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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갱, 70년의 기다림
입력 2015.08.16 (23:28) 수정 2015.08.17 (00:19) 취재파일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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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녹취> "6개월만 (하이난에) 갔다오면 가출옥을 해주겠다. (하이난에) 가면 좋은 식량상태와 노동조건이 상당히 좋다라고 하는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녹취> "사람이 죽으면 불에 태워서 천인갱에 던져버렸습니다. 사람을 태울 때 나는 그 냄새를 맡기가 굉장히 역겨웠어요."

<녹취> "그분들은 얼마나 돌아가실 때 조국에 오고싶어 했겠습니까. 보고싶고 울며불며 밤을 세웠을 건데..."

<오프닝>

천인갱,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묻힌 장소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몇 년 전 유해가 일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곳 하이난에서 일어났던 학살이 세상에 알려진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천인갱에 묻힌 조선인들, 그들은 왜 이곳에 끌려왔고, 또 왜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요?

<리포트>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과 해변에 가득한 야자수.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는 중국 최남단 하이난 섬입니다.

우리에게도 휴양지로 잘 알려진 이곳에 '조선촌'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는 이 작은 마을의 이름은 왜 '조선촌'이 됐을까?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이 마을은 일본군에게 끌려와 일했던 조선인들이 살았던 곳입니다. 그래서 '조선촌'이라고 불렀습니다."

70여 년 전 강제동원됐던 조선인들이 모여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조선촌'.

조선촌 마을 한쪽에는 축구장 4배 크기의 커다란 공터가 있습니다.

지금은 텃밭처럼 보이지만 이곳이 바로 숨진 조선인이 묻힌 천인갱입니다.

<인터뷰> 조선촌 주민 : "밤에 사람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예요. 해골도 나오고 울음소리도 들려서 이 근처엔 무서워서 잘 오지 않아요."

주민들은 어릴적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굶어죽거나 밥을 못 먹어 힘이 없고 쓸모없어지면 여기에 묻어버렸습니다. 그 수가 대략 천 명 정도 돼서 '천인갱'이라고 합니다."

굶주리거나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거나 도망치다 잡히면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일을 하지 못하면 두손을 묶어서 저런 큰 나무에 이렇게 매달아서 몽둥이로 때려 죽인 다음에 여기다가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취재진은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주민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70여년 전 일을 기억하는 분들은 상당수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

우선,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을 찾아가 봤습니다.

올해 97살 쪼오우야시 할머니는 당시 일본군에 끌려가 도로 공사에 동원됐습니다.

일본군에게 맞아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인터뷰> 쪼오우야시 할머니 아들 : "주로 짐을 나르는 일을 하셨는데, 일본 사람들한테 맞아서 이쪽 다리가 이렇게 상하셨습니다."

여러차례 수소문 끝에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평생 이곳에서 살아온 원주민 리족 할머니, 림 야마이.

할머니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어렸을 적 보았던 참상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뷰> 림야마이(조선촌 주민) : "조선인들을 이렇게 매달아놓고, 이 정도 되는 막대기로 다리, 엉덩이, 등, 머리를 때려서 죽였습니다."

할머니는 시신이 불에 태워진 뒤 천인갱에 묻히는 장면을 모두 지켜봤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림야마이(조선촌 주민) : "사람이 죽으면 불에 태워서 천인갱에 던져버렸습니다. 사람을 태울 때 나는 그 냄새를 맡기가 굉장히 역겨웠어요. 그 때는 일본사람을 보면 너무 무서워서 오줌이 지릴 정도였습니다."

조선인들은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인터뷰> 림야마이(조선촌 주민) : "나무를 베고, 돌을 나르는 일을 시켰는데 음식을 안 먹이는 것 같았어요. 조선인들이 배가 고파서 이쪽 길에 나와서 고구마를 파먹다가 걸렸는데, 그냥 두들겨 패서 죽이더라고요."

그렇게 희생자가 늘어나다 갑자기 찾아온 일본의 패망.

어느 순간, 이 마을에서 조선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인터뷰> 림야마이(조선촌 주민) : "일본군이 항복하고 이곳을 떠났을 때 남아있는 조선인들은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있었던 건물과 낡아빠진 옷가지 몇 조각을 남기곤 사라졌어요. 아마 일본군이 전부 때려 죽였을 겁니다."

