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진단] ‘임시정부 100년‘의 가치…한국의 미래 100년은?

입력 2019.04.14 (08:09) 수정 2019.04.1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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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김진수
■ 대담 : 한완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

-올해는 일제강점기에서 독립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임시정부는 당시 세계 처음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며 민주공화제를 명시했는데요.
이러한 가치는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수많은 선열의 헌신으로 그동안 대한민국은 경제적인 발전을 이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평화와 통일이라는 미완의 과제가 아직 놓여있습니다.
KBS 일요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계기로 임시정부의 현재적 의미와 새로운 100년을 위한 과제를 짚어보겠습니다.
-위원장님, 어서 오십시오.
지난주에 임정 수립 100년, 100주년 기념행사가 상해, 중국 상해에서 있었죠?
-그렇죠.
-거기에 참석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어젯밤에 왔습니다.
-행사는 어땠었나요?
-참 좋았습니다.
상하이에서 7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축하하는 걸 보니까 대단하고 저는 눈물이 날 뻔한 게 뭐냐 하면 우리 한인 학교 어린아이들이 애국가 4절을 다 부르는데요.
거기도 가슴이 뭉클하지만 두 번째로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우리 광복군들이 불렀던 애국가가 있습니다.
그 애국가를 4절 부르니까 막 눈물이 줄줄 납니다.
-거기에 동해물~
-나는 우리 처남이 거기 학병으로 고생하다가 고생만 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더 가슴에 맺혀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 3.1 운동 및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신데요.
지금 일단 이 기념사 추진회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활동은 한 104가지 활동이 있습니다.
각 부처가 이미 작년에도 예산을 따서 마련한 게 있고요.
우리 위원회는 100년 전에 일어났던 3.1운동의 정신 그리고 3.1운동의 실천이 주는 공공적 감동.
공익적 감동, 이것을 국민하고 많이 나누어 가지고자 여러 가지 애를 썼습니다.
-알겠습니다.
임정 수립 기념일이 4월 13일이었는데 올해부터 4월 11일로 바뀐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그 연유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분도 많을 거 같은데.
-그것은요.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데요.
1919년 4월 10일 본국에서 이제 3.1운동 주도자들이, 지도자들이 보낸 현순 목사란 분이 상해 어떤 공간을, 집을 마련해서 거기서 4월 11일에 임시정부 의정원, 국회 의정원을 시작했죠.
그래서 4월 10일 날 시작해서 4월 11일 날까지 밤 꼬박 새우고.
-의정원이라고 하면 우리 국회에 해당되는 거죠?
-그렇죠, 국회죠.
거기서 국호를 제정하고 거기서 헌장을, 헌법을 제정했죠.
그래서 국가의 틀을 제도적인 틀을 거기서 갖췄죠.
그게 11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13일에서 11일로 바로 잡았죠.
-이때까지 이제 4월 13일로 그렇게 이제 알고 그 기념을 해 왔던 사정을 들어 보니까 좀 기막힌 부분도 있더라고요.
윤봉길 의사 의거로 인해서 임시정부가 굉장히 탄압을 받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거기서 압수수색된 자료에서 기록을 보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일본 경찰의 자료가 4월 13일로 돼 있어서 이때까지 4월 13일로 했다가 이제 새롭게 이제 정리를 해보니까 4월 10일에서 11일, 그 사이에 이제 모든 헌장 같은 게 헌법에 해당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이제 올해부터 이제 4월 11일로 정했다고 하는데 굉장히 의미가 있는 거 같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3.1 운동 뒤에 이렇게 이루어졌는데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되겠죠?
-그렇죠.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지역과 계층과 성과 종교가, 이런 차별 없이 전 국민이 들고 일어선 거죠?
그러고 나서 한 달여를 지나서 3.1 운동 실천했던 사람들의 감동, 또 실천에 감동받고 또 감동받았던 우리 애국지사들이 우리 본국에서 노령에서 또 다른 데서 이렇게 상하이로 모여서 임시정부를 만들기로 한 거죠.
그러니까 그 독립은 3.1운동의 감동입니다.
그게 뭐냐 하는 걸 우리가 얘기를 좀 해야 할 거 같아요.
-지금 얘기해 주시죠.
-그러면요, 3.1운동은 1919년에 일어난 건데 그 특징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철저하게 비폭력이었습니다.
이 비폭력이 빛나는 이유는 운동하는 시위자들을 통제했던 일본 관원들은 총과 칼로 통제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비폭력으로 했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했다.
기껏 시위자들이 한 것은 태극기 들고 맨주먹으로 우리 대한 독립 만세만 불렀거든요.
돌을 던진 것도 없고 칼을 던진 적도 없고 칼을 쓴 적도 없고 날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평화적으로 우리 독립 만세만 불렀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그게 우리 국내의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니까 전국에서, 전국에서 그야말로 두 달 동안 인구의 10% 이상이 참여했으니까 세계적인 사건이죠.
그 당시 비폭력 평화운동을 했던 분은 영국의 간디인데.
-인도의 간디.
-인도의 간디.
영국 제국주의에 항거했던 인도의 간디 변호사인데 이분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비폭력을 내세웠지만 인구의 1%도 참여 못 했을 겁니다.
물론 인구가 크지만.
그러니까 그 당시 세계사 쪽으로 봐서 폭력이 난무해서 1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1차 대전 때 죽은 사람이 얼마인지 아세요?
3800만 명이에요.
그러니까 서구 열강의 고도의 문명의 기술을 가지고 새로 개발한 무기들, 탱크 같은 거, 기관총 같은 걸 가지고 너무 살육을 험악하게 했기 때문에 세계가 이제는 비폭력으로 가야 한다.
평화로 가야 한다 하는 무리가 무르익을 때 10년간의 일본 무단정치에 의해서 고생하던 우리 민족이 각계각층에서 통합적으로 전 민족이 전 민중이 들고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비폭력으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감동 준 거죠.
-그렇군요.
그러니까 제가 기억하기에 1차 대전이 1914년에서 1918년.
끝나고 나고 그 이듬해에 그 어떤 폭력을 반대하는, 폭력을 쓰지 않는 어떤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어떤 시위를 벌인 그 부분은 상당히 어떻게 보면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보여지는데.
그런 만큼 어떤 세계 울림, 반향이 있었습니까?
-반향이 있었습니다.
반향을 이야기하자면 3.1 운동 일어나고 나서 두 달 하고 나흘 지나서 북경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죠.
그게 소위 5.4 운동인데.
5.4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을 먹기 위해서 우리 한반도를 이렇게 다리로 이용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중국 학생들이 3.1운동의 그 선언문 보면 중국을 걱정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정말로 너무 부끄럽다. 그래서 학생들의 유인물 중에 그런 글귀가 있답니다. 불교 신자들 철저하게 자기를 자성할 때 오체투지를 하잖아요. 바짝 엎드려서. 우리는 오체투지를 하면서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 부끄러움 속에는 감사해야 한다는 그것도 있겠죠. 그런데 거기에 영향을 줬고. 그 다음에 인도의 간디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네루가 영국 반식민주의 운동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자기 딸에게 글을 쓰는데 그 딸 나이가 우리 유관순 나이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3년간 쓴 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데.
그 2권에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코리아에서는 어린 소녀가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들고일어났는데 자기 딸이 16살이니까, 네루.
나중에 수상이 됐죠.
딸을 생각하면서 너도 코리아에서 젊은 여학생들이 일어났다는 걸 알면 감동할 것이다.
울림이 컸죠.
-컸죠.
하여튼 그때 사실 제가 어릴 때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말이죠.
그때 좀 우리가 훨씬 수가 많으니까 그때 뭔가 조금 더 이렇게 투쟁적으로, 적극적으로 했으면 그때 어떤 일본을 쫓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것은 이제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만 그때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서구 열강들은 소위 소셜 다이니즘, 즉 적자생존의 갑질하는 강대국들이 약한 나라의 부족을 삼켰단 말이죠.
문명을 준다는 이름 밑에서 삼켰는데 그 사람들이 통명을 제도적으로 썼습니다.
자국 내에서는 민주주의를 했겠죠.
영국, 프랑스 했겠지만 자기들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무단 통치도 하고 그렇게 약탈도 하고 착취도 하고 차별했거든요.
그런 국제적인 정세로 봐서 지금 우리 앵커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힘을 합쳤다고 해서 쫓아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고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패권주의의 제일 마지막에 붙어서 우리를 잔인하게 이렇게 했죠.
-알겠습니다.
지금 그 글에서 3.1운동 뒤에 임시정부와 바로 직결되는 어떤 임시정부 수립의 원인이 된다 이제 이미 설명을 해 주셨고요.
그렇게 되면 사실 이제 제가 보면 그때 당시 이제 주재소라고 하죠.
-그렇죠, 주재소.
-지금은 파출소에 해당하는 건데 몇 군데는 사실 습격도 하긴 했어요.
했는데 그것조차도 아주 진짜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했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진짜 비폭력, 평화적 어떤 시위였다,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 거 같고요.
아까 말씀하실 때 4월 10일에서 4월 11일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했는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어떻게 정해졌다고 보시나요?
-그러니까 그 당시 일본은요.
아시다시피 3.1 운동 일어나기 전에 순종이 돌아갔잖아요.
왕이 돌아갔으니까 이제 왕정, 조선 500년 지배했던 소위 대한제국의 재건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3.1 운동을 일으킨 주도세력들의 머릿속에는 우리는 이제 왕정 시대를 뛰어넘어가야 한다.
아직 세계의 선진국가들만 자국민에게만 민주주의를 베풀었던 식민주의는 안 하고 그것을 우리는 완벽하게 민국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까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면서 내세운 게 민주적 공화제죠.
그러니까 민주공화제라는 말 자체가 헌법 제1조에 올라간 것도 세계 최초입니다.
발마르 공화국이 몇 년 후에 썼는지 몰라도요.
그러니까 헌법 제1조에 민주공화국을 했다는 거 자체가 선진국 통틀어서 최초입니다.
굉장히 자랑스러운 것이죠.
왜 이런 사실을 지난 100년 동안 우리 국민이 모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저도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사람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부끄럽게 생각하죠.
제대로 못 가르친 거죠.
못 가르치도록 그렇게 일제 36년간은 일본 사람이 그렇게 했고 그리고 분단에 대해서 분단에 대해서 우리가 독립해방이 돼야 하는데 독립해방 안 되고 분단이 왔잖아요.
그러니까 분단을 이끌었던 지배 세력이 신일 냉전세력이니까 그들이 일본에 의해서 고통당한 우리 민족의 입장보다도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을 개발된 국가의 모델로 보고 싶었으니까 이게 잘 안 된 거죠.
