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약물중독자입니다]⑥ 누구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입력 2019.05.24 (07:00) 수정 2019.05.2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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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생활을 그린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는 해롱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해롱이는 상습적으로 마약을 투약하다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투옥됩니다. 남자친구는 해롱이를 경찰에 신고했고, 엄마는 보석금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해롱이가 마약을 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롱이, 출소하자마자 다시 마약을 투약하고 경찰에 잡혀갑니다. 시청자들에겐 충격적인 결말이지만 약물 중독자들에겐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출소뽕'은 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독자들은 투옥이 '중독을 끊는 기회'가 아니라 '약을 다시 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시청자들에게 충격적인 결말이었던 해롱이의 ‘출소뽕’ 장면. 하지만 약물 중독자들은 흔한 일이라고 말한다. (tvN 방송 화면 캡쳐)시청자들에게 충격적인 결말이었던 해롱이의 ‘출소뽕’ 장면. 하지만 약물 중독자들은 흔한 일이라고 말한다. (tvN 방송 화면 캡쳐)

투약과 투옥의 반복…'텐텐클럽'은 금방

중독자A는 '텐텐클럽'이라는 은어를 알려줬습니다. 투옥 열 번, 징역 10년을 일컫는 말입니다. A는 "마약사범은 한번 잡혀가면 텐텐클럽 되는 건 금방"이라고 말합니다. 중독을 치료하지 못하면 투옥과 출소, 투약을 반복하는 삶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중독치료의 권위자 조성남 국립법무법원 소장은 "투옥 기간 동안 중독자들은 입으로 약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약을 경험했던 사람이 마약을 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투약할 때 만큼은 아니어도 도파민 수치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투옥된 마약사범들은 서로의 경험을 나누면서 (조성남 원장의 표현에 따르면) '말로 약을 합니다'.

'주사기'에서 '흡입'으로…"마약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약을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까요? 19세기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처럼 정부는 관세청·검역본부·수사기관이 총동원돼 마약 밀수를 적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중독자B는 "마약은 진화한다"며 공급 억제 위주의 마약류 관리 정책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세상 모든 약을 막을 수 없다면 약물 중독자는 어떻게든 약물을 한다는 겁니다. 수면내시경 등에 쓰였던 프로포폴이 마약류로 사용되는 것처럼, 좋은 의도로 쓰이는 약도 언제든 마약이 될 수 있습니다.

중독자C는 "집행유예 기간에도 시약기에 나오지 않는 약물을 투약한다"고 털어놨습니다. 구치소에서조차 약을 처방받아 섞은 뒤 빻아서 흡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정부가 대마초 밀수를 집중 단속하면 합성 대마가 유통되는 식입니다.

경찰 관계자는 젊은이들이 마약을 투약하는 방식도 바뀌었다고 귀띔했습니다. 기존에는 주사기를 이용해 정맥에 마약류를 직접 주입했다면, 요즘에는 태운 후 흡입하는 방식이 더 많다고 합니다. 흡입하는 경우 더 많은 양이 필요한데도 몸에 자국이 남지 않아 선호한다는 겁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약을 구하기 쉬워졌기 때문에 더 많은 양을 투약한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몸에 자국이 남지 않는 흡입 방식으로 마약 투약 방식도 바뀌고 있다.몸에 자국이 남지 않는 흡입 방식으로 마약 투약 방식도 바뀌고 있다.

"이제 문제는 처방약"…미국은 이미 '오피오이드 파동'

처방약이 있는 한 약물중독의 위험은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중독자D는 "최근 N·A 찾아오는 분들 중에 처방약 중독이 특히 눈에 띈다"이라고 말했습니다. 헤로인이나 모르핀 계열의 강한 진통제에 중독돼 치료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선 이미 마약성 진통제 오피오이드 오·남용으로 인한 중독이 큰 문제로 불거졌습니다.

식욕억제제로 많이 쓰이는 펜타민 계열의 이른바 '다이어트 약', 스틸녹스, 졸피뎀 등의 수면유도제 등도 엄격한 제한 없이 자주, 많이 투약하면 약에 의존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환각과 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엔 한 영화배우가 식욕억제제 과다 복용으로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마약 없애려면…(1)수요 억제 (2)중독 치료 (3)공급 엄벌

사람을 도와주는 약과 마약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합니다. 그래서 중독자들은 마약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급 억제' 뿐만 아니라 '수요 억제'에도 힘을 써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마약사범을 엄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약류에 대한 신규 수요를 차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마약류 문제를 쉬쉬하지만 말고 공론화해서 그 폐해를 알려야 합니다. 마약의 이미지는 재벌가나 클럽처럼 화려한 생활과 결부됩니다. 하지만 마약의 쾌감과 화려함은 순간이고, 이후 중독자의 삶은 투옥과 금단의 나락으로 빠져듭니다.

