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eye] 또 다른 일본 ‘오키나와’의 아픔
입력 2013.05.18 (10:52)
수정 2013.06.03 (23:1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멘트>
일본은 일본인데 좀 느낌이 다르죠?
이국적인 분위기로 1년에 6백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 일본의 오키나와 섬입니다.
이 오키나와가 19세기 말까지는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가 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미국의 지배를 거쳐, 다시 일본으로 복귀된 굴곡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
요즘 이 곳 사람들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일본이 된 5월15일이 슬픈 오키나와를 홍수진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미 해병대 나가라! 오스프리 반대!
오키나와 중심부 기노완 시입니다.
빗속에서도 ...미군은 돌아가라며 거센 항의를 계속하는 이들, 이 곳에 미군기 오스프리 배치가 결정된 뒤 9개월째 밤낮없이 집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출. 퇴근길 5분씩 시위에 가세하는 주민도 적지 않습니다.
<인터뷰>오타(오키나와 주민):"미국에도 없는 위험한 오스프리를 오키나와엔 왜 배치합니까?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죠. 자존심 걸고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오스프리 시내 날고~~ 오키나와 주택가를 나는 미군 최신 수송기 오스프리.
헬기처럼 수직이착륙이 가능하지만, 추락사고가 빈번한 사고뭉치로 유명합니다.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미.일 정부는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10여대를 배치했습니다.
주민 10만명, 41개 지자체장 모두가 나선 오키나와 역사상 최대 집회. 오스프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무시됐습니다. 일본 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미군기지 74%가 몰려있는 곳. 그래서 주민들은 오키나와 차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에 편입된 뒤 41년 동안 오키나와에선 성폭행 같은 미군 범죄가 8천 5백건 이상, 전투기 등 추락 사고는 40여 건으로 미군 관련 피해가 끊이질 않습니다.
인구 밀집 지역에 있는 미국 해병대의 비행장 후텐마 기집니다. 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옮겨 달라는 게 오키나와 주민들의 숙원입니다.
그러나 미일 정부는 기지를 오키나와 헤노코로 옮기기로 해 주민들의 오랜 숙원은 좌절됐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일왕 부부와 아베 총리 등은 오키나와만 빼고 일본이 미 군정 에서 벗어날 날을 주권 회복 기념일로 축하하고 일왕 만세 삼창까지 했습니다.
<인터뷰> 오키나와 주민:"굴욕의 날에 일본 정부가 다른 행사를 여는 것은 우리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일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미. 일 양국에 대한 분노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450년 동안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습니다.
한.중. 일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 그러나 19세기 말 일본 침략으로 멸망한 뒤 2차 대전 패전 뒤엔 일본 본토보다 20년이나 더 미국의 지배를 받고서, 1972년에야 다시 일본 땅으로 복귀됐습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41주년을 맞은 날, 주민들은 거리로 나왔습니다. 미군 기지를 몰아넣고 오키나와의 희생만 강요하는 차별적 태도, 불합리한 미.일 안보조약 등에 대한 항의입니다.
<인터뷰>히다(오키나와 주민):"본토사람들이 좀 더 오키나와 입장에서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자기들만 안전하면 되고, 오키나와 주민의 안전은 아무래도 좋다는 겁니까?"
올해는 이례적으로 오키나와가 본토에 복귀된 걸 기념하는 공시행사가 열리질 않았습니다. 대신에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오키나와의 싸늘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집회와 행진은 일주일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군기지 없는 오키나와! 일본정부가 들어줄 수 없다면, 자기 결정권을 갖자며 사실상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9살 초등학교 교사 니시 씨도,, 요즘 시위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인터뷰>니시(초등학교 교사):"저희 세대는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역시 태어난 곳 역사를 모르면 안 되겠구나 느꼈습니다."
류큐왕국의 깃발... 미국의 지배를 받던 때 등 박물관을 찾아 공부해 가며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초등학교 교장:"전에는 일본 국민이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본토에 여행 갈 때 여권을 들고 갔습니다."
학생들도 류큐왕국의 450년 역사, 일본의 침략과 미군의 지배, 일본 복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초등학교 6학년:"일본에 복귀된 건 잘된 일이지만, (미군)기지가 있으니까 앞으로 없어지도록 노력할 겁니다."
2차 대전을 경험한 86세 아라가키 씨는 오키나와 인들에 대한 차별을 몸으로 느낀 세댑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을 치른 오키나와, 당시 주민 1/4인 10 만 명이 숨졌는데, 일본군에게 숨졌거나, 일왕을 위해 집단 자결한 숫자가 상당합니다.