-사실 저도 민주공화제가 헌법에 명시된 거는 임시정부의 경우가 처음인 거를 사실 이번에 처음 알았거든요.
-그렇습니까?
-사실 이제 저희가 민주공화제를 얘기를 들을 때 그때 어디서 받아들였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참 어떻게 보면 좀 제가 몰랐던 것도 충격적이고.
-그러니까 우리 선생님께서도 몰랐다고 하니까 젊은이들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 책임이, 우리 기성세대가 큰데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우리가 피압박 민족으로서 강점당한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거는 더 놀라운 겁니다.
선진국은 타국에 대해서 그렇게 안 했으니까.
아까 말한 대로 경고를 하면서도 우리는 부족, 식민지 대상이 됐던 아프리카 부족이 아니고 당당한 국가였거든요.
그래서 그런 저력이 있기 때문에 민주공화제를 이렇게 실천하도록 우리 선조들이 합의한 거 참 고맙게 생각을 해요.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많은 국가가 이제 민주주의, 또 공화제 이렇게 채택을 하면서도 또 기존에 갖고 있던 어떤 왕 제도는 존속시키는 국가도 있고요.
-나라도 있죠.
-제가 이제 이번에 크게 깨달았던 거는 사실 저는 일본 강점에 의해서 저희 왕정이 깨졌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게 아니고 이미 임시정부에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이제 제국,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민주공화정을 우리가 받아들였다.
이 의미는 굉장히 큰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용한 평화적인 멋진 세계 유례가 별로 없는 혁명이죠.
평화적인 혁명이죠.
우리 바로 3.1 운동 일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볼셰비키 혁명도 유일 혁명이고 1차 대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우리는 조용히 그야말로 제국에서 민국으로.
대한은 그대로 대한제국을 받고.
-받았죠.
알겠습니다.
이제 그렇게 해서 이제 일본이 이제 항복을 하게 되고 광복이 찾아오고 미 군정을 거쳐서 이제 1948년에 이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는데 이제 지금 우리가 임정 그다음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렇게 얘기할 때 이게 지금 건국절을 놓고 말이죠.
어떤 계기가 과연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걸 놓고 지금 상당한 어떤 다툼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있었죠.
그런데 우리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소위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숭고하시는 분들 가운데 그런 말이 나오는데요.
확실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 헌법을 마련할 때 대통령이었잖아요.
대통령 전에 국회의장 같은 입장에서 헌법을 했는데 그 어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현재를 건국 30주년.
그럼 그건 뭐냐 하면 1919년 그날이 건국이라는 걸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역사 앞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러니까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초대 정부 수립의 날입니다.
건국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해서 진짜 건국절은 1919년 3.1 정신, 민주공화제 정신을 그렇게 폄훼하거나 그야말로 약화시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를 기쁘게 하는 논리일 수도 있죠.
-일단 건국절을 주장하는 쪽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면 말이죠.
일단 흔히 하는 주장이 국가라고 하면 국민, 주권, 영토.
이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그때는 국민이 있었다 하더라도 특히 주권은 우리가 잃은 상태 아니었느냐.
이러면서 그러니까 한마디로 임시정부 상황이 어떻게 보면 불안전한 건국?
이렇게 지금 주장을 하는 거 같아요.
-국가의 3요소가 없기 때문에 국가라고 할 수가 없다 이런 논리인데요.
형식 논리상 그럴듯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확실하게 말씀을 드리면요.
1910년 소위 국치일, 경술국치일에 저희가 강점당하고 빼앗겼잖아요.
일본의 패권이 우리 국민을 황제, 그쪽 천황의 식민, 신하로 바꿔 놓고. 그리고 간토를 300리 반도 강산을 강점 강탈했고 그러니까 주권도 빼앗아갔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우리 집에 강도가 총, 칼 들고 들어와서 우리 아무 일도 없는데 나하고 가족하고 쫓아내고 문패도 하나 떼고 자기 문패 붙이고 하면서 이제 나는 쫓겨났으니까 내 집으로 들어가고 싶을 거 아닙니까?
그런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주권도 강탈당했고 국토도 강탈당했고 국민이란 지위도 강탈당해서 이렇게 왔는데 그 세 요소가 없기 때문에 나라가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자의 논리를 어떻게 그대로 따라 하느냐 말이에요.
상식이 있으면 부끄러워하지도 못하죠.
-그때 사실 주권 중에 외교관도 박탈당한 상황이고.
-외교권은 1905년 을사늑약 때 빼앗겼죠.
-빼앗겼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또 외교적인 노력, 노선 충돌을 일으킨 부분이긴 합니다만 그런 부분도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이승만 전 대통령도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어떤 그리고 그 부분을 완전히 우리가 국가가 아닌 상태. 그렇게 인정하지 않은 그런 증좌로도 보이거든요.
-그럼요, 건국 1년 기원으로 하고 48년을 건국 30주년이라고 하죠.
-그렇죠.
그런데 왜 이렇게 저는 이제 또 어떤 상황이 바뀌고 또 정부가 바뀌는 상황이 오면 또 저는 건국절 논란이 또 일어날 거라고 보거든요.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요?
뭐로 보입니까?
-그게 예를 들어 3.1 정신이 갖고 있는 고귀한 울림, 감동적이고 공공적이고 변혁적인 울림을 전혀 이해 못 하기 때문에 그렇고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뿌리를 보면 대개 친일 쪽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그런 세력이 다시 그런 주장을 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다시 우리를 삼키거나 아시아를 지배할 그런 시대는 오기가 힘들 테니까요.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고요.
그러니까 건국절보다도 정확하게 정부 수립일로 기념해야죠.
-그렇죠.
지금 선생님 말씀하실 때 3.1 운동에 대한 어떤 평가절하, 그런데 그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임시정부를 좀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떤 그런 좀 느낌이 있어서 그거는 어디서 연유하는 건지.
-그것은요,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국내에서 보면 그 당시에 인정하지 않기보다도 독립을 존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고요.
논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일본한테 강점당했으니까 우리도 힘으로 무력으로 쟁취하자 이런 생각하는 애국자들도 있었고요.
그게 애국자들이죠.
그리고 실력, 교육을 통해서 실력을 길러서 우리가 대응하자, 장기적으로.
이제 도산 선생 같은 사람, 백범도 그런 류에 속하고요. 많은 사람이 김규식 선생도 그렇고.
하지만 또 그렇게 말하는 분들도 일본의 잔인한 걸 보니까 우리도 군대를 가져야겠다.
박용만 선생님 같은 사람들도 있었고요.
김규식 선생님 같은 선배 같은 분도 군관 학교 만들려고 노력을 했어요.
신채호 선생이나 이런 분들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하지 않겠나, 이런 게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우리가 억울하게 국토를 빼앗기고 주권을 강탈당하고 차별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응을 보면 여러 가지 방법론 나오는 걸 나쁘다고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이제 백범이 임시정부를 쭉 초기부터 27년간 2차 전쟁 끝날 때까지 지켜봤는데 그 어른의 생각은 아주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민족 부르주아 민족 운동이죠.
북한 쪽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 내부에서는 민족 부르주아 운동이라고 해서 그렇게 나쁘게만은 보지 않는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제가 질문을 드린 어떤 의도는 임정을 건국절을 주장함으로써 임정을 조금 폄하하려는 의도라면 거기에는 어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큰 부분이 갈라져 나오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이제 그거를 여쭤본 건데.
-그거는요.
정확하게 얘기한다는 게 각자가 다 정확하게 얘기를 한다고 말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은 임정에서 탄핵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방법론이 예를 들어서 우리 민족이 미국의 한 주로 취급당한다든지 그쪽에 부와 은총에 의해서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는데 이제 그런 식의 논리를 가지고 소위 소셜 다이니즘, 갑질 통해서 약소국가를 막 삼켰던 경쟁이 심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그런 논리가 잘 안 먹혀들어 가죠.
투항 주의로 보게 되겠죠.
사회주의 입장에서 안 보더라도 그렇게 건전한 민족주의 입장에서 봐도 그렇죠.
백범 선생은 건전한 민족주의 입장에서 봐도 그래도 투항주의로 비춰지겠죠.
그런 분들이 이제 임시정부를 조금 폄훼하고 싶은 생각, 그런 유혹을 느낄 수도 있겠죠.
또 어떤 사람들은요.
일제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김구 선생마저 테러리스트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와 어떻게 이봉창 선생을 어떻게 테러리스트로 보겠습니까?
그분들의 내공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수준에 올라가 있는 분들이에요.
-하여튼 선생님께서 앞으로는 그런 논란이 더 없을 거라고 하시니까 진짜 또 논란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한번 기대해 보고요.
아까 이제 3.1 운동을 언급하시면서 비폭력, 평화 어떤 운동, 시위.
그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를 해주셨는데 이제 3.1운동이나 임정이나 어떤 현재적 가치에 대해서 좀 한번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그게 그랬다면 사실 촛불혁명 얼마 전에 촛불혁명도 그런 어떤 부분에서 세계에 준 메시지가 참 유사하다고 보여져요?
-그렇죠.
-어떻게 보시나요?
-굉장히 유사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촛불혁명 일어난 지 2년 조금 안 되니까 국내 학자들도 3.1 운동과 촛불혁명을 처음부터 연결시키는 일에 빠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현장에서 느낀 게 어떤 거냐면 이런 거죠.
2017년 11월 같은데요.
효자동에서 경찰이 막았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남자들이 올라가 차 위에 올라가서 효자동으로 진군하고 싶었던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죠.
그러니까 그 차 안에 그러니까 밖에서 소녀들이 나이가 뭐 20대 전후라고 생각되는데 내려와, 내려와 이렇게 세 번 여러 번 부르짖어도 남자들이 안 내려오니까 많은 여자의 목소리가 비폭력, 비폭력, 비폭력을 외치니까 스르르 내려왔어요.
그러면 올라갔던 남자들도 다 민주화 운동 한 사람들 같은데 비폭력이라는 말을 듣고 내려오게 한 저 힘은 뭔가.
그리고 저 비폭력이라고 소리 지르는 저 젊은 여자들은 누군가 하는 것을 생각하니까 아, 저게 100년 유관순의 정신이구나.
비폭력, 유관순 열사가 죽었을 때 의사들이 내린 사망 선고가 뭔지 아세요?
-모릅니다.
-자궁 파괴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고문을 비인간적으로 했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잖아요.
-그렇네요.
-그러면서도 유관순 열사는 10대 소녀가 나의 가장 큰 슬픔은 조국을 위해서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건 보편적인 울림이죠.
