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남아공의 실패…“우리는 불평등을 너무 오래 방치했다”

입력 2016.12.28 (14:26) 수정 2016.12.2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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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한민국 국회는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다. 수년간 의혹으로만 떠돌던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정황이 여러 물증으로 입증되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의 하야와 탄핵을 외쳤다. 국회가 탄핵안을 통과시켰지만 집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는 2016년의 마지막 날 헌법재판소의 조속한 탄핵 인용을 촉구하는 10차 집회가 예정돼 있다.

올해 아프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정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이컵 주마(Jacob Zuma) 대통령 퇴진 문제를 놓고 일 년 내내 사회적 갈등이 반복됐다. 지난 4월, 대통령 사저 증축에 200억 원이 넘는 국가 예산이 불법적으로 쓰인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남아공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탄핵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남아공 국회는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에서 부결시켰다. 국회 의석의 62%를 점한 집권 여당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11월에는 인도계 재벌 굽타(Gupta) 그룹의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졌다. 일개 대기업 일가가 대통령과의 친분을 이용해 장관 인사에 개입하고, 이권을 부당하게 챙긴 사실이 문건으로 확인됐다. 이번에도 야당 주도로 대통령과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됐다. 하지만 여당 반대로 표결에 착수조차 못 했다.

넬슨 만델라는 1994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43년간의 인종 분리주의 정책을 추진한 백인 정권을 종식시켰다.넬슨 만델라는 1994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43년간의 인종 분리주의 정책을 추진한 백인 정권을 종식시켰다.

1994년 변호사이자 인권 운동가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인종분리주의, 즉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백인 정권을 선거로 종식시킨 이래 남아공은 지금 민주주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부패한 정치권력을 민주적 절차에 의해 바꿔내지 못한다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상당하다.

최근 넬슨 만델라 재단(Nelson Mandela Foundation)이 주마 정권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만델라 재단은 1999년 만델라 전 대통령의 퇴임 직후 설립된 비정부기구다. 재단은 그간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 발언을 자제해왔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는 대신, 남아공의 인권과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역량을 집중해왔다.

주마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여당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는 만델라 전 대통령이 이끌던 정당이다. 주마 대통령은 최근 퇴진 국면에서 종종 "나는 만델라와 함께 수감 생활을 한 동지"라며 감정적 호소를 해왔다. 그렇기에 만델라 재단의 이례적이고 공개적인 비판은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기자는 대통령 부패 문제와 관련해 만델라 재단의 베른 해리스(Verne Harris) 조사·기록 이사를 만났다.

KBS 취재진은 주마 대통령 퇴진 관련 인터뷰를 위해 관련해 넬슨 만델라 재단을 방문했다.KBS 취재진은 주마 대통령 퇴진 관련 인터뷰를 위해 관련해 넬슨 만델라 재단을 방문했다.

-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주마 대통령을 비판한 이유가 궁금하다.
"상황이 엄중하다. 우리는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동안 발언을 자제했더라도 이런 때에 만델라 재단이 시민들에게 견해를 밝히고, 또 시국을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 넬슨 만델라 시대 이후 남아공 사회는 어떻게 바뀌어왔나?
"만델라 이후 남아공은 지도력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이 현재의 부패와 모순을 있게 한 원인이다. 1990년대 만델라 대통령 집권 시기에는 사회적 문제를 옳은 방향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축적된 모순을 모두 바로 잡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 남아공 사회에 축적된 모순의 뿌리는 어디인가?
"남아공의 부패와 모순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 인종분리주의를 지지하는 백인 정권은 남아공을 1948년부터 1994년까지 통치했다 - 말기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흑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할 때,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현재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사회 모순을 해결하려면 우리는 이 낡은 구조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부패의 근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부터가 개혁의 시작이다."