또 하나는 기존 중독자들에 대한 재활과 치료입니다. 마약 공급책은 엄벌하되, 단순 투약자에겐 중독을 치료할 기회를 줘야 합니다.

최근엔 국내에도 중독자 치료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초범에 한해 치료의 기회를 주는 '치료 조건부 기소유예'나 정부 지정 병원에서 1년 동안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료보호제도' 등이 도입됐습니다. 하지만, 실제 운용률은 턱없이 낮습니다. 예컨대 전국의 중독자 치료보호 지정 병원 20여 곳 가운데 실제로 중독자를 받는 병동은 5곳 정도에 불과합니다.

국내에는 중독자 치료 시설이 부족하다. 사진은 충남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국립법무병원.국내에는 중독자 치료 시설이 부족하다. 사진은 충남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국립법무병원.

"매일이 단약(斷藥)과의 사투"

19세기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중독자들은 대부분 저마다의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마약에 손을 댔고, 헤어나올 수 없는 마약의 늪에 빠졌습니다. 마약을 끊으려고 다짐해봐도 이미 찍혀버린 '범법자'라는 낙인과 쾌감의 기억은 그들을 끊임없이 마약으로 유혹합니다.

그래서 재활을 하려는 중독자들은 매일 '익명의 약물중독자들'(N·A)과 같은 치료 모임에 나갑니다. 저녁에 모여 매일의 경험을 나누고, 함께 식사합니다. 인근 식당에서 밥을 먹고 패스트푸드점에서 디저트까지 먹으면 하루가 끝납니다. '딱 하루 더' 마약을 하지 않고 보낸 겁니다.

[나는 약물중독자입니다] 연재가 시작된 후 한 중독자는 "모르는 사람들이 댓글로 힘내라고 말해주니까 눈물이 나더라"며 담담히 웃었습니다. 마약이라는 큰 실수를 저지른 중독자가 치료를 받고 우리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마약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를 끼운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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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약물중독자입니다]⑥ 누구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 입력 2019-05-24 07:00:39
    • 수정2019-05-29 17:39:45
    취재K
교도소 생활을 그린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는 해롱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해롱이는 상습적으로 마약을 투약하다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투옥됩니다. 남자친구는 해롱이를 경찰에 신고했고, 엄마는 보석금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해롱이가 마약을 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롱이, 출소하자마자 다시 마약을 투약하고 경찰에 잡혀갑니다. 시청자들에겐 충격적인 결말이지만 약물 중독자들에겐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출소뽕'은 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독자들은 투옥이 '중독을 끊는 기회'가 아니라 '약을 다시 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시청자들에게 충격적인 결말이었던 해롱이의 ‘출소뽕’ 장면. 하지만 약물 중독자들은 흔한 일이라고 말한다. (tvN 방송 화면 캡쳐)
투약과 투옥의 반복…'텐텐클럽'은 금방

중독자A는 '텐텐클럽'이라는 은어를 알려줬습니다. 투옥 열 번, 징역 10년을 일컫는 말입니다. A는 "마약사범은 한번 잡혀가면 텐텐클럽 되는 건 금방"이라고 말합니다. 중독을 치료하지 못하면 투옥과 출소, 투약을 반복하는 삶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중독치료의 권위자 조성남 국립법무법원 소장은 "투옥 기간 동안 중독자들은 입으로 약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약을 경험했던 사람이 마약을 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투약할 때 만큼은 아니어도 도파민 수치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투옥된 마약사범들은 서로의 경험을 나누면서 (조성남 원장의 표현에 따르면) '말로 약을 합니다'.

'주사기'에서 '흡입'으로…"마약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약을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까요? 19세기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처럼 정부는 관세청·검역본부·수사기관이 총동원돼 마약 밀수를 적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중독자B는 "마약은 진화한다"며 공급 억제 위주의 마약류 관리 정책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세상 모든 약을 막을 수 없다면 약물 중독자는 어떻게든 약물을 한다는 겁니다. 수면내시경 등에 쓰였던 프로포폴이 마약류로 사용되는 것처럼, 좋은 의도로 쓰이는 약도 언제든 마약이 될 수 있습니다.

