.
그사이 고영희는 정철과 정은, 여정을 차례로 낳았다.
김정남은 1980년대 후반 북한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설자리는 없었다.
이에 대해 이모 성혜랑은 1989년, 김정일의 김정남에 대한 사랑은 고영희의 자식들에게로 옮겨가 김정남은 버리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증언했다.
김정남은 북한으로 돌아온 이후 고영희의 견제로 극도로 통제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혜랑은 이런 이유로 자서전에서 탈북한 뒤 남한에서 총에 맞아 숨진 아들 이한영보다 조카 김정남이 더 불쌍하다고까지 말했다.
김정남은 장남이지만 서자인데다 어머니인 성혜림의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했다.
반면 김정철과 김정은은 적자인데다 퍼스트레이디였던 고영희의 그늘 아래서 후계자로 성장했다.
김정남의 북한 내 위상은 1989년부터 12년 동안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활동했던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김정남의 존재조차 몰랐으며 북한 고위층이 참석하는 연회에 참석한 것을 단 한차례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장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일의 숨겨진 아들로 태어나서 김정일이 김정남에게 아무런 직책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 체류한다 하더라도 김정남이 할 수 있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과거 2004년까지 고영희가 살아있을 때에는 고영희 세력이 김정남을 철저하게 견제를 했고 고영희 사망 이후에는 김정철과 김정은 세력이 김정남을 견제 하고 있기 때문에 김정남은 해외 유랑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김정남이 해외생활을 시작한 건 일본에서 나리타공항에서 추방된 2001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때만 해도 원하면 언제든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된 이후에는 발조차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이 북한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도 이동이 자유롭지 않고 여러 가지 감시를 받기 때문에 김정남으로서는 해외를 떠돌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김정남은 평양에 계속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과 마카오, 싱가포르 등을 왔다갔다하는 걸로 그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정남은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지난 2009년 4월에는 마카오에서 일본 TBS와 인터뷰에서 후계자 여부를 묻는 질문에 ‘후계자가 이런 캐주얼 차림을 하고 있겠느냐‘ 말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일본 아사히 tv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3대 세습에 반대하지만 동생이 필요하다면 해외에서 도울 것' 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에는 일본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이 3대 세습에 반대했지만, 국가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김정남의 언론 인터뷰는 치밀한 계산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분석된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한 위해를 하지 말라는 하나의 메시지죠. 왜냐하면 공개적으로 그렇게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만약 위해가 가한다면 그것은 평양당국의 소행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다라는 측면이 하나고, 두 번째는 자신 말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김정은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해서 이것은 바르지 않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라는 메시지죠.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고 또 김정은에 대한 무언의 자신의 요구죠."
권력의 세계는 냉혹하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지명되자 삼촌 김영주와 의붓 어머니 김성애를 곁가지로 분류해 권력에서 밀어냈고, 이복동생 김평일은 해외로 쫓았다.
김평일은 현재 폴란드 대사로, 20년째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김평일이 공식 직책을 부여받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김평일과 김정남은 매우 비슷한 처지다.
<인터뷰> 남성욱(국가안보전략연구소 소장) : "김정은이 권력을 내년에 공식화하면서 세습이 확정되면 김정남의 위상이나 입지는 더욱더 좁아져서 평양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결국은 중국 땅에서 계속 사는 것이 과거에 김평일의 운명을 볼 때 짐작해볼 수 있는 하나의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남은 현재 중국 베이징과 마카오에서 여러 채의 고급 주택을 소유한 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직업이 없는 그가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 덕분이다.
<인터뷰> 장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은 김정일의 지시하에 그의 고모와 고모부에 김경희와 장성택이 보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남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조달하는 것도 장성택이 맡고 있고 과거 김정남의 교육도 장성택이 맡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김정남을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국가안전보위부를 관장하는 장성택이 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김정남을 비록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진 못했지만 그에 대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북한은 최고 권력자 가계나 사생활의 노출을 극도로 꺼려왔다.
따라서 김정남의 돌출행동이나 이번과 같은 김한솔의 페이스북 노출은 김정일 위원장과 김정은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김정남과 김한솔의 공개활동은 크게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궁극적으로 보호막인 김정일 위원장이 숨지게 되면 김정남의 신변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장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김정남은 김정일의 아들로서 계속 해외에서 특권적인 생활을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만약 김정일이 사라진다고 했을 때 김정남의 신변은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높고 특히 김정남의 고모부인 장성택까지 사망한다고 하면 김정남에 대한 보호막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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