- 사회 문제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지도층은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데 실패했고, 청렴하지 못했다. 1990년대 넬슨 만델라 정부에 참여한 나로서는, 중요한 사회적 가치들이 빠르게 무너지는 현실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런 가치들이 무너질 때, 사회는 부패가 득세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 우리는 이제서야 사회의 퇴보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우리는 부패와 불평등을 방치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주마 퇴진을 계기로 바로잡아야 한다."


-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주마 정권을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남아공의 시민들,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민주주의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일고 있다. 남아공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남아공은 특히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서 생겨난 불평등은 해결되지 못한 채 여전히 우리는 괴롭히고 있다. 오히려 1994년보다 더 악화했다. 우리는 불평등을 너무 오래 방치했다."

2016년 11월 2일 남아공 수도 프리토리아에서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2016년 11월 2일 남아공 수도 프리토리아에서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남아공 경제 규모는 아프리카 전체 GDP의 27%를 차지한다.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한 1인당 GDP는 1만 2,700달러, 인구는 5,314만 명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잠재력 있는 시장으로 꼽힌다.
하지만 6%가 넘는 물가상승률과 25%에 달하는 실업률은 남아공 경제의 걸림돌이다. 남아공 통계청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면, 소득 상위 10%는 국가 소득의 58%를 벌어들이는 반면, 하위 10%는 0.5%에 불과하다.

특히 인종 간 경제력 차이가 극명하다. 전체 인구의 8.4%에 불과한 백인 인구는 전체 가구 소득의 40.1%를 차지한다. 백인 인구보다 10배 많은 흑인의 전체 가구 소득 44.6%와 대등하다. 쉽게 말해 평균적으로 백인 가구가 흑인 가구보다 10배 잘 산다는 뜻이다. 양극화의 골이 깊다.

2014년 치러진 총선에서는 토지 강제 수용과 기업 국유화를 주장하는 공산주의 정당 경제자유투사당(Economic Freedom Fighter)이 원내 3당으로 발돋움했다. 대통령 퇴진 관련 폭력 투쟁을 이끌고 있는 이 정당의 지지자는 "우리는 대통령이 스스로 내려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혁명으로 끌어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불신의 사회다. 남아공은 지금 불의와 불평등을 방치한 대가를 뼈아프게 치러내고 있다.

[연관 기사] ☞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대통령 퇴진 정국…남아공 흔들(201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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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남아공의 실패…“우리는 불평등을 너무 오래 방치했다”
    • 입력 2016-12-28 14:26:37
    • 수정2016-12-28 14:34:37
    취재후·사건후
올해 대한민국 국회는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다. 수년간 의혹으로만 떠돌던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정황이 여러 물증으로 입증되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의 하야와 탄핵을 외쳤다. 국회가 탄핵안을 통과시켰지만 집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는 2016년의 마지막 날 헌법재판소의 조속한 탄핵 인용을 촉구하는 10차 집회가 예정돼 있다.

올해 아프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정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이컵 주마(Jacob Zuma) 대통령 퇴진 문제를 놓고 일 년 내내 사회적 갈등이 반복됐다. 지난 4월, 대통령 사저 증축에 200억 원이 넘는 국가 예산이 불법적으로 쓰인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남아공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탄핵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남아공 국회는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에서 부결시켰다. 국회 의석의 62%를 점한 집권 여당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11월에는 인도계 재벌 굽타(Gupta) 그룹의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졌다. 일개 대기업 일가가 대통령과의 친분을 이용해 장관 인사에 개입하고, 이권을 부당하게 챙긴 사실이 문건으로 확인됐다. 이번에도 야당 주도로 대통령과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됐다. 하지만 여당 반대로 표결에 착수조차 못 했다.

넬슨 만델라는 1994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43년간의 인종 분리주의 정책을 추진한 백인 정권을 종식시켰다.
1994년 변호사이자 인권 운동가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인종분리주의, 즉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백인 정권을 선거로 종식시킨 이래 남아공은 지금 민주주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부패한 정치권력을 민주적 절차에 의해 바꿔내지 못한다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상당하다.

