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부는 왜 아직도 죄송해야 하나요?

입력 2016.04.08 (18:31) 수정 2016.04.0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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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를 받았는데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순간을 상상해 봤는가? 얼마나 황당하고 막막할까?

그런데 매번 시험을 볼 때마다 같은 경험을 반복하는 학생들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학생운동선수들이다.

그렇다고 이름만 써서 낼 수도 없다. 고민하던 학생 선수들은 결국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라고 쓰고 도망치듯 시험장을 떠난다. 이 모든 비극은 출발점은 1972년 시작된 체육특기자 제도다.



체육특기자 제도 학교체육 파행 근본 원인

체육특기자 제도는 학업 성적과 관계없이 운동 성적에 따라 대학 특례 입학을 허용하는 제도다. 이 제도가 시작된 이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초중고대학까지 이어지는 학교 운동부에는 대학 진학을 위해 오직 운동에만 매달리는 현상이 굳어졌다.

지난 2007년 공부를 포기하고 운동기계로 전락해버린 학교 운동부의 속살을 드러내고자 기획했던 KBS 다큐멘터리 2부작 제목이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였다. 그러나 그 당시 프롤로그로 제작됐던 학생들의 현실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화면 속 학생들의 담담한 목소리는 다시 들어도 가슴 아프다.



"저희가 솔직히 운동으로 학교 왔지 공부 1%도 보고 온 거 아니잖아요"

"초등학교부터 한 거라곤 운동밖에 없는데"

"운동만 잘하면 되니까"

"일단 시험지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은 다 풀기 시작하잖아요. 저는 펜들도 쓸 말이 없는 거예요. 막막하죠"

"교수님 눈치도 보이고 바로 나갈 수도 없으니까 옆 사람 볼까 봐 눈치보고… 문제 읽는 척하다가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라고 쓰고"

"타이밍 맞춰서 교수님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도망치다시피 나오죠"

"부끄럽죠. 공허감이 많이 들어요. 다른 애들은 저렇게 쓰고 있는데 난 운동만 해도 되나 생각도 들고"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도망치는 것처럼 나와야 하나? 죄인 같은 생각도 많이 들죠"

"들어갔다 나오는 것도 창피하고 다른 사람들이 '운동부니까'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게 되게 싫었어요"

-시사기획 쌈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2007)' 중에서-

지난 10여 년간 학교체육 시스템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언제나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일반학생'이었다.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 선수들의 숫자도 점점 늘고 있다.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는 일반 학생들의 숫자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10년 대학스포츠 총장협의회가 공식 출범하면서 대학 농구와 배구, 축구 등은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연중 리그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또 대학스포츠 운영 규정을 신설해 최종 2학기 평균 C학점을 받지 못하면 대회 출전을 제한할 수 있는 미국식 최저학력제도를 도입했다. 수업결손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학기 중 토너먼트 대회는 금지됐다.

최저학력규정을 명시한 대학스포츠 총장협의회 운영규정최저학력규정을 명시한 대학스포츠 총장협의회 운영규정


[다운받기] 2015 대학스포츠 총장협의회 운영규정 [PDF]

대학 스포츠에 발맞춰 초중고 학교 체육도 변화의 물결에 합류했다. 초중고대학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정상적인 학사관리와 진학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009년 초중고 축구 주말리그 출범을 시작으로 야구와 농구가 주말리그 대열에 합류했다. 학기 중 지방 토너먼트 대회를 폐지하면서 수업 결손이 크게 줄어들었다. 2011년에는 학교체육진흥법이 제정돼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지 않으면 대회 출전을 제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일반 학생들의 체육 활동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핵심은 학교 스포츠클럽 리그다. 본격적인 리그 대회가 시작된 지 불과 4년만인 지난 해 무려 52만 명의 학생이 대회에 출전했다. 600만 명을 조금 넘는 전국 초중고 학생 열 명 중의 한 명 가까운 숫자가 참가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리그로 성장한 것이다.



더구나 올해 초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 스포츠를 하나로 묶는 통합 대한체육회가 출범하면서 학교 체육은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하나씩 다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엘리트 학교 운동부 지도자와 학부모들 상당수는 승리 지상주의라는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학생 운동 선수들은 소수의 특별한 부류일 뿐이다. 근본 원인은 체육특기자 제도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체육특기자 제도 개선 통합체육회 최우선 과제

학업 성적과 관계없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체육특기자 제도가 존재하는 한 엘리트 학교체육의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따라서 새로 출범한 통합체육회는 최우선 과제로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엘리트 학교체육의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던 체육 특기자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학교체육은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뿌리가 된다. 학교체육이 정상화되지 않는다면 통합체육회의 최종 목표인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실질적 통합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체육특기자 제도를 개선하지 않는 한 학교체육의 정상화 역시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연관 기사]
☞ 시사기획 쌈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 1부 (2007.5.19)
☞ 시사기획 쌈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 2부 (2007.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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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부는 왜 아직도 죄송해야 하나요?
    • 입력 2016-04-08 18:31:24
    • 수정2016-04-08 18:36:32
    취재K
시험지를 받았는데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순간을 상상해 봤는가? 얼마나 황당하고 막막할까?

