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잔혹사도 교훈으로”…독일 최대 강제수용소

입력 2020.02.22 (22:14) 수정 2020.02.22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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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지 75주년이 되는 올해, 세계 각국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행사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쟁 당시 각종 고문과 생체실험 등이 자행된 강제수용소들 일부는 현재 생생한 역사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는데요,

독일 최대 규모 수용소로 잔혹함의 대명사였던 부헨발트 수용소의 과거와 현재를 유광석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독일 중부 도시 바이마르에서 10km 떨어진 숲속, 나치 독일이 2차대전 전인 1937년에 세운 부헨발트 강제수용소가 나옵니다.

나치 정권은 40헥타르에 이르는 수용소 외곽을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쌌습니다.

감시탑 23곳에서 수감자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아래를 보면 강한 전류가 흐르던 철조망이 있습니다. 짙은 선 쪽으로 가는 수감자가 있으면 경고 사격 없이 즉시 발사했습니다."]

수용소 입구 철문에 있는 문구, '각자에게 제 몫을'이란 말은 매일 이 앞에서 점호를 받았던 수감자들을 향한 나치의 메시지였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너희는 여기 있는 게 마땅하다’ 부헨발트 수감자들을 모욕하는 문구입니다."]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불편한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방에서는 인체실험과 생체해부가 자행됐습니다.

해부대는 체액이 고이지 않고 흘러내리도록 설계됐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대학에서 의대생들을 위해 장기가 필요하다고 요청했습니다. 직접 관찰할 목적으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나치는 새로운 독극물과 해독제를 만들면 먼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실험을 거쳤습니다.

[구바/폴란드인 관람객 : "충격적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용소가 해방된 1945년까지 유대인과 정치범, 포로 등 모두 28만여 명이 이 곳에 수감됐습니다.

이 가운데 5만 6천여 명이 굶주림과 강제노역, 고문, 질병 등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부헨발트 수용소가 '시체 공장'으로 불린 이유입니다.

생체실험이 끝난 시신들은 10번이라고 쓰인 이 나무문을 통해 처리실로 옮겨졌습니다.

시체 처리실은 다름 아닌 소각장이었습니다.

마치 빵을 굽는 오븐처럼 생긴 대형 소각로, 하루에 4백 구의 시신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나치는 수용소의 수많은 시신들을 최대한 빨리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르푸르트에 있는 회사에 소각로 설계를 의뢰했습니다."]

금니는 소각 전에 미리 뽑아냈습니다.

[사미 알타하티쉬/독일인 관람객 : "사람들이 화장 당하는 것을 상상해 봤습니다.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1945년 4월 11일 수용소에 도착한 미군 부대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뼈만 남은 채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는 생존자들, 무더기로 쌓인 시신 더미에선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빅토르 헤르스코비치/체코슬로바키아인 수감자 :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혹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는 더러운 유대인 돼지다"라고 말하도록 매일 강요당했습니다. 밤낮으로 구타를 당했습니다."]

나치의 만행을 눈으로 확인한 아이젠하워 연합군 사령관은 바이마르 주민 천여 명을 데려와 잔혹한 현장을 보게 했습니다.

사람 피부로 만든 전등 갓, 벗겨낸 피부에 그린 외설적인 그림, 축소시킨 사람의 머리..

처음에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왔던 독일인들은 곧장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대부분 주민들은 참상을 알지 못했다며 부인했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확실한 것은 주민들이 냄새에 대해 불평을 했다는 겁니다. 저 (소각장) 굴뚝에서 밤낮으로 연기가 나왔고 그것을 주민들이 봤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문학가 괴테와 쉴러가 고전주의 문학을 꽃피우고, 최초의 공화국 헌법이 공포된 대표적 문화도시 바이마르,자부심 강했던 바이마르 시민들은 불과 10km 떨어진 곳에서 잔혹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수용소는 이제 기념관으로 바뀌어 과거의 역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투쟁을 선전했던 동독 시절을 지나, 1990년 통일 이후엔 젊은 세대를 위한 교육장으로 거듭났습니다.

학교와 연계한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이 수시로 진행됩니다.

기념관은 특히 유대인 배척주의와 인종주의가 여전한 현실에 주목합니다.

[알리나/우크라이나인 관람객 : "누군가는 유대인이라서, 또 인종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1월 27일 독일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지도자들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75주년 기념식에서 반유대주의와 맞설 것을 촉구했습니다.

부헨발트도 오는 4월 수용소 해방 75주년을 맞아 생존자를 초청한 가운데 희생자 추모식을 거행할 계획입니다.

