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리포트] 한국 살린 푸른 눈 ‘굿-닥터’

입력 2013.10.05 (08:25) 수정 2013.10.05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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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지난 1일은, 건군 65주년을 맞은 '국군의 날' 이었습니다. 남>시가 행진도 하고, 다양한 기념 행사들이 펼쳐졌죠? 여>또 8일은,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분들을 위해 제정된 '재향 군인의 날'입니다.

그래서 저희 <특파원 현장보고>는 한국전에 참전했다 저마다 특별한 사연을 안고 돌아간 외국인 노병들을 찾아봤습니다.

특히 총-칼 대신 청진기와 메스를 들고 9만 명의 목숨을 살린, 푸른 눈의 '굿닥터' 얘기가 따뜻합니다. 남>류 란 순회 특파원이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리포트>

지난 7월, 세계 각국의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정전60주년 기념 행사가 한창이던 때..

더 이상 건강이 허락지 않아 한국을 찾지 못한 한 노병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취재진은 노르웨이로 향했습니다.

태극기까지 내걸고 KBS를 반겨준 이는, '노르웨이 한국전 참전용사회' 닐스 에겔리언 회장입니다.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여기저기 모셔두었던 보물을 꺼내 자랑하기 바쁜 닐스 할아버지...

부인 마리 여사와 노년을 보내고 있는 아담한 집 구석구석이 한국 관련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녹취> "... 건강하세요. 언젠가 찾아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누렇게 세월이 묻은 편지지...

그 중에서도 특히 해마다 한국 지인들이 보내오는 안부글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 잘생긴 청년이 19살의 닐스입니다.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1년, 의료인력을 보낸 노르웨이 부대를 따라 닐스는 그렇게 한국에 왔습니다.

<인터뷰> 닐스 에겔리언(87세) : "노르웨이 한국전 참전용사회 회장 "그 땐 젊었으니까, 뭔가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자원한 게 가장 컸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너무나 선명해요. 도착한 곳은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한 전쟁터였습니다."

동두천 허허벌판에 천막으로 병실을 세우고, UN으로부터 의료 기구들을 사들여 사흘만에 환자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노르웨이 육군 이동 외과병원', '노르마쉬(NORMASH)'의 시작입니다.

유난히 아이들에게 정이 많았던 닐스와 동료 병사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의료 행위는 군인에게 한정됐기 때문에, 부상한 여성과 어린이들을 외면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인터뷰> 닐스 : "우리는 결국 규칙을 깨고 말았어요.군인이든 아니든, 다친 사람들은 모두 데려와 치료하기 시작했죠. 물론 군인들을 돕기 위해 왔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달을 지내며, 한국 병사들과도 깊은 우애를 나누게 됐다는 닐스.

<인터뷰> "내 친구 김종영..."

아직도 함께 불렀던 그 절절한 애국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녹취>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인터뷰> 닐스 :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은 전쟁을 치르면서, 울분과 조국에 대한 마음이 상당히 컸어요. 그래서 애국가를 그렇게 힘차게 불렀던 겁니다."

그러던 중 닐스 씨가 뜬금없이 일본 얘기를 꺼냈습니다.

일본군 노래를 언젠가 배웠는데, 이 노래를 아느냐는 겁니다.

<인터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나쁜 군가였어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할 때 여성들을 납치하고 그런...아주 끔찍한 내용이었습니다. 여러 일본인들에게 노랫말 뜻을 물어봤는데, 부끄러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더군요."

닐스는 노르웨이 방송에도 여러차례 출연해 참전 당시를 회고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한국전 당시 시간에 멈춰있는 듯한 남편의 모습이, 부인에겐 어쩌면 불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취재진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인터뷰> 마리 에겔리언(닐스 씨 부인) : "영원히 저한테서 '아리랑'을 부르고, 저런 걸 모으는 걸 그만하라는 얘기는 들을 수 없을 겁니다. // 그게 제 남편의 삶이고, 저 역시 좋아하니까요."