그런데 매번 시험을 볼 때마다 같은 경험을 반복하는 학생들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학생운동선수들이다.

그렇다고 이름만 써서 낼 수도 없다. 고민하던 학생 선수들은 결국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라고 쓰고 도망치듯 시험장을 떠난다. 이 모든 비극은 출발점은 1972년 시작된 체육특기자 제도다.



체육특기자 제도 학교체육 파행 근본 원인

체육특기자 제도는 학업 성적과 관계없이 운동 성적에 따라 대학 특례 입학을 허용하는 제도다. 이 제도가 시작된 이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초중고대학까지 이어지는 학교 운동부에는 대학 진학을 위해 오직 운동에만 매달리는 현상이 굳어졌다.

지난 2007년 공부를 포기하고 운동기계로 전락해버린 학교 운동부의 속살을 드러내고자 기획했던 KBS 다큐멘터리 2부작 제목이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였다. 그러나 그 당시 프롤로그로 제작됐던 학생들의 현실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화면 속 학생들의 담담한 목소리는 다시 들어도 가슴 아프다.



"저희가 솔직히 운동으로 학교 왔지 공부 1%도 보고 온 거 아니잖아요"

"초등학교부터 한 거라곤 운동밖에 없는데"

"운동만 잘하면 되니까"

"일단 시험지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은 다 풀기 시작하잖아요. 저는 펜들도 쓸 말이 없는 거예요. 막막하죠"

"교수님 눈치도 보이고 바로 나갈 수도 없으니까 옆 사람 볼까 봐 눈치보고… 문제 읽는 척하다가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라고 쓰고"

"타이밍 맞춰서 교수님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도망치다시피 나오죠"

"부끄럽죠. 공허감이 많이 들어요. 다른 애들은 저렇게 쓰고 있는데 난 운동만 해도 되나 생각도 들고"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도망치는 것처럼 나와야 하나? 죄인 같은 생각도 많이 들죠"

"들어갔다 나오는 것도 창피하고 다른 사람들이 '운동부니까'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게 되게 싫었어요"

-시사기획 쌈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2007)' 중에서-

지난 10여 년간 학교체육 시스템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언제나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일반학생'이었다.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 선수들의 숫자도 점점 늘고 있다.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는 일반 학생들의 숫자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10년 대학스포츠 총장협의회가 공식 출범하면서 대학 농구와 배구, 축구 등은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연중 리그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또 대학스포츠 운영 규정을 신설해 최종 2학기 평균 C학점을 받지 못하면 대회 출전을 제한할 수 있는 미국식 최저학력제도를 도입했다. 수업결손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학기 중 토너먼트 대회는 금지됐다.

최저학력규정을 명시한 대학스포츠 총장협의회 운영규정

[다운받기] 2015 대학스포츠 총장협의회 운영규정 [PDF]

대학 스포츠에 발맞춰 초중고 학교 체육도 변화의 물결에 합류했다. 초중고대학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정상적인 학사관리와 진학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009년 초중고 축구 주말리그 출범을 시작으로 야구와 농구가 주말리그 대열에 합류했다. 학기 중 지방 토너먼트 대회를 폐지하면서 수업 결손이 크게 줄어들었다. 2011년에는 학교체육진흥법이 제정돼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지 않으면 대회 출전을 제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일반 학생들의 체육 활동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핵심은 학교 스포츠클럽 리그다. 본격적인 리그 대회가 시작된 지 불과 4년만인 지난 해 무려 52만 명의 학생이 대회에 출전했다. 600만 명을 조금 넘는 전국 초중고 학생 열 명 중의 한 명 가까운 숫자가 참가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리그로 성장한 것이다.



더구나 올해 초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 스포츠를 하나로 묶는 통합 대한체육회가 출범하면서 학교 체육은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하나씩 다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엘리트 학교 운동부 지도자와 학부모들 상당수는 승리 지상주의라는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학생 운동 선수들은 소수의 특별한 부류일 뿐이다. 근본 원인은 체육특기자 제도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체육특기자 제도 개선 통합체육회 최우선 과제

학업 성적과 관계없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체육특기자 제도가 존재하는 한 엘리트 학교체육의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따라서 새로 출범한 통합체육회는 최우선 과제로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엘리트 학교체육의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던 체육 특기자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학교체육은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뿌리가 된다. 학교체육이 정상화되지 않는다면 통합체육회의 최종 목표인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의 실질적 통합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체육특기자 제도를 개선하지 않는 한 학교체육의 정상화 역시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연관 기사]
☞ 시사기획 쌈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 1부 (2007.5.19)
☞ 시사기획 쌈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 2부 (2007.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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