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1994 vs 2011, 남북 무엇이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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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2월 31일 토요일, 남북의 창 이현주입니다.
먼저 남북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보는 <이슈 앤 한반도>입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지 17년만에 아들 김정일 위원장이 숨졌습니다.
북한 최고 권력자의 죽음이라는 점을 같지만 남과 북, 모두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1994년과 2011년,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정소라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지 17년 만에 김정일 위원장도 숨을 거뒀습니다.
절대권력자의 죽음이라는 점은 같지만 북한 사회가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17년 전과는 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불안에 떨었던 그때와 달리 차분한 모습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발표 이후 북한 매체가 전하는 모습은 울음바다, 그 자체입니다.
<녹취> 김철혁(군인) : "장군님께서 이렇게 돌아가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
<녹취> 황길철(평양방직기계공장 지배인) : "열차에서 순직하시다니 이게 우리들이 일을 많이 못해서 그렇습니다 장군님."
김정일 위원장 갑작스러운 사망 발표는 우리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시민들은 놀라움에 TV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감으로 주가는 급락했고 환율은 급등했습니다.
<인터뷰> 황지혜(인천시민) : "전쟁이 일어날 지 그런 거에 대한 걱정이 많았어요. "
지난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숨졌습니다.
김 주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북한 전역이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열흘간의 애도기간 동안 북한 주민들은 생업을 중단하고 추모에만 매달렸습니다.
<녹취> 평양시민 : "수령님 눈을 뜨십시오. 일어나십시오."
<녹취> 평양시민 : "아버지 수령님. 한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이렇게 가시다니 이게 웬말입니까"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우리 사회도 크게 술렁였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감으로 생필품 사재기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전군에 비상경계태세를 발동했습니다.
또 조문을 하거나 조의를 표하는 모든 행위를 모두 금지시켰습니다.
조문을 둘러싼 극심한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녹취> 김두섭(당시 민주자유당 의원/1994.7.14. 임시국회) : "과연 여기가 서울인가, 평양인지 혼란이 있었습니다."
<녹취> 이부영(당시 민주당 의원/1994.7.14. 임시국회) :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김영삼 대통령은 상주인 김정일에게 첫 인사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곳곳에 추모소가 설치되자 정부는 처벌을 강행했습니다.
<녹취> 경찰 (전남대 수사 결과 발표/1994.7.15) : "김일성과 북한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분향소를 설치하고 조문단을 보내겠다는 주장 등의 명백한 실정법 위반 행위는 국기를 뒤흔드는 반국가적 행위입니다."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우리 사회는 극심한 남남갈등을 겪었고, 남북관계 역시 더욱 악화됐습니다.
절대권력자의 유고가 발생했지만 북한 체제는 비교적 안정된 모습입니다.
주민들의 애도 분위기 역시 김일성 주석이 숨졌던 1994년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녹취> 박종철(북민협 회장/김정일 위원장 사망 당시 평양 체류) : "슬픔에 잠기고 있으면서도 평상시와 똑같은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 사망 때 애도기간 내내 폐쇄됐던 북중국경지대 교역도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녹취>이우영(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최고지도자고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는 것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같다고 볼 수 있겠지만 김일성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서는 북한 주민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김정일 하고는 급이 다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북한 매체가 보여주는 북한 주민들의 울음은 최고지도자를 어버이로 받드는 세뇌교육과 군중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시현(심리학 박사) : "굉장히 잘못된 방향이긴 하지만 자기들의 입맛에 굉장히 잘 사람들을 조건화시켜놓아요. 누가 흐느끼고 울고 하면 저도 모르게 조금 반응하게 되고, 반응하게 되면 그 반응에 적합한 감정이 생길 수 있고 하니까 집단화 성격이강할수록 군중심리는 더더욱 그렇겠죠."
또 일상화된 감시와 통제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 이우영(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북한 주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에서 카메라가 들이댄다든지 혹은 외국 사람들에 대한 반응 같은 데서 나오는 조금 체제에 대한 충성을 오버해서 표현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슬픔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또 일부분에 있어서 강조되고 조금 오버해서 표현되는 것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빠르게 평정을 찾았습니다.
1994년과 달리 전쟁에 대한 공포는 금세 사라졌습니다.
주가와 환율도 이틀만에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인터뷰> 유동엽(서울시 연희동) : "처음에 뉴스를 접했을 때는 많이 놀란 면도 있었고 혹시 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많이 들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까 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우리 정부의 태도도 17년전과 달라졌습니다. 제한적으로나마 조문과, 통일부를 통한 조전 발송을 허용했습니다.
