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도발 배후·협상의 ‘얼굴’…‘파워맨’ 김영철은?

입력 2019.02.09 (08:08) 수정 2019.02.0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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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 위원장 못지 않게 측근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을 두 차례 만나 김 위원장의 친서까지 전달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이제 사실상 대미·대남 라인의 최고실세라 할 수 있는데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 등으로 대남도발의 배후로 여겨졌던 김영철 부위원장이 어떻게 북한의 협상책임자가 된 걸까요?

이번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북한 김영철 부위원장 집중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평창의 밤하늘을 수놓은 1218대의 드론.

한반도기를 앞세워 공동 입장한 남과 북.

1년 전, 전 세계에 감동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은 스포츠 축제를 넘어 남북 관계 개선과 북미 협상이라는 대전환의 마중물이 되었다.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북미대화 의지를 전달코자 평창을 찾은 사람, 바로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자 통일전선부장 김영철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김영철의 발걸음은 워싱턴을 향했다.

두 번째 백악관 방문.

그가 가져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됐고, 북한과 미국은 두 번째 회담을 준비 중이다.

급변한 한반도 정세와 함께 북한 대외협상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매김한 김영철.

그는 어떤 인물일까?

1946년생으로 알려진 김영철은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 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북한의 대표 군부인사다.

군사정전위원회 연락장교 출신의 김영철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 한 것은 1989년 남북 고위급 예비회담.

당시 인민무력부 부국장의 직책으로 회담에 참석한 김영철은 직설적인 화법과 물러서지 않는 원칙주의적 태도로 주목을 받았다.

[김영철/당시 인민무력부 부국장/1989년 : "우리 군대라는 게 그렇습니다. 일단 주 타격방향, 그쪽으로 말하면 주공 방향이죠? 주공 방향이 설정되면 거기다 역량과 기제를 집중한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제도 좀 시원스럽게, 하나 명백한데 거기다 의제를 설정하면 좋지 무슨 다른 의견이 그렇게 많습니까?"]

예비회담에 이어 본 회담까지 참가하면서 김영철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 주석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김영철이 김일성 주석을 독대하고 개명까지 했다는 게 외교관 출신 탈북민의 증언이다.

[고영환/전 북한 외교관 : "어떻게 그렇게 논리가 정연하고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하냐. 원래 이름이 뭐냐 그러니까 김동수입니다. 원래 이름이 김동수입니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김영철 이름이 좋은데 뭘 김영철이라고 하느냐... 가명을 쓰고 나왔거든요, 대표단들이. (김일성이) '김영철이라는 이름 좋은데'(하는 바람에) 김영철이라는 이름이 김일성한테 하사를 받은 이름처럼 돼버렸어요. 그러면서 그때부터 출세가 시작이 된거거든요."]

김일성 주석 사망 후에도 김영철에 대한 정권 차원의 신임은 계속됐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국방장관회담 등 주요 남북회담의 실무자로 지속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남측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예비역 장성은 김영철의 농익은 협상전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문성묵/제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남측 차석 대표2007년 : "오랫동안 이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해서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고 특히 소위 말하는 협상꾼이라고 볼 수 있어요. 능수능란하게 상대방을 다루고, 말하자면 극단적으로 상대방을 코너에 몰아붙이고 윽박지르고 협박을 하고 그랬다가 또 필요 시에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완전히 얼굴을 바꿔가지고 이제는 아주 사정 모드로 전환을 해요."]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중 남북 군인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북한이 자신들의 주장이 담긴 서해 북방한계선의 공동어로구역 도면을 사전 협의 없이 언론에 일방적으로 공개하면서 발생한 상황.

그러나 김영철은 오히려 당당했다.

[김영철/제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북측 수석 대표/2007년 : "회담하는데 그래. 응? 뭐 큰일 난 것처럼 그래. 야, 싫어하면 하지 말아 됐어!"]

[김영철/제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북측 수석 대표/2007년 : "남측 여론이 그렇게 무섭소? 나가면 나갔지 또 무슨 큰 일이라고 그래."]

김영철의 이런 행동은 회담에서 유리한 상황을 선점하기 위한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전술으로 평가받는다.

[문성묵/제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남측 차석 대표/2007년 : "때로는 대화 때로는 도발. 대화와 도발을 섞어서 자기가 원하는 국면을 만들어나가는데 김영철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러니까 북한으로서는 김영철이가 1등공신이다...그런 차원에서 김영철이 지금 중용되고 있다고 보고 있어요."]

2008년, 김정일의 건강악화로 본격화된 김정은 위원장의 권력 승계 작업.

