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정부를 믿은 죄’…희망고문 끝 절망만 남은 개성공단

입력 2019.04.30 (12:07) 수정 2019.04.3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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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고문 견딜 여력 없다. 정부가 결단 내려달라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오늘(30일) 공단 폐쇄 이후 9번째 방북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공장에 가서 기계가 녹슬지 않았는지, 원자재에 곰팡이가 슬진 않았는지 살펴보게라도 해달라는 겁니다.

개성공단기업협회는 다음 달(5월) 초 신임 김연철 통일부 장관과 첫 상견례를 앞두고 있습니다. 일부 기업주들은 결례될 수 있다며 첫인사는 하고 방북신청을 하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의 따질 형편이냐, 개성에 가는 게 한시가 급하다'는 강경론이 더 힘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개성공단 기업주들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방증이겠지요.

물류창고를 급히 개조해 운영 중인 ‘개성공단 1호기업’ SJ테크의 인천공장물류창고를 급히 개조해 운영 중인 ‘개성공단 1호기업’ SJ테크의 인천공장

물류창고 개조한 공장에서 명맥 잇는 '개성공단 1호기업'

개성공단이 가로막힌 지 3년 2개월째. 개성공단 기업주들의 형편은 어떨까요? 비가 많이 내리던 지난주 목요일, 인천시 원창동의 SJ테크 공장을 취재했습니다.

SJ테크는 자동차 부품 등을 만드는 개성공단 1호기업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물류창고를 급히 개조한 공장에 남한에 뒀던 비상용 설비를 끌어모아 생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천 공장의 규모는 4천 제곱미터가 넘는 4층짜리 개성공단 공장의 1/10 수준입니다. 26대에 달하던 사출기는 11대로 줄었습니다. 공장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금형 3천 개는 개성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2개씩 만들어뒀던 핵심 금형 500개로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투자액 절반 이상, 100억 원 넘게 손실"

개성공단 1호기업이라면 뭔가 남다른 뜻을 가지고 개성에 진출했다고 할 수 있겠죠? SJ테크 유창근 대표이사를 만나봤습니다.

유창근 대표이사는 "저희가 200억 원 가까이 투자했는데, 100억 원 정도는 손실이 났다"며 말을 시작했습니다. 폐쇄 이후 거래처였던 중국업체가 부도나면서 물품대금 400만 달러도 날렸다고 합니다. 개성이 막히지 않았다면 만들지 않았어도 될 인천공장과 추가 설비들도 모두 부담입니다.

"가장 큰 손해요? 북쪽 연구인력입니다"

유 대표이사는 "100명 정도 되는 북쪽 연구원이 가장 큰 재산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상실하게 된 것이 가장 큰 피해"라고 말했습니다. 회사가 자금을 투자해 양성한 인적자원도 손해 봤다는 뜻이죠. 설비나 자재만 피해는 아니라는 겁니다.

유 대표이사는 본인을 '이산가족'으로 소개했습니다. 한솥밥을 먹고 동고동락한 북한 근로자들과 헤어진 게 이산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지금도 그들이 어떤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참 눈에 밟히고 선하다"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매일이 희망고문, 하노이 회담 이후 절망뿐

유 대표이사는 판문점 선언 이후 지난 1년이 매일같이 '희망고문'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남북 정상이 만나며 기대감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 희망은 거대한 절망으로 몰아쳤습니다.

"개성에 있던 사업부 임직원들이 그대로 실직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경영자로서는 상당히 고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하나야 (사업) 정리하면 되겠지만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을 다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경영 보험금, 대출금 다 해서 하여튼 올인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끝났습니다.

개성공단 폐쇄의 여파로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도 이미 국내 공장 2곳을 접었습니다.개성공단 폐쇄의 여파로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도 이미 국내 공장 2곳을 접었습니다.

"김정은 대변인? 미국을 맹종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정부를 믿고 북한에 투자한 기업인들. 한마디 없이 공장문을 닫게 한 지난 정권이 가장 원망스럽지 않을까요? 취재진이 만나본 기업인들은 좀 다른 얘기를 했습니다.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을 2번째 역임하고 있는 정기섭 회장. 현 정부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습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김정은 대변인이라고 하는데 저는 (문 정부가) 미국을 맹종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실망스럽습니다."

현 정부가 미국을 맹종? 무슨 뜻일까요?

"시설점검용 방북은 유엔 제재 또는 미국 제재 어느 조항에도 저촉이 안 되는 건데, (방북 허가 내주지 않는) 정부가 미국 눈치 봐서 미리 알아서 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부의 소극적인 대미자세가 대단히 불만스럽습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를 검토하지 않는다는 미국. 이런 미국 입장만 살피느라 정부가 방북신청도 승인해주지 않고 희생만 강요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럴 거면 정부를 믿고 북한에 들어간 개성공단 기업들에 지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정부가 지원은 제대로 해주지 않고 언론 플레이만 한다는 의심도 대단히 컸습니다.

통일은 대박? 정부를 믿은 죄

불과 몇천 원, 몇만 원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버려도 며칠이나 속이 쓰립니다. 수십~수백억 원의 재산을 사실상 잃어버린 개성공단 입주기업 사업주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설날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2016년 2월 10일. 정부는 아무 예고 없이 개성공단을 폐쇄했습니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에 대응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2014년 신년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말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당한 뒤 실형을 선고받았고, 개성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막혀있습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 정부는 지키고 있나?

