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레 끄느라 하루 4만보’…택배노동자 “아파트 입구까지만 배송”

입력 2021.04.08 (15:56) 수정 2021.04.0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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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의 5천 세대 초대형 단지 아파트에 택배 상자 수천 개가 아파트 입구에 쌓이게 된 사연, 지난주 전해드렸습니다.

닷새 뒤 이 아파트를 다시 찾았을 때 더는 아파트 입구엔 택배 상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손수레에 택배를 가득 담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택배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관기사] 아파트 입구에 택배 상자 수천 개 쌓인 이유는? (2021.4.2)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53869


[연관기사] “택배차는 지하로만”…출입 막히자 손수레 끄는 택배 노동자들(2021.4.6)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56567


오늘(8일) 오전 택배 노동자들은 이 아파트 정문에 모였습니다. 물건이 적게 실리는 작은 차로 바꾸거나, 손수레를 끄는 일을 더는 하지 않기로 한 겁니다. 택배 노동자들은 이 아파트를 '배송 불가 지역'으로 지정하고, 택배는 입구까지만 배송하기로 했습니다.


■ "손수레 끌며 언덕 넘어" 실태조사 해보니…

아파트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국택배노동조합은 택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아파트처럼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금지한 아파트가 얼마나 더 있는지 조사했더니, 수도권과 부산, 대구 등 전국 179곳 아파트에서 비슷한 갈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설문에 응한 택배 노동자 중 일부는 "눈 오는 날 손수레로 언덕을 넘어 배송을 하다 미끄러져 다친 적이 있다"며 "비 오는 날엔 손수레에 실린 물건이 젖어 컴플레인(항의)이 들어온 적도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손수레 배송'을 한다고 밝힌 택배 노동자들은 근무 시간이 평균 세 배 정도 더 긴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오늘(8일) 오전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앞에서 열린 전국택배노동조합 기자회견오늘(8일) 오전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앞에서 열린 전국택배노동조합 기자회견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진일 한진택배 노동자는 "이 아파트로 배송을 오는 동료가 요즘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하루 4만 보 이상 걷는다고 호소했다"며 "이사차, 가구차, 생수 배달차, 재활용 쓰레기차가 모두 지상으로 다니고 있는데 왜 택배 차량만 이곳에 들어갈 수 없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아파트 측은 안전상의 이유로 여전히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택배 차량을 막고 있습니다. 지상 공원형 아파트로 지어진 만큼, 아파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많고 곳곳에 배치된 시설물들이 손상될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택배 기사가 작은 차를 이용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 배송하라는 게 아파트 측의 요구입니다.


■ 작은 차 쓰라지만…"기어서 작업, 노동강도 3배"

택배 노동자들이 쓰는 배송 차량은 대부분 높이가 2.5m입니다. 강동구 아파트 지하주차장 출입구 높이는 2.3m라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과거 다산 신도시에서 비슷한 문제가 불거지자 공원형 아파트 지하주차장 높이를 2.7m로 상향하도록 법이 바뀌었지만, 이 아파트는 법 개정 이전에 승인을 받아 놓은 겁니다.

아파트 측이 요구하는 대로 작은 차, 즉 저상 차량으로 바꾸면 주차장 출입이 가능하지만 차량 교체나 화물칸 개조 비용은 택배 노동자 개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택배 기사는 "이 아파트에 들어오기 위해 결국 화물칸을 개조했다"며 "개조비용으로 3백만 원을 써서 이번 달은 적자"라고 말했습니다.

뒤쪽의 탑차와 달리 앞쪽의 저상차량은 택배 기사가 몸을 숙이거나 기어서 작업을 해야 한다.뒤쪽의 탑차와 달리 앞쪽의 저상차량은 택배 기사가 몸을 숙이거나 기어서 작업을 해야 한다.

비용만 문제인 게 아닙니다. 높이가 2.5m인 탑차의 화물실 높이는 1.8m지만, 저상차량은 1.2m정도입니다.

탑차 화물실에선 허리를 펴고 작업할 수 있지만, 저상차량 화물실에선 허리를 숙이거나 기어 다녀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무거운 물건을 계속 옮기다보니 신체에 무리가 가서 육체적인 부담도 더 커지는 겁니다.

차량에 실을 수 있는 물량이 적어 택배 물류센터로 수차례 다시 가서 물건을 실어오다보니 높은 탑차를 쓸 때보다 작업 시간도 배로 걸립니다. 유성욱 택배노조 CJ대한통운본부 본부장은 "저상차량' 이용 요구는 실질적인 대안이 아니며 택배노동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하는 일방적인 갑질"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택배 노동자들은 오는 14일부터 갑질 논란이 불거진 강동구 아파트에 한해 택배를 아파트 입구까지만 배송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아파트 측과 택배 노동자들이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면, 아파트 입구에 택배상자 수천 개가 쌓이는 상황이 또 다시 반복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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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수레 끄느라 하루 4만보’…택배노동자 “아파트 입구까지만 배송”
    • 입력 2021-04-08 15:56:08
    • 수정2021-04-08 17:38:34
    취재K

서울 강동구의 5천 세대 초대형 단지 아파트에 택배 상자 수천 개가 아파트 입구에 쌓이게 된 사연, 지난주 전해드렸습니다.