당시 김영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정찰총국장으로 발탁되면서 김정은 위원장과도 대를 이은 신뢰를 쌓아간다.

[조선중앙TV/2012년 3월 :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서는 통일각과 판문각을 비롯한 판문점의 여러 곳을 돌아보셨습니다."]

집권 직후인 2012년 3월, 판문점을 현지 시찰한 김정은의 곁에도 김영철이 동행했고,

[조선중앙TV/2013년 2월 : "2013년 2월 12일, 북부 지하 핵 시험장에서 제3차 지하 핵 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 후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김영철은 정전협정 백지화라는 초강수를 들고 선두에 나섰다.

[김영철/당시 정찰총국장/2013년 : "우리 역시 다종화된 우리 식의 정밀 핵 타격 수단으로 맞받아치게 될 것입니다. 누르면 발사하게 되어 있고 퍼부으면 불바다로 타 번지게 되어있습니다."]

목함 지뢰 사건으로 남북이 극한 대치를 이어가던 2015년 8월.

이 때도 김영철은 평양주재 외교관들을 상대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지뢰 도발을 강하게 부인하며 위협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김영철/당시 북한 정찰총국장/2015년 : "괴뢰들이 말하는 결정적 증거라는 것은 거의 다 허위와 기망으로 일관돼 있었습니다. 놈들의 무모한 도발은 기필코 값비싼 징벌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을 시작으로 남북대화에 임하는 김영철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지난해 4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열린 남측 예술단의 방북 공연.

여기서 김영철의 행보는 다시 주목받았다.

도종환 문화부 장관과 손을 맞잡으며 공연을 주관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통전부 산하 초대소로 예술단을 초청해 예정에 없던 만찬도 주재한 것이다.

[김영철/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 "북과 남에 울려 퍼진 노래가 민족을 위한 장중한 대교향곡으로 되기 위하여 애써 노력합시다."]

그동안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던 김영철의 돌변한 태도는 정권의 달라진 대남·대외 정책을 재빨리 포착해 대응하는 노련한 그의 처세를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타이밍을 포착하는 데 있어서 김영철이 상당히 실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평창 올림픽에 성공적으로 북한이 데뷔를 하면서 '스마일 디플로머시', 일종의 '미소외교'로서 북한이 도발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트럼프와의 정상회담까지 고비고비마다 유연하고 탄력적이면서도 상대의 허를 찌르는 시점 포착으로 김정은의 눈에 들었고 이것이 결국은 미국과의 협상에 외무성 관리들을 다 제끼고 본인이 최전방 일선에 서게 된 하나의 요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실제 지난해 세 번의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김영철은 지근거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수행한 것은 물론, 여동생 김여정 부부장을 제외하면 회담장에 배석한 유일한 인물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김영철의 위상이 최고에 달한 것은 지난 6월에 개최된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다.

리수용, 리용호와 같은 외무성 엘리트들을 뒤로 한 채 김영철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은 김영철에 대한 김위원장의 신뢰감도 함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김영철을 협상 전면에 내세우는 진짜 이유는 모든 협상에서 핵(核)보유국으로서의 위상을 전제에 두려는 북한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6차 핵실험을 끝으로 북한은 핵보유를 완성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핵보유국의 위치에서 결국은 미국과 협상을 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미국보다는 평양에 근무를 함으로써 미국의 실체나 존재감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이 핵보유 강국이고 핵을 보유한 일종의 주체로써 협상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김영철의 강공보고서가 오히려 외무성의 유연한 보고서보다는 김정은 입장에서 더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목전으로 다가온 2차 북미정상회담.

일각에선 협상대표의 변동을 추측하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북미 협상 테이블에서 김영철의 역할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한다.

[고영환/전 북한 외교관 : "지금 당장은 계속해서 세게 나가면서 미국을 약간 쥐었다 놨다 하는 것처럼 하면서 강경하게 나가서 북한 다루기가 쉽지 않구나 하는 인상을 계속 주기 위해서는 김영철이 아직도 할 역할이 많다... 비핵화가 어느 정도 진전이 되고 그리고 영변기지 핵사찰이 이루어지고 이럴 때는 외무성으로 다시 돌아올 수가 있겠지만 그 큰 틀을 만들기 전에 김영철이 빠지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30년간 수많은 협상 테이블에 앉으며 북한의 책임 협상가로 올라선 김영철. 그의 발언이나 행보가 곧 북한당국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로 해석된다는 점에서 노회한 협상가에게 모아지는 관심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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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도발 배후·협상의 ‘얼굴’…‘파워맨’ 김영철은?
    • 입력 2019-02-09 08:27:52
    • 수정2019-02-09 08:36:58
    남북의 창
[앵커]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 위원장 못지 않게 측근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을 두 차례 만나 김 위원장의 친서까지 전달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이제 사실상 대미·대남 라인의 최고실세라 할 수 있는데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 등으로 대남도발의 배후로 여겨졌던 김영철 부위원장이 어떻게 북한의 협상책임자가 된 걸까요?

