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가입 경위서 제출”…CJ대한통운 노조 설립·가입 방해

입력 2020.11.0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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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취재진과 만난 CJ대한통운 동강원지점 택배 기사. 그는  “노조 가입하는 것이 무슨 범법 행위가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시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지난달 29일, 취재진과 만난 CJ대한통운 동강원지점 택배 기사. 그는 “노조 가입하는 것이 무슨 범법 행위가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시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강릉에 있는 CJ대한통운 동강원지점에서 일하는 한 택배 기사는, 최근 대리점 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리점 실적이 좋지 않다"고 운을 떼면서,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된 경위와 본사·대리점에 대해 가진 불만 등을 적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실상 '경위서'를 제출하라고 한 겁니다.

■ "본사에서 시켜"…CJ대한통운 노조 가입 탄압 정황

변호사와 노무사 등 노동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요구는 정상적인 조합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로 판단돼 부당노동행위로 다툴 가능성이 큰 상황. 택배 기사는 대리점 소장에게 "본사에서 나온 얘기냐"고 물었습니다. 취재과정에서 확보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대리점 소장은 질문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경위서를 가져오면 우리가 서명해서 본사에 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택배 기사는 취재진에게 "노조 가입하는 것이 무슨 범법 행위가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시느냐"고 되물으면서 울분을 토했습니다.


■ 본사와 재계약 걸려 있는 대리점들, 사실상 '을'의 위치

대리점은 본사와의 재계약이 걸려 있습니다. 계약서만 보면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택배 기사가 중간 단계인 대리점과 계약을 맺고, 그다음 이 대리점이 CJ대한통운과 다시 상위 계약을 맺는 이중 구조에서, 대리점은 본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을'의 위치에 있습니다. "(본사) 지점에서는 우리한테 추궁하는 거지. 우리 대리점에서 우리 직원들한테 뭔가 (노조 활동 등을) 잘못했고 이러니까 우리보고 적어내라고 한 거지. 나 보고." "본사와의 계약이 갱신되지 않을까 봐 그러셨냐"라는 취재진 질문을 받고도, 대리점 소장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취재진은 택배 기사와 대리점 소장 간 통화에서 언급된 CJ대한통운 동강원지점 관계자를 찾아갔습니다. 지점에서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오히려, 대리점에서 "월권행위를 했겠냐?"라며 노조 활동 방해 의혹을 부인했습니다. 또, 자동분류장치나 회사 복지 수준 등을 들어 본사 입장을 두둔하기도 했습니다.


택배 기사 여러 명을 만나 심층 면접하며 취재한 결과, 강릉에 있는 대리점 11곳 중 상당수가 노조 활동과 관련해 택배기사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달 말 본사와의 재계약을 앞둔 한 대리점은, 택배 기사에게 전화해 "본사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면서 "계약 문제가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달 한 달 동안만이라도 노조 활동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또 노조에 누가 가입하려고 하는지 거듭 확인하고 있고, 노조에 들어가면 같이 일을 못 하겠다고 말하는 등 본사와 대리점이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압박을 계속 넣고 있다고 택배 노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조가 없는 강릉지역 CJ대한통운 택배 기사. 분류 작업이 오후 2~3시에나 끝나다 보니, 매일 이렇게 뛰어다니며 배송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노조가 없는 강릉지역 CJ대한통운 택배 기사. 분류 작업이 오후 2~3시에나 끝나다 보니, 매일 이렇게 뛰어다니며 배송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 강원도 택배노조 3곳뿐…노조 만들기도, 만들고 나서도 힘든 현실

강원도에 있는 택배 노동조합은 3곳뿐입니다. CJ대한통운은 동해삼척지회, 춘천과 원주에 있는 우체국 택배노조가 전부입니다. 동해와 삼척지역의 경우, 노조가 생긴 뒤로 인력이 추가 투입돼 분류 마무리 작업 시간이 오후 1시~1시 30분까지 당겨졌다는 게 택배 기사들 얘기입니다. 하지만 강릉의 경우, 물량이 많은 날엔 3시까지도 분류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노동자들 설명입니다. 거점 물류기지에서 오는 화물차량도 노조가 있는 동해·삼척권역에는 비교적 일찍 도착한다고 기사들은 말합니다. 이광표 동해삼척지회장도 "회사가 노조 있는 지역만 눈치를 봐서" 그렇다고 얘기합니다. 강릉에 있는 CJ대한통운 택배 기사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관련 기사] 택배 노조 유무에 따라 작업환경 차이 커