지독한 류마티스에 시달리며 쉽게 일어설 수도 없는 마리 여사는, 그렇게 한참을 손을 흔들어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배웅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국전쟁이 잊혀지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한국정부에 작은 바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노르웨이 참전 용사의 2세, 루시 폴크 씨의 초대를 받아 오슬로 중심가에 새로 생긴 아파트촌을 방문했습니다.

루시는 노르웨이 육군이동외과병원, 노르마쉬의 수석 의사로 파견됐던 베른하르 중령의 장녀로, 현재 한-노르웨이 친선협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인터뷰> 루시 폴크(한국전 참전용사 2세) : "아버지는 제가 겨우 생후 13개월 때 한국으로 파병되셨어요.거의 기억이 없죠. 나중에 다시 한국 국립의료원 의사로 근무하셨는데, 그때 저도 같이 한국에 가서 1년간 병원에서 일했답니다."

루시의 손에 꼭 들려있는 초록색 낡은 수첩,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 머물 당시에 쓴 베른하르 중령의 일기, 하루하루의 사건과 감상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녹취> "그 소년이 깨어나더니 "고맙습니다,고맙습니다...근데 전 돈이 없는데 어떡해요?" 이랬대요. "

<인터뷰> 루시 : "저는 아버지의 유품들을 소중히 간직해왔지만, 제 자식과 손자들은 과연 그래줄지 걱정입니다. 많은 참전용사들이 이 귀한 역사적 자료들을 제각각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데, 이 분들이 돌아가시고 분실되기 전에 한 데 잘 모은다면, 얼마나 의미있을까요?"

닐스 씨와 가까이 지내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이 모였습니다.

아직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는 이들은, 오늘도 당시의 무용담으로 웃음꽃을 피웁니다.

<녹취> "그 때도 닐스가 제일 좋아했지. ( 아니야, 아니야.)"

한국 명예 총영사까지 지낸 홀테 씨의 집에도 한국 관련 물건들이 정성스럽게 진열돼 있습니다.

어느새 60년, 참전 용사들의 머리엔 백발이 성성합니다.

결코 한국을 잊을 수 없다는 푸른 눈의 노병들.

늙은 군인들은 한국도 자신들을 기억해주길, 묵묵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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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 리포트] 한국 살린 푸른 눈 ‘굿-닥터’
    • 입력 2013-10-05 08:29:08
    • 수정2013-10-05 10:34:00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지난 1일은, 건군 65주년을 맞은 '국군의 날' 이었습니다. 남>시가 행진도 하고, 다양한 기념 행사들이 펼쳐졌죠? 여>또 8일은,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분들을 위해 제정된 '재향 군인의 날'입니다.

그래서 저희 <특파원 현장보고>는 한국전에 참전했다 저마다 특별한 사연을 안고 돌아간 외국인 노병들을 찾아봤습니다.

특히 총-칼 대신 청진기와 메스를 들고 9만 명의 목숨을 살린, 푸른 눈의 '굿닥터' 얘기가 따뜻합니다. 남>류 란 순회 특파원이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리포트>

지난 7월, 세계 각국의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정전60주년 기념 행사가 한창이던 때..

더 이상 건강이 허락지 않아 한국을 찾지 못한 한 노병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취재진은 노르웨이로 향했습니다.

태극기까지 내걸고 KBS를 반겨준 이는, '노르웨이 한국전 참전용사회' 닐스 에겔리언 회장입니다.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여기저기 모셔두었던 보물을 꺼내 자랑하기 바쁜 닐스 할아버지...

부인 마리 여사와 노년을 보내고 있는 아담한 집 구석구석이 한국 관련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녹취> "... 건강하세요. 언젠가 찾아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누렇게 세월이 묻은 편지지...

그 중에서도 특히 해마다 한국 지인들이 보내오는 안부글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 잘생긴 청년이 19살의 닐스입니다.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1년, 의료인력을 보낸 노르웨이 부대를 따라 닐스는 그렇게 한국에 왔습니다.

<인터뷰> 닐스 에겔리언(87세) : "노르웨이 한국전 참전용사회 회장 "그 땐 젊었으니까, 뭔가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자원한 게 가장 컸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너무나 선명해요. 도착한 곳은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한 전쟁터였습니다."

