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에게 ‘문건 특정하라’는 국정원…박지원의 ‘다짐’ 어디로?

입력 2021.04.25 (08:1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국정원의 어두운 과거로 피해를 입은 여러분께 사죄하는 마음으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정보공개 청구에 적극 협력하겠다."

- 지난해 12월 16일, 박지원 국정원장 브리핑 中 -

지난해 12월, 박지원 국정원장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권력기관 개혁 관련 브리핑에서 민간인 사찰 등에 대한 진상규명에 끝까지 협력하고, 피해자들의 정보공개 청구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박지원 국정원장의 발언은 국정원이 사찰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시민단체가 이 확정판결을 얻기까지는 3년이 걸렸습니다. 이후 불법 사찰 피해자들은 잇따라 국정원에 정보공개를 청구했습니다.

박지원 원장의 말은 잘 지켜졌을까요?

시민단체 ‘내놔라 내파일’이 정보공개 청구로 받은 국정원 문건. 40여 쪽이 백지 상태다.시민단체 ‘내놔라 내파일’이 정보공개 청구로 받은 국정원 문건. 40여 쪽이 백지 상태다.

■ 주요 내용은 빈칸 처리…백지 상태로 온 문건

시민단체 '내놔라 내파일'은 이명박 정부 당시 4대강 사업 반대 활동을 했던 조명래 전 환경부 장관과 황평우 전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을 대리해 지난 2월 21일 국정원에 사찰 자료 정보공개 청구를 했습니다.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공공기관은 정보공개 청구를 받은 날로부터 (평일 기준) 최대 20일 이내에 공개 여부를 결정해 통지하도록 돼 있습니다. 하지만 국정원은 약 2달이 지난 이달 16일이 되어서야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비공개 처리된 '부분 공개' 결정이었습니다.

조 전 장관의 경우 정보공개 청구를 했던 30개 항목 중에 6개 항목에 해당하는 문건 10건을, 황 전 위원장의 경우 42개 항목 중에 6개 항목에 해당하는 문건 38건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정보공개를 요청했던 문건 대부분은 사생활 또는 영업상 비밀 보호를 이유로 비공개 처리됐고, 특히 문서 내용과 제목 등이 특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보가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받은 문건 곳곳은 지워져 있었고, 황 전 위원장이 받은 문건 210쪽 가운데 40여 쪽은 아예 백지 상태였습니다. 문건을 받아 본 피해자들은 조각조각 나뉜 정보를 통해 사찰 내용을 유추하거나 추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3년 8개월간 소송 끝에 받은 베트남 학살 관련 한 장짜리 옛 중앙정보부 문건‘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3년 8개월간 소송 끝에 받은 베트남 학살 관련 한 장짜리 옛 중앙정보부 문건

■ 3년 8개월 소송 끝에 돌아온 결과는 '15글자'

지난 9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15글자만 적힌 한 장짜리 베트남 학살 조사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1968년 베트남 퐁니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이듬해 한국 파병 부대원들을 조사한 서류의 '목록' 일부입니다.


군인 3명의 이름과 지역, 이 15글자를 받기 위해 3년 8개월간 5번의 소송을 거쳐야 했습니다.

국정원은 처음에는 '외교관계에 관한 사항'이라는 이유로 정보공개 청구를 기각했고, 이에 소송을 제기한 민변이 승소하자 개인정보가 있다는 이유로 재차 공개를 거부했다가 패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피조사자들의 생년월일 등 개인정보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 공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국정원은 50여 년 전 작성한 문서 공개조차 폐쇄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청구 대상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비공개 결정을 내린 국정원‘청구 대상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비공개 결정을 내린 국정원

■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데... 국정원 "문서 특정해라"

국정원은 문서 제목 등이 특정되는 정보만 공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국정원에서 어떤 제목으로 비공개 사찰 문건을 작성했는지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문서 제목을 어떻게 특정해서 정보공개 청구를 하라는 것이냐 하는 항변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정보공개 청구를 하려면 문서 제목을 알아야 한다고 하니 취재진이 직접 제목을 알려달라고 정보공개 청구를 해봤습니다.

지난달 취재진은 박형준 부산시장이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홍보기획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홍보기획관 요청사항'으로 작성된 2건의 4대강 사찰 문건(18쪽)을 단독 보도한 바 있습니다. 또 문건을 그대로 인터넷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 '4대강 사찰' 박형준 후보 연루 국정원 문건 공개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36590 )

KBS 취재진은 국정원에 2008년 7월 1일부터 2009년 8월 31일까지 '청와대 홍보기획관 요청사항'으로 생산한 문건 제목들을 알려달라고 정보공개 청구했습니다. 원문 전체가 아닌 '제목'만 알려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청구 대상 정보를 보다 구체적으로 특정·보완하라"였습니다.