<인터뷰>아라가키(86세):"동급생이 100명이었는데 반 이상이 죽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이기만 하면 도망친 얘기 등 전쟁 때 고생한 얘기들뿐 이었죠."
오래된 차별과 분노는 <독립>을 공공연히 얘기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학 교수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라는 단체가 발족했습니다. 주민투표로 독립을 선언하고 유엔에도 가입하자는 게 장기적인 계획입니다.
<인터뷰>오시로('류큐' 독립 시민단체 대표):"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를 이렇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일본 본토사람은 도대체 뭡니까? 독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오키나와 국회의원은 주민 20% 가 독립을 원한다며 논란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틈을 탄 중국은 영유권 주장을 넓혀가면서 류큐 왕국의 독립을 돕자고 나섰습니다.
나머지 미군기지 이전 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좀처럼 듣지 않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얼마나 들어줄지. 중국과 맞물리면서 일본 정부도 극도로 경계하고 있지만, 오키나와 인, 아니 류큐인들의 촉각도 곤두설 데로 곤두서 있습니다.
일본은 일본인데 좀 느낌이 다르죠?
이국적인 분위기로 1년에 6백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 일본의 오키나와 섬입니다.
이 오키나와가 19세기 말까지는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가 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미국의 지배를 거쳐, 다시 일본으로 복귀된 굴곡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
요즘 이 곳 사람들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일본이 된 5월15일이 슬픈 오키나와를 홍수진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미 해병대 나가라! 오스프리 반대!
오키나와 중심부 기노완 시입니다.
빗속에서도 ...미군은 돌아가라며 거센 항의를 계속하는 이들, 이 곳에 미군기 오스프리 배치가 결정된 뒤 9개월째 밤낮없이 집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출. 퇴근길 5분씩 시위에 가세하는 주민도 적지 않습니다.
<인터뷰>오타(오키나와 주민):"미국에도 없는 위험한 오스프리를 오키나와엔 왜 배치합니까?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죠. 자존심 걸고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오스프리 시내 날고~~ 오키나와 주택가를 나는 미군 최신 수송기 오스프리.
헬기처럼 수직이착륙이 가능하지만, 추락사고가 빈번한 사고뭉치로 유명합니다.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미.일 정부는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10여대를 배치했습니다.
주민 10만명, 41개 지자체장 모두가 나선 오키나와 역사상 최대 집회. 오스프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무시됐습니다. 일본 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미군기지 74%가 몰려있는 곳. 그래서 주민들은 오키나와 차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에 편입된 뒤 41년 동안 오키나와에선 성폭행 같은 미군 범죄가 8천 5백건 이상, 전투기 등 추락 사고는 40여 건으로 미군 관련 피해가 끊이질 않습니다.
인구 밀집 지역에 있는 미국 해병대의 비행장 후텐마 기집니다. 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옮겨 달라는 게 오키나와 주민들의 숙원입니다.
그러나 미일 정부는 기지를 오키나와 헤노코로 옮기기로 해 주민들의 오랜 숙원은 좌절됐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일왕 부부와 아베 총리 등은 오키나와만 빼고 일본이 미 군정 에서 벗어날 날을 주권 회복 기념일로 축하하고 일왕 만세 삼창까지 했습니다.
<인터뷰> 오키나와 주민:"굴욕의 날에 일본 정부가 다른 행사를 여는 것은 우리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일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미. 일 양국에 대한 분노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450년 동안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습니다.
한.중. 일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 그러나 19세기 말 일본 침략으로 멸망한 뒤 2차 대전 패전 뒤엔 일본 본토보다 20년이나 더 미국의 지배를 받고서, 1972년에야 다시 일본 땅으로 복귀됐습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41주년을 맞은 날, 주민들은 거리로 나왔습니다. 미군 기지를 몰아넣고 오키나와의 희생만 강요하는 차별적 태도, 불합리한 미.일 안보조약 등에 대한 항의입니다.
<인터뷰>히다(오키나와 주민):"본토사람들이 좀 더 오키나와 입장에서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자기들만 안전하면 되고, 오키나와 주민의 안전은 아무래도 좋다는 겁니까?"
