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젖은 콜센터]④ “나는 감정 앵무새인가요?”…콜센터 매뉴얼 잔혹사

입력 2019.12.28 (08:01) 수정 2019.12.2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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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너머 콜센터 상담원들은 언제나 200% 친절 상태입니다. 때로는 과한 환대 때문에 전화한 게 미안해질 정도입니다.

상담원의 개인적인 호의도 작용하겠지만, 이 친절은 대부분 고객 응대 매뉴얼에 따른 것입니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으면 점수가 깎입니다. 점수가 깎이면 월급도 깎입니다. 강요된 친절입니다.

기업 입장에서 고객에게 친절하라는 매뉴얼을 당연히 제시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매뉴얼이 현실과 동떨어졌고, 너무나도 주관적이며, 매우 경직됐다는 겁니다.

상담원들은 "로봇에게 일을 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며 인권침해를 호소합니다.

한 대기업의 콜센터 업무를 위탁받은 (주)한국고용정보의 고객 응대 매뉴얼한 대기업의 콜센터 업무를 위탁받은 (주)한국고용정보의 고객 응대 매뉴얼

"안녕하세요 고객님" VS "고객님 안녕하세요"

우리나라 굴지의 한 대기업 콜센터 업무를 위탁받은 한국고용정보. 춘천에 자리잡은 이 콜센터 500명 상담원도 고객 응대 매뉴얼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매뉴얼에는 맞이인사 음성, 경청태도 등의 큰 분류 아래 50여 가지 세세한 상담원 평가 기준이 적혀있습니다.

매뉴얼 일부를 살펴볼까요?


한국고용정보의 한 상담원은 "안녕하세요 고객님"을 "고객님 안녕하세요"라고 순서를 바꿨다가 점수가 깎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마다 말하는 습관과 억양이 다 다른데, 그걸 매뉴얼 대로 고치다 보니 괴롭다고 호소했습니다.

매뉴얼 대로라면 5kg를 5킬로그램이 아니라 5킬로라고 안내해도 감점을 받습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전화를 받느라 깜빡하고 상담원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바로 점수가 깎입니다.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소비자 입장에서 어순이 바뀐들, 킬로그램을 킬로로 안내받은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 정도는 상담원들 재량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요?

현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투와 음색, 단어 순서와 숨 쉬는 위치까지 모두 점수로 변환됩니다. 점수는 곧 인센티브 급여와 직결됩니다. 상담원들은 기를 쓰고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LG전자 콜센터 업무를 맡은 자회사 하이텔레서비스의 매뉴얼LG전자 콜센터 업무를 맡은 자회사 하이텔레서비스의 매뉴얼

다른 콜센터는 어떨까요? LG 전자 자회사인 하이텔레서비스는 60가지 평가기준을 가지고 상담원의 점수를 매깁니다.

매뉴얼의 일부입니다.


5점을 받기 위해서, 아니 3점이나 1점으로 깎이지 않기 위해선 나에게 욕을 하고 소리 지르는 고객에게도 '밝고 리듬감 있는 음성으로 감정 기복 없이 성의있게 상담'해야 합니다.

오늘따라 전화를 많이 받느라 발음이 좀 꼬이면 바로 4점에서 2.4점, 0.8점으로 추락합니다. 점수가 다소 떨어지면, 매뉴얼대로 잘하는지만 지켜보는 직위의 상급자에게 불려가 '특별교육'을 받기도 합니다.

매뉴얼에 따라 전화 끊기 전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고객님 더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라고 했다가 화가 난 고객을 더 화나게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이처럼 고객 응대 매뉴얼은 어떠한 경우라도 예외 없이 지켜지도록 강제됩니다. 상담원의 재량권은 조금도 없습니다. 괴로움은 또 있습니다.

KBS 취재진이 살펴본 매뉴얼 속의 평가지표에는 주관적인 표현이 한가득입니다. "리듬감, 생동감, 상냥한, 감정 기복 없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여, 안정감 있게...."

평가자인 상급자의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매우 큽니다. 매뉴얼의 부당함에도 상담원들은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습니다.

네가 앵무새야? 이런 것도 못 해줘?

상담원도 소비자도 기업도 살 수 있는 매뉴얼은 없을까. 삼성전자와 LG전자 콜센터 사정을 잘 아는 금속노조 서울지부 황수진 미조직사업부장을 만나봤습니다.

황수진 부장은 "고객 입장에서 '안녕하세요 고객님'과 '고객님 안녕하세요' 사이에 차이가 없지 않으냐. 회사가 과하게 신경을 쓰도록 업무환경을 만들어 놓다 보니까 상담원들이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부 콜센터 상담원들이 "이런 상황에서 이런 멘트는 맞지 않는다, 현실에 부합하는 응대 매뉴얼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고객들과 만나는 상담원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현실적인 매뉴얼을 만들고, 상담원들에게 자율성을 조금 열어주면 해결될 일인데 하나도 개선이 되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융통성 없는 회사와 화 난 고객 사이에서 매뉴얼만 반복해야 하는 상담원들. "네가 앵무새야? 이런 것도 못 해줘?"라는 항의도 오롯이 상담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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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물젖은 콜센터]④ “나는 감정 앵무새인가요?”…콜센터 매뉴얼 잔혹사
    • 입력 2019-12-28 08:01:35
    • 수정2019-12-28 16:08:57
    취재K
전화기 너머 콜센터 상담원들은 언제나 200% 친절 상태입니다. 때로는 과한 환대 때문에 전화한 게 미안해질 정도입니다.

