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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회고록 “북 정상회담 5번 제안”
입력 2015.01.29 (17:20) 수정 2015.01.29 (19:48) 시사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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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북한이 5번이나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밖에도 대외비 내용이 수두룩합니다.

그 비밀의 문을 열어보겠습니다.

MB의 외교안보 브레인이었던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5번인가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첫번째 제의는 언제쯤 있었습니까?

-5번 이렇게 꼭 찍어서 이때이때 분명히 제안이라고 볼 수 없고 큰 국정 5년의 흐름 속에서 북한이 내부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그런 고위급 대화에 대한 희망을 전해 왔다 이렇게 보고요.

잘 알려진 대로 그 단초는 2009년 천안함이 일어나기 한 10개월 전이 되겠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서 조문회담차 온 사람들이 시작했다 이런 얘기군요.

지금 김태효 전 전략기획관께서 첫 시작에 대한 얘기를 하셨는데 사실 아주 중요한 내용들이 많아서 저희가 일목요연하게 한번 정리를 해서 전달을 먼저 해 드리겠습니다.

박지현 앵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보면요.

싱가포르 회담 사전접촉 자리에 북한은 김양건 통일전선 부장을, 우리측은 임태희 노동부 장관을 보냈다고 합니다.

20일 후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서명한 내용이라며 3장짜리 합의서라는 걸 들고 나왔는데요.

문서에는 정상회담 조건으로 옥수수 100만톤, 쌀 40만톤, 비료 30만의 식량을 비롯해서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달러어치를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자본금 100억달러를 제공하라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2010년 12월에 있었습니다.

북측 보위부 고위인사가 비밀리에 서울에 들어온 것인데요.

당시 이 대통령과 면담을 하지 못하고 예정보다 하루 더 머물다 돌아가 북한은 공개처형을 했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 면담에 실패했는데요.

즉각 돌아오지 않고 하루 더 머무른 것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이 크게 화를 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이 회고록은 밝히고 있습니다.

-박지현 앵커 수고했습니다.

이제부터 정말 중요한 얘기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도표를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게 1차 남북정상회담 제안과 관련해서 중요한 일지기 때문에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한번 도표를 보실까요.

지금 도표가 나오는데요.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과 관련해서 8월 21일에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이죠.

그다음에 김양건 통일전선부 부장하고 서울힐튼호텔에서 비밀리에 만납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김기남 북한 대남비서가 청와대로 들어가서 대통령을 예방하죠.

그리고 나서 도표에는 안 나옵니다마는 5일 후에는 이산가족 상봉에 전격적으로 합의를 합니다.

그에 따라서 9월 26일부터 10월 1일 사이에 추석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만남이 있고 나서 생긴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한 9일 후군요.

10월 10일에 베이징에서는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리는데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정상회담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에 싱가포르에서 다시 한 번 임태희, 김양건 회동이 열립니다.

이 싱가포르 회동에서 나중에 해석을 놓고 문제가 생기는데 그게 언제 생기냐 하면 11월 7일에 통일부와 북한의 통일전선부, 그러니까 통통회담에서 문제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1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이 비밀접촉 또는 공개접촉을 했던 일지입니다.

지금 화면을 보셨는데요.

이러한 특사급의 비밀회동과 대통령과의 면담 이런 것을 통해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고 남북 정상회담이 구체적으로 추진됐다는 건데요.

그런데 11월에 갑자기 틀어져버렸습니다.

이 부분이 이제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건데 이제부터 그 진실을 한번 파헤쳐보겠습니다.

우리 김태효 교수님.

지금 교수시니까 교수님이라고 여쭤보겠습니다.

임태희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하고 김양건 부장하고 싱가포르에서 비밀리에 만났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나서 북한은 합의문을 썼다고 하는 거고 그 합의문 밑에 임태희 장관이 사인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우리쪽은 그게 아니라는 것 같기도 한데 여하튼 그러면 사인을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그 문건이 2장짜리든 3장짜리든 북한이 실제로 당국간에 우리 통일부와 통일전선부와의 회동이 있으면서 그것을 주장하고 들고 나왔는데요.

안 그래도 제가 기억을 해 보면 그 당시에 특사로 보내서 여러 가지로 협상을 진행을 시켰으니까 당시에 임 장관께서 북한측과 어떤 말을 하고 어디까지 합의가 됐는지를 다 확인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런데 결국에 공식적인 정부라인끼리 합의가 최종합의기 때문에 현장에서 급박하게 여러 가지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당시에 임 장관께서 서명을 한 장을 했다는 얘기인데 그 서명한 내용이 북한측이 보기에는 최종 합의다라고 인식을 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다는 얘기겠죠.