그러나 노조가 모든 해답이 될 순 없습니다. 김남석 노무사는 "택배 기사의 근로기준법상 신분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느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노조 만들 권리는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규정되는 택배 기사들. 이렇다 보니 노조를 꾸려도 사업장으로부터 '어엿한 노조'로 대접받기가 사실상 힘든 상황입니다. 노조를 만드는 것도, 노조를 만든 뒤에도 순탄치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택배 기사들의 고단한 삶이 바뀌어 어깨가 가벼워질 때까지는 앞으로도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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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조 가입 경위서 제출”…CJ대한통운 노조 설립·가입 방해
    • 입력 2020-11-03 07:01:50
    취재K
지난달 29일, 취재진과 만난 CJ대한통운 동강원지점 택배 기사. 그는  “노조 가입하는 것이 무슨 범법 행위가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시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강릉에 있는 CJ대한통운 동강원지점에서 일하는 한 택배 기사는, 최근 대리점 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리점 실적이 좋지 않다"고 운을 떼면서,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된 경위와 본사·대리점에 대해 가진 불만 등을 적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실상 '경위서'를 제출하라고 한 겁니다.

■ "본사에서 시켜"…CJ대한통운 노조 가입 탄압 정황

변호사와 노무사 등 노동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요구는 정상적인 조합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로 판단돼 부당노동행위로 다툴 가능성이 큰 상황. 택배 기사는 대리점 소장에게 "본사에서 나온 얘기냐"고 물었습니다. 취재과정에서 확보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대리점 소장은 질문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경위서를 가져오면 우리가 서명해서 본사에 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택배 기사는 취재진에게 "노조 가입하는 것이 무슨 범법 행위가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시느냐"고 되물으면서 울분을 토했습니다.


■ 본사와 재계약 걸려 있는 대리점들, 사실상 '을'의 위치

대리점은 본사와의 재계약이 걸려 있습니다. 계약서만 보면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택배 기사가 중간 단계인 대리점과 계약을 맺고, 그다음 이 대리점이 CJ대한통운과 다시 상위 계약을 맺는 이중 구조에서, 대리점은 본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을'의 위치에 있습니다. "(본사) 지점에서는 우리한테 추궁하는 거지. 우리 대리점에서 우리 직원들한테 뭔가 (노조 활동 등을) 잘못했고 이러니까 우리보고 적어내라고 한 거지. 나 보고." "본사와의 계약이 갱신되지 않을까 봐 그러셨냐"라는 취재진 질문을 받고도, 대리점 소장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취재진은 택배 기사와 대리점 소장 간 통화에서 언급된 CJ대한통운 동강원지점 관계자를 찾아갔습니다. 지점에서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오히려, 대리점에서 "월권행위를 했겠냐?"라며 노조 활동 방해 의혹을 부인했습니다. 또, 자동분류장치나 회사 복지 수준 등을 들어 본사 입장을 두둔하기도 했습니다.


택배 기사 여러 명을 만나 심층 면접하며 취재한 결과, 강릉에 있는 대리점 11곳 중 상당수가 노조 활동과 관련해 택배기사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달 말 본사와의 재계약을 앞둔 한 대리점은, 택배 기사에게 전화해 "본사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면서 "계약 문제가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달 한 달 동안만이라도 노조 활동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또 노조에 누가 가입하려고 하는지 거듭 확인하고 있고, 노조에 들어가면 같이 일을 못 하겠다고 말하는 등 본사와 대리점이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압박을 계속 넣고 있다고 택배 노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조가 없는 강릉지역 CJ대한통운 택배 기사. 분류 작업이 오후 2~3시에나 끝나다 보니, 매일 이렇게 뛰어다니며 배송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 강원도 택배노조 3곳뿐…노조 만들기도, 만들고 나서도 힘든 현실

강원도에 있는 택배 노동조합은 3곳뿐입니다. CJ대한통운은 동해삼척지회, 춘천과 원주에 있는 우체국 택배노조가 전부입니다. 동해와 삼척지역의 경우, 노조가 생긴 뒤로 인력이 추가 투입돼 분류 마무리 작업 시간이 오후 1시~1시 30분까지 당겨졌다는 게 택배 기사들 얘기입니다. 하지만 강릉의 경우, 물량이 많은 날엔 3시까지도 분류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노동자들 설명입니다. 거점 물류기지에서 오는 화물차량도 노조가 있는 동해·삼척권역에는 비교적 일찍 도착한다고 기사들은 말합니다. 이광표 동해삼척지회장도 "회사가 노조 있는 지역만 눈치를 봐서" 그렇다고 얘기합니다. 강릉에 있는 CJ대한통운 택배 기사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관련 기사] 택배 노조 유무에 따라 작업환경 차이 커

그러나 노조가 모든 해답이 될 순 없습니다. 김남석 노무사는 "택배 기사의 근로기준법상 신분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느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노조 만들 권리는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규정되는 택배 기사들. 이렇다 보니 노조를 꾸려도 사업장으로부터 '어엿한 노조'로 대접받기가 사실상 힘든 상황입니다. 노조를 만드는 것도, 노조를 만든 뒤에도 순탄치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택배 기사들의 고단한 삶이 바뀌어 어깨가 가벼워질 때까지는 앞으로도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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