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연평도 포격 2년…지금 연평도는?

입력 2012.11.2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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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먼저 남북 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 ]입니다.

어제는 서해 연평도가 북한으로부터 포탄 공격을 받은 지 2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당시의 참혹한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복구공사가 대부분 마무리 되고 떠났던 주민들도 되돌아오면서 섬에는 다시 활기가 넘치고 있는데요..

남북의 창 취재진이 직접 연평도를 찾았습니다.

섬의 모습과 또 주민들의 생활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조아란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녹취> "산에서 훈련하지 왜 건물에 오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찰나 포가 막 머리 위로 날아오는 거야. 1분 후에도 살아있을까."

<녹취> "방공호에 가서 있다가 꽃게잡이 배타고 나갔지. 여태 살던 고향이니까 돌아와야지."

<녹취> "이제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주민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아요. 이제 죽어도 여기에서 죽겠다는 생각이죠."

지난 18일, 연평도 당섬 선착장.

하루 한 번, 배가 들어오는 때를 맞춰 선착장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막 도착한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육지에 나가 생필품을 공수해 온 주민이나 휴가를 다녀온 군인들.

그리고 복구 작업을 위해 섬을 찾은 외지인들입니다.

<인터뷰> 연평도 복구공사 참여자 : "공사를 하러 왔는데 여기 현지 사람하고 만나봐야 아니까."

연평도 곳곳에선 복구공사가 한창입니다.

당섬 선착장 입구에는 터미널 공사가, 마을 한 가운데는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를 통합한 학교 건물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정창현(연평고등학교 교감) : "워낙 오래돼서 낙후됐고 포격 충격으로 인해서 건물에 다 금이 갔어요. 금이 가서물이 새는데 물이 새는 걸 잡으려니까 뭐 새로 짓는 게 낫겠다."

포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 주택은 이 모습 그대로 안보 교육관으로 보존됩니다.

포격으로 희생당한 병사들을 기리는 위령탑과 추모 공원도 막바지 공사가 한창입니다.

섬 곳곳엔 북한의 포격에 대비한 대피소 7곳도 마련됐습니다.

복구 작업으로 외지인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연평도 내 식당과 숙박업소도 반짝 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기수(연평도 주민) : "공사하는 것 때문에 이게 좀 활기차죠, 좀. 사람들도 열심히 사시는 것 같고 그런 게 많이 달라졌어요."

연평도 포격 2년.

포격으로 부서진 건물과 도로는 대부분 거의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연평도를 찾는 외지인들도 더욱 많아졌고 주민들도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평온했던 2010년 11월 하순 오후.

갑작스레 날아든 포탄 170여 발은 주민들을 순식간에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인터뷰> 임병철(연평도 주민) : "포탄이 탁 넘어오더니 저쪽 군부대 있는데 산에서 뚝뚝 떨어지더라고. 떨어지는데 불기둥이 한 10m씩 막 올라가. 찰나에 포가 막 머리 위로 날아오는 거야. 야, 이건 아니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북한군의 포격으로 민간인과 군인 4명이 숨지고 26명이 다쳤습니다.

주택과 상가 등 50여 채가 부서졌고, 주민들은 앞 다퉈 섬을 떠났습니다.

연평도 포격 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은 중부리입니다.

지금은 복구공사가 한창인 이 주변으로 포격이 집중됐습니다.

20년 넘게 연평도를 지켜온 황의심 할머니도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인터뷰> 황의심(연평도 주민) : "욕실이고 뭐고 그때 포격, 여기서 때렸으니까 금이 다 가버렸지. 멀쩡한 데 하나도 없어."

딸과 함께 목숨을 건졌지만 포격으로 인한 후유증은 컸습니다.

신경 쇠약으로 심리 치료를 받았지만 아직도 밤잠을 설치는 날이 적지 않습니다.

