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다시 한국인” 그녀의 3가지 꿈

입력 2016.01.11 (08:56) 수정 2016.01.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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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미현입니다.”

긴 머리에 비니를 쓴 친구가 다가왔다. 키는 150cm 남짓해 보였다. 얼굴은 코와 뺨이 검붉게 그을려 있었다. 눈밭에서 사는 스키 선수다웠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서툴지만 정확한 우리말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미현입니다.” 낯가림이 없는 적극적인 성격이 느껴졌다.

이미현이미현
▲ 수줍게 주민등록증 신청서를 보여주는 이미현

"제 주민등록증 신청서예요. (기분이 어때요?)
한국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게 매우 자랑스럽고,
특히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는 게 정말 좋아요.
집에 돌아온 것처럼 느껴져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그녀는 한때 재클린이라 불렸다. 재클린 글로리아 클링(Jacquline Gloria Kling)이라는 미국 이름이다. 재클린은 지난달 중순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잃어버렸던 이름도 되찾았다. 한 살 때 복지재단에 맡겨질 때 함께 남겨진 이름인 ‘이미현’이다. 재클린으로 20년을 살아온 그녀는 이제 ‘이미현’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복지재단에 위탁될 당시복지재단에 위탁될 당시
▲ 복지재단에 위탁된 한 살 때

■ 재클린에서 이미현으로 돌아온 이유

슬로프 훈련슬로프 훈련
▲ 슬로프 스타일 훈련 장면

이미현은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다. 그중에서도 슬로프 스타일 전문이다. 슬로프 스타일은 슬로프에 설치된 점프대와 장애물을 통과하며 기술을 겨루는 경기다. 이미현의 장기는 공중에서 한 바퀴 반, 540도를 비틀어 도는 기술이다. 이른바 로데오 파이브라 불린다. 이미현은 로데오 파이브를 앞세워 미국 내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거머쥐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을 앞둔 대한스키협회가 이미현에 주목한 이유다.

이미현도 재클린 글로리아 클링 시절에는 미국 국가대표를 꿈꿨다. 그러나 뜻밖의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2012년 경기 중에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무릎 아래 정강이와 무릎 위 허벅지에 핀을 박는 큰 수술을 받았다. 부상을 털고 일어나 2013년과 2014년에도 잇달아 각종 대회에서 입상했지만, 미국 대표팀은 재클린을 받아주지 않았다.

슬로프 훈련슬로프 훈련
▲ 김주용 코치와 이미현 선수

그때 손을 내민 사람이 프리스타일 스키 올림픽팀의 코치 김주용 씨였다. 두 사람은 2006년 프리스타일 스키 동호인들이 모이는 웹사이트에서 처음 만났다. 동양계 미국인 소녀가 자신의 기술을 사진으로 찍어 올렸고, 프리스타일 스키에 빠진 한국인 오빠는 그 사진에 매료돼 감탄하는 댓글을 달았다. 그렇게 시작된 교류는 시간이 흘러 귀화에 대한 논의로 발전했다.

지난해 김주용 코치는 자신이 일하던 스키장의 강사로 재클린을 초청했다. 재클린은 1995년 한국을 떠난 뒤 정확히 20년 만에 모국으로 돌아왔다. 선수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가르치며 낯설었던 모국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한국의 국가대표로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재클린은 이미현으로 돌아왔다. 국적 회복을 통해서였다.

■ 재클린으로 살았던 20년

입양 당시입양 당시
▲ 입양 당시의 이미현

오늘의 이미현을 만든 건 재클린으로 살았던 20년이다. 이미현은 재클린이라는 이름으로 1995년 미국 펜실베니아의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 콜롬비아에서 입양된 2살 많은 오빠까지 가족은 4명이었다. 스키 관련 일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재클린은 3살 때부터 스키를 탔다. 지금도 5살 때 아버지, 오빠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갖고 있다.

양아버지와 오빠양아버지와 오빠
▲ 양아버지, 오빠와 함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재클린이 학교에 들어가던 7살 때 양부모는 이혼했다. 이후 어머니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겨울에는 아버지의 집에서 스키를 탔다. 어린 나이부터 먼 거리를 여행할 수밖에 없었고, 여행은 재클린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정불화와 인종차별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스트레스는 스키로 풀었다. 스키를 탈 때 그 누구도 재클린을 차별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재클린에 손가락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스키에 빠져들었다.