올해는 이례적으로 오키나와가 본토에 복귀된 걸 기념하는 공시행사가 열리질 않았습니다. 대신에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오키나와의 싸늘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집회와 행진은 일주일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군기지 없는 오키나와! 일본정부가 들어줄 수 없다면, 자기 결정권을 갖자며 사실상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9살 초등학교 교사 니시 씨도,, 요즘 시위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인터뷰>니시(초등학교 교사):"저희 세대는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역시 태어난 곳 역사를 모르면 안 되겠구나 느꼈습니다."
류큐왕국의 깃발... 미국의 지배를 받던 때 등 박물관을 찾아 공부해 가며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초등학교 교장:"전에는 일본 국민이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본토에 여행 갈 때 여권을 들고 갔습니다."
학생들도 류큐왕국의 450년 역사, 일본의 침략과 미군의 지배, 일본 복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초등학교 6학년:"일본에 복귀된 건 잘된 일이지만, (미군)기지가 있으니까 앞으로 없어지도록 노력할 겁니다."
2차 대전을 경험한 86세 아라가키 씨는 오키나와 인들에 대한 차별을 몸으로 느낀 세댑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을 치른 오키나와, 당시 주민 1/4인 10 만 명이 숨졌는데, 일본군에게 숨졌거나, 일왕을 위해 집단 자결한 숫자가 상당합니다.
<인터뷰>아라가키(86세):"동급생이 100명이었는데 반 이상이 죽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이기만 하면 도망친 얘기 등 전쟁 때 고생한 얘기들뿐 이었죠."
오래된 차별과 분노는 <독립>을 공공연히 얘기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학 교수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라는 단체가 발족했습니다. 주민투표로 독립을 선언하고 유엔에도 가입하자는 게 장기적인 계획입니다.
<인터뷰>오시로('류큐' 독립 시민단체 대표):"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를 이렇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일본 본토사람은 도대체 뭡니까? 독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오키나와 국회의원은 주민 20% 가 독립을 원한다며 논란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틈을 탄 중국은 영유권 주장을 넓혀가면서 류큐 왕국의 독립을 돕자고 나섰습니다.
나머지 미군기지 이전 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좀처럼 듣지 않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얼마나 들어줄지. 중국과 맞물리면서 일본 정부도 극도로 경계하고 있지만, 오키나와 인, 아니 류큐인들의 촉각도 곤두설 데로 곤두서 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 eye] 또 다른 일본 ‘오키나와’의 아픔
-
- 입력 2013-05-18 11:21:50
- 수정2013-06-03 23:11:22
<앵커멘트>
일본은 일본인데 좀 느낌이 다르죠?
이국적인 분위기로 1년에 6백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 일본의 오키나와 섬입니다.
이 오키나와가 19세기 말까지는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가 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미국의 지배를 거쳐, 다시 일본으로 복귀된 굴곡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
요즘 이 곳 사람들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일본이 된 5월15일이 슬픈 오키나와를 홍수진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미 해병대 나가라! 오스프리 반대!
오키나와 중심부 기노완 시입니다.
빗속에서도 ...미군은 돌아가라며 거센 항의를 계속하는 이들, 이 곳에 미군기 오스프리 배치가 결정된 뒤 9개월째 밤낮없이 집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출. 퇴근길 5분씩 시위에 가세하는 주민도 적지 않습니다.
<인터뷰>오타(오키나와 주민):"미국에도 없는 위험한 오스프리를 오키나와엔 왜 배치합니까?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죠. 자존심 걸고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오스프리 시내 날고~~ 오키나와 주택가를 나는 미군 최신 수송기 오스프리.
헬기처럼 수직이착륙이 가능하지만, 추락사고가 빈번한 사고뭉치로 유명합니다.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미.일 정부는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10여대를 배치했습니다.
주민 10만명, 41개 지자체장 모두가 나선 오키나와 역사상 최대 집회. 오스프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무시됐습니다. 일본 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미군기지 74%가 몰려있는 곳. 그래서 주민들은 오키나와 차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에 편입된 뒤 41년 동안 오키나와에선 성폭행 같은 미군 범죄가 8천 5백건 이상, 전투기 등 추락 사고는 40여 건으로 미군 관련 피해가 끊이질 않습니다.
인구 밀집 지역에 있는 미국 해병대의 비행장 후텐마 기집니다. 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옮겨 달라는 게 오키나와 주민들의 숙원입니다.
그러나 미일 정부는 기지를 오키나와 헤노코로 옮기기로 해 주민들의 오랜 숙원은 좌절됐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일왕 부부와 아베 총리 등은 오키나와만 빼고 일본이 미 군정 에서 벗어날 날을 주권 회복 기념일로 축하하고 일왕 만세 삼창까지 했습니다.
