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블랙리스트 때문에 정치 많이 알게 됐어요”…검열하는 영화인들

입력 2018.04.14 (10:56) 수정 2018.04.14 (20:06)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취재후] “블랙리스트 때문에 정치 많이 알게 됐어요”…검열하는 영화인들

[취재후] “블랙리스트 때문에 정치 많이 알게 됐어요”…검열하는 영화인들


특별취재팀을 꾸려 자유 주제로 취재할 기회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인천상륙작전>이었습니다. 검찰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수사가 이미 마무리됐는데 '뒷북'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꼭 해보고 싶다고 밀어붙였습니다. 일종의 부채 의식에서였습니다.

2016년 8월, KBS 보도본부에서는 문화부 기자들에 대한 징계 파동이 있었습니다. KBS가 32억 원이나 투자한 영화에 관객은 많이 모였는데 평론가 평점이 형편없으니 시쳇말로 '평론가를 조지라'는 지시를 거부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KBS는 이미 <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해 도를 넘은 홍보성 보도를 뉴스에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화투자사'인 KBS가, 동시에 '언론사'라는 강점을 살려, 뉴스를 무기로 휘두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자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은 요구였습니다.

화난 기자들이 항의도 하고 피케팅도 해봤지만, 명령에 '불복종'한 기자들에 대한 징계는 예정된 수순대로 진행됐습니다. 물론 징계무효 소송에서는 기자들이 이겼지만, 지난한 재판 과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리포트 '총'을 맞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고 재판까지 해야 했던 동료 기자들에게 빚을 갚고 싶다는 마음이 취재 착수 경위입니다.

[연관기사] ‘블랙·화이트리스트’ 집행자 추적…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말하다


그런데 KBS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자한 경위부터 차근차근 취재하던 기자들은 영화 제작사 정태원 대표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됐습니다. 조대현 전 KBS 사장이 연임을 앞두고 청와대로부터 '좌파'라는 질타를 받게 되자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영화인 <인천상륙작전>에 파격적인 투자를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 대표는 그 상황을 "승부수를 던졌다"고 표현했습니다.

조대현 전 사장은 결국 연임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조 전 사장이 던진 '승부수'는 후임 고대영 사장 때에 이르러 보도본부에 '징계 파동'이라는 후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영화계 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 취재 과정에 취재팀은 '모태펀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벤처업계나 창업투자회사들 사이에선 '돈줄'로 통하지만,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한국벤처투자가 운용하는 모태펀드 규모는 지난해 8월 기준으로 3조 4,182억 원. 이 가운데 1,272억 원이 영화 펀드입니다.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열악한 영화 제작 환경에선 가뭄 속 해갈이 되는 돈입니다.

제법 큰 예산을 굴리는 곳인데 한국벤처투자에서 일하는 직원은 30여 명뿐입니다. 자금이 투명하게 집행되는지, 김영란법은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하는 조직도 제대로 없습니다. 공공기관이어서 감사원 감사도 받고 한다지만, 소속은 중소벤처기업부인데 굴리는 예산은 문화체육관광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환경부 등 10개 정부 부처와 기관에 분산돼 있다 보니 관심의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국회 정무위 소속 모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정감사 때 조사를 좀 해보려고 다른 상임위 의원실들에 공동 작업을 요청해봤는데 다들 너무 복잡하다며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영화계 블랙리스트 집행 과정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활약한 한국벤처투자 조강래 전 사장과 신모 전 상근 전문위원은 그래서 검찰 수사도 받지 않고 조용히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검찰도 관심이 없었나 봅니다.

[연관기사] ‘블랙·화이트리스트’ 집행자 추적…국책은행·공공기관도 대규모 투자


모태펀드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면 청와대와 문체부에는 '집행자'들이 있었습니다. 취재 과정에 종종 머리에 떠오른 건 한나 아렌트가 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유럽 각지에서 폴란드 수용소에 열차로 이송하는 최고 책임자였던 아이히만. 자신은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무죄를 항변했지만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아주 근면한 인간이었고, 근면성 자체는 범죄가 아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은 유죄라고 비난했습니다.

