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진 앵커 :
지금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종군위안부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국가배상을 촉구하는 유엔인권위원회가 국제적인 관심속에 진행되고 있습니다만은, 그나마 단 한번 거론조차 되지않고 있는 잊혀진 일제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 종전을 앞두고 일본 관동군에 편입됐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돼서 강제노동에 시달린 3천5백여명의 한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한맺힌 사연을 한재호 기자가 취재 했습니다.
⊙한재호 기자 :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5년 8월6일 소련군의 연합군의 일원으로 소만국경 전 지역에 걸쳐 일본 관동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 합니다. 당시 63만명의 관동군은 퇴조를 거듭하다 결국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여기에는 관동군에 지명된 한국인 3천5백여명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당시 포로들은 포츠담 회담에 따라 자국으로 돌려보내도록 돼 있었지만 관동군 총사령관 야마다 대장은 자신이 전범자로 처형될 것이 두려워 이를 무시하고 부하들을 소련군에 넘겨주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들은 고향대신 죽음의 땅 시베리아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영하 40도를 웃도는 혹한과 굶주림, 그 속에서 3년 넘게 계속된 강제노동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습니다.
⊙이병주 (시베리아포로수용소생존자) :
침을 뱉으면 침이 얼어서 굴러갈 정도예요. 그런 추위입니다. 거기에서 입고 간 하복을 가지고 겨울을 난다는건 뭐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고생을 했지요.
⊙한재호 기자 :
1948년 12월 한국인포로들은 마침내 조국땅을 밟았지만 적성 국가의 포로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40여년동안 또 다시 수용소 아닌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지난 92년에 와서야 이들은 수용소에서 함께 있다 돌아온 50여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시베리아삭풍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일본 포로들이 받은 배상과 똑같은 배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 했습니다. 이어 지난해 2월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은 노동증명서를 붙여 다시 일본 관방장관에게 정신적 육체적 피해보상을 청구 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청구)서류를 접수한 근거가 전혀 없나요?"
⊙일본 관방장관 비서실 (통화) :
이곳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요.
⊙한재호 기자 :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자국인들에게는 가능한 보상을 다 해주면서 한국인들에게는 한마디 사과조차 없는 일본, 이들 한인들은 시베리아의 모진 바람만큼이나 차디찬 일본의 태도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김일영 (시베리아삭풍회원) :
우리는 결사코 그 어떤 자손만대로 이런 억울한 것을 전하고...
⊙한재호 기자 :
KBS 뉴스, 한재호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잊혀진 일제 피해자; 한국인 포로수용자
-
- 입력 1996-04-14 21:00:00
⊙김종진 앵커 :
지금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종군위안부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국가배상을 촉구하는 유엔인권위원회가 국제적인 관심속에 진행되고 있습니다만은, 그나마 단 한번 거론조차 되지않고 있는 잊혀진 일제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 종전을 앞두고 일본 관동군에 편입됐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돼서 강제노동에 시달린 3천5백여명의 한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한맺힌 사연을 한재호 기자가 취재 했습니다.
⊙한재호 기자 :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5년 8월6일 소련군의 연합군의 일원으로 소만국경 전 지역에 걸쳐 일본 관동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 합니다. 당시 63만명의 관동군은 퇴조를 거듭하다 결국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여기에는 관동군에 지명된 한국인 3천5백여명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당시 포로들은 포츠담 회담에 따라 자국으로 돌려보내도록 돼 있었지만 관동군 총사령관 야마다 대장은 자신이 전범자로 처형될 것이 두려워 이를 무시하고 부하들을 소련군에 넘겨주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들은 고향대신 죽음의 땅 시베리아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영하 40도를 웃도는 혹한과 굶주림, 그 속에서 3년 넘게 계속된 강제노동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습니다.
⊙이병주 (시베리아포로수용소생존자) :
침을 뱉으면 침이 얼어서 굴러갈 정도예요. 그런 추위입니다. 거기에서 입고 간 하복을 가지고 겨울을 난다는건 뭐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고생을 했지요.
⊙한재호 기자 :
1948년 12월 한국인포로들은 마침내 조국땅을 밟았지만 적성 국가의 포로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40여년동안 또 다시 수용소 아닌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지난 92년에 와서야 이들은 수용소에서 함께 있다 돌아온 50여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시베리아삭풍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일본 포로들이 받은 배상과 똑같은 배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 했습니다. 이어 지난해 2월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은 노동증명서를 붙여 다시 일본 관방장관에게 정신적 육체적 피해보상을 청구 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청구)서류를 접수한 근거가 전혀 없나요?"
⊙일본 관방장관 비서실 (통화) :
이곳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요.
⊙한재호 기자 :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자국인들에게는 가능한 보상을 다 해주면서 한국인들에게는 한마디 사과조차 없는 일본, 이들 한인들은 시베리아의 모진 바람만큼이나 차디찬 일본의 태도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김일영 (시베리아삭풍회원) :
우리는 결사코 그 어떤 자손만대로 이런 억울한 것을 전하고...
⊙한재호 기자 :
KBS 뉴스, 한재호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
좋아요
0
-
응원해요
0
-
후속 원해요
0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