그 울림이 98년을 뛰어넘어서 이 광화문에서 터져 나왔구나.
비폭력 하니까 내려왔구나.
그리고 실제로 광화문에서 다른 도시에도 큰 데 광장에서 했습니다만 그 5, 6개월 동안 1700여 명이 참여했는데 단 한 건의 폭력이 발생 안 했어요.
그래서 세계 언론이 극찬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게 현대적 의미인데요.
극찬한 의미를 제가 직접 본 것 가운데 제일 인상적인 게 이런 거였어요.
한국 사람들은 김치를 늘 일상적으로 먹는다.
김치를 일상적으로 생활 속에서 먹듯이 저렇게 비폭력, 평화, 민주 시위도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구나.
아마 일본 지식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게 그런 걸 겁니다.
그리고 독일 언론 같은 데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한국 사람들은 서방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배우는데 이제 우리 서방 선진국가가 한국으로부터 저 높은 수준의 비폭력 민주주의 삶 속에 육화된 민주주의를 배워야겠다.
이런 격창.
그리고 언제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서 언제 외국 장성이 우리가 리더에 따라서 들쥐처럼 따라다닌다.
그렇게 폄하한 적이 있는데 민주주의의 가장 성숙한 행진을 보여준 것이 우리 3.1운동의 부활로서 촛불 시민혁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촛불혁명으로 인해서 어떻게 보면 지금의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다.
이렇게 볼 수 있겠는데 말이죠.
어떻습니까?
그 어떤 시민들의 요구, 어떤 기대.
이 정부가 잘 지금 반영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어떻게 보시는 편인가요?
-사실요, 촛불 시민혁명의 결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이 됐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그거에 대한 사실을 너무 늘 가슴 속에 지니면서 저 뜻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평창올림픽 대회를 계기로 해서 평화 흐름을, 아까 우리 앵커께서 제일 처음에 우리 화두에 시작할 때 경제는 개발됐지만 평화와 이게 안 됐다는 거, 그걸 이룩하려고 하는 것이죠.
사실 촛불혁명은 간디의 절친이었던 타고르가 칭찬한 동방의 등불입니다.
평화의 등불입니다.
그러니까 평화의 뜻을 재조명하려고 하는데 과연 대통령과 함께 이 정부를 출범시킨 분들이 촛불 정신을 얼마나 이해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솔직히 뭐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네요.
지난 2년간의 행태를 보면 촛불 시민혁명이 3.1 운동을 일으킨 자기 몸을 불살라서 내가 조국을 위해서 바칠 몸이 하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던 그 애국지사의 열정이 있었다면 2년간의 실적이 이거밖에 안 되겠나.
왜 안 되는가에 대해서 안타깝죠.
그러나 이해를 합니다.
이 경제 문제인데, 주로.
불평등 문제 가지고 많이 비판하는데 이것은요.
21세기 후반기에 전 세계인 선진국가가 다 겪는 문제입니다.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하루 이틀 만에 할 수 없고요.
저는 통일에 관심이 있잖아요.
옛날 정부의 통일 담당 국무위원도 했고 그런데 한국이 분단을 극복하면서 남북이 공조해서 민족 경제, 경제공동체를 만들면 그야말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놀라운 경제의 소위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창조적인 지식과 첨단 지식과 기술과 자본.
그쪽에 엄청나게 비싼 지하자원, 히토 이로부시에서 금 등과 근면하고 질 좋은 노동력과 또 그쪽의 창의성하고 합치면요.
이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탁 트인다고 생각을 하는데 대통령이 그걸 하시려고 지금 남북 관계를 지금 막 타이트하게 하는데 그 대통령의 속셈을 과연 얼마나 여당에서나 그쪽 소위 집권당 내부에서 알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런 방향이 있고요.
이제 한 쪽에서는 이제 사실 이제 촛불혁명 당시에 이게 나라냐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반칙, 부조리에 대한 어떤 레드카드를 시민들이 내보인 건데.
-그럼요.
-그렇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적폐 청산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청산됐습니까?
-그러니까 적폐 청산은 노력으로 이어졌죠, 노력으로.
그런데 한쪽에서는 턱없이 모자라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너무 적폐 청산만 부르짖는다고 하고.
지금 이 부분도 상당히 온도가 다르거든요.
어떻게 보십니까?
-앵커님께서는 굉장히 기계적으로 이렇게 중립적으로 보시는데 적폐 같은 적폐라는 말 자체가 냄새나고 썩어빠진 것들이 쌓여있는 것을 적폐라고 합니다.
좋은 것을 적폐라고 하지 않습니다.
적폐라고 하는 객관적인 사실이 냄새나는 부패와 반칙과 이런 것들이 쌓여서 생긴 하나의 정치적 유산이라면 그 쓰레기는 빨리 치워야 합니다.
집 이사 가는 데 집은 좋은데 그 안에 쓰레기가, 그전에 살던 사람이 그대로 버리고 갔다.
그것부터 치워야죠.
치워야지, 그 집이 깨끗하게 되죠.
그러니까 적폐 청산의 문제를 그 말에 대해서는 너무 과민반응하는 국민이 어떻게 보는가 하면 이제 피곤하다.
그러면 냄새나는 오물과 함께 살자는 건 아닐 텐데도 피곤하다 그러거든요.
피곤하지 않습니다.
적폐를 청산하고 나면 미래가 탁 보입니다.
적폐 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고 미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문제입니다.
-선생님께서 적폐를 쓰레기에 비유를 해 주셨는데 만약 선생님께서 쓰레기를 정리하신다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서 어떤 쓰레기부터 빨리, 먼저 쓰레기 청소할 때도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냄새 제일 많이 나고, 고약한 냄새 제일 많이 나는 거부터 먼저 해야죠.
-그걸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부정부패.
-부정부패요?
-부정부패겠죠.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던 소위 반칙과 부패죠.
그러니까 부에 편중돼서 그게 쌓여 있는 거.
근면한 사람이 아무리 실력으로 많이 노력해도 이게 부모 잘못 만났다든지 좋은 집단에 속해있지 않다든지 어느 지역 출신이 아니라든지 이렇게 되면 그게 구조적으로 또 이렇게 차별받아온 것이 있다면 그것이 적폐죠.
그런데 더 큰 적폐는 역사적으로 말하면 역시 일제 유산이 아니겠는가.
-근본적인.
적폐.
그러면 이제.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한 게 아니었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반민특위를 만들어서 어떤 친일 청산을 하려고 했는데 하여튼 그 노력이 실패를 했고요.
사실은 이제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친일 세력들이 또 우리 사회에 어떤 주류 세력으로 또 등장하게 되고 하여튼 그런 부분들이 지금까지도 사실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렇죠.
그렇게 봐야죠.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잘한 것도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잘한 게 있는데 그 두 대통령이 이제 잘못한 게 있다고 한다면 지금 말하는 대로 일제시대의 떵떵거리고 살던 사람이 해방 후에도 떵떵거리게 살게 되고 독립운동 한 사람들은 그때도 차별받고 고생하고 감옥 가고 후손들도 결국 별로 잘 살지 못한다.
이게 내려오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이제 그런 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일제 유산과 현재의 그런 냄새나는 것들하고 이게 연결이 돼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청산을 하자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반민특위 말씀하셨는데 실패했다고 그랬는데 반민특위를 국회에서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반민특위에 종사했던 사람을 다 색깔론으로 소외시켰거든요.
그런데 그게 지금도 내려오잖아요.
정치적인 의견이 다르면 색깔론으로 저 사람은 좌파다.
혹은 저 사람은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잖아요.
내가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신자고 우리 집안을 봐도 굉장히 보수적인데 저도 색깔로 많이 시달린 거 아시잖아요.
엉뚱한 거죠.
-지금 말씀이 나오셨으니까 과연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금 보수와 진보.
선생님께서는 지금 어떻게 구별하시고 제대로 구분되고 구별되고 있다고 보시나요?
어떻게 보시나요?
-제대로 구분도 잘 안 되고요.
보수와 진보는 같이 가야 해요.
민주주의가 왜 좋으냐.
보수 합리적인 보수 정당이 집권하면 합리적인 진보를 들을 수가 있고 합리적인 진보가 집권하면 합리적인 보수를 모시고 가는 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이때까지 분단 이후에 분단 이후에 74년 동안 우리 사회를 겁나게 했던 보수는 그런 합리적인 보수도 아니고 이건 극우적이었고.
그럼 한국에는 극좌는 있느냐.
한국에 제가 보기에는 진보적인 좌파는 있습니다마는 소위 극좌, 볼셰비키는 없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기껏해야 북구라파, 북구라파의 사회복지정책을 강조하는 사회민주당 계통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사회민주당도 이것은 빨갱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이 교육이 왜 잘못됐냐면 친일 세력이 70년간 지배하다 보니까 그렇게 보도록 외눈이 되도록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된 것이죠.
-그러니까 하여튼 반공, 사실 그런데 반공이라는 개념이 우리는 한국전쟁도 겪었고요.
또 어떻게 보면 반공이라는 이념이 또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또 미국이라는 아주 우리가 큰 국가랑 같이 오면서 여러 가지 혜택도 많이 또 입었는데.
또 그 나라가 반공으로 대표되는 나라였으니까요.
어떤 그런 부분에서 불가피성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이제 이렇게 보시면 더 흥미로울 겁니다.
한국 전쟁 기원을 썼던 미국 학자가 그 후에 한국전쟁이라는 작은 책자를 써서 어떻게 이야기를 했나 보면 미국이 세계 1차대전 끝날 때까지만 해도 세계의 민주주의에 종주국 같고 선도국이었다는 게 사실인데 한국전쟁 이후에 미국도 안보 국가로 저하됐다.
그래서 매카시즘이 생기고 군사복합체를 신봉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했다.
그래서 5성 장군 출신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퇴임식에서 퇴임하면서 군산복합체를 조심하라.
이건 민주주의의 적이다.
민주주의의 공적이라고 했거든요.
그럼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빨갱이로 몰겠습니까?
미국의 그런 점도 있는 겁니다.
미국이 무조건 반공 국가가 아니고 블루스 커밍스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한국 전쟁 이후에 미국이 미국의 정치가 그렇게 변질된 거로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나는 미국이 미국의 아름다움은 반공 국가에 있는 게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또 다른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기본적인 인권.
그리고 생존권적 인권이나 자유권적 인권, 평화, 인도.
이런 기본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나라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국이 훌륭한 그런 것이지, 미국이 지원하고 테러리스트를 지원한다?
이게 있다면 그런 거 가지고 미국을 높게 보는 건 아니죠.
-알겠습니다.
