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KBS_MeToo(3) : 카메라 앞에 서지 못했지만…“나도 당했다”

입력 2018.02.21 (17:14) 수정 2018.02.2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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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공개한 KBS #미투(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06319). 이 영상에는 다섯 명의 기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사실 KBS 안에서 ‘미투’를 외친 사람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수치스럽고 아팠던 자신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카메라 앞에 서지 못했던 것일 뿐.

막 입사해서 각 부서마다 정신없이 인사를 다니던 시기였습니다. 어느 날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다른 부서의 남자 기자 선배였습니다. 당황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제게, 그는 “난 기러기 아빠다. 와이프랑 애들이 모두 해외에 있다. 참 외롭다. 혼자 살고 있다”라는 말을 늘어놨습니다. 왜 제게 이런 전화를 걸었는지, 이 시간에 갑자기 외롭다는 말은 왜 하는 건지 충격적이었습니다. 화가 났지만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 비슷한 시간에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혼자 사느냐, 나는 외롭다" 같은 말들을 혼잣말처럼 계속 쏟아냈습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더 비슷한 일이 반복됐습니다.
-14년차 직원 B씨

어느 날 호피무늬 옷을 입고 출근했더니, 다른 부서의 한 남자 팀장이 “오늘은 호피무늬네. 속옷도 호피야?”라는 말을 던지더군요. 얼굴이 화끈거렸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전 직원 E씨

같이 밥 먹자고 불러내서 차 조수석에 앉았는데 “치마가 너무 짧은 것 아니냐”라며 갑자기 손으로 제 치맛단을 끌어내린다거나. “일주일에 두세 번만 같이 저녁 먹으면서 업무 외의 일을 도와 달라. 지금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라는 수치스런 제의를 받기도 하고. “이렇게 예쁘게 입고 온 날에는 복도를 좀 많이 걸어 다녀라. 그래야 내가 잠깐이라도 눈이 즐겁지 않냐“라고 아무렇지 않게 희롱한다거나… 모두 일상적인 일들이었습니다.
-4년차 직원 A씨


이들은 왜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직접 목소리 내는 걸 주저했을까. 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미투’ 목소리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지 짚어봤다.


■ 화살의 방향

‘미투’를 고민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줄까. 내가 얼마나 용기를 내어 진정성 있게 말을 하든, 결국 멋대로 판단해버리진 않을까. 그래서 ‘미투’ 이후에 더 큰 상처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성폭력과 성희롱 이슈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감수성에 대한 회의감이 존재했다.

“내가 신원을 드러내고 미투를 외쳤을 때 따라올 오해와 편견들을 맞서기가 겁이 난다. 당장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부터 찾아보겠지. 그런 일을 당할 만한 행동을 한 게 아니겠느냐는 싸늘한 눈초리. 걔가 먼저 꼬리친 거 아니야? 걔 평소 행실이 어때? 일은 고분고분하게 잘 하나? 쟤 원래 옷을 저렇게 입네. 나 개인에게 쏠릴 회사 안팎의 불편한 시선과 관심들…. 또 가해자와 나의 관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내가 뭔가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 가해자를 저격한다고 의심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내가 문제여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흘러갈 거 같다.” (D)

“과연 내가 지적한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정말 잘못된 일이라며 함께 공감해줄까? 사실 내가 겪은 성희롱, 성적 비하 발언, 외모에 대한 코멘트들은 너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모두 말로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하지만, 과연 실제로 그런 언행의 무게를 진짜로 느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싶다. 그렇다보니 나의 ‘미투’가 그저 술자리에서 오가는 안주거리 농담, 웃음거리만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만 예민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지 않을까.” (A)



■자기검열의 늪
미투 선언을 고민하다, 점점 더 치밀한 자기검열로 빠져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흠 잡힐 부분은 없는지, 내가 행실을 잘못해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는지, 내가 피해자라고 주장하기에 ‘충분히 결백하고 불쌍한’ 사람인지 스스로 자격을 따져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미투에 나서기로 결심했던 마음은 점점 약해진다.