지난 1998년, 국내 연구팀이 천인갱에서 부분적인 발굴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불과 30센티미터 정도 땅을 파내려 가자, 10여 구의 유골이 나타납니다.

<인터뷰> 박선주(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한 10m x 10m 정도 했을 거예요. 나란히 나오는데 머리는 동쪽을 향해서 놓고 목을 보니까 일부는 철사줄 같은 걸로 묶었어. 묶여서 시신들이 쭉 나오더라고. 한 10여 구.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거 밖에 없었죠. 유해를 수습도 못하고 중국에서 못 가져가게 했으니까 그때만 해도..."

2천년대 초반에는 한 한국인 사업가가 천인갱 부지를 중국 정부로부터 임대해 유해 100여 구를 발굴한 뒤 인근에 건물을 짓고 유해를 안치했습니다.

천인갱을 역사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보존 상태가 좋은 유골 5구는 유리관에 따로 넣어 보관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이 지지부진해지자 이 사업가는 연락이 두절됐고, 건물을 관리하기로 했던 직원들도 떠나고 말았습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유해를 안치한 건물은 버려진 채 방치돼 있습니다.

유리관에 있던 유골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원래는 완전한 한 구의 유골이 있었는데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겠네요."

단지 안에 있던 유해도 상당수 유실됐습니다.

<녹취>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이쪽에 있던 게 한국 국기, 이쪽에 있는 게 중국 국이였는데, 어떻게 떨어져 나갔는지는 모르겠어요. 너무 오래돼서 떨어진 건지..."

추모비마저 훼손됐고, 천인갱 터에는 누군가 가축 사료용 작물을 심었습니다.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사실 이 울타리 안에는 농사를 지으면 안 되는데 아무도 관리를 안 하니까요. 돼지 사료로 쓴다고 고구마를 키우고 있습니다."

<녹취> "조상님께서 묻히신 자리에 돼지 먹이를 키우는 게 이게 참..."

이역만리 하이난 섬에 이름도 없이 버려진 조선인들.

취재진은 그들에 관한 기록과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하이난 섬의 대표적인 관광코스인 허우다오, 이른바 '원숭이 섬'.

이 섬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만든 큰 동굴이 있습니다.

동굴은 해안 경비를 위한 진지로 사용됐습니다.

<인터뷰> 원숭이섬 주민 : "98년인가 일본인 5명이 여기 와서 하이난 침략 당시 이곳 사람들을 붙잡아 이 동굴을 만들었다고 말했어요."

이런 진지 등 군사시설은 지금도 하이난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신주백(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 "동남아로의 작전 내지는 중국의 남쪽 지방의 작전에서의 굉장히 중요한 근거지였다. 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할 수 있는, 내지는 (중국의) 남쪽 지방을 공격할 수 있는 공군기지의 건설이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었다."

1939년, 일본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철광석 생산지였던 하이난 섬을 점령했습니다.

<녹취> 일본 뉴스 제56 호 : "1939년 2월 10일 남중국해 하이난으로 진군했던 우리 육해군 부대는 하이난의 요충지를 공략하여 장개석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섬을 점령한 지 4년 뒤, 당시 일본 내무대신 유자와 미치히토가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에게 문서를 보냅니다.

조선총독부의 수형자 2천 명을 하이난에 보내겠다는 내용입니다.

<음성대역> "하이난 광산 개발과 군수시설 건설에 다수의 노동자가 필요해 조선총독부 수형자 가운데 약 2천 명을 이 섬에 출역시키고자 한다."

이미 아시아 각지로 강제동원이 이뤄져 보낼 수 있는 인력이 바닥나자 감옥에 갇힌 수형자들까지 동원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인터뷰> 신주백(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 "하이난은 조선인 강제동원의 예정지였다기 보다는 전체적인 전쟁의 현황 속에서 특정한 전략적인 목적이 부각되니까 긴급동원이 요구되었던 공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로 죄수들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을 동원했던 것이지 강제동원의 어떤 전체적인 계획속에서 움직였던 공간은 아니다."

1943년 3월부터 이듬해인 1944년까지.