하여튼 이 이야기는 상당히 좀 큰 당론이라서요.
미국 얘기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지금 인권만 해도 그 미국이 여성참정권을 갖게 된 게 1930년대 이야기고 인종 차별 문제는 지금도 있으니까 과연 인권 부분에서 과연 대표할 수 있느냐도 이제 또 의문이 들긴 하는데.
어찌 됐든 하여튼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반공이라는 그 이념이 또 우리는 또 한국전쟁도 겪었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 않았나 그런 질문을 드렸던 거고요.
다시 친일 얘기로 좀 돌아가서요.
그럼 지금 이제 이렇게 뿌리를 갖고 흘러왔는데 이제 어떻게, 이제 친일 청산, 말은 쉽지만 말이죠.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제가 하나 예를 들게요.
한 두 달 전에 일본 정부의 그렇게, 그렇게 큰 고위 인사는 아니지만 내가 만났는데 내가 3.1 운동을 맡으니까 한일 관계 미래가 더 밝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걱정이 돼서 식사를 같이하자고 그래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제가 솔직히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분부터 저는 일제 시대 3년간 일본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침에 일본 노래가 내 입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내가 되고 싶은 게.
비행사가 돼서 떨어질 때 바다에 떨어지는 게 아니고 적군의 배에 떨어져서 배도 침몰시키는 가미가 도코타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일본을 제국주의적 일본의 강점을 나는 미워한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듣더라고요, 솔직히 이야기하니까.
그다음 이야기했어요.
솔직히 내가 나이 팔십 중간이 돼 가는데 내가 죽으면서 어떤 나라를 미워하면서 죽고 싶지는 않고 어떤 집단이나 인간을 미워하면서 내가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증오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우리는 당한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감옥의 문 여는 열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 열쇠는 누가 갖고 있냐고 해서 당신 나라가 갖고 있습니다.
나라를 증오의 감옥에서 해방시켜주세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거냐.
그래서 그랬습니다.
독일의 브란트처럼 국가가 나치 때 많은 사람을 죽였던 그 범죄를 반인륜적 범죄를 진심으로 무릎 꿇고 사과해주면 나는 당장 용서할 마음이 있다.
그런데 슬프게도 나에게는 열쇠가 없습니다.
증오의 열쇠는 당신들이 열어주세요.
그래서 당신 나라가 해야 하지 않겠냐 했더니 그분이 그럽디다.
우리도 하토야마 수상이 와서 사과를 하고.
그분들은 연립내각제 약소 정당의 대표였고 브란트는 독일을 동반 통일로 이끈 강력한 지도자였으니까 한다면 실력자 정치인이 와서 해라.
그러면 우리의 트라우마가 풀릴 것이다.
트라우마 갖고 있으면 그게 고생입니다.
이거 풉시다.
그러니까 아무 대답 안 하고.
-알겠습니다.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이제 우리 한반도 문제로 좀 한번 넘어가 볼까요?
통일 부총리도 하셨으니까.
지금 아까 살짝 언급을 해 주셨는데 이제 남과 북이 어떤 경제 공동체의 형태를 이루었을 때 거는 어떤 기대, 이런 걸 얘기를 해 주셨는데.
통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통일은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이 돼서 남과 북이 서로를 악화화하지 않고 서로 형제자매로 보면서 그렇게 경제교류, 주로 경제교류, 문화교류, 각종 교류를 활성화시키면 평화가 정착이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평화정착 되려고 하면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좋아져야 해요.
우리하고 미군, 동맹 관계니까.
동맹 관계는 플러스고 북미 관계는 마이너스고.
그런데 남북이 마이너스라면 균형이 잡히는데 여기에 또 플러스가 되려고 하니까 불균형이 오니까 북미 관계를 개선시키면서 남북 간의 평화가 정착된다면 통일은 저절로 오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지금 이제 사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마는 하도 이렇게 떨어져 살다 보니까 사실 지금 어떤 통일에 대한 두려움을 겪는 국민들도 많은 것 같아요.
특히.
-젊은 사람들 가운데 이제 분단 비용도 크지만 통일 비용은 더 클 것이다.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 통일 비용을 다 세금으로 내야 할 텐데 힘들지 않겠나.
이러기 때문에 기간이 남북 간 서로 악마화하지 않고 서로 형제자매로 서로 도우기를 한 10년, 20년 한다면 그 기간에 그 격차를 줄임으로써 젊은이들이 걱정하는 경제적 부담으로 줄일 수 있는 길을 찾아야죠.
-어쨌든 많은 사람과 통일 얘기를 하면 지금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어떤 중간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거든요.
역시 선생님 생각도 그러시군요.
그런데 하여튼 지금 아까 말씀하시는 중에 북미 관계 중에 어떻게 보면 대단히 중요한 요소 다 말씀해주셨는데 잘 돼 가다가 지금 굉장히 꼬여버렸어요.
지금 선생님한테 어떻게 전망하시냐 이렇게 여쭙는 건 좀 한정도 있지만 그래도 거기 장관을 지내셨으니까 어떻게 전망하고 계십니까?
-제가 장관을 지냈기 때문에 견해가 있는 게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큰 틀로 이야기한다면요.
기술적으로 스몰딜이냐 빅딜이냐 이런 게 아니고 얘기를 한다면 지금 미국 정치가요.
트럼프가 집권한 이후에 큰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아요.
왜냐하면 트럼프는 다자 국제관계를 주관합니다.
그러니까 나토라든지 EU라든지 많은 나라와 상대를 해서 뭘 협상을 하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아주 1:1로 하려고 하죠.
그 양반 부동산 업자로서 1:1로 하면 자신이 있는데 다자로 하면 안 좋잖아요.
그게 확실하고요.
둘째로 2차 대전 이후에 미국이 민주공화국 양당이 힘을 합쳐서 세운 국제군사지배체제.
그리고 교역, 국제 국가 질서체제를 트럼프는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가 미국 굿 그레이트 어게인,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자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안보 짐을 다 맡기고 자기들 잘사는 건 그만두고 너희들 비용만 내라.
그리고 우리 지적재산소유권을 가지고 이렇게 훔쳐 가는 나라에 대해서 당당하게 제재를 가해서 우리 이권을 지켜야 하고.
이런 이런 생각이 있어서 소위 2차 대전 이후 74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미국식 경제 군사지배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어요, 크게.
흔들릴 가능 속에서 어떤 기회가 오냐면 단독 1:1로 겨루어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트럼프는 북한을 지목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김정은을 자꾸 띄워 놓습니다.
어제 워싱턴에서도 우리 대통령하고 하면서 김정은 위원장 띄우고 그래서 다시 하노이에서 무산됐던 것을 달성시키는 쪽으로 가고 싶은 뜻을 보이죠.
그러니까 큰 틀로 보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윤리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분이 대통령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실망시키기만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지금 패러다임 시프트에서 큰 틀에서 보면 미국의 지배 질서가 조금 이완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는 조그마한 어떤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이 말이 트럼프의 기대에서 모든 것을 하자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남북 간에 서로 공조할 수 있으면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하면서 그런 기회가 오면 탁 잡아서 미국과 우리는 동맹 관계니까 마찰하지 않고 이룩할 수 있는 길이 생길 수 있죠.
내가 너무 막연한 이야기를 해서 들으시는 분이 답답할지 몰라도.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요.
선생님 말씀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기념추진사업 위원회인가요?
하도 길어서 헷갈리는데.
그 북한과의 어떤 여러 가지 사업도 추진을 했는데 별로 성사된 건 없는 거 같아요.
-북한과 안 된 거는요.
그러니까 9월 19일 날 작년 평양에서 9.18 선언을 하면서 3.1절 같은 민족 공동행사는 같이하자고 합의를 했어요.
그러니까 양 정상의 합의를 봤으니까 3.1절을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트럼프가 북미 회담 날짜를 하노이에서 하필 잡기를 2월 28일, 7일 이렇게 잡으니까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건 불가능하구나.
-일정상.
-일정상.
-일정상 불가피하게 된 거죠?
-불가피하게 된 거죠.
-그런데 3.1절에 대한 거를 북한에서도 원래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왔나요?
-3.1절에 대해서는요.
김일성 일가 자체
내에서도 좋게 평가하는
분이 있고 또 김일성
주석을 존경하는 사람
가운데 손정도라는 분이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아들들이 해군참모총장도 하고 상당히 빛나는 가정이죠.
그런데 그분 가정하고 손정도 목사가 굉장히 가깝기 때문에 3.1 운동은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
손정도 목사가 바로 이 사진 있잖아요.
이 사진, 저기 이승만 대통령 옆에 앉아있는 분이 손정도 목사예요.
왼쪽에.
-왼쪽으로요?
그러면 이분을 말씀하시나요?
-그렇죠.
저분을 기리는 재단이 있어서 남북 간의 교류도 있고 합니다.
그러니까 3.1 운동에 대해서는 소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에서 방법론은 틀리지만 그쪽에서는 평가하고요.
다만 임시정부에 대해서 좀 다릅니다.
-어떻게 얘기를 하다 보니까 이제 대담 정리해야 할 시간이 됐는데 말이죠.
하여튼 우리 남한 내에도 어떤 이념 갈등, 좌우 분열.
보혁 갈등.
복잡한 지금 상황이 계속 임정 수립 이후 100년 동안 지금 이어지고 있는데 앞으로의 100년, 어떻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짧게 한 말씀 듣고 대담 마치겠습니다.
-추상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요.
지금 우리는 민주화가 상당히 높은 단계에 들어갔지만 이 민주화가 평화 없이 이루어지면 남북 대결이 그대로 존재한다면 이게 민주화가 꽃필 수가 없습니다.
남북 관계가 갈등하면 항상 손해 보는 사람이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색깔론으로 탄압받으니까 안 되고요.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해서 평화와 함께 가도록 하는 게 필요하고요.
둘째로는 그렇다면 이게 민주적 국민 통합과 민족적 통합.
평화 번영으로 남북이 같이 가는 거.
이게 100년 후에 가야 할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날로 차이를 존중하는 포용사로 가야 합니다.
앵커 선생님 나하고 고향이 달라도 나와 다르기 때문에 또 존중하는 거.
여성이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내가 더 존중하는 거.
-알겠습니다.
-흑인이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더 존중하는 거.
이런 포용 사회로 가야 하죠.
-말씀 감사드리고요.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토대 위에 우리는 광복을 맞았고 이후 눈부신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실현시켰습니다.
이제는 머지않은 미래에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 통일을 이룸으로써 진정한 독립을 완성시켜야 할 것입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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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요진단] ‘임시정부 100년‘의 가치…한국의 미래 100년은?
