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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리포트] 사라져 가는 임시정부 발자취
입력 2014.08.16 (08:25) 수정 2014.08.16 (09:22) 특파원 현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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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어제가 바로 제69주년 광복절이었죠?

우리 국민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의 출발이 상해임시정부라는 사실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8년 동안이나 유랑생활을 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잊혀져가는 임시정부 유랑 8년, 그 발자취를 김태욱 특파원이 쫓아가봤습니다.

<리포트>

상하이 점령으로 일제가 침략전쟁을 본격화하던 1932년 4월..

24살의 한 대한 청년이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녹취> 기록화면 : "일본군 사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주요 군 고급장교들이 후송되는 장면입니다."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킨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이를 계기로 한중 항일연대가 만들어지면서 독립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제의 집요한 추적이 시작되면서 1919년 시작된 임시정부 상하이 시대는 13년만에 막을 내립니다.

임시정부 유랑의 첫 기착지 저장성 항저우..

천상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항저우가 있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로선 이 때가 최대의 시련기이기도 했습니다.

쫓겨온 임정요원들이 항저우에서 처음 자리잡은 곳은 여관방 한 칸이 전부였습니다.

<녹취> 최란(항저우임시정부기념관 부장) : "여기 와서 5개월 남짓하게 있었어요. 한 방에서 (일을) 했어요."

임정요원들이 살았다는 항저우 우푸리 일대..

옛집들은 지금도 그대로지만 과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녹취> 왕펑잉(50여년 거주) : "모르겠는데요. 우리가 여기 왔을 때는 다 일반 주민이었어요. 내가 여기서 50년 넘게 살았는데 한국인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철저히 신분을 감춰야 했기 때문에 당시 임정요원들의 행적을 찾기는 이제는 더욱 어려운 일이 돼버렸습니다.

다만 청사 자리는 2007년 원형 복원작업이 완료돼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좁은 회의실과 침실을 겸한 사무실 두 칸, 소박하고 단출한 공간이지만 훌륭한 역사교육의 장입니다.

<인터뷰> 쟝징(관람객) : "어린 친구들이 여기와서 보고 나면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시 일제의 표적이 된 김구 선생이 몸을 숨긴 곳은 물의 도시 지아싱입니다.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문을 달아 옷장으로 가장했고..

침대 곁에는 비밀 탈출구를 만들어 언제든 피신할 준비를 해뒀습니다.

김구 선생은 당시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와 함께 하루종일 운하를 돌며 일제의 추격을 따돌려야 했습니다.

<인터뷰> 셩팡(지아싱 김구피난처관리소장) : "상황이 매우 위급해졌을 때 김구 선생이 비밀통로로 내려와서 이 배를 타고 도망갔어요. '주아이바오'가 배에서 그를 기다렸어요."

이동녕 선생 등 임정요원들이 거주했던 집도 근방에 남아 있습니다.

지아싱 시정부가 지난 1996년 훼손된 원형을 복원해 시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한국인의 발길은 드뭅니다.

<인터뷰> 후슈잉(관리인) : "하루는 한국인 부부가 정신지체 아들을 데리고 왔어요. 큰 비가 와서 문을 닫으려했는데 포기하지 않고 들어와서 아들을 교육시켰어요. 정말 감동스러웠어요."

1935년 11월, 임시정부는 일본특무대의 대대적 조사를 피해 장쑤성 전쟝으로 이전합니다.

지방문헌 등 그 어떤 자료에도 행적이 남아있지 않은 전쟝 임시정부..

다만 김구 선생이 이곳 소학교에서 강연했던 사실이 증언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녹취> 다창롱(1922년 출생/퇴직교사) : "일본이 얼마나 한국인들에게 각박하게 대하고 있는지를 강연했어요. 당시 듣고 있던 학생들이 모두 분개했습니다."

전쟝에서의 생활도 잠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1937년 11월 난징으로 진격해오자 임시정부도 다시 유랑길에 오릅니다.

도착지는 후난성 창샤..

문화유적으로 지정된 조선혁명당 본부 남목청에는 김구 선생이 세력통합을 추진하다 피격된 장소가 남아 있습니다.

<녹취> 창샤임시정부유적지 영상자료 : "중국국민정부 수뇌인 장제스도 전문을 보내 부상상태를 알아보고, 대표를 파견해 은화 3천 원을 보내와 위로를 하였다."