서울과 평양, 함흥과 원산, 부산과 광주 등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8차례에 걸쳐 모두 2천여 명이 차출돼 하이난으로 동원됐습니다.

당시 조선 전체 수형자의 1/10에 달하는 인원이었습니다.

주로 형기가 2년 정도 남은, 스무살에서 마흔살 사이의 건강한 남성들이었습니다.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1과장) : "일본은 그 전에도 일본인 수형자를 남양군도에 동원한 적은 있어요. 그런데 조선인 수형자를 그렇게 한 경우는 처음이고요. 그래서 2천 명의 수형자와 250명의 간수가 같이 출발을 하게 된 겁니다."

일본이 그들에게 붙인 이름은 남방파견보국대, 이른바 조선보국대입니다.

일본은 이들에게 하이난 동원의 대가로 가출옥, 즉 가석방을 제안했습니다.

하이난에서 여섯 달만 일하면 고국으로 돌아와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겁니다.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1과장) : "6개월만 (하이난에) 갔다오면 가출옥을 해주겠다, 해서 6개월이라는 기간을 약속했고요. (하이난에) 가면 좋은 식량상태와 노동조건이 상당히 좋다라고 하는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을 그냥 개인이 하거나 간수가 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이 했고요. 그 다음에 지금 부민관 앞 그러니까 서울시의회가 있는 그 앞을 행진까지 하면서 거기서 행사까지 하고."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광산에서의 고된 노동과 굶주림, 그리고 가혹행위와 학살이었습니다.

조선보국대 1500명이 건설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비행장이 있는 곳입니다.

하이난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광산 외에도 도로와 철도, 비행장 건설 등에 투입됐습니다.

당시 건설됐던 비행장은 지금도 중국의 해군 기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싼야의 비행장 건설과 해안선 축성공사 등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이 계속됐습니다.

이들은 수형자, 즉 죄수 신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노예와 다름 없는 처우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말라리아 등 풍토병에 시달리면서 사망자는 급격히 늘었습니다.

<음성대역> 장위샨(중국인 목격자/해남문사 제20집 기록) : "당시 콜레라와 말라리아가 유행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감염됐습니다. 일본군들은 자신에게 콜레라가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염된 노동자를 발견하면 생사여부를 불문하고 끌고 가서 불에 태웠습니다."

<음성대역> 故 고복남(하이난 강제동원 생존자) : "도망치다 잡히니까 나를 나무에 매달아놨는데, 그렇게 매달린 채로 석달 열흘을 있었어요. 나중에 수갑을 여니까 수갑이 살 속으로 들어가 뼈가 하얗게 보이더라고요."

그렇다면 6개월만 일하면 가출옥, 즉 가석방 시켜준다는 일본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경성형무소의 가출옥관계서류입니다.

서류마다 '해남도파견보국대'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있습니다.

하이난 파견을 이유로 가석방 됐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국에 돌아와 가석방된 것으로 확인된 인원은 모두 112명 뿐.

전체 동원 인원 2천 명의 5% 정도입니다.

이들 외에 전쟁이 끝난 뒤 하이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없는 걸까?

취재진은 그동안 공개된 적이 없던 하이난 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귀환보고서를 입수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6년 4월 작성한 이 귀환보고서에 '조선보국대'로 분류된 인원은 모두 658명.

이 가운데 조선인 간수를 제외한 수형자들은 606명에 불과합니다.

전체 2천여 명 가운데 가석방이 확인된 112명, 그리고 귀환보고서에 적힌 606명 등 7백여 명은 살아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천3백 명에 대한 기록은 현재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1995년, 중국 하이난성에서 발행한 책입니다.

천인갱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이 책엔 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음성대역> "일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천여 명의 조선 노동자들을 끌고와 지하갱도를 파게 하고 무기와 물자를 묻었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뜻밖에도 이 조선인들을 전부 살해해 한 곳에 묻었다. 이곳을 '천인갱'이라고 부르게 됐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천인갱이 지속적인 가혹행위와 개별적인 학살의 결과물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박선주(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쭉 이렇게 길게 나란히 묻었으면 이건 그래도 어느 정도 계획을 하고 묻어준 거거든요. 그런데 나란히 이렇게 나온 걸로 봐서는...집단으로 죽인 사람을 갖다가 막 전쟁이 끝나고 할 때 그 때 그렇게 나란히 매장할 정신이 있었을리 없잖아요."