    • 입력 2019-04-14 08:16:01
    • 수정2019-04-14 09:47:10
    일요진단 라이브
■ 진행 : 김진수
■ 대담 : 한완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

-올해는 일제강점기에서 독립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임시정부는 당시 세계 처음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며 민주공화제를 명시했는데요.
이러한 가치는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수많은 선열의 헌신으로 그동안 대한민국은 경제적인 발전을 이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평화와 통일이라는 미완의 과제가 아직 놓여있습니다.
KBS 일요진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계기로 임시정부의 현재적 의미와 새로운 100년을 위한 과제를 짚어보겠습니다.
-위원장님, 어서 오십시오.
지난주에 임정 수립 100년, 100주년 기념행사가 상해, 중국 상해에서 있었죠?
-그렇죠.
-거기에 참석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어젯밤에 왔습니다.
-행사는 어땠었나요?
-참 좋았습니다.
상하이에서 7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축하하는 걸 보니까 대단하고 저는 눈물이 날 뻔한 게 뭐냐 하면 우리 한인 학교 어린아이들이 애국가 4절을 다 부르는데요.
거기도 가슴이 뭉클하지만 두 번째로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우리 광복군들이 불렀던 애국가가 있습니다.
그 애국가를 4절 부르니까 막 눈물이 줄줄 납니다.
-거기에 동해물~
-나는 우리 처남이 거기 학병으로 고생하다가 고생만 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더 가슴에 맺혀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 3.1 운동 및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신데요.
지금 일단 이 기념사 추진회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활동은 한 104가지 활동이 있습니다.
각 부처가 이미 작년에도 예산을 따서 마련한 게 있고요.
우리 위원회는 100년 전에 일어났던 3.1운동의 정신 그리고 3.1운동의 실천이 주는 공공적 감동.
공익적 감동, 이것을 국민하고 많이 나누어 가지고자 여러 가지 애를 썼습니다.
-알겠습니다.
임정 수립 기념일이 4월 13일이었는데 올해부터 4월 11일로 바뀐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그 연유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분도 많을 거 같은데.
-그것은요.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데요.
1919년 4월 10일 본국에서 이제 3.1운동 주도자들이, 지도자들이 보낸 현순 목사란 분이 상해 어떤 공간을, 집을 마련해서 거기서 4월 11일에 임시정부 의정원, 국회 의정원을 시작했죠.
그래서 4월 10일 날 시작해서 4월 11일 날까지 밤 꼬박 새우고.
-의정원이라고 하면 우리 국회에 해당되는 거죠?
-그렇죠, 국회죠.
거기서 국호를 제정하고 거기서 헌장을, 헌법을 제정했죠.
그래서 국가의 틀을 제도적인 틀을 거기서 갖췄죠.
그게 11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13일에서 11일로 바로 잡았죠.
-이때까지 이제 4월 13일로 그렇게 이제 알고 그 기념을 해 왔던 사정을 들어 보니까 좀 기막힌 부분도 있더라고요.
윤봉길 의사 의거로 인해서 임시정부가 굉장히 탄압을 받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거기서 압수수색된 자료에서 기록을 보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일본 경찰의 자료가 4월 13일로 돼 있어서 이때까지 4월 13일로 했다가 이제 새롭게 이제 정리를 해보니까 4월 10일에서 11일, 그 사이에 이제 모든 헌장 같은 게 헌법에 해당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이제 올해부터 이제 4월 11일로 정했다고 하는데 굉장히 의미가 있는 거 같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3.1 운동 뒤에 이렇게 이루어졌는데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되겠죠?
-그렇죠.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지역과 계층과 성과 종교가, 이런 차별 없이 전 국민이 들고 일어선 거죠?
그러고 나서 한 달여를 지나서 3.1 운동 실천했던 사람들의 감동, 또 실천에 감동받고 또 감동받았던 우리 애국지사들이 우리 본국에서 노령에서 또 다른 데서 이렇게 상하이로 모여서 임시정부를 만들기로 한 거죠.
그러니까 그 독립은 3.1운동의 감동입니다.
그게 뭐냐 하는 걸 우리가 얘기를 좀 해야 할 거 같아요.
-지금 얘기해 주시죠.
-그러면요, 3.1운동은 1919년에 일어난 건데 그 특징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철저하게 비폭력이었습니다.
이 비폭력이 빛나는 이유는 운동하는 시위자들을 통제했던 일본 관원들은 총과 칼로 통제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비폭력으로 했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했다.
기껏 시위자들이 한 것은 태극기 들고 맨주먹으로 우리 대한 독립 만세만 불렀거든요.
돌을 던진 것도 없고 칼을 던진 적도 없고 칼을 쓴 적도 없고 날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평화적으로 우리 독립 만세만 불렀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그게 우리 국내의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니까 전국에서, 전국에서 그야말로 두 달 동안 인구의 10% 이상이 참여했으니까 세계적인 사건이죠.
그 당시 비폭력 평화운동을 했던 분은 영국의 간디인데.
-인도의 간디.
-인도의 간디.
영국 제국주의에 항거했던 인도의 간디 변호사인데 이분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비폭력을 내세웠지만 인구의 1%도 참여 못 했을 겁니다.
물론 인구가 크지만.
그러니까 그 당시 세계사 쪽으로 봐서 폭력이 난무해서 1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1차 대전 때 죽은 사람이 얼마인지 아세요?
3800만 명이에요.
그러니까 서구 열강의 고도의 문명의 기술을 가지고 새로 개발한 무기들, 탱크 같은 거, 기관총 같은 걸 가지고 너무 살육을 험악하게 했기 때문에 세계가 이제는 비폭력으로 가야 한다.
평화로 가야 한다 하는 무리가 무르익을 때 10년간의 일본 무단정치에 의해서 고생하던 우리 민족이 각계각층에서 통합적으로 전 민족이 전 민중이 들고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비폭력으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감동 준 거죠.
-그렇군요.
그러니까 제가 기억하기에 1차 대전이 1914년에서 1918년.
끝나고 나고 그 이듬해에 그 어떤 폭력을 반대하는, 폭력을 쓰지 않는 어떤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어떤 시위를 벌인 그 부분은 상당히 어떻게 보면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보여지는데.
그런 만큼 어떤 세계 울림, 반향이 있었습니까?
-반향이 있었습니다.
반향을 이야기하자면 3.1 운동 일어나고 나서 두 달 하고 나흘 지나서 북경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죠.
그게 소위 5.4 운동인데.
5.4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을 먹기 위해서 우리 한반도를 이렇게 다리로 이용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중국 학생들이 3.1운동의 그 선언문 보면 중국을 걱정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정말로 너무 부끄럽다. 그래서 학생들의 유인물 중에 그런 글귀가 있답니다. 불교 신자들 철저하게 자기를 자성할 때 오체투지를 하잖아요. 바짝 엎드려서. 우리는 오체투지를 하면서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 부끄러움 속에는 감사해야 한다는 그것도 있겠죠. 그런데 거기에 영향을 줬고. 그 다음에 인도의 간디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네루가 영국 반식민주의 운동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자기 딸에게 글을 쓰는데 그 딸 나이가 우리 유관순 나이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3년간 쓴 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데.
그 2권에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코리아에서는 어린 소녀가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들고일어났는데 자기 딸이 16살이니까, 네루.
나중에 수상이 됐죠.
딸을 생각하면서 너도 코리아에서 젊은 여학생들이 일어났다는 걸 알면 감동할 것이다.
울림이 컸죠.
-컸죠.
하여튼 그때 사실 제가 어릴 때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말이죠.
그때 좀 우리가 훨씬 수가 많으니까 그때 뭔가 조금 더 이렇게 투쟁적으로, 적극적으로 했으면 그때 어떤 일본을 쫓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것은 이제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만 그때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서구 열강들은 소위 소셜 다이니즘, 즉 적자생존의 갑질하는 강대국들이 약한 나라의 부족을 삼켰단 말이죠.
문명을 준다는 이름 밑에서 삼켰는데 그 사람들이 통명을 제도적으로 썼습니다.
자국 내에서는 민주주의를 했겠죠.
영국, 프랑스 했겠지만 자기들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무단 통치도 하고 그렇게 약탈도 하고 착취도 하고 차별했거든요.
그런 국제적인 정세로 봐서 지금 우리 앵커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힘을 합쳤다고 해서 쫓아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고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패권주의의 제일 마지막에 붙어서 우리를 잔인하게 이렇게 했죠.
-알겠습니다.
지금 그 글에서 3.1운동 뒤에 임시정부와 바로 직결되는 어떤 임시정부 수립의 원인이 된다 이제 이미 설명을 해 주셨고요.
그렇게 되면 사실 이제 제가 보면 그때 당시 이제 주재소라고 하죠.
-그렇죠, 주재소.
-지금은 파출소에 해당하는 건데 몇 군데는 사실 습격도 하긴 했어요.
했는데 그것조차도 아주 진짜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했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진짜 비폭력, 평화적 어떤 시위였다,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 거 같고요.
아까 말씀하실 때 4월 10일에서 4월 11일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했는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어떻게 정해졌다고 보시나요?
-그러니까 그 당시 일본은요.
아시다시피 3.1 운동 일어나기 전에 순종이 돌아갔잖아요.
왕이 돌아갔으니까 이제 왕정, 조선 500년 지배했던 소위 대한제국의 재건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3.1 운동을 일으킨 주도세력들의 머릿속에는 우리는 이제 왕정 시대를 뛰어넘어가야 한다.
아직 세계의 선진국가들만 자국민에게만 민주주의를 베풀었던 식민주의는 안 하고 그것을 우리는 완벽하게 민국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까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면서 내세운 게 민주적 공화제죠.
그러니까 민주공화제라는 말 자체가 헌법 제1조에 올라간 것도 세계 최초입니다.
발마르 공화국이 몇 년 후에 썼는지 몰라도요.
그러니까 헌법 제1조에 민주공화국을 했다는 거 자체가 선진국 통틀어서 최초입니다.
굉장히 자랑스러운 것이죠.
왜 이런 사실을 지난 100년 동안 우리 국민이 모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저도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사람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부끄럽게 생각하죠.
제대로 못 가르친 거죠.
못 가르치도록 그렇게 일제 36년간은 일본 사람이 그렇게 했고 그리고 분단에 대해서 분단에 대해서 우리가 독립해방이 돼야 하는데 독립해방 안 되고 분단이 왔잖아요.
그러니까 분단을 이끌었던 지배 세력이 신일 냉전세력이니까 그들이 일본에 의해서 고통당한 우리 민족의 입장보다도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을 개발된 국가의 모델로 보고 싶었으니까 이게 잘 안 된 거죠.