아르바이트아르바이트
▲ 시간당 8달러 10센트를 받았던 수영장 청소 아르바이트

"수영장 청소와 햄버거 가게 점원, 2가지 일에 의용소방대원을 했어요.
아침에 2시간 남짓 자고 수영장 청소를 하러 갔어요.
저녁 6시 반까지 수영장에서 일하고 또 2시간쯤 잤죠.
그리고는 햄버거 가게에 야간조로 들어갔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았어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스키를 타거나 일을 할 때도, 잠시 쉴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난 괜찮아. 잘하고 있어. 해낼 수 있어. 그렇지만 자주 울지는 않았어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15살이 되던 2009년 재클린은 어머니로부터 독립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재클린은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수영장에서 청소를 했다. 시간당 8달러 10센트를 받는 일이었다.

일이 끝나면 2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창고와 같은 곳에서 쥐와 함께 잠을 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햄버거 가게의 야간조로 투입됐다. 시간당 10달러를 받으며 밤을 지새운 뒤 다시 2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유일한 휴일은 토요일, 수영장이 문을 닫기 때문이었다.

대회 우승대회 우승
▲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재클린

"스키는 제 인생에서 정말 소중해요.
내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건
가족과 친구, 그리고 스키입니다."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재클린은 겨우내 스키를 탔다. 단순히 취미가 아니었다. 꿈이었고, 미래였기 때문에 프로페셔널들이 모이는 캠프에서 함께 훈련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여행했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재클린은 더 강해졌고, 유명해졌다. 트로피와 메달이 쌓여갔다. 스폰서도 붙었다. 키와 몸집은 작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차돌보다 단단했고, 에너지는 활화산처럼 넘쳐흘렀다.

기념 팔찌기념 팔찌
▲ 지난해 숨진 친구 첼시를 기념하는 팔찌

믿고 기댔던 친구도 있었다. 재클린보다 4살 많은 첼시 미칼레스코였다. 재클린과 첼시는 의용소방대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재클린은 첼시와 그녀가 닮은 점이 많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훌륭한 인격을 존경한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녀는 지난해 초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재클린은 첼시의 이름을 새긴 팔찌와 티셔츠로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다.

■ 이미현으로 이루고 싶은 3가지 꿈

이미현이미현
▲ 친부모를 생각하는 이미현

"엄마와 아빠를 만나면 아마도 악수를 하겠죠.
그들을 껴안고 생명을 주신 데 감사하다고 할 거예요.
그리고 입양 보내주셔서 고맙다고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아버지는 갓 서른을 넘긴 목포 남자였다. 어머니는 30대 후반의 진주 여자였다.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임신을 모른 채 헤어졌다. 어머니는 미현을 키울 수 없었고, 복지재단에 미현을 맡겼다. 그래서 재클린이 이미현이 되면서 가장 먼저 이루고 싶었던 꿈은 친부모를 찾는 것이다. 친부모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냐는 질문에 미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평창 동계 올림픽 이후에 엄마와 아빠를 다시 찾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조금 더 쉽겠죠.
더 많은 사람이 나를 알고, 내 얼굴을 알고, 내 사연을 알 테니까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국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미현은 친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미현이 태어났던 진주의 한 병원은 2년 전 화재로 관련 문서를 소실했다. 미현을 입양 보낸 복지재단을 통해서도 친부모를 찾기는 어려웠다.

미현은 친부모 찾기를 중단했다. 대신 스키에 집중하기로 했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얘기를 알게 된다면 친부모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것이 두 번째 꿈이다.

미현의 마음에 남아있는 마지막 응어리는 대학이다. 양부모가 이혼하고, 독립하면서 그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스키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아 대학은 사치였다. 그러나 평창에서 메달을 딴다면 다음에는 대학과 학위에 도전하고 싶어 한다. 2살 많은 오빠를 소개하며 대학에 갔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 나비가 되어 날고 싶은 작은 거인

이미현이미현
▲ 해맑게 웃는 이미현

방송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했다. 카메라 앞에 서면 떨린다고 했다. 촬영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담담했고, 당당했다. 그리고 답변은 단호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갖은 고초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해온 사람답게 확신에 차 있었다. 앞에 작은 거인이 앉아 있는 느낌이었고, 눈 속에서 핀 꽃이 얼마나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미현은 꿈을 이뤄 나비가 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에 도전하고, 헤어진 친부모를 찾고, 대학에서 새로운 꿈을 찾고 싶어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홀로 눈밭을 헤쳐온 재클린으로서의 20년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인내하는 누에의 삶이었다면, 앞으로 이미현으로서의 삶은 꿈을 이룬 나비가 되어 날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연관 기사]
☞ “다시 한국인” 스키 이미현, 평창 메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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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다시 한국인” 그녀의 3가지 꿈
    • 입력 2016-01-11 08:56:15
    • 수정2016-01-11 09:56:23
    취재후·사건후
■ “안녕하세요. 이미현입니다.”