“사건 당시에 내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같은 것. 내가 그때 정말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했었나. 내가 여지를 준 건 아니었나하는 생각과 함께 끝없이 자기 검열에 빠져들게 된다. 내가 겪은 일을 '성희롱'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지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이정도 일은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건가, 내가 너무 나간 건 아닐까 망설이게 되고 그 망설임은 곧 나 스스로 빨리 잊어버리고 내일을 생각하는 게 나를 위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그 고민 속에서 용기를 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D)

■“그래, 너 두고 보자”
미투 선언 이후의 불이익도 간과할 수 없다. 어렵게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가해자가 “나는 그런 적 없다, 증거를 가져오라”라고 잡아떼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한다거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에게 보복할 수 있다는 현실적 불안감이다. 실제로 성추행을 당한 뒤 문제제기를 했더니 가해자가 오히려 '일을 크게 만들면 큰일 난다'며 협박을 가하고,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며 부서 내 왕따로 모는 일을 경험했다는 한 직원의 구체적 제보도 있었다. 이런 실질적인 위협이 상존하는데도 지금 미투 운동이 활발하니 “나도 당했다”를 외쳐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더 약한 고리
KBS 내부에는 작가나 캐스터, AD, FD, 리서처 등 정직원 신분이 아닌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은 임시직, 계약직이라는 약자적 지위상 다양한 성폭력적 상황에 광범위하게 노출된다. 이들의 경우 '나도 당했다'고 말하고 싶은 일들이 더 많지만, 이후 개인이 떠안아야 할 불이익이 훨씬 크다. 이들의 ‘미투’ 참여가 대부분 익명으로 이뤄지는 이유다. 취재기자에게 익명을 전제로 피해 사실을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아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리는 경우도 있었다.

“(가해자가) 나보다 힘이 세니까. 직간접적으로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내 장래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알 수 없는 거니까 주저하게 된다. 성 피해를 신고한 비정규직 직원이 퇴사 이후 다른 일자리를 못 구해 애를 먹고 있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신고가 직접적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 아닌가. 생계를 걸어야 하는 문제라고 느낀다.” (G)

“계약직 신분이었지만 정말 이건 아니다 싶어 용기를 내서 정당한 절차로 문제제기를 했었다. 그런데 다른 직장에 가서 까지도 "너 KBS에서 그런 일 벌였었다며?"라고 정말 생각지 못한 자리에서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다. 꼬리표가 달린 기분이다. 더 이상 나서고 싶지가 않다.” (H)

“어찌 됐든 나는 이 일을 계속 하고 싶고 내 직장, 내 직업이 소중하다. 그래서 굳이 문제 삼고 싶지가 않다. 한번은 혼자 견디기가 버거워, 같은 부서 기자 선배에게 가해자의 이름을 꺼내봤다. 그런데 운을 떼자마자 돌아온 말은 ‘아, A씨? 일도 잘하고 너무 좋은 사람이지’라는 반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이 참 좋은 직장 선배, 동료인 거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결국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단념하게 된다.” (I)



■어차피 안 될 거야
이처럼 ‘미투’ 이후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측된다면, 그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나도 당했다”를 외칠 만한 유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적지 않은 이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물음표를 던졌다. 자신이 나서면 부당한 현실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긍정적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거였다. 앞서 “나도 당했다”고 외쳤던 피해자들은 이미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해자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고, 한때 어렵게 용기를 냈던 피해자의 마음속에는 무력감과 냉소가 들어앉았다.

“난 문제를 제기했지만 바뀌는 게 없었다. 철저한 조사나 징계 처분은 없었고 타부서로 발령 내고 조용히 치워버리는 게 전부였다. 문제를 이런 식으로 취급했던 조직에 무엇을 기대하나. 이제 와서 다시 미투를 외치는 게 웃기다.” (C)

“결국 나 자신만을 생각했을 때 무엇이 더 이로운 일일지 너무나 잘 알고 또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인들, 관계자들, 선배들에게 이야기를 해도 돌아오는 것은 ‘동정’ 뿐임을 알고 더 이상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는 것도 알기에.” (A)


익명의 팔꿈치가 말하는 것. 2017년 12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 사진. 미투 선언에 참여한 6명의 여성이 실린 이 사진의 우측 하단에는 누군가의 오른쪽 팔꿈치가 담겨 있다. 그는 성폭력을 당한 한 병원 직원으로, 자신의 사연이 알려질 경우 가족에게 끼칠 악영향을 우려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타임 측은 이 팔꿈치의 존재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때문에 여전히 정체를 밝히고 앞으로 나오기를 꺼리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표한다고 설명했다.익명의 팔꿈치가 말하는 것. 2017년 12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 사진. 미투 선언에 참여한 6명의 여성이 실린 이 사진의 우측 하단에는 누군가의 오른쪽 팔꿈치가 담겨 있다. 그는 성폭력을 당한 한 병원 직원으로, 자신의 사연이 알려질 경우 가족에게 끼칠 악영향을 우려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타임 측은 이 팔꿈치의 존재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때문에 여전히 정체를 밝히고 앞으로 나오기를 꺼리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표한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나는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만난 '그녀들'은 공개적으로 나서진 못했지만, 침묵하기 보다 “나도 당했다”고 세상에 알리기를 원했다. 이유는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내가 겪었던 부당한 일들을 알려서, 앞으로는 그런 일들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이 조직도 예외가 아니고, 이 정도 수준이라는 걸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른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위로받았듯이, 나 역시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다, 함께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metoo.kbs@gmail.com

