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위해 십시일반…국채 보상 운동 27만 명 명단 확인
입력 2017.03.01 (21:26)
수정 2017.03.0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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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나라가 일제에 진 빚을 갚자며, 1907년 일반 국민들이 시작한 움직임이 국채 보상 운동인데요,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한 민초들의 명단이 대거 발굴돼,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대완 기자입니다.
<리포트>
1907년, 유학자 곽종석 선생이 국채보상금 모금을 맡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지극히 정성으로 모금을 권고하고, 혹시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강요해서는 안 된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진 빚 1300만 원을 갚자며 1907년 대구와 부산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한 민초들의 명단이 확인됐습니다.
당시 대한매일 등 5개 신문에 기재된 인원은 경남 지역 2만 5천여 명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모두 27만 명,
이들이 사는 곳과 기부액수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인터뷰> 하범식(국채보상운동 지도부 후손) : " 군중을 모아놓고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외세의 빚이 있으니까 백성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 십시일반을 하자..."
쌀 수십 가마니의 거액부터 한푼 두푼까지 나라를 위한 마음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추경화(향토사학자) : "남녀 구분하지 않고, 기생들도 참여하고 진주 지역에는 특별히 기생들이 엄청나게 (모금)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하지만 지도자 일부를 제외하고 훈포장 등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국채보상운동 110주년을 맞아 민초의 국권 회복 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KBS 뉴스 이대완입니다.
나라가 일제에 진 빚을 갚자며, 1907년 일반 국민들이 시작한 움직임이 국채 보상 운동인데요,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한 민초들의 명단이 대거 발굴돼,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대완 기자입니다.
<리포트>
1907년, 유학자 곽종석 선생이 국채보상금 모금을 맡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지극히 정성으로 모금을 권고하고, 혹시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강요해서는 안 된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진 빚 1300만 원을 갚자며 1907년 대구와 부산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한 민초들의 명단이 확인됐습니다.
당시 대한매일 등 5개 신문에 기재된 인원은 경남 지역 2만 5천여 명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모두 27만 명,
이들이 사는 곳과 기부액수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인터뷰> 하범식(국채보상운동 지도부 후손) : " 군중을 모아놓고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외세의 빚이 있으니까 백성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 십시일반을 하자..."
쌀 수십 가마니의 거액부터 한푼 두푼까지 나라를 위한 마음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추경화(향토사학자) : "남녀 구분하지 않고, 기생들도 참여하고 진주 지역에는 특별히 기생들이 엄청나게 (모금)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하지만 지도자 일부를 제외하고 훈포장 등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국채보상운동 110주년을 맞아 민초의 국권 회복 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KBS 뉴스 이대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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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위해 십시일반…국채 보상 운동 27만 명 명단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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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7-03-01 21:28:36
- 수정2017-03-01 21: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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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일제에 진 빚을 갚자며, 1907년 일반 국민들이 시작한 움직임이 국채 보상 운동인데요,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한 민초들의 명단이 대거 발굴돼,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대완 기자입니다.
<리포트>
1907년, 유학자 곽종석 선생이 국채보상금 모금을 맡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지극히 정성으로 모금을 권고하고, 혹시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강요해서는 안 된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진 빚 1300만 원을 갚자며 1907년 대구와 부산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한 민초들의 명단이 확인됐습니다.
당시 대한매일 등 5개 신문에 기재된 인원은 경남 지역 2만 5천여 명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모두 27만 명,
이들이 사는 곳과 기부액수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인터뷰> 하범식(국채보상운동 지도부 후손) : " 군중을 모아놓고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외세의 빚이 있으니까 백성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 십시일반을 하자..."
쌀 수십 가마니의 거액부터 한푼 두푼까지 나라를 위한 마음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추경화(향토사학자) : "남녀 구분하지 않고, 기생들도 참여하고 진주 지역에는 특별히 기생들이 엄청나게 (모금)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하지만 지도자 일부를 제외하고 훈포장 등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국채보상운동 110주년을 맞아 민초의 국권 회복 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KBS 뉴스 이대완입니다.
나라가 일제에 진 빚을 갚자며, 1907년 일반 국민들이 시작한 움직임이 국채 보상 운동인데요,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한 민초들의 명단이 대거 발굴돼,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대완 기자입니다.
<리포트>
1907년, 유학자 곽종석 선생이 국채보상금 모금을 맡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지극히 정성으로 모금을 권고하고, 혹시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강요해서는 안 된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진 빚 1300만 원을 갚자며 1907년 대구와 부산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한 민초들의 명단이 확인됐습니다.
당시 대한매일 등 5개 신문에 기재된 인원은 경남 지역 2만 5천여 명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모두 27만 명,
이들이 사는 곳과 기부액수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인터뷰> 하범식(국채보상운동 지도부 후손) : " 군중을 모아놓고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외세의 빚이 있으니까 백성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 십시일반을 하자..."
쌀 수십 가마니의 거액부터 한푼 두푼까지 나라를 위한 마음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추경화(향토사학자) : "남녀 구분하지 않고, 기생들도 참여하고 진주 지역에는 특별히 기생들이 엄청나게 (모금)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하지만 지도자 일부를 제외하고 훈포장 등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국채보상운동 110주년을 맞아 민초의 국권 회복 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KBS 뉴스 이대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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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완 기자 bigbowl@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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