하이난에서 사라진 1,300명, 7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이난 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강제동원 피해자는 최대 4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 정부가 수습한 유골은 불과 4백여 위.

일본은 종전 이후 지금까지 126만 위를 봉환했습니다.

<인터뷰> 안부수(아태평화교류협회 회장) : "강제로 자기 의사에 반해서 동원이 됐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얼마나 돌아가실 때 조국에 오고싶어 했겠습니까. 보고싶고 울며불며 밤을 세웠을 건데...유골이 고국에 오지 못하면 영혼이 오지 못한다는, 구천에 떠돈다는 말이 있죠. 그래서 억울한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꼭 모시고 와야 됩니다."

유리관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고, 유골이 담긴 단지도 정성스럽게 닦아냅니다.

유골이 안치된 건물을 청소하기 위해 한 민간단체가 나섰습니다.

<인터뷰> 김태문(영관장교연합회 사무총장) : "와보니까 관리도 너무 허술하고 먼지도 쌓이고 깨지고 엉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도 나서서 여기서 청소도 하고 깨끗하게 해서 위령제라도 모셔야지 않겠느냐..."

이어진 위령제, 식민지 수형자라는 이유로 열대의 섬에 끌려와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넋을 위로합니다.

<인터뷰> 권영해(대한민국건국회 회장) : "(유해를) 수습을 해서 안장이라도 하든지, 아니면 유해를 보관이라도 해야될텐데 보시다시피 작년이 다르고 금년이 다르고, 내년에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이대로 둘 수가 없다고 하는 심정에서 추모식을 하게된 겁니다."

황무지였던 천인갱 주변엔 어느덧 건물이 들어서고 개발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광복 70주년.

천인갱에 묻힌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지난 70년은 조국의 손길을 기다린 시간이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고, 유해를 봉환하는 것이 국가의 당연한 책무일 것입니다.



[연관기사]

☞ [디·퍼] ‘천인갱’, 하이난에서 사라진 조선인 1,300명

☞ [뉴스9] 중국 섬에서 쓸쓸히…강제징용자 1,300명 묻힌 ‘천인갱’
  • 천인갱, 70년의 기다림
    • 입력 2015-08-16 23:38:04
    • 수정2015-08-17 00:19:03
    취재파일K
<프롤로그>

<녹취> "6개월만 (하이난에) 갔다오면 가출옥을 해주겠다. (하이난에) 가면 좋은 식량상태와 노동조건이 상당히 좋다라고 하는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녹취> "사람이 죽으면 불에 태워서 천인갱에 던져버렸습니다. 사람을 태울 때 나는 그 냄새를 맡기가 굉장히 역겨웠어요."

<녹취> "그분들은 얼마나 돌아가실 때 조국에 오고싶어 했겠습니까. 보고싶고 울며불며 밤을 세웠을 건데..."

<오프닝>

천인갱,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묻힌 장소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몇 년 전 유해가 일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곳 하이난에서 일어났던 학살이 세상에 알려진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천인갱에 묻힌 조선인들, 그들은 왜 이곳에 끌려왔고, 또 왜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요?

<리포트>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과 해변에 가득한 야자수.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는 중국 최남단 하이난 섬입니다.

우리에게도 휴양지로 잘 알려진 이곳에 '조선촌'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는 이 작은 마을의 이름은 왜 '조선촌'이 됐을까?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이 마을은 일본군에게 끌려와 일했던 조선인들이 살았던 곳입니다. 그래서 '조선촌'이라고 불렀습니다."

70여 년 전 강제동원됐던 조선인들이 모여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조선촌'.

조선촌 마을 한쪽에는 축구장 4배 크기의 커다란 공터가 있습니다.

지금은 텃밭처럼 보이지만 이곳이 바로 숨진 조선인이 묻힌 천인갱입니다.

<인터뷰> 조선촌 주민 : "밤에 사람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예요. 해골도 나오고 울음소리도 들려서 이 근처엔 무서워서 잘 오지 않아요."

주민들은 어릴적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굶어죽거나 밥을 못 먹어 힘이 없고 쓸모없어지면 여기에 묻어버렸습니다. 그 수가 대략 천 명 정도 돼서 '천인갱'이라고 합니다."

