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단독영상]③ 영상으로 드러난 ‘궁색한 4·3 진압 명분’

입력 2021.04.02 (19:14) 수정 2021.04.02 (19:46)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KBS가 확보한 이 현대사 영상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해야할 장면은 제헌국회 구성을 위해 실시된 5·10 총선거를 다룬 내용입니다.

제주4·3에 대한 강경진압 명분의 하나가 5·10선거에 반대한 무장봉기였는데 실제 당시 상황은 어땠을까요?

당시 영상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강정훈 기자입니다.

[리포트]

1948년 전진조선보 10보에 기록된 5·10선거 당시 서울 시내 모습입니다.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무장경찰과 붙잡힌 단독선거 반대자들, 그들의 무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약간의 폭동과 소란"이라고 표현되고 있지만,

["이날은 약간의 폭동과 소란이 있었으나 선거위원들의 노력으로 투표는 무사히 진행되었습니다."]

무장경찰들이 투표장을 지켜야했고, 투표 과정에 위험을 무릅썼다는 표현까지 나오며 당시 선거가 결코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투표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위협을 무릅쓰고 대담스럽게도 투표장으로 가서 제각각 자유의사에 의해서 입후보자들 가운데서도 어느 한사람을 선택하는 귀중한 한 표를 던진 것입니다."]

실제 미군 보고서를 살펴보면 선거를 앞둔 소요 사태는 전국적인 상황이었습니다.

4·3 발발 하루 전인 1948년 4월 2일 작성된 미 24군단 주간요약 보고서에는 2월과 3월 전국적으로 경찰관서 습격이 239건 발생했고, 경찰 53명, 무장대 144명, 비무장대 28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때까지 제주에선 단 한 건도 경찰지서 습격사건이 없었습니다.

5·10선거 갈등이 극에 달했던 1948년 5월 7일에서 11일까지 전국 선거 관련 소요 현황에 대한 미군정 정보 보고서를 봐도, 경찰지서나 투표함 습격, 전화선 절단, 방화 등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5·10선거에 반대하며 경찰지서를 습격한 사건이 제주에서만 일어난 돌출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유독 인명 피해는 제주에서 가장 컸던 겁니다.

[김종민/전 국무총리실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한 말이 제주도의 사건에 남한 주민들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이런 표현을 써요. 그러니까 제주도를 강경진압을 빨리 해서 남한 주민들을 겁박하기 위한 그런 목적도 있었다고 보는 거죠. 하나의 본보기로써."]

이 같은 군과 경찰의 계속된 강경진압 속에 제주는 5·10선거를 거부한 남한의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았고 오랜 시간 핍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KBS 뉴스 강정훈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4·3 단독영상]③ 영상으로 드러난 ‘궁색한 4·3 진압 명분’
    • 입력 2021-04-02 19:14:23
    • 수정2021-04-02 19:46:10
    뉴스7(제주)
[앵커]

KBS가 확보한 이 현대사 영상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해야할 장면은 제헌국회 구성을 위해 실시된 5·10 총선거를 다룬 내용입니다.

제주4·3에 대한 강경진압 명분의 하나가 5·10선거에 반대한 무장봉기였는데 실제 당시 상황은 어땠을까요?

당시 영상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강정훈 기자입니다.

[리포트]

1948년 전진조선보 10보에 기록된 5·10선거 당시 서울 시내 모습입니다.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무장경찰과 붙잡힌 단독선거 반대자들, 그들의 무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약간의 폭동과 소란"이라고 표현되고 있지만,

["이날은 약간의 폭동과 소란이 있었으나 선거위원들의 노력으로 투표는 무사히 진행되었습니다."]

무장경찰들이 투표장을 지켜야했고, 투표 과정에 위험을 무릅썼다는 표현까지 나오며 당시 선거가 결코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투표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위협을 무릅쓰고 대담스럽게도 투표장으로 가서 제각각 자유의사에 의해서 입후보자들 가운데서도 어느 한사람을 선택하는 귀중한 한 표를 던진 것입니다."]

실제 미군 보고서를 살펴보면 선거를 앞둔 소요 사태는 전국적인 상황이었습니다.

4·3 발발 하루 전인 1948년 4월 2일 작성된 미 24군단 주간요약 보고서에는 2월과 3월 전국적으로 경찰관서 습격이 239건 발생했고, 경찰 53명, 무장대 144명, 비무장대 28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때까지 제주에선 단 한 건도 경찰지서 습격사건이 없었습니다.

5·10선거 갈등이 극에 달했던 1948년 5월 7일에서 11일까지 전국 선거 관련 소요 현황에 대한 미군정 정보 보고서를 봐도, 경찰지서나 투표함 습격, 전화선 절단, 방화 등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5·10선거에 반대하며 경찰지서를 습격한 사건이 제주에서만 일어난 돌출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유독 인명 피해는 제주에서 가장 컸던 겁니다.

[김종민/전 국무총리실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 :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한 말이 제주도의 사건에 남한 주민들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이런 표현을 써요. 그러니까 제주도를 강경진압을 빨리 해서 남한 주민들을 겁박하기 위한 그런 목적도 있었다고 보는 거죠. 하나의 본보기로써."]

이 같은 군과 경찰의 계속된 강경진압 속에 제주는 5·10선거를 거부한 남한의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았고 오랜 시간 핍박을 견뎌야 했습니다.

KBS 뉴스 강정훈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제주-주요뉴스

더보기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