-최종 합의라고 표현을 쓰셨는데 오해할 수 있었다는 건데 북한이 오해할 수 있었다면 그냥 서로 회담록 정도가 아니고 적어도 합의문 형태의 어떤 문건에 임태희 당시 장관이 특사 자격으로 사인을 했기 때문에 이건 최종합의다, 가합의든 최종합의든간에 합의문의 형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돌아갔고 나중에 통통회담 때 그것을 자, 봐라 이렇게 합의하지 않았냐라고 낸 것 아니겠어요?

-제가 싱가포르에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어휘와 단어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죠.

그러나 회고록에 나와 있듯이 북한이 회담으로 나온 사람들의 여러 가지 사정 또 부탁, 그리고 뭔가 성과가 있어야 과거처럼 잘 될 것 아니냐.

그러면 고려해 볼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정도는 또 가서 대통령께 설득을 드려봐야겠다 해서 합의가 비공식적으로 그렇게.

-됐을 수도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어쨌든 북한은 믿고 싶은 대로 자꾸 믿으면서 마지막 최종 결과...

-그런데 북한이 말이에요.

12월, 조금 전에 도표에서 봤습니다마는 이른바 통통회담에서 남측이 뒤통수를 쳤다.

합의를 했는데 뭔 소리냐 하면서 남북관계가 급랭하게 되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이 북한의 단순한 오해였느냐, 아니면 그 당시 정가에서는 사실 비밀리에 돌아다닌 얘기는 우리 남한 정부,우리 정부의 강경파들이 임태희 당시 장관의 합의를 엎어버렸다 이런 얘기도 사실은 좀 돌고 그랬단 말이죠.

-우리 국민들이 봤을 때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과연 어떤 조건과 어떤 남북관계를 상정하고 그 회담이 이루어졌을까를 관심 있게 볼 거 아니에요.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당시에 대북관계 라인에 있었던,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볼 때 오늘 지금 드러난 북한의 요구사항들은 심하다 이거죠.

그리고 사실은 북한 주민들한테 가는 물자가 아니라 북한 당국이 정권의 힘을 더 쥐기 위한 배급제도를 강화하는 데 쓰인다든지 군량미로 전이가 될 수 있다든가 아니면 아스팔트나 저런 어마어마한 현금 같은 것은 또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전량물자로 흐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북한이 말이에요.

국가개발은행 설립자본금으로 100억달러 달라 했다는 것은 그 당시 미국이 북한의 돈줄을 콱 쥐어서 말이죠.

아무 돈도 못 들어가게 하니까 급해서 이런 걸 제안했다 이렇게 봐야 할까요?

-이미 부시 대통령 말기에 방코델타아시아는 냉각탑을 폭파하는 조건으로 해제가 됐지만 사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대북강경책, 봉쇄 자꾸 이렇게 얘기하는데 실제로는 과거처럼 핵과 미사일에 쓰일 지원은 좀 줄이고 어떻게 하면 이 북한의 시장 그리고 주민들한테 민생에 도움이 되는 물자나 지원품목을 좀더 개발해서 늘리나 이렇게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 정권은 과거처럼 하고 싶었던 것이죠.

원하는 물자가 똑같았는데 우리는 다른 방도로 도와주고 싶었고 아마 그래서 의도는 다르고 그것을 매개로 정상회담은 하고 싶고.

그래서 이전 정부와는 다르게 먼저 우리가 바빠서 정상회담을 자꾸 재촉했던 것이 그 이전에 2번의 정상회담이었다면 이번은 북한이 급하고 또 원하는 것을 얻고 싶고 그러나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 과정과 수순이 좀 다르게 진행됐다 그렇게 볼 수 있죠.

-북한이 급하게 접근해 왔다고 당시 느끼셨나요?

북한 사정이 급하구나.

-그렇습니다.

지금 회고록에 드러난 시점은 8월에 조문단이 예방을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회고록에도 우리가 다 쓰지 않았지만 그 조문단이 우리에게 김정일의 메시지를 들고 오기 두세 달 전부터 비슷한 요구조건과 정상회담에 대한 제의가 계속 들어옵니다.

따라서 시작은 5월이라고 봐야 됩니다.