최근 넬슨 만델라 재단(Nelson Mandela Foundation)이 주마 정권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만델라 재단은 1999년 만델라 전 대통령의 퇴임 직후 설립된 비정부기구다. 재단은 그간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 발언을 자제해왔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는 대신, 남아공의 인권과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역량을 집중해왔다.

주마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여당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는 만델라 전 대통령이 이끌던 정당이다. 주마 대통령은 최근 퇴진 국면에서 종종 "나는 만델라와 함께 수감 생활을 한 동지"라며 감정적 호소를 해왔다. 그렇기에 만델라 재단의 이례적이고 공개적인 비판은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기자는 대통령 부패 문제와 관련해 만델라 재단의 베른 해리스(Verne Harris) 조사·기록 이사를 만났다.

KBS 취재진은 주마 대통령 퇴진 관련 인터뷰를 위해 관련해 넬슨 만델라 재단을 방문했다.
-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주마 대통령을 비판한 이유가 궁금하다.
"상황이 엄중하다. 우리는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동안 발언을 자제했더라도 이런 때에 만델라 재단이 시민들에게 견해를 밝히고, 또 시국을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 넬슨 만델라 시대 이후 남아공 사회는 어떻게 바뀌어왔나?
"만델라 이후 남아공은 지도력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이 현재의 부패와 모순을 있게 한 원인이다. 1990년대 만델라 대통령 집권 시기에는 사회적 문제를 옳은 방향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축적된 모순을 모두 바로 잡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 남아공 사회에 축적된 모순의 뿌리는 어디인가?
"남아공의 부패와 모순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 인종분리주의를 지지하는 백인 정권은 남아공을 1948년부터 1994년까지 통치했다 - 말기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흑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할 때,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현재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사회 모순을 해결하려면 우리는 이 낡은 구조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부패의 근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부터가 개혁의 시작이다."

- 사회 문제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지도층은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데 실패했고, 청렴하지 못했다. 1990년대 넬슨 만델라 정부에 참여한 나로서는, 중요한 사회적 가치들이 빠르게 무너지는 현실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런 가치들이 무너질 때, 사회는 부패가 득세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 우리는 이제서야 사회의 퇴보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우리는 부패와 불평등을 방치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주마 퇴진을 계기로 바로잡아야 한다."


-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주마 정권을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남아공의 시민들,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민주주의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일고 있다. 남아공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남아공은 특히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서 생겨난 불평등은 해결되지 못한 채 여전히 우리는 괴롭히고 있다. 오히려 1994년보다 더 악화했다. 우리는 불평등을 너무 오래 방치했다."

2016년 11월 2일 남아공 수도 프리토리아에서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남아공 경제 규모는 아프리카 전체 GDP의 27%를 차지한다.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한 1인당 GDP는 1만 2,700달러, 인구는 5,314만 명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잠재력 있는 시장으로 꼽힌다.
하지만 6%가 넘는 물가상승률과 25%에 달하는 실업률은 남아공 경제의 걸림돌이다. 남아공 통계청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면, 소득 상위 10%는 국가 소득의 58%를 벌어들이는 반면, 하위 10%는 0.5%에 불과하다.

특히 인종 간 경제력 차이가 극명하다. 전체 인구의 8.4%에 불과한 백인 인구는 전체 가구 소득의 40.1%를 차지한다. 백인 인구보다 10배 많은 흑인의 전체 가구 소득 44.6%와 대등하다. 쉽게 말해 평균적으로 백인 가구가 흑인 가구보다 10배 잘 산다는 뜻이다. 양극화의 골이 깊다.

2014년 치러진 총선에서는 토지 강제 수용과 기업 국유화를 주장하는 공산주의 정당 경제자유투사당(Economic Freedom Fighter)이 원내 3당으로 발돋움했다. 대통령 퇴진 관련 폭력 투쟁을 이끌고 있는 이 정당의 지지자는 "우리는 대통령이 스스로 내려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혁명으로 끌어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불신의 사회다. 남아공은 지금 불의와 불평등을 방치한 대가를 뼈아프게 치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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