<인터뷰> 오키나와 주민:"굴욕의 날에 일본 정부가 다른 행사를 여는 것은 우리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일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미. 일 양국에 대한 분노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450년 동안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습니다.
한.중. 일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 그러나 19세기 말 일본 침략으로 멸망한 뒤 2차 대전 패전 뒤엔 일본 본토보다 20년이나 더 미국의 지배를 받고서, 1972년에야 다시 일본 땅으로 복귀됐습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41주년을 맞은 날, 주민들은 거리로 나왔습니다. 미군 기지를 몰아넣고 오키나와의 희생만 강요하는 차별적 태도, 불합리한 미.일 안보조약 등에 대한 항의입니다.
<인터뷰>히다(오키나와 주민):"본토사람들이 좀 더 오키나와 입장에서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자기들만 안전하면 되고, 오키나와 주민의 안전은 아무래도 좋다는 겁니까?"
올해는 이례적으로 오키나와가 본토에 복귀된 걸 기념하는 공시행사가 열리질 않았습니다. 대신에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오키나와의 싸늘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집회와 행진은 일주일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군기지 없는 오키나와! 일본정부가 들어줄 수 없다면, 자기 결정권을 갖자며 사실상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9살 초등학교 교사 니시 씨도,, 요즘 시위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인터뷰>니시(초등학교 교사):"저희 세대는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역시 태어난 곳 역사를 모르면 안 되겠구나 느꼈습니다."
류큐왕국의 깃발... 미국의 지배를 받던 때 등 박물관을 찾아 공부해 가며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초등학교 교장:"전에는 일본 국민이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본토에 여행 갈 때 여권을 들고 갔습니다."
학생들도 류큐왕국의 450년 역사, 일본의 침략과 미군의 지배, 일본 복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초등학교 6학년:"일본에 복귀된 건 잘된 일이지만, (미군)기지가 있으니까 앞으로 없어지도록 노력할 겁니다."
2차 대전을 경험한 86세 아라가키 씨는 오키나와 인들에 대한 차별을 몸으로 느낀 세댑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을 치른 오키나와, 당시 주민 1/4인 10 만 명이 숨졌는데, 일본군에게 숨졌거나, 일왕을 위해 집단 자결한 숫자가 상당합니다.
<인터뷰>아라가키(86세):"동급생이 100명이었는데 반 이상이 죽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이기만 하면 도망친 얘기 등 전쟁 때 고생한 얘기들뿐 이었죠."
오래된 차별과 분노는 <독립>을 공공연히 얘기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학 교수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라는 단체가 발족했습니다. 주민투표로 독립을 선언하고 유엔에도 가입하자는 게 장기적인 계획입니다.
<인터뷰>오시로('류큐' 독립 시민단체 대표):"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를 이렇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일본 본토사람은 도대체 뭡니까? 독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오키나와 국회의원은 주민 20% 가 독립을 원한다며 논란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틈을 탄 중국은 영유권 주장을 넓혀가면서 류큐 왕국의 독립을 돕자고 나섰습니다.
나머지 미군기지 이전 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좀처럼 듣지 않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얼마나 들어줄지. 중국과 맞물리면서 일본 정부도 극도로 경계하고 있지만, 오키나와 인, 아니 류큐인들의 촉각도 곤두설 데로 곤두서 있습니다.
일본은 일본인데 좀 느낌이 다르죠?
이국적인 분위기로 1년에 6백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 일본의 오키나와 섬입니다.
이 오키나와가 19세기 말까지는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가 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미국의 지배를 거쳐, 다시 일본으로 복귀된 굴곡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
요즘 이 곳 사람들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일본이 된 5월15일이 슬픈 오키나와를 홍수진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미 해병대 나가라! 오스프리 반대!
오키나와 중심부 기노완 시입니다.
빗속에서도 ...미군은 돌아가라며 거센 항의를 계속하는 이들, 이 곳에 미군기 오스프리 배치가 결정된 뒤 9개월째 밤낮없이 집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출. 퇴근길 5분씩 시위에 가세하는 주민도 적지 않습니다.
<인터뷰>오타(오키나와 주민):"미국에도 없는 위험한 오스프리를 오키나와엔 왜 배치합니까?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죠. 자존심 걸고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오스프리 시내 날고~~ 오키나와 주택가를 나는 미군 최신 수송기 오스프리.
헬기처럼 수직이착륙이 가능하지만, 추락사고가 빈번한 사고뭉치로 유명합니다.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미.일 정부는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10여대를 배치했습니다.