-임태희, 김양건 회동이 사실상 무산되고 나서는 남북비밀접촉은 일절 없었습니까?

무슨 정보파트를 제외한 비선접촉.

-글쎄요.

그 비선접촉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확정이 되고 국민들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시점이 올 때까지는 조심스럽게 서로의 메시지를 확인한다라는 관점에서는 5년 내내 필요에 따라서 상시적으로 북한과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공식라인이 아닌 의사접촉이 있었다 이렇게 봐도 되죠?

-공식라인은 사실 2009년에 파행 이후로는 거의 없었다고 제가 기억이 됩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말이죠.

이제 한중 관련 문제도 조금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상당히 좀 의미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요.

박지현 앵커, 다시 한 번 좀 전해 주시죠.

-때는 2012년 1월 9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국빈 만찬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 전 대통령은 통일이 되면 양국은 국경을 마주하는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된다고 하면서 한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기정사실화했는데요.

이는 중국에서 금기시되는 내용인데 말입니다.

또 한반도 통일 후 미군은 주둔하고 있는 위치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히며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할 것.

또 통일한국이 중국 입장을 배려할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고 합니다.

-박지현 앵커 수고했습니다.

교수님, 지금 중요한 대목인데 중국이 가장 걱정하는 데 압록강까지 미군이 들어온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서 아마 우리 대통령이 그렇게 안심을 시켜드리는 차원에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이 이후에 중국의 반응이라고 그럴까, 어땠습니까?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고 나서.

-좀 의미 있는 중국측의 변화라고 하면 2008년, 9년에 계속 우리의 통일정책이라든지 또 북한의 앞으로의 불투명성 이런 것들을 우리가 굉장히 솔직하게 토론을 꺼낼 때 중국이 좀 조심스러워하거나 대답을 끊거나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경청하는 태도가 굉장히 진지해지고 또 때때로는 자기들이 관심 있어하는 내용을 또 질문을 해 오기도 하고 이렇게 변화된 건 저는 크게 평가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북한 핵을 왜 중국이 당장 해결해 주지 않느냐.

그리고 우리의 통일정책을 왜 시원하게 자유민주통일이라고 불러주지 않느냐.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명박 정부는 한중관계를 망친 것 아니냐.

한미관계만 신경쓴 것 아니냐 이런 평가도 있었습니다마는 실제로 40차례 가까운 정상회담을 통해서 중국이 계속 북한의 미래 그리고 우리의 통일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묵묵하게 들어보고 또 어떻게 하면 미래의 한국과 중국이 서로 상생해 서로 이익을 나눌 수 있는 경제 그리고 안보관계까지도 갈 수 있겠나 하는 것을 우리 실무진을 포함해서 정상회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시간이 촉박해서요.

한미관계도 좀 여쭙고 싶은데 자원외교가 요새 하도 국정조사 이런 것도 있고 해서...

한승수 총리가 했다 이렇게 해 버리니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자원외교가 말이죠.

뭐가 문제였어요?

스스로 지금 와서 되돌아보시면.

-자원외교는 상대방 국가와 지역에 따라 다른데요.

크게 우리에게 필요로 한 것은 에너지 자원외교죠.

그래서 원자력을 수출하고 충분한 핵물질을 공급하는 대상으로서 UA가 우리가 성공한 자원외교로 평가할 수 있고요.

그다음에 오랜 권위주의 정부이면서 자원이 풍부하고 지도자의 결단에 따라서 한국과 장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경우가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같은 건데 그건 결국 이명박 정부 때 합의한 사항들이 지금 발전되고 또 계속 연장이 되는 경우가 박 정부에 들어와서도 여러 가지로 잘된 치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투명한 것은 아프리카대륙이나 독재국가에서 말을 해 놓고 여러 나라에게 동시에 경쟁을 시킨다든지 아니면 중간에 관리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계속 시간을 끈다든지 하면서 손실이나 불투명성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내부적으로 굉장히 검증과정을 거치면서 신중하게 접근을 했다고 저도 옆에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당시에 박영준 차관이 너무 나서 가지고 얽히고 그런 건 없었어요?

-일은 그렇게 진행되기 힘들고요.

대통령 보고를 항상 거치고 또 관련 부처와 관련 국책연구기관들이 항상 심층분석을 하고 동행을 합니다.

따라서 저는 책임을 지금 누구한테 떠넘긴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했다면 나중에 재평가를 받아서 이렇게 잘됐을 수 있었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알겠습니다.