-사실 저도 민주공화제가 헌법에 명시된 거는 임시정부의 경우가 처음인 거를 사실 이번에 처음 알았거든요.
-그렇습니까?
-사실 이제 저희가 민주공화제를 얘기를 들을 때 그때 어디서 받아들였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참 어떻게 보면 좀 제가 몰랐던 것도 충격적이고.
-그러니까 우리 선생님께서도 몰랐다고 하니까 젊은이들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 책임이, 우리 기성세대가 큰데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우리가 피압박 민족으로서 강점당한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거는 더 놀라운 겁니다.
선진국은 타국에 대해서 그렇게 안 했으니까.
아까 말한 대로 경고를 하면서도 우리는 부족, 식민지 대상이 됐던 아프리카 부족이 아니고 당당한 국가였거든요.
그래서 그런 저력이 있기 때문에 민주공화제를 이렇게 실천하도록 우리 선조들이 합의한 거 참 고맙게 생각을 해요.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많은 국가가 이제 민주주의, 또 공화제 이렇게 채택을 하면서도 또 기존에 갖고 있던 어떤 왕 제도는 존속시키는 국가도 있고요.
-나라도 있죠.
-제가 이제 이번에 크게 깨달았던 거는 사실 저는 일본 강점에 의해서 저희 왕정이 깨졌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게 아니고 이미 임시정부에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이제 제국,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민주공화정을 우리가 받아들였다.
이 의미는 굉장히 큰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용한 평화적인 멋진 세계 유례가 별로 없는 혁명이죠.
평화적인 혁명이죠.
우리 바로 3.1 운동 일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볼셰비키 혁명도 유일 혁명이고 1차 대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우리는 조용히 그야말로 제국에서 민국으로.
대한은 그대로 대한제국을 받고.
-받았죠.
알겠습니다.
이제 그렇게 해서 이제 일본이 이제 항복을 하게 되고 광복이 찾아오고 미 군정을 거쳐서 이제 1948년에 이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는데 이제 지금 우리가 임정 그다음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렇게 얘기할 때 이게 지금 건국절을 놓고 말이죠.
어떤 계기가 과연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걸 놓고 지금 상당한 어떤 다툼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있었죠.
그런데 우리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소위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숭고하시는 분들 가운데 그런 말이 나오는데요.
확실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 헌법을 마련할 때 대통령이었잖아요.
대통령 전에 국회의장 같은 입장에서 헌법을 했는데 그 어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현재를 건국 30주년.
그럼 그건 뭐냐 하면 1919년 그날이 건국이라는 걸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역사 앞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러니까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초대 정부 수립의 날입니다.
건국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해서 진짜 건국절은 1919년 3.1 정신, 민주공화제 정신을 그렇게 폄훼하거나 그야말로 약화시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를 기쁘게 하는 논리일 수도 있죠.
-일단 건국절을 주장하는 쪽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면 말이죠.
일단 흔히 하는 주장이 국가라고 하면 국민, 주권, 영토.
이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그때는 국민이 있었다 하더라도 특히 주권은 우리가 잃은 상태 아니었느냐.
이러면서 그러니까 한마디로 임시정부 상황이 어떻게 보면 불안전한 건국?
이렇게 지금 주장을 하는 거 같아요.
-국가의 3요소가 없기 때문에 국가라고 할 수가 없다 이런 논리인데요.
형식 논리상 그럴듯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확실하게 말씀을 드리면요.
1910년 소위 국치일, 경술국치일에 저희가 강점당하고 빼앗겼잖아요.
일본의 패권이 우리 국민을 황제, 그쪽 천황의 식민, 신하로 바꿔 놓고. 그리고 간토를 300리 반도 강산을 강점 강탈했고 그러니까 주권도 빼앗아갔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우리 집에 강도가 총, 칼 들고 들어와서 우리 아무 일도 없는데 나하고 가족하고 쫓아내고 문패도 하나 떼고 자기 문패 붙이고 하면서 이제 나는 쫓겨났으니까 내 집으로 들어가고 싶을 거 아닙니까?
그런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주권도 강탈당했고 국토도 강탈당했고 국민이란 지위도 강탈당해서 이렇게 왔는데 그 세 요소가 없기 때문에 나라가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자의 논리를 어떻게 그대로 따라 하느냐 말이에요.
상식이 있으면 부끄러워하지도 못하죠.
-그때 사실 주권 중에 외교관도 박탈당한 상황이고.
-외교권은 1905년 을사늑약 때 빼앗겼죠.
-빼앗겼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또 외교적인 노력, 노선 충돌을 일으킨 부분이긴 합니다만 그런 부분도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이승만 전 대통령도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어떤 그리고 그 부분을 완전히 우리가 국가가 아닌 상태. 그렇게 인정하지 않은 그런 증좌로도 보이거든요.
-그럼요, 건국 1년 기원으로 하고 48년을 건국 30주년이라고 하죠.
-그렇죠.
그런데 왜 이렇게 저는 이제 또 어떤 상황이 바뀌고 또 정부가 바뀌는 상황이 오면 또 저는 건국절 논란이 또 일어날 거라고 보거든요.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요?
뭐로 보입니까?
-그게 예를 들어 3.1 정신이 갖고 있는 고귀한 울림, 감동적이고 공공적이고 변혁적인 울림을 전혀 이해 못 하기 때문에 그렇고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뿌리를 보면 대개 친일 쪽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그런 세력이 다시 그런 주장을 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다시 우리를 삼키거나 아시아를 지배할 그런 시대는 오기가 힘들 테니까요.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고요.
그러니까 건국절보다도 정확하게 정부 수립일로 기념해야죠.
-그렇죠.
지금 선생님 말씀하실 때 3.1 운동에 대한 어떤 평가절하, 그런데 그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임시정부를 좀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떤 그런 좀 느낌이 있어서 그거는 어디서 연유하는 건지.
-그것은요,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국내에서 보면 그 당시에 인정하지 않기보다도 독립을 존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고요.
논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일본한테 강점당했으니까 우리도 힘으로 무력으로 쟁취하자 이런 생각하는 애국자들도 있었고요.
그게 애국자들이죠.
그리고 실력, 교육을 통해서 실력을 길러서 우리가 대응하자, 장기적으로.
이제 도산 선생 같은 사람, 백범도 그런 류에 속하고요. 많은 사람이 김규식 선생도 그렇고.
하지만 또 그렇게 말하는 분들도 일본의 잔인한 걸 보니까 우리도 군대를 가져야겠다.
박용만 선생님 같은 사람들도 있었고요.
김규식 선생님 같은 선배 같은 분도 군관 학교 만들려고 노력을 했어요.
신채호 선생이나 이런 분들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하지 않겠나, 이런 게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우리가 억울하게 국토를 빼앗기고 주권을 강탈당하고 차별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응을 보면 여러 가지 방법론 나오는 걸 나쁘다고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이제 백범이 임시정부를 쭉 초기부터 27년간 2차 전쟁 끝날 때까지 지켜봤는데 그 어른의 생각은 아주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민족 부르주아 민족 운동이죠.
북한 쪽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 내부에서는 민족 부르주아 운동이라고 해서 그렇게 나쁘게만은 보지 않는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제가 질문을 드린 어떤 의도는 임정을 건국절을 주장함으로써 임정을 조금 폄하하려는 의도라면 거기에는 어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큰 부분이 갈라져 나오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이제 그거를 여쭤본 건데.
-그거는요.
정확하게 얘기한다는 게 각자가 다 정확하게 얘기를 한다고 말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은 임정에서 탄핵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방법론이 예를 들어서 우리 민족이 미국의 한 주로 취급당한다든지 그쪽에 부와 은총에 의해서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는데 이제 그런 식의 논리를 가지고 소위 소셜 다이니즘, 갑질 통해서 약소국가를 막 삼켰던 경쟁이 심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그런 논리가 잘 안 먹혀들어 가죠.
투항 주의로 보게 되겠죠.
사회주의 입장에서 안 보더라도 그렇게 건전한 민족주의 입장에서 봐도 그렇죠.
백범 선생은 건전한 민족주의 입장에서 봐도 그래도 투항주의로 비춰지겠죠.
그런 분들이 이제 임시정부를 조금 폄훼하고 싶은 생각, 그런 유혹을 느낄 수도 있겠죠.
또 어떤 사람들은요.
일제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김구 선생마저 테러리스트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와 어떻게 이봉창 선생을 어떻게 테러리스트로 보겠습니까?
그분들의 내공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수준에 올라가 있는 분들이에요.
-하여튼 선생님께서 앞으로는 그런 논란이 더 없을 거라고 하시니까 진짜 또 논란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한번 기대해 보고요.
아까 이제 3.1 운동을 언급하시면서 비폭력, 평화 어떤 운동, 시위.
그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를 해주셨는데 이제 3.1운동이나 임정이나 어떤 현재적 가치에 대해서 좀 한번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그게 그랬다면 사실 촛불혁명 얼마 전에 촛불혁명도 그런 어떤 부분에서 세계에 준 메시지가 참 유사하다고 보여져요?
-그렇죠.
-어떻게 보시나요?
-굉장히 유사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촛불혁명 일어난 지 2년 조금 안 되니까 국내 학자들도 3.1 운동과 촛불혁명을 처음부터 연결시키는 일에 빠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현장에서 느낀 게 어떤 거냐면 이런 거죠.
2017년 11월 같은데요.
효자동에서 경찰이 막았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남자들이 올라가 차 위에 올라가서 효자동으로 진군하고 싶었던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죠.
그러니까 그 차 안에 그러니까 밖에서 소녀들이 나이가 뭐 20대 전후라고 생각되는데 내려와, 내려와 이렇게 세 번 여러 번 부르짖어도 남자들이 안 내려오니까 많은 여자의 목소리가 비폭력, 비폭력, 비폭력을 외치니까 스르르 내려왔어요.
그러면 올라갔던 남자들도 다 민주화 운동 한 사람들 같은데 비폭력이라는 말을 듣고 내려오게 한 저 힘은 뭔가.
그리고 저 비폭력이라고 소리 지르는 저 젊은 여자들은 누군가 하는 것을 생각하니까 아, 저게 100년 유관순의 정신이구나.
비폭력, 유관순 열사가 죽었을 때 의사들이 내린 사망 선고가 뭔지 아세요?
-모릅니다.
-자궁 파괴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고문을 비인간적으로 했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잖아요.
-그렇네요.
-그러면서도 유관순 열사는 10대 소녀가 나의 가장 큰 슬픔은 조국을 위해서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건 보편적인 울림이죠.