긴 머리에 비니를 쓴 친구가 다가왔다. 키는 150cm 남짓해 보였다. 얼굴은 코와 뺨이 검붉게 그을려 있었다. 눈밭에서 사는 스키 선수다웠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서툴지만 정확한 우리말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미현입니다.” 낯가림이 없는 적극적인 성격이 느껴졌다.

이미현
▲ 수줍게 주민등록증 신청서를 보여주는 이미현

"제 주민등록증 신청서예요. (기분이 어때요?)
한국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게 매우 자랑스럽고,
특히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는 게 정말 좋아요.
집에 돌아온 것처럼 느껴져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그녀는 한때 재클린이라 불렸다. 재클린 글로리아 클링(Jacquline Gloria Kling)이라는 미국 이름이다. 재클린은 지난달 중순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잃어버렸던 이름도 되찾았다. 한 살 때 복지재단에 맡겨질 때 함께 남겨진 이름인 ‘이미현’이다. 재클린으로 20년을 살아온 그녀는 이제 ‘이미현’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복지재단에 위탁될 당시
▲ 복지재단에 위탁된 한 살 때

■ 재클린에서 이미현으로 돌아온 이유

슬로프 훈련
▲ 슬로프 스타일 훈련 장면

이미현은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다. 그중에서도 슬로프 스타일 전문이다. 슬로프 스타일은 슬로프에 설치된 점프대와 장애물을 통과하며 기술을 겨루는 경기다. 이미현의 장기는 공중에서 한 바퀴 반, 540도를 비틀어 도는 기술이다. 이른바 로데오 파이브라 불린다. 이미현은 로데오 파이브를 앞세워 미국 내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거머쥐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을 앞둔 대한스키협회가 이미현에 주목한 이유다.

이미현도 재클린 글로리아 클링 시절에는 미국 국가대표를 꿈꿨다. 그러나 뜻밖의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2012년 경기 중에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무릎 아래 정강이와 무릎 위 허벅지에 핀을 박는 큰 수술을 받았다. 부상을 털고 일어나 2013년과 2014년에도 잇달아 각종 대회에서 입상했지만, 미국 대표팀은 재클린을 받아주지 않았다.

슬로프 훈련
▲ 김주용 코치와 이미현 선수

그때 손을 내민 사람이 프리스타일 스키 올림픽팀의 코치 김주용 씨였다. 두 사람은 2006년 프리스타일 스키 동호인들이 모이는 웹사이트에서 처음 만났다. 동양계 미국인 소녀가 자신의 기술을 사진으로 찍어 올렸고, 프리스타일 스키에 빠진 한국인 오빠는 그 사진에 매료돼 감탄하는 댓글을 달았다. 그렇게 시작된 교류는 시간이 흘러 귀화에 대한 논의로 발전했다.

지난해 김주용 코치는 자신이 일하던 스키장의 강사로 재클린을 초청했다. 재클린은 1995년 한국을 떠난 뒤 정확히 20년 만에 모국으로 돌아왔다. 선수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가르치며 낯설었던 모국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한국의 국가대표로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재클린은 이미현으로 돌아왔다. 국적 회복을 통해서였다.

■ 재클린으로 살았던 20년

입양 당시
▲ 입양 당시의 이미현

오늘의 이미현을 만든 건 재클린으로 살았던 20년이다. 이미현은 재클린이라는 이름으로 1995년 미국 펜실베니아의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 콜롬비아에서 입양된 2살 많은 오빠까지 가족은 4명이었다. 스키 관련 일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재클린은 3살 때부터 스키를 탔다. 지금도 5살 때 아버지, 오빠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갖고 있다.

양아버지와 오빠
▲ 양아버지, 오빠와 함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재클린이 학교에 들어가던 7살 때 양부모는 이혼했다. 이후 어머니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겨울에는 아버지의 집에서 스키를 탔다. 어린 나이부터 먼 거리를 여행할 수밖에 없었고, 여행은 재클린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정불화와 인종차별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스트레스는 스키로 풀었다. 스키를 탈 때 그 누구도 재클린을 차별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재클린에 손가락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스키에 빠져들었다.

