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간 군사적 대치 중 접촉 전례는?

입력 2015.08.23 (21:17) 수정 2015.08.24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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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이번 회담이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성사됐다는 점도 눈여겨 볼 부분인데요.

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몇 번 있었다고 합니다.

보도에 소현정 기잡니다.

<리포트>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까지 침투했던 1·21사태.

같은 해 10월 120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해 민간인 20여 명을 포함해 6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두 달 넘게 남북 간 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와중에도 판문점에서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군정위는 북한의 도발 증거를 낱낱이 제시하며 북측을 압박했고 이후 북한의 대남공작 담당자들이 대대적으로 문책당했습니다.

<인터뷰> 문성묵(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 : "1968년에 북한의 1·21사태 그 다음에 그해 연말에 있었던 울진 삼척 공비 또 그 후에 북한이 일련의 도발들을 이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서 다루어졌어요."

북한군의 선제 충돌 공격으로 발생했던 1999년 1차 연평해전.

교전 당일 유엔사령부와 북한군은 장성급 회담을 열었습니다.

2002년 2차 연평해전 당시엔 북한의 제안으로 한 달 만에 장성급 회담이 열려 남북이 군사적 충돌 재발 방지에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엔 남북이 최고위급 군사회담 개최에 합의했지만, 실무회담 과정에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끝내 결렬됐습니다.

KBS 뉴스 소현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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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간 군사적 대치 중 접촉 전례는?
    • 입력 2015-08-23 21:18:01
    • 수정2015-08-24 08:4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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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이번 회담이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성사됐다는 점도 눈여겨 볼 부분인데요.

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몇 번 있었다고 합니다.

보도에 소현정 기잡니다.

<리포트>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까지 침투했던 1·21사태.

같은 해 10월 120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해 민간인 20여 명을 포함해 6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두 달 넘게 남북 간 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와중에도 판문점에서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군정위는 북한의 도발 증거를 낱낱이 제시하며 북측을 압박했고 이후 북한의 대남공작 담당자들이 대대적으로 문책당했습니다.

<인터뷰> 문성묵(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 : "1968년에 북한의 1·21사태 그 다음에 그해 연말에 있었던 울진 삼척 공비 또 그 후에 북한이 일련의 도발들을 이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서 다루어졌어요."

북한군의 선제 충돌 공격으로 발생했던 1999년 1차 연평해전.

교전 당일 유엔사령부와 북한군은 장성급 회담을 열었습니다.

2002년 2차 연평해전 당시엔 북한의 제안으로 한 달 만에 장성급 회담이 열려 남북이 군사적 충돌 재발 방지에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엔 남북이 최고위급 군사회담 개최에 합의했지만, 실무회담 과정에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끝내 결렬됐습니다.

KBS 뉴스 소현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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