그 울림이 98년을 뛰어넘어서 이 광화문에서 터져 나왔구나.
비폭력 하니까 내려왔구나.
그리고 실제로 광화문에서 다른 도시에도 큰 데 광장에서 했습니다만 그 5, 6개월 동안 1700여 명이 참여했는데 단 한 건의 폭력이 발생 안 했어요.
그래서 세계 언론이 극찬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게 현대적 의미인데요.
극찬한 의미를 제가 직접 본 것 가운데 제일 인상적인 게 이런 거였어요.
한국 사람들은 김치를 늘 일상적으로 먹는다.
김치를 일상적으로 생활 속에서 먹듯이 저렇게 비폭력, 평화, 민주 시위도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구나.
아마 일본 지식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게 그런 걸 겁니다.
그리고 독일 언론 같은 데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한국 사람들은 서방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배우는데 이제 우리 서방 선진국가가 한국으로부터 저 높은 수준의 비폭력 민주주의 삶 속에 육화된 민주주의를 배워야겠다.
이런 격창.
그리고 언제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서 언제 외국 장성이 우리가 리더에 따라서 들쥐처럼 따라다닌다.
그렇게 폄하한 적이 있는데 민주주의의 가장 성숙한 행진을 보여준 것이 우리 3.1운동의 부활로서 촛불 시민혁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촛불혁명으로 인해서 어떻게 보면 지금의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다.
이렇게 볼 수 있겠는데 말이죠.
어떻습니까?
그 어떤 시민들의 요구, 어떤 기대.
이 정부가 잘 지금 반영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어떻게 보시는 편인가요?
-사실요, 촛불 시민혁명의 결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이 됐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그거에 대한 사실을 너무 늘 가슴 속에 지니면서 저 뜻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평창올림픽 대회를 계기로 해서 평화 흐름을, 아까 우리 앵커께서 제일 처음에 우리 화두에 시작할 때 경제는 개발됐지만 평화와 이게 안 됐다는 거, 그걸 이룩하려고 하는 것이죠.
사실 촛불혁명은 간디의 절친이었던 타고르가 칭찬한 동방의 등불입니다.
평화의 등불입니다.
그러니까 평화의 뜻을 재조명하려고 하는데 과연 대통령과 함께 이 정부를 출범시킨 분들이 촛불 정신을 얼마나 이해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솔직히 뭐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네요.
지난 2년간의 행태를 보면 촛불 시민혁명이 3.1 운동을 일으킨 자기 몸을 불살라서 내가 조국을 위해서 바칠 몸이 하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던 그 애국지사의 열정이 있었다면 2년간의 실적이 이거밖에 안 되겠나.
왜 안 되는가에 대해서 안타깝죠.
그러나 이해를 합니다.
이 경제 문제인데, 주로.
불평등 문제 가지고 많이 비판하는데 이것은요.
21세기 후반기에 전 세계인 선진국가가 다 겪는 문제입니다.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하루 이틀 만에 할 수 없고요.
저는 통일에 관심이 있잖아요.
옛날 정부의 통일 담당 국무위원도 했고 그런데 한국이 분단을 극복하면서 남북이 공조해서 민족 경제, 경제공동체를 만들면 그야말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놀라운 경제의 소위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창조적인 지식과 첨단 지식과 기술과 자본.
그쪽에 엄청나게 비싼 지하자원, 히토 이로부시에서 금 등과 근면하고 질 좋은 노동력과 또 그쪽의 창의성하고 합치면요.
이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탁 트인다고 생각을 하는데 대통령이 그걸 하시려고 지금 남북 관계를 지금 막 타이트하게 하는데 그 대통령의 속셈을 과연 얼마나 여당에서나 그쪽 소위 집권당 내부에서 알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런 방향이 있고요.
이제 한 쪽에서는 이제 사실 이제 촛불혁명 당시에 이게 나라냐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반칙, 부조리에 대한 어떤 레드카드를 시민들이 내보인 건데.
-그럼요.
-그렇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적폐 청산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청산됐습니까?
-그러니까 적폐 청산은 노력으로 이어졌죠, 노력으로.
그런데 한쪽에서는 턱없이 모자라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너무 적폐 청산만 부르짖는다고 하고.
지금 이 부분도 상당히 온도가 다르거든요.
어떻게 보십니까?
-앵커님께서는 굉장히 기계적으로 이렇게 중립적으로 보시는데 적폐 같은 적폐라는 말 자체가 냄새나고 썩어빠진 것들이 쌓여있는 것을 적폐라고 합니다.
좋은 것을 적폐라고 하지 않습니다.
적폐라고 하는 객관적인 사실이 냄새나는 부패와 반칙과 이런 것들이 쌓여서 생긴 하나의 정치적 유산이라면 그 쓰레기는 빨리 치워야 합니다.
집 이사 가는 데 집은 좋은데 그 안에 쓰레기가, 그전에 살던 사람이 그대로 버리고 갔다.
그것부터 치워야죠.
치워야지, 그 집이 깨끗하게 되죠.
그러니까 적폐 청산의 문제를 그 말에 대해서는 너무 과민반응하는 국민이 어떻게 보는가 하면 이제 피곤하다.
그러면 냄새나는 오물과 함께 살자는 건 아닐 텐데도 피곤하다 그러거든요.
피곤하지 않습니다.
적폐를 청산하고 나면 미래가 탁 보입니다.
적폐 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고 미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문제입니다.
-선생님께서 적폐를 쓰레기에 비유를 해 주셨는데 만약 선생님께서 쓰레기를 정리하신다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서 어떤 쓰레기부터 빨리, 먼저 쓰레기 청소할 때도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냄새 제일 많이 나고, 고약한 냄새 제일 많이 나는 거부터 먼저 해야죠.
-그걸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부정부패.
-부정부패요?
-부정부패겠죠.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던 소위 반칙과 부패죠.
그러니까 부에 편중돼서 그게 쌓여 있는 거.
근면한 사람이 아무리 실력으로 많이 노력해도 이게 부모 잘못 만났다든지 좋은 집단에 속해있지 않다든지 어느 지역 출신이 아니라든지 이렇게 되면 그게 구조적으로 또 이렇게 차별받아온 것이 있다면 그것이 적폐죠.
그런데 더 큰 적폐는 역사적으로 말하면 역시 일제 유산이 아니겠는가.
-근본적인.
적폐.
그러면 이제.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한 게 아니었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반민특위를 만들어서 어떤 친일 청산을 하려고 했는데 하여튼 그 노력이 실패를 했고요.
사실은 이제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친일 세력들이 또 우리 사회에 어떤 주류 세력으로 또 등장하게 되고 하여튼 그런 부분들이 지금까지도 사실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렇죠.
그렇게 봐야죠.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잘한 것도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잘한 게 있는데 그 두 대통령이 이제 잘못한 게 있다고 한다면 지금 말하는 대로 일제시대의 떵떵거리고 살던 사람이 해방 후에도 떵떵거리게 살게 되고 독립운동 한 사람들은 그때도 차별받고 고생하고 감옥 가고 후손들도 결국 별로 잘 살지 못한다.
이게 내려오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이제 그런 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일제 유산과 현재의 그런 냄새나는 것들하고 이게 연결이 돼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청산을 하자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반민특위 말씀하셨는데 실패했다고 그랬는데 반민특위를 국회에서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반민특위에 종사했던 사람을 다 색깔론으로 소외시켰거든요.
그런데 그게 지금도 내려오잖아요.
정치적인 의견이 다르면 색깔론으로 저 사람은 좌파다.
혹은 저 사람은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잖아요.
내가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신자고 우리 집안을 봐도 굉장히 보수적인데 저도 색깔로 많이 시달린 거 아시잖아요.
엉뚱한 거죠.
-지금 말씀이 나오셨으니까 과연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금 보수와 진보.
선생님께서는 지금 어떻게 구별하시고 제대로 구분되고 구별되고 있다고 보시나요?
어떻게 보시나요?
-제대로 구분도 잘 안 되고요.
보수와 진보는 같이 가야 해요.
민주주의가 왜 좋으냐.
보수 합리적인 보수 정당이 집권하면 합리적인 진보를 들을 수가 있고 합리적인 진보가 집권하면 합리적인 보수를 모시고 가는 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이때까지 분단 이후에 분단 이후에 74년 동안 우리 사회를 겁나게 했던 보수는 그런 합리적인 보수도 아니고 이건 극우적이었고.
그럼 한국에는 극좌는 있느냐.
한국에 제가 보기에는 진보적인 좌파는 있습니다마는 소위 극좌, 볼셰비키는 없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기껏해야 북구라파, 북구라파의 사회복지정책을 강조하는 사회민주당 계통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사회민주당도 이것은 빨갱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이 교육이 왜 잘못됐냐면 친일 세력이 70년간 지배하다 보니까 그렇게 보도록 외눈이 되도록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된 것이죠.
-그러니까 하여튼 반공, 사실 그런데 반공이라는 개념이 우리는 한국전쟁도 겪었고요.
또 어떻게 보면 반공이라는 이념이 또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또 미국이라는 아주 우리가 큰 국가랑 같이 오면서 여러 가지 혜택도 많이 또 입었는데.
또 그 나라가 반공으로 대표되는 나라였으니까요.
어떤 그런 부분에서 불가피성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이제 이렇게 보시면 더 흥미로울 겁니다.
한국 전쟁 기원을 썼던 미국 학자가 그 후에 한국전쟁이라는 작은 책자를 써서 어떻게 이야기를 했나 보면 미국이 세계 1차대전 끝날 때까지만 해도 세계의 민주주의에 종주국 같고 선도국이었다는 게 사실인데 한국전쟁 이후에 미국도 안보 국가로 저하됐다.
그래서 매카시즘이 생기고 군사복합체를 신봉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했다.
그래서 5성 장군 출신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퇴임식에서 퇴임하면서 군산복합체를 조심하라.
이건 민주주의의 적이다.
민주주의의 공적이라고 했거든요.
그럼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빨갱이로 몰겠습니까?
미국의 그런 점도 있는 겁니다.
미국이 무조건 반공 국가가 아니고 블루스 커밍스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한국 전쟁 이후에 미국이 미국의 정치가 그렇게 변질된 거로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나는 미국이 미국의 아름다움은 반공 국가에 있는 게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또 다른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기본적인 인권.
그리고 생존권적 인권이나 자유권적 인권, 평화, 인도.
이런 기본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나라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국이 훌륭한 그런 것이지, 미국이 지원하고 테러리스트를 지원한다?
이게 있다면 그런 거 가지고 미국을 높게 보는 건 아니죠.
-알겠습니다.