주민 10만명, 41개 지자체장 모두가 나선 오키나와 역사상 최대 집회. 오스프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무시됐습니다. 일본 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미군기지 74%가 몰려있는 곳. 그래서 주민들은 오키나와 차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에 편입된 뒤 41년 동안 오키나와에선 성폭행 같은 미군 범죄가 8천 5백건 이상, 전투기 등 추락 사고는 40여 건으로 미군 관련 피해가 끊이질 않습니다.
인구 밀집 지역에 있는 미국 해병대의 비행장 후텐마 기집니다. 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옮겨 달라는 게 오키나와 주민들의 숙원입니다.
그러나 미일 정부는 기지를 오키나와 헤노코로 옮기기로 해 주민들의 오랜 숙원은 좌절됐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일왕 부부와 아베 총리 등은 오키나와만 빼고 일본이 미 군정 에서 벗어날 날을 주권 회복 기념일로 축하하고 일왕 만세 삼창까지 했습니다.
<인터뷰> 오키나와 주민:"굴욕의 날에 일본 정부가 다른 행사를 여는 것은 우리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일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미. 일 양국에 대한 분노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450년 동안 '류큐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습니다.
한.중. 일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 그러나 19세기 말 일본 침략으로 멸망한 뒤 2차 대전 패전 뒤엔 일본 본토보다 20년이나 더 미국의 지배를 받고서, 1972년에야 다시 일본 땅으로 복귀됐습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41주년을 맞은 날, 주민들은 거리로 나왔습니다. 미군 기지를 몰아넣고 오키나와의 희생만 강요하는 차별적 태도, 불합리한 미.일 안보조약 등에 대한 항의입니다.
<인터뷰>히다(오키나와 주민):"본토사람들이 좀 더 오키나와 입장에서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자기들만 안전하면 되고, 오키나와 주민의 안전은 아무래도 좋다는 겁니까?"
올해는 이례적으로 오키나와가 본토에 복귀된 걸 기념하는 공시행사가 열리질 않았습니다. 대신에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오키나와의 싸늘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집회와 행진은 일주일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군기지 없는 오키나와! 일본정부가 들어줄 수 없다면, 자기 결정권을 갖자며 사실상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29살 초등학교 교사 니시 씨도,, 요즘 시위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인터뷰>니시(초등학교 교사):"저희 세대는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역시 태어난 곳 역사를 모르면 안 되겠구나 느꼈습니다."
류큐왕국의 깃발... 미국의 지배를 받던 때 등 박물관을 찾아 공부해 가며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초등학교 교장:"전에는 일본 국민이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본토에 여행 갈 때 여권을 들고 갔습니다."
학생들도 류큐왕국의 450년 역사, 일본의 침략과 미군의 지배, 일본 복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초등학교 6학년:"일본에 복귀된 건 잘된 일이지만, (미군)기지가 있으니까 앞으로 없어지도록 노력할 겁니다."
2차 대전을 경험한 86세 아라가키 씨는 오키나와 인들에 대한 차별을 몸으로 느낀 세댑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을 치른 오키나와, 당시 주민 1/4인 10 만 명이 숨졌는데, 일본군에게 숨졌거나, 일왕을 위해 집단 자결한 숫자가 상당합니다.
<인터뷰>아라가키(86세):"동급생이 100명이었는데 반 이상이 죽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이기만 하면 도망친 얘기 등 전쟁 때 고생한 얘기들뿐 이었죠."
오래된 차별과 분노는 <독립>을 공공연히 얘기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학 교수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라는 단체가 발족했습니다. 주민투표로 독립을 선언하고 유엔에도 가입하자는 게 장기적인 계획입니다.
<인터뷰>오시로('류큐' 독립 시민단체 대표):"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를 이렇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일본 본토사람은 도대체 뭡니까? 독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오키나와 국회의원은 주민 20% 가 독립을 원한다며 논란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틈을 탄 중국은 영유권 주장을 넓혀가면서 류큐 왕국의 독립을 돕자고 나섰습니다.
나머지 미군기지 이전 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좀처럼 듣지 않던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얼마나 들어줄지. 중국과 맞물리면서 일본 정부도 극도로 경계하고 있지만, 오키나와 인, 아니 류큐인들의 촉각도 곤두설 데로 곤두서 있습니다.
-
-
홍수진 기자 nodance@kbs.co.kr
홍수진 기자의 기사 모음
-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
좋아요
0
-
응원해요
0
-
후속 원해요
0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