청와대와 문체부에서 블랙리스트 집행 관련 실무를 담당했던 공무원들은 KBS 취재팀과의 만남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아주 나쁜 것"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관련 재판에 나가서 비슷한 취지로 법정 증언을 한 공무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현직에 있을 때는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을까요? 한 공무원은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한 번, 두 번, 어쩔 수 없이 순응하게 되고…. 그다음부터는 말해봤자 욕만 먹으니까 저항하지 않게 됐죠. 내가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누군가가 하게 될 일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마 아닐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동이 남긴 것에 대해 영화인들의 내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권이 바뀌었으니 걱정은 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영화 <일급기밀> 배급사 권지원 대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장은 숨통이 트였지만 언제 또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영화 제작사 관계자는 "정치에는 문외한이던 영화인들이 블랙리스트 파동을 겪으면서 정치에 대해서 많이들 알게 됐다"고 털어놓으며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이제는 시나리오를 검토해도 머릿속으로 '시나리오 작업 완료에 3~4년은 걸리니까 정권이 바뀌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영화인들에게 일상이 돼버린 자기 검열, 몸에 베어버린 습관과 막연한 두려움을 흔적없이 씻어내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상처는 한순간이지만 치유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연관기사] ‘블랙리스트’ 피해 후유증 앓는 영화계…파문은 현재진행형


끝으로 방송이 나간 뒤 주변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립니다. <인천상륙작전> 제작사 정태원 대표는 왜 KBS에 그런 민감한 내용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을까요? 온갖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정 대표의 의도는 순수했습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제작비 175억 원을 유치하는 과정에 청와대가 압력을 행사하거나 도와줬다는 건 터무니없는 의혹이라며 억울해 했습니다. 스스로 발로 뛰어 유치한 자금이라는 겁니다. KBS가 투자한 32억 원도 본인이 직접 사장실에 찾아와 설득해 받아낸 돈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정태원 대표는 특히 <인천상륙작전>은 절대 화이트리스트 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막 터져 나와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할 즈음, <인천상륙작전>을 보러 영화관에 가는 바람에 오히려 손해만 입었다고 무척 속상해하기도 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취재후] “블랙리스트 때문에 정치 많이 알게 됐어요”…검열하는 영화인들
    • 입력 2018-04-14 10:56:23
    • 수정2018-04-14 20:06:31
    취재후·사건후

특별취재팀을 꾸려 자유 주제로 취재할 기회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인천상륙작전>이었습니다. 검찰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수사가 이미 마무리됐는데 '뒷북'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꼭 해보고 싶다고 밀어붙였습니다. 일종의 부채 의식에서였습니다.

2016년 8월, KBS 보도본부에서는 문화부 기자들에 대한 징계 파동이 있었습니다. KBS가 32억 원이나 투자한 영화에 관객은 많이 모였는데 평론가 평점이 형편없으니 시쳇말로 '평론가를 조지라'는 지시를 거부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KBS는 이미 <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해 도를 넘은 홍보성 보도를 뉴스에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화투자사'인 KBS가, 동시에 '언론사'라는 강점을 살려, 뉴스를 무기로 휘두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자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은 요구였습니다.

화난 기자들이 항의도 하고 피케팅도 해봤지만, 명령에 '불복종'한 기자들에 대한 징계는 예정된 수순대로 진행됐습니다. 물론 징계무효 소송에서는 기자들이 이겼지만, 지난한 재판 과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리포트 '총'을 맞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고 재판까지 해야 했던 동료 기자들에게 빚을 갚고 싶다는 마음이 취재 착수 경위입니다.

[연관기사] ‘블랙·화이트리스트’ 집행자 추적…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말하다


그런데 KBS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자한 경위부터 차근차근 취재하던 기자들은 영화 제작사 정태원 대표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됐습니다. 조대현 전 KBS 사장이 연임을 앞두고 청와대로부터 '좌파'라는 질타를 받게 되자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영화인 <인천상륙작전>에 파격적인 투자를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 대표는 그 상황을 "승부수를 던졌다"고 표현했습니다.