취재과정에서 만난 많은 기업주들은 한결같이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게 정부의 제 1 책무다. 정부는 과연 그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개성공단 기업들은 자산과 재고를 합해 1조 5천억 원 이상 피해를 봤다고 추산합니다. '순진하게' 정부를 믿고 투자한 죄라고 하기에는 그 죗값이 너무 무겁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연관 기사] “희망고문 언제까지”…한계 다다른 개성공단 기업들의 절박한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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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30 12:07:21
    • 수정2019-04-30 12:10:39
    취재후·사건후
희망고문 견딜 여력 없다. 정부가 결단 내려달라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오늘(30일) 공단 폐쇄 이후 9번째 방북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공장에 가서 기계가 녹슬지 않았는지, 원자재에 곰팡이가 슬진 않았는지 살펴보게라도 해달라는 겁니다.

개성공단기업협회는 다음 달(5월) 초 신임 김연철 통일부 장관과 첫 상견례를 앞두고 있습니다. 일부 기업주들은 결례될 수 있다며 첫인사는 하고 방북신청을 하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의 따질 형편이냐, 개성에 가는 게 한시가 급하다'는 강경론이 더 힘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개성공단 기업주들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방증이겠지요.

물류창고를 급히 개조해 운영 중인 ‘개성공단 1호기업’ SJ테크의 인천공장
물류창고 개조한 공장에서 명맥 잇는 '개성공단 1호기업'

개성공단이 가로막힌 지 3년 2개월째. 개성공단 기업주들의 형편은 어떨까요? 비가 많이 내리던 지난주 목요일, 인천시 원창동의 SJ테크 공장을 취재했습니다.

SJ테크는 자동차 부품 등을 만드는 개성공단 1호기업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물류창고를 급히 개조한 공장에 남한에 뒀던 비상용 설비를 끌어모아 생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천 공장의 규모는 4천 제곱미터가 넘는 4층짜리 개성공단 공장의 1/10 수준입니다. 26대에 달하던 사출기는 11대로 줄었습니다. 공장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금형 3천 개는 개성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2개씩 만들어뒀던 핵심 금형 500개로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투자액 절반 이상, 100억 원 넘게 손실"

개성공단 1호기업이라면 뭔가 남다른 뜻을 가지고 개성에 진출했다고 할 수 있겠죠? SJ테크 유창근 대표이사를 만나봤습니다.

유창근 대표이사는 "저희가 200억 원 가까이 투자했는데, 100억 원 정도는 손실이 났다"며 말을 시작했습니다. 폐쇄 이후 거래처였던 중국업체가 부도나면서 물품대금 400만 달러도 날렸다고 합니다. 개성이 막히지 않았다면 만들지 않았어도 될 인천공장과 추가 설비들도 모두 부담입니다.

"가장 큰 손해요? 북쪽 연구인력입니다"

유 대표이사는 "100명 정도 되는 북쪽 연구원이 가장 큰 재산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상실하게 된 것이 가장 큰 피해"라고 말했습니다. 회사가 자금을 투자해 양성한 인적자원도 손해 봤다는 뜻이죠. 설비나 자재만 피해는 아니라는 겁니다.

유 대표이사는 본인을 '이산가족'으로 소개했습니다. 한솥밥을 먹고 동고동락한 북한 근로자들과 헤어진 게 이산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지금도 그들이 어떤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참 눈에 밟히고 선하다"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매일이 희망고문, 하노이 회담 이후 절망뿐

유 대표이사는 판문점 선언 이후 지난 1년이 매일같이 '희망고문'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남북 정상이 만나며 기대감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 희망은 거대한 절망으로 몰아쳤습니다.

"개성에 있던 사업부 임직원들이 그대로 실직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경영자로서는 상당히 고심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하나야 (사업) 정리하면 되겠지만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을 다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경영 보험금, 대출금 다 해서 하여튼 올인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끝났습니다.

개성공단 폐쇄의 여파로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도 이미 국내 공장 2곳을 접었습니다.
"김정은 대변인? 미국을 맹종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정부를 믿고 북한에 투자한 기업인들. 한마디 없이 공장문을 닫게 한 지난 정권이 가장 원망스럽지 않을까요? 취재진이 만나본 기업인들은 좀 다른 얘기를 했습니다.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을 2번째 역임하고 있는 정기섭 회장. 현 정부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습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김정은 대변인이라고 하는데 저는 (문 정부가) 미국을 맹종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실망스럽습니다."

현 정부가 미국을 맹종? 무슨 뜻일까요?

"시설점검용 방북은 유엔 제재 또는 미국 제재 어느 조항에도 저촉이 안 되는 건데, (방북 허가 내주지 않는) 정부가 미국 눈치 봐서 미리 알아서 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부의 소극적인 대미자세가 대단히 불만스럽습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를 검토하지 않는다는 미국. 이런 미국 입장만 살피느라 정부가 방북신청도 승인해주지 않고 희생만 강요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럴 거면 정부를 믿고 북한에 들어간 개성공단 기업들에 지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정부가 지원은 제대로 해주지 않고 언론 플레이만 한다는 의심도 대단히 컸습니다.

통일은 대박? 정부를 믿은 죄

불과 몇천 원, 몇만 원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버려도 며칠이나 속이 쓰립니다. 수십~수백억 원의 재산을 사실상 잃어버린 개성공단 입주기업 사업주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설날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2016년 2월 10일. 정부는 아무 예고 없이 개성공단을 폐쇄했습니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에 대응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2014년 신년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말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당한 뒤 실형을 선고받았고, 개성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막혀있습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 정부는 지키고 있나?

취재과정에서 만난 많은 기업주들은 한결같이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게 정부의 제 1 책무다. 정부는 과연 그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개성공단 기업들은 자산과 재고를 합해 1조 5천억 원 이상 피해를 봤다고 추산합니다. '순진하게' 정부를 믿고 투자한 죄라고 하기에는 그 죗값이 너무 무겁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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