아르바이트
▲ 시간당 8달러 10센트를 받았던 수영장 청소 아르바이트

"수영장 청소와 햄버거 가게 점원, 2가지 일에 의용소방대원을 했어요.
아침에 2시간 남짓 자고 수영장 청소를 하러 갔어요.
저녁 6시 반까지 수영장에서 일하고 또 2시간쯤 잤죠.
그리고는 햄버거 가게에 야간조로 들어갔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았어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스키를 타거나 일을 할 때도, 잠시 쉴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난 괜찮아. 잘하고 있어. 해낼 수 있어. 그렇지만 자주 울지는 않았어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15살이 되던 2009년 재클린은 어머니로부터 독립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재클린은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수영장에서 청소를 했다. 시간당 8달러 10센트를 받는 일이었다.

일이 끝나면 2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창고와 같은 곳에서 쥐와 함께 잠을 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햄버거 가게의 야간조로 투입됐다. 시간당 10달러를 받으며 밤을 지새운 뒤 다시 2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유일한 휴일은 토요일, 수영장이 문을 닫기 때문이었다.

대회 우승
▲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재클린

"스키는 제 인생에서 정말 소중해요.
내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건
가족과 친구, 그리고 스키입니다."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재클린은 겨우내 스키를 탔다. 단순히 취미가 아니었다. 꿈이었고, 미래였기 때문에 프로페셔널들이 모이는 캠프에서 함께 훈련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여행했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재클린은 더 강해졌고, 유명해졌다. 트로피와 메달이 쌓여갔다. 스폰서도 붙었다. 키와 몸집은 작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차돌보다 단단했고, 에너지는 활화산처럼 넘쳐흘렀다.

기념 팔찌
▲ 지난해 숨진 친구 첼시를 기념하는 팔찌

믿고 기댔던 친구도 있었다. 재클린보다 4살 많은 첼시 미칼레스코였다. 재클린과 첼시는 의용소방대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재클린은 첼시와 그녀가 닮은 점이 많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훌륭한 인격을 존경한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녀는 지난해 초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재클린은 첼시의 이름을 새긴 팔찌와 티셔츠로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다.

■ 이미현으로 이루고 싶은 3가지 꿈

이미현
▲ 친부모를 생각하는 이미현

"엄마와 아빠를 만나면 아마도 악수를 하겠죠.
그들을 껴안고 생명을 주신 데 감사하다고 할 거예요.
그리고 입양 보내주셔서 고맙다고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아버지는 갓 서른을 넘긴 목포 남자였다. 어머니는 30대 후반의 진주 여자였다. 대가족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임신을 모른 채 헤어졌다. 어머니는 미현을 키울 수 없었고, 복지재단에 미현을 맡겼다. 그래서 재클린이 이미현이 되면서 가장 먼저 이루고 싶었던 꿈은 친부모를 찾는 것이다. 친부모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냐는 질문에 미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평창 동계 올림픽 이후에 엄마와 아빠를 다시 찾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조금 더 쉽겠죠.
더 많은 사람이 나를 알고, 내 얼굴을 알고, 내 사연을 알 테니까요."
- 이미현 인터뷰 중에서


국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미현은 친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미현이 태어났던 진주의 한 병원은 2년 전 화재로 관련 문서를 소실했다. 미현을 입양 보낸 복지재단을 통해서도 친부모를 찾기는 어려웠다.

미현은 친부모 찾기를 중단했다. 대신 스키에 집중하기로 했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얘기를 알게 된다면 친부모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것이 두 번째 꿈이다.

미현의 마음에 남아있는 마지막 응어리는 대학이다. 양부모가 이혼하고, 독립하면서 그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스키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아 대학은 사치였다. 그러나 평창에서 메달을 딴다면 다음에는 대학과 학위에 도전하고 싶어 한다. 2살 많은 오빠를 소개하며 대학에 갔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 나비가 되어 날고 싶은 작은 거인

이미현
▲ 해맑게 웃는 이미현

방송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했다. 카메라 앞에 서면 떨린다고 했다. 촬영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담담했고, 당당했다. 그리고 답변은 단호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갖은 고초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해온 사람답게 확신에 차 있었다. 앞에 작은 거인이 앉아 있는 느낌이었고, 눈 속에서 핀 꽃이 얼마나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미현은 꿈을 이뤄 나비가 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에 도전하고, 헤어진 친부모를 찾고, 대학에서 새로운 꿈을 찾고 싶어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홀로 눈밭을 헤쳐온 재클린으로서의 20년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인내하는 누에의 삶이었다면, 앞으로 이미현으로서의 삶은 꿈을 이룬 나비가 되어 날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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