굶주리거나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거나 도망치다 잡히면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일을 하지 못하면 두손을 묶어서 저런 큰 나무에 이렇게 매달아서 몽둥이로 때려 죽인 다음에 여기다가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취재진은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주민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70여년 전 일을 기억하는 분들은 상당수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

우선,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을 찾아가 봤습니다.

올해 97살 쪼오우야시 할머니는 당시 일본군에 끌려가 도로 공사에 동원됐습니다.

일본군에게 맞아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인터뷰> 쪼오우야시 할머니 아들 : "주로 짐을 나르는 일을 하셨는데, 일본 사람들한테 맞아서 이쪽 다리가 이렇게 상하셨습니다."

여러차례 수소문 끝에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평생 이곳에서 살아온 원주민 리족 할머니, 림 야마이.

할머니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어렸을 적 보았던 참상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뷰> 림야마이(조선촌 주민) : "조선인들을 이렇게 매달아놓고, 이 정도 되는 막대기로 다리, 엉덩이, 등, 머리를 때려서 죽였습니다."

할머니는 시신이 불에 태워진 뒤 천인갱에 묻히는 장면을 모두 지켜봤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림야마이(조선촌 주민) : "사람이 죽으면 불에 태워서 천인갱에 던져버렸습니다. 사람을 태울 때 나는 그 냄새를 맡기가 굉장히 역겨웠어요. 그 때는 일본사람을 보면 너무 무서워서 오줌이 지릴 정도였습니다."

조선인들은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인터뷰> 림야마이(조선촌 주민) : "나무를 베고, 돌을 나르는 일을 시켰는데 음식을 안 먹이는 것 같았어요. 조선인들이 배가 고파서 이쪽 길에 나와서 고구마를 파먹다가 걸렸는데, 그냥 두들겨 패서 죽이더라고요."

그렇게 희생자가 늘어나다 갑자기 찾아온 일본의 패망.

어느 순간, 이 마을에서 조선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인터뷰> 림야마이(조선촌 주민) : "일본군이 항복하고 이곳을 떠났을 때 남아있는 조선인들은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있었던 건물과 낡아빠진 옷가지 몇 조각을 남기곤 사라졌어요. 아마 일본군이 전부 때려 죽였을 겁니다."

지난 1998년, 국내 연구팀이 천인갱에서 부분적인 발굴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불과 30센티미터 정도 땅을 파내려 가자, 10여 구의 유골이 나타납니다.

<인터뷰> 박선주(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한 10m x 10m 정도 했을 거예요. 나란히 나오는데 머리는 동쪽을 향해서 놓고 목을 보니까 일부는 철사줄 같은 걸로 묶었어. 묶여서 시신들이 쭉 나오더라고. 한 10여 구.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거 밖에 없었죠. 유해를 수습도 못하고 중국에서 못 가져가게 했으니까 그때만 해도..."

2천년대 초반에는 한 한국인 사업가가 천인갱 부지를 중국 정부로부터 임대해 유해 100여 구를 발굴한 뒤 인근에 건물을 짓고 유해를 안치했습니다.

천인갱을 역사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보존 상태가 좋은 유골 5구는 유리관에 따로 넣어 보관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이 지지부진해지자 이 사업가는 연락이 두절됐고, 건물을 관리하기로 했던 직원들도 떠나고 말았습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유해를 안치한 건물은 버려진 채 방치돼 있습니다.

유리관에 있던 유골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원래는 완전한 한 구의 유골이 있었는데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겠네요."

단지 안에 있던 유해도 상당수 유실됐습니다.

<녹취>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이쪽에 있던 게 한국 국기, 이쪽에 있는 게 중국 국이였는데, 어떻게 떨어져 나갔는지는 모르겠어요. 너무 오래돼서 떨어진 건지..."

추모비마저 훼손됐고, 천인갱 터에는 누군가 가축 사료용 작물을 심었습니다.

<인터뷰> 린관차이(조선촌 주민) : "사실 이 울타리 안에는 농사를 지으면 안 되는데 아무도 관리를 안 하니까요. 돼지 사료로 쓴다고 고구마를 키우고 있습니다."