우리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명박 회고록 “북 정상회담 5번 제안”
    • 입력 2015-01-29 17:29:20
    • 수정2015-01-29 19:48:38
    시사진단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북한이 5번이나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밖에도 대외비 내용이 수두룩합니다.

그 비밀의 문을 열어보겠습니다.

MB의 외교안보 브레인이었던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5번인가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첫번째 제의는 언제쯤 있었습니까?

-5번 이렇게 꼭 찍어서 이때이때 분명히 제안이라고 볼 수 없고 큰 국정 5년의 흐름 속에서 북한이 내부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그런 고위급 대화에 대한 희망을 전해 왔다 이렇게 보고요.

잘 알려진 대로 그 단초는 2009년 천안함이 일어나기 한 10개월 전이 되겠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서 조문회담차 온 사람들이 시작했다 이런 얘기군요.

지금 김태효 전 전략기획관께서 첫 시작에 대한 얘기를 하셨는데 사실 아주 중요한 내용들이 많아서 저희가 일목요연하게 한번 정리를 해서 전달을 먼저 해 드리겠습니다.

박지현 앵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보면요.

싱가포르 회담 사전접촉 자리에 북한은 김양건 통일전선 부장을, 우리측은 임태희 노동부 장관을 보냈다고 합니다.

20일 후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서명한 내용이라며 3장짜리 합의서라는 걸 들고 나왔는데요.

문서에는 정상회담 조건으로 옥수수 100만톤, 쌀 40만톤, 비료 30만의 식량을 비롯해서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달러어치를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자본금 100억달러를 제공하라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2010년 12월에 있었습니다.

북측 보위부 고위인사가 비밀리에 서울에 들어온 것인데요.

당시 이 대통령과 면담을 하지 못하고 예정보다 하루 더 머물다 돌아가 북한은 공개처형을 했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 면담에 실패했는데요.

즉각 돌아오지 않고 하루 더 머무른 것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이 크게 화를 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이 회고록은 밝히고 있습니다.

-박지현 앵커 수고했습니다.

이제부터 정말 중요한 얘기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도표를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게 1차 남북정상회담 제안과 관련해서 중요한 일지기 때문에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한번 도표를 보실까요.

지금 도표가 나오는데요.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과 관련해서 8월 21일에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이죠.

그다음에 김양건 통일전선부 부장하고 서울힐튼호텔에서 비밀리에 만납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김기남 북한 대남비서가 청와대로 들어가서 대통령을 예방하죠.

그리고 나서 도표에는 안 나옵니다마는 5일 후에는 이산가족 상봉에 전격적으로 합의를 합니다.

그에 따라서 9월 26일부터 10월 1일 사이에 추석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만남이 있고 나서 생긴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한 9일 후군요.

10월 10일에 베이징에서는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리는데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정상회담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에 싱가포르에서 다시 한 번 임태희, 김양건 회동이 열립니다.

이 싱가포르 회동에서 나중에 해석을 놓고 문제가 생기는데 그게 언제 생기냐 하면 11월 7일에 통일부와 북한의 통일전선부, 그러니까 통통회담에서 문제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1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이 비밀접촉 또는 공개접촉을 했던 일지입니다.

지금 화면을 보셨는데요.

이러한 특사급의 비밀회동과 대통령과의 면담 이런 것을 통해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고 남북 정상회담이 구체적으로 추진됐다는 건데요.

그런데 11월에 갑자기 틀어져버렸습니다.

이 부분이 이제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건데 이제부터 그 진실을 한번 파헤쳐보겠습니다.

우리 김태효 교수님.

지금 교수시니까 교수님이라고 여쭤보겠습니다.

임태희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하고 김양건 부장하고 싱가포르에서 비밀리에 만났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나서 북한은 합의문을 썼다고 하는 거고 그 합의문 밑에 임태희 장관이 사인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우리쪽은 그게 아니라는 것 같기도 한데 여하튼 그러면 사인을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그 문건이 2장짜리든 3장짜리든 북한이 실제로 당국간에 우리 통일부와 통일전선부와의 회동이 있으면서 그것을 주장하고 들고 나왔는데요.

안 그래도 제가 기억을 해 보면 그 당시에 특사로 보내서 여러 가지로 협상을 진행을 시켰으니까 당시에 임 장관께서 북한측과 어떤 말을 하고 어디까지 합의가 됐는지를 다 확인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런데 결국에 공식적인 정부라인끼리 합의가 최종합의기 때문에 현장에서 급박하게 여러 가지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당시에 임 장관께서 서명을 한 장을 했다는 얘기인데 그 서명한 내용이 북한측이 보기에는 최종 합의다라고 인식을 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다는 얘기겠죠.