<인터뷰> 황의심(연평도 주민) : "정신을 잃었다가 조용해져 가지고 애기 데리고 갔지. 혼났어 그때. 조금 급하다, 뭐 좀 신경 쓰고 그러면 불안해서 막 손발이 손도 그렇게 그냥 안정이 안 되면 약 먹어야 돼."

항상 피난 준비를 하고 있다는 황 할머니.

그러나 정든 고향을 떠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터뷰> 황의심(연평도 주민) : "입을 옷을 준비해서 머리맡에다가 놓고 자고 가방도 항상 애 기저귀, 물티슈 뭐 이런 건 항상 준비해놓는데요. 하루치 그냥 자고나면 감사히 잘 잤습니다. 기도하고 그저 하루하루 넘기는 게 감사하다고 기도하면서 사는 거야."

포격 진지로 달려간 해병대원들이 불과 5분 만에 자주포 발사 준비를 마칩니다.

<인터뷰> 김보람(상병/해병대 연평부대) : "우리는 준비돼 있습니다. 적이 다시 한 번 도발한다면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연평도를 감도는 긴장감은 여전합니다.

돌발 상황에 신속 대응할 수 있도록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실탄 사격이 매일 밤낮 진행되고, 해안 경계 근무도 더욱 철저해졌습니다.

<인터뷰> 김지용(상병/해병대 연평부대) : "적이 언제든지 도발할 수 있으므로 저의 가족을 지킨다는 심정으로 한 치의 빈틈없이 경계 근무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이른 아침, 마을 어르신들이 손수 길 청소에 나섰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아침이면 이렇게 모입니다.

북한의 포격으로 평범한 일상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고얌전(연평도 주민) : "다 들어와서 잘 살아요. 그 사람들(북한군)만 가만히 있으면 공기 좋고 늙은이 살기에는 괜찮아. 또 여기 새 마을도 또 이렇게 지어주고 하니까."

마을 담장 곳곳엔 아기자기한 벽화가 자리 잡았고 마을 분위기도 한층 밝아졌습니다.
모두 외지인들의 자원봉사 또는 재능기부로 이뤄진 것입니다.

<인터뷰> 정창현(연평고등학교 교감) : "주민 입장에서는 굉장히 감사하죠. 그 국민들이 관심 가져 주시는 것이 진짜 감사하고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이 땅에 없기를 좀 바랍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갯벌. 섬 아낙은 세 시간 넘게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보고 굴 따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인터뷰> 오연옥(연평도 주민) : "(얼마나 하셨어요?) 한 관 정도. 5만원?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나 하지 젊은 사람들은 안 해요."

6.25 전쟁을 피해 처음 찾은 연평도.

그 뒤 60년 넘도록 연평도 앞바다는 변함없이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 돼 왔습니다.

고요한 바다 건너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섬 2개가 보입니다.

바로 북한의 갑도와 석도입니다.

<인터뷰> 임병철(연평도 주민) : "저 너머가 해주항이고 이쪽에 이렇게는 여기가 북한에서 제일 쌀이 많이 난다는 연백평야야. 지금 날씨가 흐려서 그런데 육안으로도 쫙 다 보여요."

북한과 가깝지만 6.25 때 단 한차례의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는 조용한 섬마을.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일대는 남북이 가장 심각하게 대치하는 현장이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은 2년 전의 악몽을 가슴에 묻어둔 채 여전히 섬을 꿋꿋이 지키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진영(연평도 주민) : "많이 의지해요. 이전에는 그런 것을 찾아보지 못했는데 서로 돕고 의지하는 그런 것들이 새록새록 새롭게 돼요. 이제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는 생각이죠. 주민들도 역시 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다 정착하시는 분들은 다 여기를 사랑해요."

긴장감 속에서도 연평도 주민들이 이 섬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바로 이곳이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국민의 따뜻한 관심과 응원에 주민들도 더욱 힘을 내고 있는데요.