상담원의 개인적인 호의도 작용하겠지만, 이 친절은 대부분 고객 응대 매뉴얼에 따른 것입니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으면 점수가 깎입니다. 점수가 깎이면 월급도 깎입니다. 강요된 친절입니다.

기업 입장에서 고객에게 친절하라는 매뉴얼을 당연히 제시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매뉴얼이 현실과 동떨어졌고, 너무나도 주관적이며, 매우 경직됐다는 겁니다.

상담원들은 "로봇에게 일을 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며 인권침해를 호소합니다.

한 대기업의 콜센터 업무를 위탁받은 (주)한국고용정보의 고객 응대 매뉴얼
"안녕하세요 고객님" VS "고객님 안녕하세요"

우리나라 굴지의 한 대기업 콜센터 업무를 위탁받은 한국고용정보. 춘천에 자리잡은 이 콜센터 500명 상담원도 고객 응대 매뉴얼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매뉴얼에는 맞이인사 음성, 경청태도 등의 큰 분류 아래 50여 가지 세세한 상담원 평가 기준이 적혀있습니다.

매뉴얼 일부를 살펴볼까요?


한국고용정보의 한 상담원은 "안녕하세요 고객님"을 "고객님 안녕하세요"라고 순서를 바꿨다가 점수가 깎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마다 말하는 습관과 억양이 다 다른데, 그걸 매뉴얼 대로 고치다 보니 괴롭다고 호소했습니다.

매뉴얼 대로라면 5kg를 5킬로그램이 아니라 5킬로라고 안내해도 감점을 받습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전화를 받느라 깜빡하고 상담원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바로 점수가 깎입니다.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소비자 입장에서 어순이 바뀐들, 킬로그램을 킬로로 안내받은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 정도는 상담원들 재량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요?

현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투와 음색, 단어 순서와 숨 쉬는 위치까지 모두 점수로 변환됩니다. 점수는 곧 인센티브 급여와 직결됩니다. 상담원들은 기를 쓰고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LG전자 콜센터 업무를 맡은 자회사 하이텔레서비스의 매뉴얼
다른 콜센터는 어떨까요? LG 전자 자회사인 하이텔레서비스는 60가지 평가기준을 가지고 상담원의 점수를 매깁니다.

매뉴얼의 일부입니다.


5점을 받기 위해서, 아니 3점이나 1점으로 깎이지 않기 위해선 나에게 욕을 하고 소리 지르는 고객에게도 '밝고 리듬감 있는 음성으로 감정 기복 없이 성의있게 상담'해야 합니다.

오늘따라 전화를 많이 받느라 발음이 좀 꼬이면 바로 4점에서 2.4점, 0.8점으로 추락합니다. 점수가 다소 떨어지면, 매뉴얼대로 잘하는지만 지켜보는 직위의 상급자에게 불려가 '특별교육'을 받기도 합니다.

매뉴얼에 따라 전화 끊기 전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고객님 더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라고 했다가 화가 난 고객을 더 화나게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이처럼 고객 응대 매뉴얼은 어떠한 경우라도 예외 없이 지켜지도록 강제됩니다. 상담원의 재량권은 조금도 없습니다. 괴로움은 또 있습니다.

KBS 취재진이 살펴본 매뉴얼 속의 평가지표에는 주관적인 표현이 한가득입니다. "리듬감, 생동감, 상냥한, 감정 기복 없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여, 안정감 있게...."

평가자인 상급자의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매우 큽니다. 매뉴얼의 부당함에도 상담원들은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습니다.

네가 앵무새야? 이런 것도 못 해줘?

상담원도 소비자도 기업도 살 수 있는 매뉴얼은 없을까. 삼성전자와 LG전자 콜센터 사정을 잘 아는 금속노조 서울지부 황수진 미조직사업부장을 만나봤습니다.

황수진 부장은 "고객 입장에서 '안녕하세요 고객님'과 '고객님 안녕하세요' 사이에 차이가 없지 않으냐. 회사가 과하게 신경을 쓰도록 업무환경을 만들어 놓다 보니까 상담원들이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부 콜센터 상담원들이 "이런 상황에서 이런 멘트는 맞지 않는다, 현실에 부합하는 응대 매뉴얼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고객들과 만나는 상담원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현실적인 매뉴얼을 만들고, 상담원들에게 자율성을 조금 열어주면 해결될 일인데 하나도 개선이 되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융통성 없는 회사와 화 난 고객 사이에서 매뉴얼만 반복해야 하는 상담원들. "네가 앵무새야? 이런 것도 못 해줘?"라는 항의도 오롯이 상담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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