취재 : 김시원, 김채린, 류란, 송형국, 윤봄이, 이랑
촬영·편집 : 고형석, 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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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KBS_MeToo(3) : 카메라 앞에 서지 못했지만…“나도 당했다”
    • 입력 2018-02-21 17:14:42
    • 수정2018-02-21 18:21:27
    사회
지난주 공개한 KBS #미투(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06319). 이 영상에는 다섯 명의 기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사실 KBS 안에서 ‘미투’를 외친 사람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수치스럽고 아팠던 자신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카메라 앞에 서지 못했던 것일 뿐. 막 입사해서 각 부서마다 정신없이 인사를 다니던 시기였습니다. 어느 날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다른 부서의 남자 기자 선배였습니다. 당황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제게, 그는 “난 기러기 아빠다. 와이프랑 애들이 모두 해외에 있다. 참 외롭다. 혼자 살고 있다”라는 말을 늘어놨습니다. 왜 제게 이런 전화를 걸었는지, 이 시간에 갑자기 외롭다는 말은 왜 하는 건지 충격적이었습니다. 화가 났지만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 비슷한 시간에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혼자 사느냐, 나는 외롭다" 같은 말들을 혼잣말처럼 계속 쏟아냈습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더 비슷한 일이 반복됐습니다. -14년차 직원 B씨 어느 날 호피무늬 옷을 입고 출근했더니, 다른 부서의 한 남자 팀장이 “오늘은 호피무늬네. 속옷도 호피야?”라는 말을 던지더군요. 얼굴이 화끈거렸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전 직원 E씨 같이 밥 먹자고 불러내서 차 조수석에 앉았는데 “치마가 너무 짧은 것 아니냐”라며 갑자기 손으로 제 치맛단을 끌어내린다거나. “일주일에 두세 번만 같이 저녁 먹으면서 업무 외의 일을 도와 달라. 지금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라는 수치스런 제의를 받기도 하고. “이렇게 예쁘게 입고 온 날에는 복도를 좀 많이 걸어 다녀라. 그래야 내가 잠깐이라도 눈이 즐겁지 않냐“라고 아무렇지 않게 희롱한다거나… 모두 일상적인 일들이었습니다. -4년차 직원 A씨 이들은 왜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직접 목소리 내는 걸 주저했을까. 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미투’ 목소리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지 짚어봤다. ■ 화살의 방향 ‘미투’를 고민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줄까. 내가 얼마나 용기를 내어 진정성 있게 말을 하든, 결국 멋대로 판단해버리진 않을까. 그래서 ‘미투’ 이후에 더 큰 상처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성폭력과 성희롱 이슈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감수성에 대한 회의감이 존재했다. “내가 신원을 드러내고 미투를 외쳤을 때 따라올 오해와 편견들을 맞서기가 겁이 난다. 당장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부터 찾아보겠지. 그런 일을 당할 만한 행동을 한 게 아니겠느냐는 싸늘한 눈초리. 걔가 먼저 꼬리친 거 아니야? 걔 평소 행실이 어때? 일은 고분고분하게 잘 하나? 쟤 원래 옷을 저렇게 입네. 나 개인에게 쏠릴 회사 안팎의 불편한 시선과 관심들…. 또 가해자와 나의 관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내가 뭔가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 가해자를 저격한다고 의심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내가 문제여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흘러갈 거 같다.” (D) “과연 내가 지적한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정말 잘못된 일이라며 함께 공감해줄까? 사실 내가 겪은 성희롱, 성적 비하 발언, 외모에 대한 코멘트들은 너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모두 말로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하지만, 과연 실제로 그런 언행의 무게를 진짜로 느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싶다. 그렇다보니 나의 ‘미투’가 그저 술자리에서 오가는 안주거리 농담, 웃음거리만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만 예민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지 않을까.” (A) ■자기검열의 늪 미투 선언을 고민하다, 점점 더 치밀한 자기검열로 빠져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흠 잡힐 부분은 없는지, 내가 행실을 잘못해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는지, 내가 피해자라고 주장하기에 ‘충분히 결백하고 불쌍한’ 사람인지 스스로 자격을 따져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미투에 나서기로 결심했던 마음은 점점 약해진다. “사건 당시에 내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같은 것. 내가 그때 정말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했었나. 내가 여지를 준 건 아니었나하는 생각과 함께 끝없이 자기 검열에 빠져들게 된다. 내가 겪은 일을 '성희롱'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지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이정도 일은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건가, 내가 너무 나간 건 아닐까 망설이게 되고 그 망설임은 곧 나 스스로 빨리 잊어버리고 내일을 생각하는 게 나를 위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그 고민 속에서 용기를 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D) ■“그래, 너 두고 보자” 미투 선언 이후의 불이익도 간과할 수 없다. 