-최종 합의라고 표현을 쓰셨는데 오해할 수 있었다는 건데 북한이 오해할 수 있었다면 그냥 서로 회담록 정도가 아니고 적어도 합의문 형태의 어떤 문건에 임태희 당시 장관이 특사 자격으로 사인을 했기 때문에 이건 최종합의다, 가합의든 최종합의든간에 합의문의 형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돌아갔고 나중에 통통회담 때 그것을 자, 봐라 이렇게 합의하지 않았냐라고 낸 것 아니겠어요?

-제가 싱가포르에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어휘와 단어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죠.

그러나 회고록에 나와 있듯이 북한이 회담으로 나온 사람들의 여러 가지 사정 또 부탁, 그리고 뭔가 성과가 있어야 과거처럼 잘 될 것 아니냐.

그러면 고려해 볼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정도는 또 가서 대통령께 설득을 드려봐야겠다 해서 합의가 비공식적으로 그렇게.

-됐을 수도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어쨌든 북한은 믿고 싶은 대로 자꾸 믿으면서 마지막 최종 결과...

-그런데 북한이 말이에요.

12월, 조금 전에 도표에서 봤습니다마는 이른바 통통회담에서 남측이 뒤통수를 쳤다.

합의를 했는데 뭔 소리냐 하면서 남북관계가 급랭하게 되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이 북한의 단순한 오해였느냐, 아니면 그 당시 정가에서는 사실 비밀리에 돌아다닌 얘기는 우리 남한 정부,우리 정부의 강경파들이 임태희 당시 장관의 합의를 엎어버렸다 이런 얘기도 사실은 좀 돌고 그랬단 말이죠.

-우리 국민들이 봤을 때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과연 어떤 조건과 어떤 남북관계를 상정하고 그 회담이 이루어졌을까를 관심 있게 볼 거 아니에요.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당시에 대북관계 라인에 있었던,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볼 때 오늘 지금 드러난 북한의 요구사항들은 심하다 이거죠.

그리고 사실은 북한 주민들한테 가는 물자가 아니라 북한 당국이 정권의 힘을 더 쥐기 위한 배급제도를 강화하는 데 쓰인다든지 군량미로 전이가 될 수 있다든가 아니면 아스팔트나 저런 어마어마한 현금 같은 것은 또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전량물자로 흐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북한이 말이에요.

국가개발은행 설립자본금으로 100억달러 달라 했다는 것은 그 당시 미국이 북한의 돈줄을 콱 쥐어서 말이죠.

아무 돈도 못 들어가게 하니까 급해서 이런 걸 제안했다 이렇게 봐야 할까요?

-이미 부시 대통령 말기에 방코델타아시아는 냉각탑을 폭파하는 조건으로 해제가 됐지만 사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대북강경책, 봉쇄 자꾸 이렇게 얘기하는데 실제로는 과거처럼 핵과 미사일에 쓰일 지원은 좀 줄이고 어떻게 하면 이 북한의 시장 그리고 주민들한테 민생에 도움이 되는 물자나 지원품목을 좀더 개발해서 늘리나 이렇게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 정권은 과거처럼 하고 싶었던 것이죠.

원하는 물자가 똑같았는데 우리는 다른 방도로 도와주고 싶었고 아마 그래서 의도는 다르고 그것을 매개로 정상회담은 하고 싶고.

그래서 이전 정부와는 다르게 먼저 우리가 바빠서 정상회담을 자꾸 재촉했던 것이 그 이전에 2번의 정상회담이었다면 이번은 북한이 급하고 또 원하는 것을 얻고 싶고 그러나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 과정과 수순이 좀 다르게 진행됐다 그렇게 볼 수 있죠.

-북한이 급하게 접근해 왔다고 당시 느끼셨나요?

북한 사정이 급하구나.

-그렇습니다.

지금 회고록에 드러난 시점은 8월에 조문단이 예방을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회고록에도 우리가 다 쓰지 않았지만 그 조문단이 우리에게 김정일의 메시지를 들고 오기 두세 달 전부터 비슷한 요구조건과 정상회담에 대한 제의가 계속 들어옵니다.

따라서 시작은 5월이라고 봐야 됩니다.