조문을 둘러싼 남남갈등도 17년 전에 비해 크게 약해졌습니다.
국회차원의 조문 논란은 일찌감치 일단락됐고, 대학이나 시민사회에서 조문소 설치를 두고 마찰이 빚어지긴 했지만 큰 갈등으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우영(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전체적으로 보면 국민들도 그렇지만 남북관계에서 다양한 사건 사고를 겪으면서 조금 내성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26일,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회장이 방북 조문길에 올랐습니다.
이 여사와 현 회장은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조문을 한 뒤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게도 조의를 표했습니다.
김 부위원장은 두 손을 꼭 잡고 조문단에게 일일이 사의를 표시했습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조문단과 면담을 갖고 남북협력을 강조했습니다.
<녹취> 윤철구(김대중평화센터 사무총장/지난 27일) : "김영남 상임위원장께서도 6.15와 10.4를 강조하시며 두 분의. 또 노무현 대통령님까지 세 분의 일이 잘 진행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북한을 떠날 때는 대남관계를 총괄하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배웅했습니다.
우리측 조문단은 평양에 머무는 동안 김정은 부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백화원 초대소에 머무는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유호열(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 "김일성 사망 때는 조문파동이 굉장히 격렬했고 당시 후계자인 김정일 입장에서는 김영삼 정부하고는 더 이상 대화도 하지 않겠다, 이런 강한 반발을 했고 그래서 관계가 계속 악화됐었는데. 이번에는 정부가 조문단 파견의 신축적인 태도를 보이고 국민들도 대체적으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분위기, 그리고 북한 입장에서도 향후 애도기간이 지난 후에 남북관계를 조심스럽게 재개하려는 그런 관계가 될 거라고 봅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영결식이 끝나면서 북한 사회도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북한 최고 권력자의 죽음을 대하는 남과 북의 태도는 1994년과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런만큼 이번 김정일 위원장 사망이 17년 전처럼 남북관계를 경색시켜서는 안되겠죠. 아무쪼록 김 위원장의 사망이 서로 남북관계를 되돌아보고, 교류와 협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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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한반도] 1994 vs 2011, 남북 무엇이 달라졌나?
-
- 입력 2011-12-31 09:51:52
- 수정2011-12-31 09:55:42

<앵커 멘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2월 31일 토요일, 남북의 창 이현주입니다.
먼저 남북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보는 <이슈 앤 한반도>입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지 17년만에 아들 김정일 위원장이 숨졌습니다.
북한 최고 권력자의 죽음이라는 점을 같지만 남과 북, 모두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1994년과 2011년,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정소라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지 17년 만에 김정일 위원장도 숨을 거뒀습니다.
절대권력자의 죽음이라는 점은 같지만 북한 사회가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17년 전과는 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불안에 떨었던 그때와 달리 차분한 모습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발표 이후 북한 매체가 전하는 모습은 울음바다, 그 자체입니다.
<녹취> 김철혁(군인) : "장군님께서 이렇게 돌아가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
<녹취> 황길철(평양방직기계공장 지배인) : "열차에서 순직하시다니 이게 우리들이 일을 많이 못해서 그렇습니다 장군님."
김정일 위원장 갑작스러운 사망 발표는 우리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시민들은 놀라움에 TV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감으로 주가는 급락했고 환율은 급등했습니다.
<인터뷰> 황지혜(인천시민) : "전쟁이 일어날 지 그런 거에 대한 걱정이 많았어요. "
지난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숨졌습니다.
김 주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북한 전역이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열흘간의 애도기간 동안 북한 주민들은 생업을 중단하고 추모에만 매달렸습니다.
<녹취> 평양시민 : "수령님 눈을 뜨십시오. 일어나십시오."
<녹취> 평양시민 : "아버지 수령님. 한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이렇게 가시다니 이게 웬말입니까"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우리 사회도 크게 술렁였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감으로 생필품 사재기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전군에 비상경계태세를 발동했습니다.
또 조문을 하거나 조의를 표하는 모든 행위를 모두 금지시켰습니다.
조문을 둘러싼 극심한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녹취> 김두섭(당시 민주자유당 의원/1994.7.14. 임시국회) : "과연 여기가 서울인가, 평양인지 혼란이 있었습니다."
<녹취> 이부영(당시 민주당 의원/1994.7.14. 임시국회) :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김영삼 대통령은 상주인 김정일에게 첫 인사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곳곳에 추모소가 설치되자 정부는 처벌을 강행했습니다.