어렵게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가해자가 “나는 그런 적 없다, 증거를 가져오라”라고 잡아떼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한다거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에게 보복할 수 있다는 현실적 불안감이다. 실제로 성추행을 당한 뒤 문제제기를 했더니 가해자가 오히려 '일을 크게 만들면 큰일 난다'며 협박을 가하고,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며 부서 내 왕따로 모는 일을 경험했다는 한 직원의 구체적 제보도 있었다. 이런 실질적인 위협이 상존하는데도 지금 미투 운동이 활발하니 “나도 당했다”를 외쳐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더 약한 고리 KBS 내부에는 작가나 캐스터, AD, FD, 리서처 등 정직원 신분이 아닌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은 임시직, 계약직이라는 약자적 지위상 다양한 성폭력적 상황에 광범위하게 노출된다. 이들의 경우 '나도 당했다'고 말하고 싶은 일들이 더 많지만, 이후 개인이 떠안아야 할 불이익이 훨씬 크다. 이들의 ‘미투’ 참여가 대부분 익명으로 이뤄지는 이유다. 취재기자에게 익명을 전제로 피해 사실을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아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리는 경우도 있었다. “(가해자가) 나보다 힘이 세니까. 직간접적으로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내 장래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알 수 없는 거니까 주저하게 된다. 성 피해를 신고한 비정규직 직원이 퇴사 이후 다른 일자리를 못 구해 애를 먹고 있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신고가 직접적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 아닌가. 생계를 걸어야 하는 문제라고 느낀다.” (G) “계약직 신분이었지만 정말 이건 아니다 싶어 용기를 내서 정당한 절차로 문제제기를 했었다. 그런데 다른 직장에 가서 까지도 "너 KBS에서 그런 일 벌였었다며?"라고 정말 생각지 못한 자리에서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다. 꼬리표가 달린 기분이다. 더 이상 나서고 싶지가 않다.” (H) “어찌 됐든 나는 이 일을 계속 하고 싶고 내 직장, 내 직업이 소중하다. 그래서 굳이 문제 삼고 싶지가 않다. 한번은 혼자 견디기가 버거워, 같은 부서 기자 선배에게 가해자의 이름을 꺼내봤다. 그런데 운을 떼자마자 돌아온 말은 ‘아, A씨? 일도 잘하고 너무 좋은 사람이지’라는 반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이 참 좋은 직장 선배, 동료인 거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결국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단념하게 된다.” (I) ■어차피 안 될 거야 이처럼 ‘미투’ 이후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측된다면, 그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나도 당했다”를 외칠 만한 유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적지 않은 이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물음표를 던졌다. 자신이 나서면 부당한 현실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긍정적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거였다. 앞서 “나도 당했다”고 외쳤던 피해자들은 이미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해자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고, 한때 어렵게 용기를 냈던 피해자의 마음속에는 무력감과 냉소가 들어앉았다. “난 문제를 제기했지만 바뀌는 게 없었다. 철저한 조사나 징계 처분은 없었고 타부서로 발령 내고 조용히 치워버리는 게 전부였다. 문제를 이런 식으로 취급했던 조직에 무엇을 기대하나. 이제 와서 다시 미투를 외치는 게 웃기다.” (C) “결국 나 자신만을 생각했을 때 무엇이 더 이로운 일일지 너무나 잘 알고 또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인들, 관계자들, 선배들에게 이야기를 해도 돌아오는 것은 ‘동정’ 뿐임을 알고 더 이상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는 것도 알기에.” (A) 익명의 팔꿈치가 말하는 것. 2017년 12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 사진. 미투 선언에 참여한 6명의 여성이 실린 이 사진의 우측 하단에는 누군가의 오른쪽 팔꿈치가 담겨 있다. 그는 성폭력을 당한 한 병원 직원으로, 자신의 사연이 알려질 경우 가족에게 끼칠 악영향을 우려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타임 측은 이 팔꿈치의 존재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때문에 여전히 정체를 밝히고 앞으로 나오기를 꺼리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대표한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나는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만난 '그녀들'은 공개적으로 나서진 못했지만, 침묵하기 보다 “나도 당했다”고 세상에 알리기를 원했다. 이유는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내가 겪었던 부당한 일들을 알려서, 앞으로는 그런 일들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이 조직도 예외가 아니고, 이 정도 수준이라는 걸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른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위로받았듯이, 나 역시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다, 함께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metoo.kbs@gmail.com 취재 : 김시원, 김채린, 류란, 송형국, 윤봄이, 이랑 촬영·편집 : 고형석, 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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