-임태희, 김양건 회동이 사실상 무산되고 나서는 남북비밀접촉은 일절 없었습니까?

무슨 정보파트를 제외한 비선접촉.

-글쎄요.

그 비선접촉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확정이 되고 국민들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시점이 올 때까지는 조심스럽게 서로의 메시지를 확인한다라는 관점에서는 5년 내내 필요에 따라서 상시적으로 북한과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공식라인이 아닌 의사접촉이 있었다 이렇게 봐도 되죠?

-공식라인은 사실 2009년에 파행 이후로는 거의 없었다고 제가 기억이 됩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말이죠.

이제 한중 관련 문제도 조금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상당히 좀 의미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요.

박지현 앵커, 다시 한 번 좀 전해 주시죠.

-때는 2012년 1월 9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국빈 만찬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 전 대통령은 통일이 되면 양국은 국경을 마주하는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된다고 하면서 한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기정사실화했는데요.

이는 중국에서 금기시되는 내용인데 말입니다.

또 한반도 통일 후 미군은 주둔하고 있는 위치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히며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할 것.

또 통일한국이 중국 입장을 배려할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고 합니다.

-박지현 앵커 수고했습니다.

교수님, 지금 중요한 대목인데 중국이 가장 걱정하는 데 압록강까지 미군이 들어온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서 아마 우리 대통령이 그렇게 안심을 시켜드리는 차원에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이 이후에 중국의 반응이라고 그럴까, 어땠습니까?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고 나서.

-좀 의미 있는 중국측의 변화라고 하면 2008년, 9년에 계속 우리의 통일정책이라든지 또 북한의 앞으로의 불투명성 이런 것들을 우리가 굉장히 솔직하게 토론을 꺼낼 때 중국이 좀 조심스러워하거나 대답을 끊거나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경청하는 태도가 굉장히 진지해지고 또 때때로는 자기들이 관심 있어하는 내용을 또 질문을 해 오기도 하고 이렇게 변화된 건 저는 크게 평가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북한 핵을 왜 중국이 당장 해결해 주지 않느냐.

그리고 우리의 통일정책을 왜 시원하게 자유민주통일이라고 불러주지 않느냐.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명박 정부는 한중관계를 망친 것 아니냐.

한미관계만 신경쓴 것 아니냐 이런 평가도 있었습니다마는 실제로 40차례 가까운 정상회담을 통해서 중국이 계속 북한의 미래 그리고 우리의 통일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묵묵하게 들어보고 또 어떻게 하면 미래의 한국과 중국이 서로 상생해 서로 이익을 나눌 수 있는 경제 그리고 안보관계까지도 갈 수 있겠나 하는 것을 우리 실무진을 포함해서 정상회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시간이 촉박해서요.

한미관계도 좀 여쭙고 싶은데 자원외교가 요새 하도 국정조사 이런 것도 있고 해서...

한승수 총리가 했다 이렇게 해 버리니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자원외교가 말이죠.

뭐가 문제였어요?

스스로 지금 와서 되돌아보시면.

-자원외교는 상대방 국가와 지역에 따라 다른데요.

크게 우리에게 필요로 한 것은 에너지 자원외교죠.

그래서 원자력을 수출하고 충분한 핵물질을 공급하는 대상으로서 UA가 우리가 성공한 자원외교로 평가할 수 있고요.

그다음에 오랜 권위주의 정부이면서 자원이 풍부하고 지도자의 결단에 따라서 한국과 장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경우가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같은 건데 그건 결국 이명박 정부 때 합의한 사항들이 지금 발전되고 또 계속 연장이 되는 경우가 박 정부에 들어와서도 여러 가지로 잘된 치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투명한 것은 아프리카대륙이나 독재국가에서 말을 해 놓고 여러 나라에게 동시에 경쟁을 시킨다든지 아니면 중간에 관리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계속 시간을 끈다든지 하면서 손실이나 불투명성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내부적으로 굉장히 검증과정을 거치면서 신중하게 접근을 했다고 저도 옆에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당시에 박영준 차관이 너무 나서 가지고 얽히고 그런 건 없었어요?

-일은 그렇게 진행되기 힘들고요.

대통령 보고를 항상 거치고 또 관련 부처와 관련 국책연구기관들이 항상 심층분석을 하고 동행을 합니다.

따라서 저는 책임을 지금 누구한테 떠넘긴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했다면 나중에 재평가를 받아서 이렇게 잘됐을 수 있었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알겠습니다.

우리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