<녹취> 경찰 (전남대 수사 결과 발표/1994.7.15) : "김일성과 북한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분향소를 설치하고 조문단을 보내겠다는 주장 등의 명백한 실정법 위반 행위는 국기를 뒤흔드는 반국가적 행위입니다."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우리 사회는 극심한 남남갈등을 겪었고, 남북관계 역시 더욱 악화됐습니다.
절대권력자의 유고가 발생했지만 북한 체제는 비교적 안정된 모습입니다.
주민들의 애도 분위기 역시 김일성 주석이 숨졌던 1994년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녹취> 박종철(북민협 회장/김정일 위원장 사망 당시 평양 체류) : "슬픔에 잠기고 있으면서도 평상시와 똑같은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 사망 때 애도기간 내내 폐쇄됐던 북중국경지대 교역도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녹취>이우영(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최고지도자고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는 것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같다고 볼 수 있겠지만 김일성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서는 북한 주민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김정일 하고는 급이 다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북한 매체가 보여주는 북한 주민들의 울음은 최고지도자를 어버이로 받드는 세뇌교육과 군중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시현(심리학 박사) : "굉장히 잘못된 방향이긴 하지만 자기들의 입맛에 굉장히 잘 사람들을 조건화시켜놓아요. 누가 흐느끼고 울고 하면 저도 모르게 조금 반응하게 되고, 반응하게 되면 그 반응에 적합한 감정이 생길 수 있고 하니까 집단화 성격이강할수록 군중심리는 더더욱 그렇겠죠."
또 일상화된 감시와 통제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 이우영(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북한 주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에서 카메라가 들이댄다든지 혹은 외국 사람들에 대한 반응 같은 데서 나오는 조금 체제에 대한 충성을 오버해서 표현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슬픔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또 일부분에 있어서 강조되고 조금 오버해서 표현되는 것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빠르게 평정을 찾았습니다.
1994년과 달리 전쟁에 대한 공포는 금세 사라졌습니다.
주가와 환율도 이틀만에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인터뷰> 유동엽(서울시 연희동) : "처음에 뉴스를 접했을 때는 많이 놀란 면도 있었고 혹시 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많이 들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까 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우리 정부의 태도도 17년전과 달라졌습니다. 제한적으로나마 조문과, 통일부를 통한 조전 발송을 허용했습니다.
조문을 둘러싼 남남갈등도 17년 전에 비해 크게 약해졌습니다.
국회차원의 조문 논란은 일찌감치 일단락됐고, 대학이나 시민사회에서 조문소 설치를 두고 마찰이 빚어지긴 했지만 큰 갈등으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뷰> 이우영(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전체적으로 보면 국민들도 그렇지만 남북관계에서 다양한 사건 사고를 겪으면서 조금 내성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26일,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회장이 방북 조문길에 올랐습니다.
이 여사와 현 회장은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조문을 한 뒤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게도 조의를 표했습니다.
김 부위원장은 두 손을 꼭 잡고 조문단에게 일일이 사의를 표시했습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조문단과 면담을 갖고 남북협력을 강조했습니다.
<녹취> 윤철구(김대중평화센터 사무총장/지난 27일) : "김영남 상임위원장께서도 6.15와 10.4를 강조하시며 두 분의. 또 노무현 대통령님까지 세 분의 일이 잘 진행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북한을 떠날 때는 대남관계를 총괄하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배웅했습니다.
우리측 조문단은 평양에 머무는 동안 김정은 부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백화원 초대소에 머무는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유호열(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 "김일성 사망 때는 조문파동이 굉장히 격렬했고 당시 후계자인 김정일 입장에서는 김영삼 정부하고는 더 이상 대화도 하지 않겠다, 이런 강한 반발을 했고 그래서 관계가 계속 악화됐었는데. 이번에는 정부가 조문단 파견의 신축적인 태도를 보이고 국민들도 대체적으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분위기, 그리고 북한 입장에서도 향후 애도기간이 지난 후에 남북관계를 조심스럽게 재개하려는 그런 관계가 될 거라고 봅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영결식이 끝나면서 북한 사회도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북한 최고 권력자의 죽음을 대하는 남과 북의 태도는 1994년과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런만큼 이번 김정일 위원장 사망이 17년 전처럼 남북관계를 경색시켜서는 안되겠죠. 아무쪼록 김 위원장의 사망이 서로 남북관계를 되돌아보고, 교류와 협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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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북한 체제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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