<녹취> "조상님께서 묻히신 자리에 돼지 먹이를 키우는 게 이게 참..."

이역만리 하이난 섬에 이름도 없이 버려진 조선인들.

취재진은 그들에 관한 기록과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하이난 섬의 대표적인 관광코스인 허우다오, 이른바 '원숭이 섬'.

이 섬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만든 큰 동굴이 있습니다.

동굴은 해안 경비를 위한 진지로 사용됐습니다.

<인터뷰> 원숭이섬 주민 : "98년인가 일본인 5명이 여기 와서 하이난 침략 당시 이곳 사람들을 붙잡아 이 동굴을 만들었다고 말했어요."

이런 진지 등 군사시설은 지금도 하이난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신주백(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 "동남아로의 작전 내지는 중국의 남쪽 지방의 작전에서의 굉장히 중요한 근거지였다. 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할 수 있는, 내지는 (중국의) 남쪽 지방을 공격할 수 있는 공군기지의 건설이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었다."

1939년, 일본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철광석 생산지였던 하이난 섬을 점령했습니다.

<녹취> 일본 뉴스 제56 호 : "1939년 2월 10일 남중국해 하이난으로 진군했던 우리 육해군 부대는 하이난의 요충지를 공략하여 장개석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섬을 점령한 지 4년 뒤, 당시 일본 내무대신 유자와 미치히토가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에게 문서를 보냅니다.

조선총독부의 수형자 2천 명을 하이난에 보내겠다는 내용입니다.

<음성대역> "하이난 광산 개발과 군수시설 건설에 다수의 노동자가 필요해 조선총독부 수형자 가운데 약 2천 명을 이 섬에 출역시키고자 한다."

이미 아시아 각지로 강제동원이 이뤄져 보낼 수 있는 인력이 바닥나자 감옥에 갇힌 수형자들까지 동원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인터뷰> 신주백(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 "하이난은 조선인 강제동원의 예정지였다기 보다는 전체적인 전쟁의 현황 속에서 특정한 전략적인 목적이 부각되니까 긴급동원이 요구되었던 공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로 죄수들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을 동원했던 것이지 강제동원의 어떤 전체적인 계획속에서 움직였던 공간은 아니다."

1943년 3월부터 이듬해인 1944년까지.

서울과 평양, 함흥과 원산, 부산과 광주 등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8차례에 걸쳐 모두 2천여 명이 차출돼 하이난으로 동원됐습니다.

당시 조선 전체 수형자의 1/10에 달하는 인원이었습니다.

주로 형기가 2년 정도 남은, 스무살에서 마흔살 사이의 건강한 남성들이었습니다.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1과장) : "일본은 그 전에도 일본인 수형자를 남양군도에 동원한 적은 있어요. 그런데 조선인 수형자를 그렇게 한 경우는 처음이고요. 그래서 2천 명의 수형자와 250명의 간수가 같이 출발을 하게 된 겁니다."

일본이 그들에게 붙인 이름은 남방파견보국대, 이른바 조선보국대입니다.

일본은 이들에게 하이난 동원의 대가로 가출옥, 즉 가석방을 제안했습니다.

하이난에서 여섯 달만 일하면 고국으로 돌아와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겁니다.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1과장) : "6개월만 (하이난에) 갔다오면 가출옥을 해주겠다, 해서 6개월이라는 기간을 약속했고요. (하이난에) 가면 좋은 식량상태와 노동조건이 상당히 좋다라고 하는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을 그냥 개인이 하거나 간수가 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이 했고요. 그 다음에 지금 부민관 앞 그러니까 서울시의회가 있는 그 앞을 행진까지 하면서 거기서 행사까지 하고."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광산에서의 고된 노동과 굶주림, 그리고 가혹행위와 학살이었습니다.

조선보국대 1500명이 건설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비행장이 있는 곳입니다.

하이난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광산 외에도 도로와 철도, 비행장 건설 등에 투입됐습니다.

당시 건설됐던 비행장은 지금도 중국의 해군 기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싼야의 비행장 건설과 해안선 축성공사 등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이 계속됐습니다.

이들은 수형자, 즉 죄수 신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노예와 다름 없는 처우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말라리아 등 풍토병에 시달리면서 사망자는 급격히 늘었습니다.