조대현 전 사장은 결국 연임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조 전 사장이 던진 '승부수'는 후임 고대영 사장 때에 이르러 보도본부에 '징계 파동'이라는 후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영화계 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 취재 과정에 취재팀은 '모태펀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벤처업계나 창업투자회사들 사이에선 '돈줄'로 통하지만,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한국벤처투자가 운용하는 모태펀드 규모는 지난해 8월 기준으로 3조 4,182억 원. 이 가운데 1,272억 원이 영화 펀드입니다.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열악한 영화 제작 환경에선 가뭄 속 해갈이 되는 돈입니다.

제법 큰 예산을 굴리는 곳인데 한국벤처투자에서 일하는 직원은 30여 명뿐입니다. 자금이 투명하게 집행되는지, 김영란법은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하는 조직도 제대로 없습니다. 공공기관이어서 감사원 감사도 받고 한다지만, 소속은 중소벤처기업부인데 굴리는 예산은 문화체육관광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환경부 등 10개 정부 부처와 기관에 분산돼 있다 보니 관심의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국회 정무위 소속 모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정감사 때 조사를 좀 해보려고 다른 상임위 의원실들에 공동 작업을 요청해봤는데 다들 너무 복잡하다며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영화계 블랙리스트 집행 과정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활약한 한국벤처투자 조강래 전 사장과 신모 전 상근 전문위원은 그래서 검찰 수사도 받지 않고 조용히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검찰도 관심이 없었나 봅니다.

[연관기사] ‘블랙·화이트리스트’ 집행자 추적…국책은행·공공기관도 대규모 투자


모태펀드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면 청와대와 문체부에는 '집행자'들이 있었습니다. 취재 과정에 종종 머리에 떠오른 건 한나 아렌트가 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유럽 각지에서 폴란드 수용소에 열차로 이송하는 최고 책임자였던 아이히만. 자신은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무죄를 항변했지만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아주 근면한 인간이었고, 근면성 자체는 범죄가 아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은 유죄라고 비난했습니다.

청와대와 문체부에서 블랙리스트 집행 관련 실무를 담당했던 공무원들은 KBS 취재팀과의 만남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아주 나쁜 것"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관련 재판에 나가서 비슷한 취지로 법정 증언을 한 공무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현직에 있을 때는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을까요? 한 공무원은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한 번, 두 번, 어쩔 수 없이 순응하게 되고…. 그다음부터는 말해봤자 욕만 먹으니까 저항하지 않게 됐죠. 내가 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누군가가 하게 될 일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마 아닐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동이 남긴 것에 대해 영화인들의 내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권이 바뀌었으니 걱정은 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영화 <일급기밀> 배급사 권지원 대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장은 숨통이 트였지만 언제 또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영화 제작사 관계자는 "정치에는 문외한이던 영화인들이 블랙리스트 파동을 겪으면서 정치에 대해서 많이들 알게 됐다"고 털어놓으며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이제는 시나리오를 검토해도 머릿속으로 '시나리오 작업 완료에 3~4년은 걸리니까 정권이 바뀌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영화인들에게 일상이 돼버린 자기 검열, 몸에 베어버린 습관과 막연한 두려움을 흔적없이 씻어내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상처는 한순간이지만 치유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연관기사] ‘블랙리스트’ 피해 후유증 앓는 영화계…파문은 현재진행형


끝으로 방송이 나간 뒤 주변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립니다. <인천상륙작전> 제작사 정태원 대표는 왜 KBS에 그런 민감한 내용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을까요? 온갖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정 대표의 의도는 순수했습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제작비 175억 원을 유치하는 과정에 청와대가 압력을 행사하거나 도와줬다는 건 터무니없는 의혹이라며 억울해 했습니다. 스스로 발로 뛰어 유치한 자금이라는 겁니다. KBS가 투자한 32억 원도 본인이 직접 사장실에 찾아와 설득해 받아낸 돈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정태원 대표는 특히 <인천상륙작전>은 절대 화이트리스트 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막 터져 나와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할 즈음, <인천상륙작전>을 보러 영화관에 가는 바람에 오히려 손해만 입었다고 무척 속상해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