이번주 <클로즈업 북한>에서는 북한 김영철 부위원장 집중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평창의 밤하늘을 수놓은 1218대의 드론.

한반도기를 앞세워 공동 입장한 남과 북.

1년 전, 전 세계에 감동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은 스포츠 축제를 넘어 남북 관계 개선과 북미 협상이라는 대전환의 마중물이 되었다.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북미대화 의지를 전달코자 평창을 찾은 사람, 바로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자 통일전선부장 김영철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김영철의 발걸음은 워싱턴을 향했다.

두 번째 백악관 방문.

그가 가져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됐고, 북한과 미국은 두 번째 회담을 준비 중이다.

급변한 한반도 정세와 함께 북한 대외협상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매김한 김영철.

그는 어떤 인물일까?

1946년생으로 알려진 김영철은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 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북한의 대표 군부인사다.

군사정전위원회 연락장교 출신의 김영철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 한 것은 1989년 남북 고위급 예비회담.

당시 인민무력부 부국장의 직책으로 회담에 참석한 김영철은 직설적인 화법과 물러서지 않는 원칙주의적 태도로 주목을 받았다.

[김영철/당시 인민무력부 부국장/1989년 : "우리 군대라는 게 그렇습니다. 일단 주 타격방향, 그쪽으로 말하면 주공 방향이죠? 주공 방향이 설정되면 거기다 역량과 기제를 집중한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제도 좀 시원스럽게, 하나 명백한데 거기다 의제를 설정하면 좋지 무슨 다른 의견이 그렇게 많습니까?"]

예비회담에 이어 본 회담까지 참가하면서 김영철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 주석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김영철이 김일성 주석을 독대하고 개명까지 했다는 게 외교관 출신 탈북민의 증언이다.

[고영환/전 북한 외교관 : "어떻게 그렇게 논리가 정연하고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하냐. 원래 이름이 뭐냐 그러니까 김동수입니다. 원래 이름이 김동수입니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김영철 이름이 좋은데 뭘 김영철이라고 하느냐... 가명을 쓰고 나왔거든요, 대표단들이. (김일성이) '김영철이라는 이름 좋은데'(하는 바람에) 김영철이라는 이름이 김일성한테 하사를 받은 이름처럼 돼버렸어요. 그러면서 그때부터 출세가 시작이 된거거든요."]

김일성 주석 사망 후에도 김영철에 대한 정권 차원의 신임은 계속됐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국방장관회담 등 주요 남북회담의 실무자로 지속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남측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예비역 장성은 김영철의 농익은 협상전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문성묵/제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남측 차석 대표2007년 : "오랫동안 이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해서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고 특히 소위 말하는 협상꾼이라고 볼 수 있어요. 능수능란하게 상대방을 다루고, 말하자면 극단적으로 상대방을 코너에 몰아붙이고 윽박지르고 협박을 하고 그랬다가 또 필요 시에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완전히 얼굴을 바꿔가지고 이제는 아주 사정 모드로 전환을 해요."]

2007년 12월,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중 남북 군인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북한이 자신들의 주장이 담긴 서해 북방한계선의 공동어로구역 도면을 사전 협의 없이 언론에 일방적으로 공개하면서 발생한 상황.

그러나 김영철은 오히려 당당했다.

[김영철/제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북측 수석 대표/2007년 : "회담하는데 그래. 응? 뭐 큰일 난 것처럼 그래. 야, 싫어하면 하지 말아 됐어!"]

[김영철/제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북측 수석 대표/2007년 : "남측 여론이 그렇게 무섭소? 나가면 나갔지 또 무슨 큰 일이라고 그래."]

김영철의 이런 행동은 회담에서 유리한 상황을 선점하기 위한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전술으로 평가받는다.

[문성묵/제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남측 차석 대표/2007년 : "때로는 대화 때로는 도발. 대화와 도발을 섞어서 자기가 원하는 국면을 만들어나가는데 김영철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러니까 북한으로서는 김영철이가 1등공신이다...그런 차원에서 김영철이 지금 중용되고 있다고 보고 있어요."]