어렵게 되찾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이 작은 섬에 계속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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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한반도] 연평도 포격 2년…지금 연평도는?
    • 입력 2012-11-24 08:48:27
    남북의 창
<앵커 멘트> 먼저 남북 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 ]입니다. 어제는 서해 연평도가 북한으로부터 포탄 공격을 받은 지 2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당시의 참혹한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복구공사가 대부분 마무리 되고 떠났던 주민들도 되돌아오면서 섬에는 다시 활기가 넘치고 있는데요.. 남북의 창 취재진이 직접 연평도를 찾았습니다. 섬의 모습과 또 주민들의 생활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조아란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녹취> "산에서 훈련하지 왜 건물에 오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찰나 포가 막 머리 위로 날아오는 거야. 1분 후에도 살아있을까." <녹취> "방공호에 가서 있다가 꽃게잡이 배타고 나갔지. 여태 살던 고향이니까 돌아와야지." <녹취> "이제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주민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아요. 이제 죽어도 여기에서 죽겠다는 생각이죠." 지난 18일, 연평도 당섬 선착장. 하루 한 번, 배가 들어오는 때를 맞춰 선착장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막 도착한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육지에 나가 생필품을 공수해 온 주민이나 휴가를 다녀온 군인들. 그리고 복구 작업을 위해 섬을 찾은 외지인들입니다. <인터뷰> 연평도 복구공사 참여자 : "공사를 하러 왔는데 여기 현지 사람하고 만나봐야 아니까." 연평도 곳곳에선 복구공사가 한창입니다. 당섬 선착장 입구에는 터미널 공사가, 마을 한 가운데는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를 통합한 학교 건물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정창현(연평고등학교 교감) : "워낙 오래돼서 낙후됐고 포격 충격으로 인해서 건물에 다 금이 갔어요. 금이 가서물이 새는데 물이 새는 걸 잡으려니까 뭐 새로 짓는 게 낫겠다." 포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 주택은 이 모습 그대로 안보 교육관으로 보존됩니다. 포격으로 희생당한 병사들을 기리는 위령탑과 추모 공원도 막바지 공사가 한창입니다. 섬 곳곳엔 북한의 포격에 대비한 대피소 7곳도 마련됐습니다. 복구 작업으로 외지인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연평도 내 식당과 숙박업소도 반짝 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기수(연평도 주민) : "공사하는 것 때문에 이게 좀 활기차죠, 좀. 사람들도 열심히 사시는 것 같고 그런 게 많이 달라졌어요." 연평도 포격 2년. 포격으로 부서진 건물과 도로는 대부분 거의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연평도를 찾는 외지인들도 더욱 많아졌고 주민들도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평온했던 2010년 11월 하순 오후. 갑작스레 날아든 포탄 170여 발은 주민들을 순식간에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인터뷰> 임병철(연평도 주민) : "포탄이 탁 넘어오더니 저쪽 군부대 있는데 산에서 뚝뚝 떨어지더라고. 떨어지는데 불기둥이 한 10m씩 막 올라가. 찰나에 포가 막 머리 위로 날아오는 거야. 야, 이건 아니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북한군의 포격으로 민간인과 군인 4명이 숨지고 26명이 다쳤습니다. 주택과 상가 등 50여 채가 부서졌고, 주민들은 앞 다퉈 섬을 떠났습니다. 연평도 포격 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은 중부리입니다. 지금은 복구공사가 한창인 이 주변으로 포격이 집중됐습니다. 20년 넘게 연평도를 지켜온 황의심 할머니도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인터뷰> 황의심(연평도 주민) : "욕실이고 뭐고 그때 포격, 여기서 때렸으니까 금이 다 가버렸지. 멀쩡한 데 하나도 없어." 딸과 함께 목숨을 건졌지만 포격으로 인한 후유증은 컸습니다. 