<음성대역> 장위샨(중국인 목격자/해남문사 제20집 기록) : "당시 콜레라와 말라리아가 유행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감염됐습니다. 일본군들은 자신에게 콜레라가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염된 노동자를 발견하면 생사여부를 불문하고 끌고 가서 불에 태웠습니다."

<음성대역> 故 고복남(하이난 강제동원 생존자) : "도망치다 잡히니까 나를 나무에 매달아놨는데, 그렇게 매달린 채로 석달 열흘을 있었어요. 나중에 수갑을 여니까 수갑이 살 속으로 들어가 뼈가 하얗게 보이더라고요."

그렇다면 6개월만 일하면 가출옥, 즉 가석방 시켜준다는 일본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경성형무소의 가출옥관계서류입니다.

서류마다 '해남도파견보국대'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있습니다.

하이난 파견을 이유로 가석방 됐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국에 돌아와 가석방된 것으로 확인된 인원은 모두 112명 뿐.

전체 동원 인원 2천 명의 5% 정도입니다.

이들 외에 전쟁이 끝난 뒤 하이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없는 걸까?

취재진은 그동안 공개된 적이 없던 하이난 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귀환보고서를 입수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6년 4월 작성한 이 귀환보고서에 '조선보국대'로 분류된 인원은 모두 658명.

이 가운데 조선인 간수를 제외한 수형자들은 606명에 불과합니다.

전체 2천여 명 가운데 가석방이 확인된 112명, 그리고 귀환보고서에 적힌 606명 등 7백여 명은 살아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천3백 명에 대한 기록은 현재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1995년, 중국 하이난성에서 발행한 책입니다.

천인갱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이 책엔 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음성대역> "일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천여 명의 조선 노동자들을 끌고와 지하갱도를 파게 하고 무기와 물자를 묻었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뜻밖에도 이 조선인들을 전부 살해해 한 곳에 묻었다. 이곳을 '천인갱'이라고 부르게 됐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천인갱이 지속적인 가혹행위와 개별적인 학살의 결과물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박선주(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쭉 이렇게 길게 나란히 묻었으면 이건 그래도 어느 정도 계획을 하고 묻어준 거거든요. 그런데 나란히 이렇게 나온 걸로 봐서는...집단으로 죽인 사람을 갖다가 막 전쟁이 끝나고 할 때 그 때 그렇게 나란히 매장할 정신이 있었을리 없잖아요."

하이난에서 사라진 1,300명, 7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이난 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강제동원 피해자는 최대 4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 정부가 수습한 유골은 불과 4백여 위.

일본은 종전 이후 지금까지 126만 위를 봉환했습니다.

<인터뷰> 안부수(아태평화교류협회 회장) : "강제로 자기 의사에 반해서 동원이 됐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얼마나 돌아가실 때 조국에 오고싶어 했겠습니까. 보고싶고 울며불며 밤을 세웠을 건데...유골이 고국에 오지 못하면 영혼이 오지 못한다는, 구천에 떠돈다는 말이 있죠. 그래서 억울한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꼭 모시고 와야 됩니다."

유리관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고, 유골이 담긴 단지도 정성스럽게 닦아냅니다.

유골이 안치된 건물을 청소하기 위해 한 민간단체가 나섰습니다.

<인터뷰> 김태문(영관장교연합회 사무총장) : "와보니까 관리도 너무 허술하고 먼지도 쌓이고 깨지고 엉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도 나서서 여기서 청소도 하고 깨끗하게 해서 위령제라도 모셔야지 않겠느냐..."

이어진 위령제, 식민지 수형자라는 이유로 열대의 섬에 끌려와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넋을 위로합니다.

<인터뷰> 권영해(대한민국건국회 회장) : "(유해를) 수습을 해서 안장이라도 하든지, 아니면 유해를 보관이라도 해야될텐데 보시다시피 작년이 다르고 금년이 다르고, 내년에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이대로 둘 수가 없다고 하는 심정에서 추모식을 하게된 겁니다."

황무지였던 천인갱 주변엔 어느덧 건물이 들어서고 개발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광복 70주년.

천인갱에 묻힌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지난 70년은 조국의 손길을 기다린 시간이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고, 유해를 봉환하는 것이 국가의 당연한 책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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