동두천 허허벌판에 천막으로 병실을 세우고, UN으로부터 의료 기구들을 사들여 사흘만에 환자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노르웨이 육군 이동 외과병원', '노르마쉬(NORMASH)'의 시작입니다.

유난히 아이들에게 정이 많았던 닐스와 동료 병사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의료 행위는 군인에게 한정됐기 때문에, 부상한 여성과 어린이들을 외면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인터뷰> 닐스 : "우리는 결국 규칙을 깨고 말았어요.군인이든 아니든, 다친 사람들은 모두 데려와 치료하기 시작했죠. 물론 군인들을 돕기 위해 왔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달을 지내며, 한국 병사들과도 깊은 우애를 나누게 됐다는 닐스.

<인터뷰> "내 친구 김종영..."

아직도 함께 불렀던 그 절절한 애국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녹취>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인터뷰> 닐스 :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은 전쟁을 치르면서, 울분과 조국에 대한 마음이 상당히 컸어요. 그래서 애국가를 그렇게 힘차게 불렀던 겁니다."

그러던 중 닐스 씨가 뜬금없이 일본 얘기를 꺼냈습니다.

일본군 노래를 언젠가 배웠는데, 이 노래를 아느냐는 겁니다.

<인터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나쁜 군가였어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할 때 여성들을 납치하고 그런...아주 끔찍한 내용이었습니다. 여러 일본인들에게 노랫말 뜻을 물어봤는데, 부끄러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더군요."

닐스는 노르웨이 방송에도 여러차례 출연해 참전 당시를 회고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한국전 당시 시간에 멈춰있는 듯한 남편의 모습이, 부인에겐 어쩌면 불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취재진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인터뷰> 마리 에겔리언(닐스 씨 부인) : "영원히 저한테서 '아리랑'을 부르고, 저런 걸 모으는 걸 그만하라는 얘기는 들을 수 없을 겁니다. // 그게 제 남편의 삶이고, 저 역시 좋아하니까요."

지독한 류마티스에 시달리며 쉽게 일어설 수도 없는 마리 여사는, 그렇게 한참을 손을 흔들어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배웅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국전쟁이 잊혀지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한국정부에 작은 바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노르웨이 참전 용사의 2세, 루시 폴크 씨의 초대를 받아 오슬로 중심가에 새로 생긴 아파트촌을 방문했습니다.

루시는 노르웨이 육군이동외과병원, 노르마쉬의 수석 의사로 파견됐던 베른하르 중령의 장녀로, 현재 한-노르웨이 친선협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인터뷰> 루시 폴크(한국전 참전용사 2세) : "아버지는 제가 겨우 생후 13개월 때 한국으로 파병되셨어요.거의 기억이 없죠. 나중에 다시 한국 국립의료원 의사로 근무하셨는데, 그때 저도 같이 한국에 가서 1년간 병원에서 일했답니다."

루시의 손에 꼭 들려있는 초록색 낡은 수첩,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 머물 당시에 쓴 베른하르 중령의 일기, 하루하루의 사건과 감상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녹취> "그 소년이 깨어나더니 "고맙습니다,고맙습니다...근데 전 돈이 없는데 어떡해요?" 이랬대요. "

<인터뷰> 루시 : "저는 아버지의 유품들을 소중히 간직해왔지만, 제 자식과 손자들은 과연 그래줄지 걱정입니다. 많은 참전용사들이 이 귀한 역사적 자료들을 제각각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데, 이 분들이 돌아가시고 분실되기 전에 한 데 잘 모은다면, 얼마나 의미있을까요?"

닐스 씨와 가까이 지내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이 모였습니다.

아직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는 이들은, 오늘도 당시의 무용담으로 웃음꽃을 피웁니다.

<녹취> "그 때도 닐스가 제일 좋아했지. ( 아니야, 아니야.)"

한국 명예 총영사까지 지낸 홀테 씨의 집에도 한국 관련 물건들이 정성스럽게 진열돼 있습니다.

어느새 60년, 참전 용사들의 머리엔 백발이 성성합니다.

결코 한국을 잊을 수 없다는 푸른 눈의 노병들.

늙은 군인들은 한국도 자신들을 기억해주길, 묵묵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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