신경 쇠약으로 심리 치료를 받았지만 아직도 밤잠을 설치는 날이 적지 않습니다. <인터뷰> 황의심(연평도 주민) : "정신을 잃었다가 조용해져 가지고 애기 데리고 갔지. 혼났어 그때. 조금 급하다, 뭐 좀 신경 쓰고 그러면 불안해서 막 손발이 손도 그렇게 그냥 안정이 안 되면 약 먹어야 돼." 항상 피난 준비를 하고 있다는 황 할머니. 그러나 정든 고향을 떠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터뷰> 황의심(연평도 주민) : "입을 옷을 준비해서 머리맡에다가 놓고 자고 가방도 항상 애 기저귀, 물티슈 뭐 이런 건 항상 준비해놓는데요. 하루치 그냥 자고나면 감사히 잘 잤습니다. 기도하고 그저 하루하루 넘기는 게 감사하다고 기도하면서 사는 거야." 포격 진지로 달려간 해병대원들이 불과 5분 만에 자주포 발사 준비를 마칩니다. <인터뷰> 김보람(상병/해병대 연평부대) : "우리는 준비돼 있습니다. 적이 다시 한 번 도발한다면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연평도를 감도는 긴장감은 여전합니다. 돌발 상황에 신속 대응할 수 있도록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실탄 사격이 매일 밤낮 진행되고, 해안 경계 근무도 더욱 철저해졌습니다. <인터뷰> 김지용(상병/해병대 연평부대) : "적이 언제든지 도발할 수 있으므로 저의 가족을 지킨다는 심정으로 한 치의 빈틈없이 경계 근무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이른 아침, 마을 어르신들이 손수 길 청소에 나섰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아침이면 이렇게 모입니다. 북한의 포격으로 평범한 일상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고얌전(연평도 주민) : "다 들어와서 잘 살아요. 그 사람들(북한군)만 가만히 있으면 공기 좋고 늙은이 살기에는 괜찮아. 또 여기 새 마을도 또 이렇게 지어주고 하니까." 마을 담장 곳곳엔 아기자기한 벽화가 자리 잡았고 마을 분위기도 한층 밝아졌습니다. 모두 외지인들의 자원봉사 또는 재능기부로 이뤄진 것입니다. <인터뷰> 정창현(연평고등학교 교감) : "주민 입장에서는 굉장히 감사하죠. 그 국민들이 관심 가져 주시는 것이 진짜 감사하고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이 땅에 없기를 좀 바랍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갯벌. 섬 아낙은 세 시간 넘게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보고 굴 따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인터뷰> 오연옥(연평도 주민) : "(얼마나 하셨어요?) 한 관 정도. 5만원?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나 하지 젊은 사람들은 안 해요." 6.25 전쟁을 피해 처음 찾은 연평도. 그 뒤 60년 넘도록 연평도 앞바다는 변함없이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 돼 왔습니다. 고요한 바다 건너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섬 2개가 보입니다. 바로 북한의 갑도와 석도입니다. <인터뷰> 임병철(연평도 주민) : "저 너머가 해주항이고 이쪽에 이렇게는 여기가 북한에서 제일 쌀이 많이 난다는 연백평야야. 지금 날씨가 흐려서 그런데 육안으로도 쫙 다 보여요." 북한과 가깝지만 6.25 때 단 한차례의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는 조용한 섬마을.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일대는 남북이 가장 심각하게 대치하는 현장이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은 2년 전의 악몽을 가슴에 묻어둔 채 여전히 섬을 꿋꿋이 지키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진영(연평도 주민) : "많이 의지해요. 이전에는 그런 것을 찾아보지 못했는데 서로 돕고 의지하는 그런 것들이 새록새록 새롭게 돼요. 이제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는 생각이죠. 주민들도 역시 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다 정착하시는 분들은 다 여기를 사랑해요." 긴장감 속에서도 연평도 주민들이 이 섬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바로 이곳이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국민의 따뜻한 관심과 응원에 주민들도 더욱 힘을 내고 있는데요. 어렵게 되찾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이 작은 섬에 계속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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