중독자C는 "집행유예 기간에도 시약기에 나오지 않는 약물을 투약한다"고 털어놨습니다. 구치소에서조차 약을 처방받아 섞은 뒤 빻아서 흡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정부가 대마초 밀수를 집중 단속하면 합성 대마가 유통되는 식입니다.

경찰 관계자는 젊은이들이 마약을 투약하는 방식도 바뀌었다고 귀띔했습니다. 기존에는 주사기를 이용해 정맥에 마약류를 직접 주입했다면, 요즘에는 태운 후 흡입하는 방식이 더 많다고 합니다. 흡입하는 경우 더 많은 양이 필요한데도 몸에 자국이 남지 않아 선호한다는 겁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약을 구하기 쉬워졌기 때문에 더 많은 양을 투약한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몸에 자국이 남지 않는 흡입 방식으로 마약 투약 방식도 바뀌고 있다.
"이제 문제는 처방약"…미국은 이미 '오피오이드 파동'

처방약이 있는 한 약물중독의 위험은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중독자D는 "최근 N·A 찾아오는 분들 중에 처방약 중독이 특히 눈에 띈다"이라고 말했습니다. 헤로인이나 모르핀 계열의 강한 진통제에 중독돼 치료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선 이미 마약성 진통제 오피오이드 오·남용으로 인한 중독이 큰 문제로 불거졌습니다.

식욕억제제로 많이 쓰이는 펜타민 계열의 이른바 '다이어트 약', 스틸녹스, 졸피뎀 등의 수면유도제 등도 엄격한 제한 없이 자주, 많이 투약하면 약에 의존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환각과 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엔 한 영화배우가 식욕억제제 과다 복용으로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마약 없애려면…(1)수요 억제 (2)중독 치료 (3)공급 엄벌

사람을 도와주는 약과 마약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합니다. 그래서 중독자들은 마약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급 억제' 뿐만 아니라 '수요 억제'에도 힘을 써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마약사범을 엄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약류에 대한 신규 수요를 차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마약류 문제를 쉬쉬하지만 말고 공론화해서 그 폐해를 알려야 합니다. 마약의 이미지는 재벌가나 클럽처럼 화려한 생활과 결부됩니다. 하지만 마약의 쾌감과 화려함은 순간이고, 이후 중독자의 삶은 투옥과 금단의 나락으로 빠져듭니다.

또 하나는 기존 중독자들에 대한 재활과 치료입니다. 마약 공급책은 엄벌하되, 단순 투약자에겐 중독을 치료할 기회를 줘야 합니다.

최근엔 국내에도 중독자 치료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초범에 한해 치료의 기회를 주는 '치료 조건부 기소유예'나 정부 지정 병원에서 1년 동안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료보호제도' 등이 도입됐습니다. 하지만, 실제 운용률은 턱없이 낮습니다. 예컨대 전국의 중독자 치료보호 지정 병원 20여 곳 가운데 실제로 중독자를 받는 병동은 5곳 정도에 불과합니다.

국내에는 중독자 치료 시설이 부족하다. 사진은 충남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국립법무병원.
"매일이 단약(斷藥)과의 사투"

19세기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중독자들은 대부분 저마다의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마약에 손을 댔고, 헤어나올 수 없는 마약의 늪에 빠졌습니다. 마약을 끊으려고 다짐해봐도 이미 찍혀버린 '범법자'라는 낙인과 쾌감의 기억은 그들을 끊임없이 마약으로 유혹합니다.

그래서 재활을 하려는 중독자들은 매일 '익명의 약물중독자들'(N·A)과 같은 치료 모임에 나갑니다. 저녁에 모여 매일의 경험을 나누고, 함께 식사합니다. 인근 식당에서 밥을 먹고 패스트푸드점에서 디저트까지 먹으면 하루가 끝납니다. '딱 하루 더' 마약을 하지 않고 보낸 겁니다.

[나는 약물중독자입니다] 연재가 시작된 후 한 중독자는 "모르는 사람들이 댓글로 힘내라고 말해주니까 눈물이 나더라"며 담담히 웃었습니다. 마약이라는 큰 실수를 저지른 중독자가 치료를 받고 우리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마약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를 끼운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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