닷새 뒤 이 아파트를 다시 찾았을 때 더는 아파트 입구엔 택배 상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손수레에 택배를 가득 담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택배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관기사] 아파트 입구에 택배 상자 수천 개 쌓인 이유는? (2021.4.2)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53869


[연관기사] “택배차는 지하로만”…출입 막히자 손수레 끄는 택배 노동자들(2021.4.6)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56567


오늘(8일) 오전 택배 노동자들은 이 아파트 정문에 모였습니다. 물건이 적게 실리는 작은 차로 바꾸거나, 손수레를 끄는 일을 더는 하지 않기로 한 겁니다. 택배 노동자들은 이 아파트를 '배송 불가 지역'으로 지정하고, 택배는 입구까지만 배송하기로 했습니다.


■ "손수레 끌며 언덕 넘어" 실태조사 해보니…

아파트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국택배노동조합은 택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아파트처럼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금지한 아파트가 얼마나 더 있는지 조사했더니, 수도권과 부산, 대구 등 전국 179곳 아파트에서 비슷한 갈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설문에 응한 택배 노동자 중 일부는 "눈 오는 날 손수레로 언덕을 넘어 배송을 하다 미끄러져 다친 적이 있다"며 "비 오는 날엔 손수레에 실린 물건이 젖어 컴플레인(항의)이 들어온 적도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손수레 배송'을 한다고 밝힌 택배 노동자들은 근무 시간이 평균 세 배 정도 더 긴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오늘(8일) 오전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앞에서 열린 전국택배노동조합 기자회견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진일 한진택배 노동자는 "이 아파트로 배송을 오는 동료가 요즘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하루 4만 보 이상 걷는다고 호소했다"며 "이사차, 가구차, 생수 배달차, 재활용 쓰레기차가 모두 지상으로 다니고 있는데 왜 택배 차량만 이곳에 들어갈 수 없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아파트 측은 안전상의 이유로 여전히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택배 차량을 막고 있습니다. 지상 공원형 아파트로 지어진 만큼, 아파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많고 곳곳에 배치된 시설물들이 손상될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택배 기사가 작은 차를 이용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 배송하라는 게 아파트 측의 요구입니다.


■ 작은 차 쓰라지만…"기어서 작업, 노동강도 3배"

택배 노동자들이 쓰는 배송 차량은 대부분 높이가 2.5m입니다. 강동구 아파트 지하주차장 출입구 높이는 2.3m라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과거 다산 신도시에서 비슷한 문제가 불거지자 공원형 아파트 지하주차장 높이를 2.7m로 상향하도록 법이 바뀌었지만, 이 아파트는 법 개정 이전에 승인을 받아 놓은 겁니다.

아파트 측이 요구하는 대로 작은 차, 즉 저상 차량으로 바꾸면 주차장 출입이 가능하지만 차량 교체나 화물칸 개조 비용은 택배 노동자 개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택배 기사는 "이 아파트에 들어오기 위해 결국 화물칸을 개조했다"며 "개조비용으로 3백만 원을 써서 이번 달은 적자"라고 말했습니다.

뒤쪽의 탑차와 달리 앞쪽의 저상차량은 택배 기사가 몸을 숙이거나 기어서 작업을 해야 한다.
비용만 문제인 게 아닙니다. 높이가 2.5m인 탑차의 화물실 높이는 1.8m지만, 저상차량은 1.2m정도입니다.

탑차 화물실에선 허리를 펴고 작업할 수 있지만, 저상차량 화물실에선 허리를 숙이거나 기어 다녀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무거운 물건을 계속 옮기다보니 신체에 무리가 가서 육체적인 부담도 더 커지는 겁니다.

차량에 실을 수 있는 물량이 적어 택배 물류센터로 수차례 다시 가서 물건을 실어오다보니 높은 탑차를 쓸 때보다 작업 시간도 배로 걸립니다. 유성욱 택배노조 CJ대한통운본부 본부장은 "저상차량' 이용 요구는 실질적인 대안이 아니며 택배노동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하는 일방적인 갑질"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택배 노동자들은 오는 14일부터 갑질 논란이 불거진 강동구 아파트에 한해 택배를 아파트 입구까지만 배송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아파트 측과 택배 노동자들이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면, 아파트 입구에 택배상자 수천 개가 쌓이는 상황이 또 다시 반복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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