[테레자 마이스너/독일인 관람객 : "특히 젊은 사람들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절대 잊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파괴하는 행동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잔혹한 역사도 교훈으로 삼을 줄 아는 용기가 한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함을 강제수용소는 묵묵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헨발트에서 유광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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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치 잔혹사도 교훈으로”…독일 최대 강제수용소
    • 입력 2020-02-22 22:38:01
    • 수정2020-02-22 22: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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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지 75주년이 되는 올해, 세계 각국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행사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전쟁 당시 각종 고문과 생체실험 등이 자행된 강제수용소들 일부는 현재 생생한 역사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는데요,

독일 최대 규모 수용소로 잔혹함의 대명사였던 부헨발트 수용소의 과거와 현재를 유광석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독일 중부 도시 바이마르에서 10km 떨어진 숲속, 나치 독일이 2차대전 전인 1937년에 세운 부헨발트 강제수용소가 나옵니다.

나치 정권은 40헥타르에 이르는 수용소 외곽을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쌌습니다.

감시탑 23곳에서 수감자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아래를 보면 강한 전류가 흐르던 철조망이 있습니다. 짙은 선 쪽으로 가는 수감자가 있으면 경고 사격 없이 즉시 발사했습니다."]

수용소 입구 철문에 있는 문구, '각자에게 제 몫을'이란 말은 매일 이 앞에서 점호를 받았던 수감자들을 향한 나치의 메시지였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너희는 여기 있는 게 마땅하다’ 부헨발트 수감자들을 모욕하는 문구입니다."]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불편한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방에서는 인체실험과 생체해부가 자행됐습니다.

해부대는 체액이 고이지 않고 흘러내리도록 설계됐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대학에서 의대생들을 위해 장기가 필요하다고 요청했습니다. 직접 관찰할 목적으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나치는 새로운 독극물과 해독제를 만들면 먼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실험을 거쳤습니다.

[구바/폴란드인 관람객 : "충격적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용소가 해방된 1945년까지 유대인과 정치범, 포로 등 모두 28만여 명이 이 곳에 수감됐습니다.

이 가운데 5만 6천여 명이 굶주림과 강제노역, 고문, 질병 등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부헨발트 수용소가 '시체 공장'으로 불린 이유입니다.

생체실험이 끝난 시신들은 10번이라고 쓰인 이 나무문을 통해 처리실로 옮겨졌습니다.

시체 처리실은 다름 아닌 소각장이었습니다.

마치 빵을 굽는 오븐처럼 생긴 대형 소각로, 하루에 4백 구의 시신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나치는 수용소의 수많은 시신들을 최대한 빨리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르푸르트에 있는 회사에 소각로 설계를 의뢰했습니다."]

금니는 소각 전에 미리 뽑아냈습니다.

[사미 알타하티쉬/독일인 관람객 : "사람들이 화장 당하는 것을 상상해 봤습니다.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1945년 4월 11일 수용소에 도착한 미군 부대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뼈만 남은 채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는 생존자들, 무더기로 쌓인 시신 더미에선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빅토르 헤르스코비치/체코슬로바키아인 수감자 :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혹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는 더러운 유대인 돼지다"라고 말하도록 매일 강요당했습니다. 밤낮으로 구타를 당했습니다."]

나치의 만행을 눈으로 확인한 아이젠하워 연합군 사령관은 바이마르 주민 천여 명을 데려와 잔혹한 현장을 보게 했습니다.

사람 피부로 만든 전등 갓, 벗겨낸 피부에 그린 외설적인 그림, 축소시킨 사람의 머리..

처음에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왔던 독일인들은 곧장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대부분 주민들은 참상을 알지 못했다며 부인했습니다.

[크리스티안 옌쉬/부헨발트 수용소 홍보팀 : "확실한 것은 주민들이 냄새에 대해 불평을 했다는 겁니다. 저 (소각장) 굴뚝에서 밤낮으로 연기가 나왔고 그것을 주민들이 봤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문학가 괴테와 쉴러가 고전주의 문학을 꽃피우고, 최초의 공화국 헌법이 공포된 대표적 문화도시 바이마르,자부심 강했던 바이마르 시민들은 불과 10km 떨어진 곳에서 잔혹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수용소는 이제 기념관으로 바뀌어 과거의 역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투쟁을 선전했던 동독 시절을 지나, 1990년 통일 이후엔 젊은 세대를 위한 교육장으로 거듭났습니다.

학교와 연계한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이 수시로 진행됩니다.

기념관은 특히 유대인 배척주의와 인종주의가 여전한 현실에 주목합니다.

[알리나/우크라이나인 관람객 : "누군가는 유대인이라서, 또 인종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1월 27일 독일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지도자들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75주년 기념식에서 반유대주의와 맞설 것을 촉구했습니다.

부헨발트도 오는 4월 수용소 해방 75주년을 맞아 생존자를 초청한 가운데 희생자 추모식을 거행할 계획입니다.

[테레자 마이스너/독일인 관람객 : "특히 젊은 사람들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절대 잊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파괴하는 행동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잔혹한 역사도 교훈으로 삼을 줄 아는 용기가 한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함을 강제수용소는 묵묵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헨발트에서 유광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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