일본군의 폭격이 점차 내륙으로 향하던 이 시기,

임시정부는 1년반 동안 창샤에서 광저우, 다시 류저우로 중국 각지를 떠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도달한 곳은 충칭으로 들어가는 관문 치쟝..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자리엔 이젠 병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하천변에 있었다는 주요 임정요원들의 거주지..

임정 군무부장을 지낸 조성환 선생의 옛집은 허물어진 뒤 공장으로 바뀌었고..

김구 선생이 살았던 집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인터뷰> 왕펑린(치쟝박물관 역사해설사) : "김구 선생이 치쟝에서 여기 살았어요. 이전에는 집 한 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없어졌어요."

그 근처에서 발견된 폐가 한 채, 우거진 잡초 속에서 전체 가옥의 반 정도만 남은 채 쓰러질 듯 서 있습니다.

<김태욱>이 곳은 치쟝 임시정부 시절 이동녕 선생이 머물던 집입니다.

치쟝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임시정부 유적이지만 이렇게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낡고 녹슨 표지 하나만이 이곳이 선생의 옛 주거지였음을 쓸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치쟝시가 박물관에 임시정부 관련 기록을 전시하고 뒤늦게 유적 보존에 나선 것은 그나마 위안입니다.

<인터뷰> 후정쥔(치쟝박물관 서기) : "치쟝에서 보존하고 있는 곳은 이동녕 선생의 옛집 밖에 없어요. 투어완 인민병원 옆에 있는데 복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잊혀지다시피한 치쟝 임시정부 시절..

그러나 독립운동 역사에서 이 시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광복군 창설의 핵심 준비 작업이 모두 치쟝 시절의 업적입니다.

<인터뷰> 간루(충칭임시정부 연구원) : "치쟝에서 3당 합병회의가 열려서 한국독립당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치쟝 시기는 한국 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출발을 알린 상하이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일제에 맞서 해방의 순간을 맞은 충칭 임시정부..

그러나 정부의 면모를 세우고 독립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한 건 바로 고난과 역경의 유랑시절이었습니다.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는 임시정부 유랑 8년..

중국 각지에 흩어진 유적의 발굴과 보전, 그리고 역사적 재평가가 시급합니다.
  • [월드 리포트] 사라져 가는 임시정부 발자취
    • 입력 2014-08-16 08:50:27
    • 수정2014-08-16 09:22:41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어제가 바로 제69주년 광복절이었죠?

우리 국민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의 출발이 상해임시정부라는 사실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8년 동안이나 유랑생활을 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잊혀져가는 임시정부 유랑 8년, 그 발자취를 김태욱 특파원이 쫓아가봤습니다.

<리포트>

상하이 점령으로 일제가 침략전쟁을 본격화하던 1932년 4월..

24살의 한 대한 청년이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녹취> 기록화면 : "일본군 사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주요 군 고급장교들이 후송되는 장면입니다."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킨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이를 계기로 한중 항일연대가 만들어지면서 독립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제의 집요한 추적이 시작되면서 1919년 시작된 임시정부 상하이 시대는 13년만에 막을 내립니다.

임시정부 유랑의 첫 기착지 저장성 항저우..

천상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항저우가 있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로선 이 때가 최대의 시련기이기도 했습니다.

쫓겨온 임정요원들이 항저우에서 처음 자리잡은 곳은 여관방 한 칸이 전부였습니다.

<녹취> 최란(항저우임시정부기념관 부장) : "여기 와서 5개월 남짓하게 있었어요. 한 방에서 (일을) 했어요."

임정요원들이 살았다는 항저우 우푸리 일대..

옛집들은 지금도 그대로지만 과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녹취> 왕펑잉(50여년 거주) : "모르겠는데요. 우리가 여기 왔을 때는 다 일반 주민이었어요. 내가 여기서 50년 넘게 살았는데 한국인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철저히 신분을 감춰야 했기 때문에 당시 임정요원들의 행적을 찾기는 이제는 더욱 어려운 일이 돼버렸습니다.

다만 청사 자리는 2007년 원형 복원작업이 완료돼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좁은 회의실과 침실을 겸한 사무실 두 칸, 소박하고 단출한 공간이지만 훌륭한 역사교육의 장입니다.

<인터뷰> 쟝징(관람객) : "어린 친구들이 여기와서 보고 나면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시 일제의 표적이 된 김구 선생이 몸을 숨긴 곳은 물의 도시 지아싱입니다.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문을 달아 옷장으로 가장했고..