2008년, 김정일의 건강악화로 본격화된 김정은 위원장의 권력 승계 작업.

당시 김영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정찰총국장으로 발탁되면서 김정은 위원장과도 대를 이은 신뢰를 쌓아간다.

[조선중앙TV/2012년 3월 :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서는 통일각과 판문각을 비롯한 판문점의 여러 곳을 돌아보셨습니다."]

집권 직후인 2012년 3월, 판문점을 현지 시찰한 김정은의 곁에도 김영철이 동행했고,

[조선중앙TV/2013년 2월 : "2013년 2월 12일, 북부 지하 핵 시험장에서 제3차 지하 핵 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 후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김영철은 정전협정 백지화라는 초강수를 들고 선두에 나섰다.

[김영철/당시 정찰총국장/2013년 : "우리 역시 다종화된 우리 식의 정밀 핵 타격 수단으로 맞받아치게 될 것입니다. 누르면 발사하게 되어 있고 퍼부으면 불바다로 타 번지게 되어있습니다."]

목함 지뢰 사건으로 남북이 극한 대치를 이어가던 2015년 8월.

이 때도 김영철은 평양주재 외교관들을 상대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지뢰 도발을 강하게 부인하며 위협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김영철/당시 북한 정찰총국장/2015년 : "괴뢰들이 말하는 결정적 증거라는 것은 거의 다 허위와 기망으로 일관돼 있었습니다. 놈들의 무모한 도발은 기필코 값비싼 징벌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을 시작으로 남북대화에 임하는 김영철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지난해 4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열린 남측 예술단의 방북 공연.

여기서 김영철의 행보는 다시 주목받았다.

도종환 문화부 장관과 손을 맞잡으며 공연을 주관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통전부 산하 초대소로 예술단을 초청해 예정에 없던 만찬도 주재한 것이다.

[김영철/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 "북과 남에 울려 퍼진 노래가 민족을 위한 장중한 대교향곡으로 되기 위하여 애써 노력합시다."]

그동안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던 김영철의 돌변한 태도는 정권의 달라진 대남·대외 정책을 재빨리 포착해 대응하는 노련한 그의 처세를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타이밍을 포착하는 데 있어서 김영철이 상당히 실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평창 올림픽에 성공적으로 북한이 데뷔를 하면서 '스마일 디플로머시', 일종의 '미소외교'로서 북한이 도발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트럼프와의 정상회담까지 고비고비마다 유연하고 탄력적이면서도 상대의 허를 찌르는 시점 포착으로 김정은의 눈에 들었고 이것이 결국은 미국과의 협상에 외무성 관리들을 다 제끼고 본인이 최전방 일선에 서게 된 하나의 요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실제 지난해 세 번의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김영철은 지근거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수행한 것은 물론, 여동생 김여정 부부장을 제외하면 회담장에 배석한 유일한 인물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김영철의 위상이 최고에 달한 것은 지난 6월에 개최된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다.

리수용, 리용호와 같은 외무성 엘리트들을 뒤로 한 채 김영철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은 김영철에 대한 김위원장의 신뢰감도 함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김영철을 협상 전면에 내세우는 진짜 이유는 모든 협상에서 핵(核)보유국으로서의 위상을 전제에 두려는 북한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6차 핵실험을 끝으로 북한은 핵보유를 완성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핵보유국의 위치에서 결국은 미국과 협상을 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미국보다는 평양에 근무를 함으로써 미국의 실체나 존재감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이 핵보유 강국이고 핵을 보유한 일종의 주체로써 협상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김영철의 강공보고서가 오히려 외무성의 유연한 보고서보다는 김정은 입장에서 더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목전으로 다가온 2차 북미정상회담.

일각에선 협상대표의 변동을 추측하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북미 협상 테이블에서 김영철의 역할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한다.

[고영환/전 북한 외교관 : "지금 당장은 계속해서 세게 나가면서 미국을 약간 쥐었다 놨다 하는 것처럼 하면서 강경하게 나가서 북한 다루기가 쉽지 않구나 하는 인상을 계속 주기 위해서는 김영철이 아직도 할 역할이 많다... 비핵화가 어느 정도 진전이 되고 그리고 영변기지 핵사찰이 이루어지고 이럴 때는 외무성으로 다시 돌아올 수가 있겠지만 그 큰 틀을 만들기 전에 김영철이 빠지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30년간 수많은 협상 테이블에 앉으며 북한의 책임 협상가로 올라선 김영철. 그의 발언이나 행보가 곧 북한당국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로 해석된다는 점에서 노회한 협상가에게 모아지는 관심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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