하여튼 이 이야기는 상당히 좀 큰 당론이라서요.
미국 얘기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지금 인권만 해도 그 미국이 여성참정권을 갖게 된 게 1930년대 이야기고 인종 차별 문제는 지금도 있으니까 과연 인권 부분에서 과연 대표할 수 있느냐도 이제 또 의문이 들긴 하는데.
어찌 됐든 하여튼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반공이라는 그 이념이 또 우리는 또 한국전쟁도 겪었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 않았나 그런 질문을 드렸던 거고요.
다시 친일 얘기로 좀 돌아가서요.
그럼 지금 이제 이렇게 뿌리를 갖고 흘러왔는데 이제 어떻게, 이제 친일 청산, 말은 쉽지만 말이죠.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제가 하나 예를 들게요.
한 두 달 전에 일본 정부의 그렇게, 그렇게 큰 고위 인사는 아니지만 내가 만났는데 내가 3.1 운동을 맡으니까 한일 관계 미래가 더 밝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걱정이 돼서 식사를 같이하자고 그래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제가 솔직히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분부터 저는 일제 시대 3년간 일본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침에 일본 노래가 내 입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내가 되고 싶은 게.
비행사가 돼서 떨어질 때 바다에 떨어지는 게 아니고 적군의 배에 떨어져서 배도 침몰시키는 가미가 도코타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일본을 제국주의적 일본의 강점을 나는 미워한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듣더라고요, 솔직히 이야기하니까.
그다음 이야기했어요.
솔직히 내가 나이 팔십 중간이 돼 가는데 내가 죽으면서 어떤 나라를 미워하면서 죽고 싶지는 않고 어떤 집단이나 인간을 미워하면서 내가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증오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우리는 당한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감옥의 문 여는 열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 열쇠는 누가 갖고 있냐고 해서 당신 나라가 갖고 있습니다.
나라를 증오의 감옥에서 해방시켜주세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거냐.
그래서 그랬습니다.
독일의 브란트처럼 국가가 나치 때 많은 사람을 죽였던 그 범죄를 반인륜적 범죄를 진심으로 무릎 꿇고 사과해주면 나는 당장 용서할 마음이 있다.
그런데 슬프게도 나에게는 열쇠가 없습니다.
증오의 열쇠는 당신들이 열어주세요.
그래서 당신 나라가 해야 하지 않겠냐 했더니 그분이 그럽디다.
우리도 하토야마 수상이 와서 사과를 하고.
그분들은 연립내각제 약소 정당의 대표였고 브란트는 독일을 동반 통일로 이끈 강력한 지도자였으니까 한다면 실력자 정치인이 와서 해라.
그러면 우리의 트라우마가 풀릴 것이다.
트라우마 갖고 있으면 그게 고생입니다.
이거 풉시다.
그러니까 아무 대답 안 하고.
-알겠습니다.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이제 우리 한반도 문제로 좀 한번 넘어가 볼까요?
통일 부총리도 하셨으니까.
지금 아까 살짝 언급을 해 주셨는데 이제 남과 북이 어떤 경제 공동체의 형태를 이루었을 때 거는 어떤 기대, 이런 걸 얘기를 해 주셨는데.
통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통일은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이 돼서 남과 북이 서로를 악화화하지 않고 서로 형제자매로 보면서 그렇게 경제교류, 주로 경제교류, 문화교류, 각종 교류를 활성화시키면 평화가 정착이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평화정착 되려고 하면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좋아져야 해요.
우리하고 미군, 동맹 관계니까.
동맹 관계는 플러스고 북미 관계는 마이너스고.
그런데 남북이 마이너스라면 균형이 잡히는데 여기에 또 플러스가 되려고 하니까 불균형이 오니까 북미 관계를 개선시키면서 남북 간의 평화가 정착된다면 통일은 저절로 오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지금 이제 사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마는 하도 이렇게 떨어져 살다 보니까 사실 지금 어떤 통일에 대한 두려움을 겪는 국민들도 많은 것 같아요.
특히.
-젊은 사람들 가운데 이제 분단 비용도 크지만 통일 비용은 더 클 것이다.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 통일 비용을 다 세금으로 내야 할 텐데 힘들지 않겠나.
이러기 때문에 기간이 남북 간 서로 악마화하지 않고 서로 형제자매로 서로 도우기를 한 10년, 20년 한다면 그 기간에 그 격차를 줄임으로써 젊은이들이 걱정하는 경제적 부담으로 줄일 수 있는 길을 찾아야죠.
-어쨌든 많은 사람과 통일 얘기를 하면 지금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어떤 중간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거든요.
역시 선생님 생각도 그러시군요.
그런데 하여튼 지금 아까 말씀하시는 중에 북미 관계 중에 어떻게 보면 대단히 중요한 요소 다 말씀해주셨는데 잘 돼 가다가 지금 굉장히 꼬여버렸어요.
지금 선생님한테 어떻게 전망하시냐 이렇게 여쭙는 건 좀 한정도 있지만 그래도 거기 장관을 지내셨으니까 어떻게 전망하고 계십니까?
-제가 장관을 지냈기 때문에 견해가 있는 게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큰 틀로 이야기한다면요.
기술적으로 스몰딜이냐 빅딜이냐 이런 게 아니고 얘기를 한다면 지금 미국 정치가요.
트럼프가 집권한 이후에 큰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아요.
왜냐하면 트럼프는 다자 국제관계를 주관합니다.
그러니까 나토라든지 EU라든지 많은 나라와 상대를 해서 뭘 협상을 하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아주 1:1로 하려고 하죠.
그 양반 부동산 업자로서 1:1로 하면 자신이 있는데 다자로 하면 안 좋잖아요.
그게 확실하고요.
둘째로 2차 대전 이후에 미국이 민주공화국 양당이 힘을 합쳐서 세운 국제군사지배체제.
그리고 교역, 국제 국가 질서체제를 트럼프는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가 미국 굿 그레이트 어게인,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자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안보 짐을 다 맡기고 자기들 잘사는 건 그만두고 너희들 비용만 내라.
그리고 우리 지적재산소유권을 가지고 이렇게 훔쳐 가는 나라에 대해서 당당하게 제재를 가해서 우리 이권을 지켜야 하고.
이런 이런 생각이 있어서 소위 2차 대전 이후 74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미국식 경제 군사지배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어요, 크게.
흔들릴 가능 속에서 어떤 기회가 오냐면 단독 1:1로 겨루어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트럼프는 북한을 지목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김정은을 자꾸 띄워 놓습니다.
어제 워싱턴에서도 우리 대통령하고 하면서 김정은 위원장 띄우고 그래서 다시 하노이에서 무산됐던 것을 달성시키는 쪽으로 가고 싶은 뜻을 보이죠.
그러니까 큰 틀로 보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윤리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분이 대통령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실망시키기만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지금 패러다임 시프트에서 큰 틀에서 보면 미국의 지배 질서가 조금 이완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는 조그마한 어떤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이 말이 트럼프의 기대에서 모든 것을 하자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남북 간에 서로 공조할 수 있으면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하면서 그런 기회가 오면 탁 잡아서 미국과 우리는 동맹 관계니까 마찰하지 않고 이룩할 수 있는 길이 생길 수 있죠.
내가 너무 막연한 이야기를 해서 들으시는 분이 답답할지 몰라도.
-지금 상황이 그러니까요.
선생님 말씀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기념추진사업 위원회인가요?
하도 길어서 헷갈리는데.
그 북한과의 어떤 여러 가지 사업도 추진을 했는데 별로 성사된 건 없는 거 같아요.
-북한과 안 된 거는요.
그러니까 9월 19일 날 작년 평양에서 9.18 선언을 하면서 3.1절 같은 민족 공동행사는 같이하자고 합의를 했어요.
그러니까 양 정상의 합의를 봤으니까 3.1절을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트럼프가 북미 회담 날짜를 하노이에서 하필 잡기를 2월 28일, 7일 이렇게 잡으니까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건 불가능하구나.
-일정상.
-일정상.
-일정상 불가피하게 된 거죠?
-불가피하게 된 거죠.
-그런데 3.1절에 대한 거를 북한에서도 원래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왔나요?
-3.1절에 대해서는요.
김일성 일가 자체
내에서도 좋게 평가하는
분이 있고 또 김일성
주석을 존경하는 사람
가운데 손정도라는 분이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아들들이 해군참모총장도 하고 상당히 빛나는 가정이죠.
그런데 그분 가정하고 손정도 목사가 굉장히 가깝기 때문에 3.1 운동은 굉장히 높이 평가합니다.
손정도 목사가 바로 이 사진 있잖아요.
이 사진, 저기 이승만 대통령 옆에 앉아있는 분이 손정도 목사예요.
왼쪽에.
-왼쪽으로요?
그러면 이분을 말씀하시나요?
-그렇죠.
저분을 기리는 재단이 있어서 남북 간의 교류도 있고 합니다.
그러니까 3.1 운동에 대해서는 소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에서 방법론은 틀리지만 그쪽에서는 평가하고요.
다만 임시정부에 대해서 좀 다릅니다.
-어떻게 얘기를 하다 보니까 이제 대담 정리해야 할 시간이 됐는데 말이죠.
하여튼 우리 남한 내에도 어떤 이념 갈등, 좌우 분열.
보혁 갈등.
복잡한 지금 상황이 계속 임정 수립 이후 100년 동안 지금 이어지고 있는데 앞으로의 100년, 어떻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짧게 한 말씀 듣고 대담 마치겠습니다.
-추상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요.
지금 우리는 민주화가 상당히 높은 단계에 들어갔지만 이 민주화가 평화 없이 이루어지면 남북 대결이 그대로 존재한다면 이게 민주화가 꽃필 수가 없습니다.
남북 관계가 갈등하면 항상 손해 보는 사람이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색깔론으로 탄압받으니까 안 되고요.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해서 평화와 함께 가도록 하는 게 필요하고요.
둘째로는 그렇다면 이게 민주적 국민 통합과 민족적 통합.
평화 번영으로 남북이 같이 가는 거.
이게 100년 후에 가야 할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날로 차이를 존중하는 포용사로 가야 합니다.
앵커 선생님 나하고 고향이 달라도 나와 다르기 때문에 또 존중하는 거.
여성이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내가 더 존중하는 거.
-알겠습니다.
-흑인이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더 존중하는 거.
이런 포용 사회로 가야 하죠.
-말씀 감사드리고요.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토대 위에 우리는 광복을 맞았고 이후 눈부신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실현시켰습니다.
이제는 머지않은 미래에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 통일을 이룸으로써 진정한 독립을 완성시켜야 할 것입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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