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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수형인 300여 명 집단학살 추정…골령골 유해발굴 재개
입력 2020.09.28 (21:50) 수정 2020.09.28 (22:07) 뉴스9(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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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6·25전쟁 발발 초기 대전형무소 수감자 수천 명이 인근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집단학살 후 암매장됐습니다.

희생자 가운데는 제주4·3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 행방불명된 300여 명도 포함돼 있는데요,

지금껏 지지부진하던 산내 학살사건 유해발굴이 최근 재개됐습니다.

유용두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의 대전 전투.

우리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북한군 총공세에 국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집중포화로 대전 시가지는 폐허가 됐습니다.

[김나아/대전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 : "거의 대부분 건물들 자체가 파괴가 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고 그만큼 대전의 피해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쟁의 포화는 대전형무소 수형인들에게 더 잔혹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야트막한 둔덕 옆으로 놓여 있는 검은 비석 하나,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이곳에서 집단학살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겁니다.

당시 군 헌병대와 경찰은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집단 처형을 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희생자 수는 최소 3천 명에서 최대 7천여 명.

수형인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는데, 제주4·3 수형인 300여 명도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희생자들이 매장된 지역도 7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지금까지 유해발굴 작업은 토지소유주 협의 문제와 비용 문제로 일부 지역에서만 이뤄졌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2007년 낭월동에서 70일간 발굴 조사를 했지만, 가장 많은 유해가 매장된 1학살지는 토지소유주 협의 문제로 추진하지 못했고 극히 일부에서 34구의 유해만 수습했습니다.

유족들이 발굴에 나선 2015년에도 18구의 유해를 수습하는데 그쳤습니다.

[박선주/충북대 명예교수/당시 유해발굴 조사단장 : "2007년 발굴에는 발굴 예정지, 가장 유력한 곳이 교회 뒤였거든요. 그런데 (토지) 사용허가를 내주지 않았어요. 2015년에 할 때도 산이 송씨 문중과 연결됐거든요. 문중에서 유해 발굴 못 한다."]

발굴이 지체되는 사이 매장 지역의 훼손 우려도 커졌습니다.

[전숙자/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사건 유족 : "유족들의 아픈 그 쓰라린 과거나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살아왔다는 것을 감안하시면 (빨리 유해발굴이 이뤄져야죠.)"]

늦었지만 올해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가 토지매입과 발굴 비용 13억 원을 투입해 유해발굴 작업을 재개했습니다.

이번 유해발굴은 약 40일 일정으로 제1학살지에서 집중적으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서영균/제주4·3희생자유족회 대전위원장 : "유해가 발굴이 다 되면 그 뼈를 한 군데 다 모여서 산소를 하나 만들면 거기 비석도세우고 해서 제단도 만들어서 후손들이라도가서 할아버지 산소가 여기다 해서 차례도 지낼 수 있고."]

이번 유해발굴이 70여 년 전 먼 타지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행불인 유족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KBS 뉴스 유용두입니다.
  • 4·3 수형인 300여 명 집단학살 추정…골령골 유해발굴 재개
    • 입력 2020-09-28 21:50:18
    • 수정2020-09-28 22:07:12
    뉴스9(제주)
[앵커]

6·25전쟁 발발 초기 대전형무소 수감자 수천 명이 인근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집단학살 후 암매장됐습니다.

희생자 가운데는 제주4·3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 행방불명된 300여 명도 포함돼 있는데요,

지금껏 지지부진하던 산내 학살사건 유해발굴이 최근 재개됐습니다.

유용두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의 대전 전투.

우리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북한군 총공세에 국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집중포화로 대전 시가지는 폐허가 됐습니다.

[김나아/대전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 : "거의 대부분 건물들 자체가 파괴가 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고 그만큼 대전의 피해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쟁의 포화는 대전형무소 수형인들에게 더 잔혹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야트막한 둔덕 옆으로 놓여 있는 검은 비석 하나,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이곳에서 집단학살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겁니다.

당시 군 헌병대와 경찰은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집단 처형을 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희생자 수는 최소 3천 명에서 최대 7천여 명.

수형인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는데, 제주4·3 수형인 300여 명도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희생자들이 매장된 지역도 7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지금까지 유해발굴 작업은 토지소유주 협의 문제와 비용 문제로 일부 지역에서만 이뤄졌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2007년 낭월동에서 70일간 발굴 조사를 했지만, 가장 많은 유해가 매장된 1학살지는 토지소유주 협의 문제로 추진하지 못했고 극히 일부에서 34구의 유해만 수습했습니다.

유족들이 발굴에 나선 2015년에도 18구의 유해를 수습하는데 그쳤습니다.

[박선주/충북대 명예교수/당시 유해발굴 조사단장 : "2007년 발굴에는 발굴 예정지, 가장 유력한 곳이 교회 뒤였거든요. 그런데 (토지) 사용허가를 내주지 않았어요. 2015년에 할 때도 산이 송씨 문중과 연결됐거든요. 문중에서 유해 발굴 못 한다."]

발굴이 지체되는 사이 매장 지역의 훼손 우려도 커졌습니다.

[전숙자/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사건 유족 : "유족들의 아픈 그 쓰라린 과거나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살아왔다는 것을 감안하시면 (빨리 유해발굴이 이뤄져야죠.)"]

늦었지만 올해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가 토지매입과 발굴 비용 13억 원을 투입해 유해발굴 작업을 재개했습니다.

이번 유해발굴은 약 40일 일정으로 제1학살지에서 집중적으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서영균/제주4·3희생자유족회 대전위원장 : "유해가 발굴이 다 되면 그 뼈를 한 군데 다 모여서 산소를 하나 만들면 거기 비석도세우고 해서 제단도 만들어서 후손들이라도가서 할아버지 산소가 여기다 해서 차례도 지낼 수 있고."]

이번 유해발굴이 70여 년 전 먼 타지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행불인 유족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KBS 뉴스 유용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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