침대 곁에는 비밀 탈출구를 만들어 언제든 피신할 준비를 해뒀습니다.

김구 선생은 당시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와 함께 하루종일 운하를 돌며 일제의 추격을 따돌려야 했습니다.

<인터뷰> 셩팡(지아싱 김구피난처관리소장) : "상황이 매우 위급해졌을 때 김구 선생이 비밀통로로 내려와서 이 배를 타고 도망갔어요. '주아이바오'가 배에서 그를 기다렸어요."

이동녕 선생 등 임정요원들이 거주했던 집도 근방에 남아 있습니다.

지아싱 시정부가 지난 1996년 훼손된 원형을 복원해 시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한국인의 발길은 드뭅니다.

<인터뷰> 후슈잉(관리인) : "하루는 한국인 부부가 정신지체 아들을 데리고 왔어요. 큰 비가 와서 문을 닫으려했는데 포기하지 않고 들어와서 아들을 교육시켰어요. 정말 감동스러웠어요."

1935년 11월, 임시정부는 일본특무대의 대대적 조사를 피해 장쑤성 전쟝으로 이전합니다.

지방문헌 등 그 어떤 자료에도 행적이 남아있지 않은 전쟝 임시정부..

다만 김구 선생이 이곳 소학교에서 강연했던 사실이 증언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녹취> 다창롱(1922년 출생/퇴직교사) : "일본이 얼마나 한국인들에게 각박하게 대하고 있는지를 강연했어요. 당시 듣고 있던 학생들이 모두 분개했습니다."

전쟝에서의 생활도 잠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1937년 11월 난징으로 진격해오자 임시정부도 다시 유랑길에 오릅니다.

도착지는 후난성 창샤..

문화유적으로 지정된 조선혁명당 본부 남목청에는 김구 선생이 세력통합을 추진하다 피격된 장소가 남아 있습니다.

<녹취> 창샤임시정부유적지 영상자료 : "중국국민정부 수뇌인 장제스도 전문을 보내 부상상태를 알아보고, 대표를 파견해 은화 3천 원을 보내와 위로를 하였다."

일본군의 폭격이 점차 내륙으로 향하던 이 시기,

임시정부는 1년반 동안 창샤에서 광저우, 다시 류저우로 중국 각지를 떠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도달한 곳은 충칭으로 들어가는 관문 치쟝..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자리엔 이젠 병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하천변에 있었다는 주요 임정요원들의 거주지..

임정 군무부장을 지낸 조성환 선생의 옛집은 허물어진 뒤 공장으로 바뀌었고..

김구 선생이 살았던 집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인터뷰> 왕펑린(치쟝박물관 역사해설사) : "김구 선생이 치쟝에서 여기 살았어요. 이전에는 집 한 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없어졌어요."

그 근처에서 발견된 폐가 한 채, 우거진 잡초 속에서 전체 가옥의 반 정도만 남은 채 쓰러질 듯 서 있습니다.

<김태욱>이 곳은 치쟝 임시정부 시절 이동녕 선생이 머물던 집입니다.

치쟝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임시정부 유적이지만 이렇게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낡고 녹슨 표지 하나만이 이곳이 선생의 옛 주거지였음을 쓸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치쟝시가 박물관에 임시정부 관련 기록을 전시하고 뒤늦게 유적 보존에 나선 것은 그나마 위안입니다.

<인터뷰> 후정쥔(치쟝박물관 서기) : "치쟝에서 보존하고 있는 곳은 이동녕 선생의 옛집 밖에 없어요. 투어완 인민병원 옆에 있는데 복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잊혀지다시피한 치쟝 임시정부 시절..

그러나 독립운동 역사에서 이 시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광복군 창설의 핵심 준비 작업이 모두 치쟝 시절의 업적입니다.

<인터뷰> 간루(충칭임시정부 연구원) : "치쟝에서 3당 합병회의가 열려서 한국독립당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치쟝 시기는 한국 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출발을 알린 상하이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일제에 맞서 해방의 순간을 맞은 충칭 임시정부..

그러나 정부의 면모를 세우고 독립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한 건 바로 고난과 역경의 유랑시절이었습니다.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는 임시정부 유랑 8년..

중국 각지에 흩어진 유적의 발굴과 보전, 그리고 역사적 재평가가 시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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