제목만이라도 알기 위해 정보공개 청구했는데, 제목부터 특정하라는 답변이 돌아온 겁니다. 국정원에서 무슨 내용으로 사찰이 이뤄졌는지도 모르는데 사찰 문건을 보려면 제목을 대야 하고, 문서 제목도 알아서 찾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 "국정원 감찰 결과 보고서 공개하겠다"더니..감감 무소식

국정원이 정보를 공개하기로 하고 이를 지키지 않은 적은 또 있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활동을 종료하면서 △간첩증거 조작사건 수사방해, △4대강 사업 민간인 사찰, △노조파괴 공작 관여 등 7가지 의혹에 대해 감찰하도록 했습니다. 국정원은 감찰실에서 조사를 마치는 대로 결과를 공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감찰 결과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왜 여태 공개하지 않느냐는 취재진의 질의에 국정원은 "감찰결과를 2018년 3~5월 정보위원장과 여야 위원들에게 보고했고, 전체 위원들이 열람하도록 정보위에 비치한 바 있다"며, "다만 감찰 결과 중 당시 검찰 수사 중인 사안이 있어 수사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음을 감안해 관련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정보공개 청구에 적극 협력하겠다"던 박지원 국정원장의 말은 지금까지 결과로 봤을 때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국정원은 여전히 정보공개에 방어적, 폐쇄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국정원을 상대로 한 정보공개 청구는 계속될 것입니다. '내놔라 내파일'은 26일, 정보공개 청구로 받은 국정원 사찰 관련 추가 문건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피해자에게 ‘문건 특정하라’는 국정원…박지원의 ‘다짐’ 어디로?
    • 입력 2021-04-25 08:11:45
    취재K

"국정원의 어두운 과거로 피해를 입은 여러분께 사죄하는 마음으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정보공개 청구에 적극 협력하겠다."

- 지난해 12월 16일, 박지원 국정원장 브리핑 中 -

지난해 12월, 박지원 국정원장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권력기관 개혁 관련 브리핑에서 민간인 사찰 등에 대한 진상규명에 끝까지 협력하고, 피해자들의 정보공개 청구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박지원 국정원장의 발언은 국정원이 사찰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시민단체가 이 확정판결을 얻기까지는 3년이 걸렸습니다. 이후 불법 사찰 피해자들은 잇따라 국정원에 정보공개를 청구했습니다.

박지원 원장의 말은 잘 지켜졌을까요?

시민단체 ‘내놔라 내파일’이 정보공개 청구로 받은 국정원 문건. 40여 쪽이 백지 상태다.
■ 주요 내용은 빈칸 처리…백지 상태로 온 문건

시민단체 '내놔라 내파일'은 이명박 정부 당시 4대강 사업 반대 활동을 했던 조명래 전 환경부 장관과 황평우 전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을 대리해 지난 2월 21일 국정원에 사찰 자료 정보공개 청구를 했습니다.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공공기관은 정보공개 청구를 받은 날로부터 (평일 기준) 최대 20일 이내에 공개 여부를 결정해 통지하도록 돼 있습니다. 하지만 국정원은 약 2달이 지난 이달 16일이 되어서야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비공개 처리된 '부분 공개' 결정이었습니다.

조 전 장관의 경우 정보공개 청구를 했던 30개 항목 중에 6개 항목에 해당하는 문건 10건을, 황 전 위원장의 경우 42개 항목 중에 6개 항목에 해당하는 문건 38건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정보공개를 요청했던 문건 대부분은 사생활 또는 영업상 비밀 보호를 이유로 비공개 처리됐고, 특히 문서 내용과 제목 등이 특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보가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받은 문건 곳곳은 지워져 있었고, 황 전 위원장이 받은 문건 210쪽 가운데 40여 쪽은 아예 백지 상태였습니다. 문건을 받아 본 피해자들은 조각조각 나뉜 정보를 통해 사찰 내용을 유추하거나 추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3년 8개월간 소송 끝에 받은 베트남 학살 관련 한 장짜리 옛 중앙정보부 문건
■ 3년 8개월 소송 끝에 돌아온 결과는 '15글자'

지난 9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15글자만 적힌 한 장짜리 베트남 학살 조사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1968년 베트남 퐁니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이듬해 한국 파병 부대원들을 조사한 서류의 '목록' 일부입니다.


군인 3명의 이름과 지역, 이 15글자를 받기 위해 3년 8개월간 5번의 소송을 거쳐야 했습니다.

국정원은 처음에는 '외교관계에 관한 사항'이라는 이유로 정보공개 청구를 기각했고, 이에 소송을 제기한 민변이 승소하자 개인정보가 있다는 이유로 재차 공개를 거부했다가 패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피조사자들의 생년월일 등 개인정보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 공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국정원은 50여 년 전 작성한 문서 공개조차 폐쇄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청구 대상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비공개 결정을 내린 국정원
■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데... 국정원 "문서 특정해라"

국정원은 문서 제목 등이 특정되는 정보만 공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국정원에서 어떤 제목으로 비공개 사찰 문건을 작성했는지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문서 제목을 어떻게 특정해서 정보공개 청구를 하라는 것이냐 하는 항변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정보공개 청구를 하려면 문서 제목을 알아야 한다고 하니 취재진이 직접 제목을 알려달라고 정보공개 청구를 해봤습니다.

지난달 취재진은 박형준 부산시장이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홍보기획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홍보기획관 요청사항'으로 작성된 2건의 4대강 사찰 문건(18쪽)을 단독 보도한 바 있습니다. 또 문건을 그대로 인터넷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 '4대강 사찰' 박형준 후보 연루 국정원 문건 공개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36590 )

KBS 취재진은 국정원에 2008년 7월 1일부터 2009년 8월 31일까지 '청와대 홍보기획관 요청사항'으로 생산한 문건 제목들을 알려달라고 정보공개 청구했습니다. 원문 전체가 아닌 '제목'만 알려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청구 대상 정보를 보다 구체적으로 특정·보완하라"였습니다.

제목만이라도 알기 위해 정보공개 청구했는데, 제목부터 특정하라는 답변이 돌아온 겁니다. 국정원에서 무슨 내용으로 사찰이 이뤄졌는지도 모르는데 사찰 문건을 보려면 제목을 대야 하고, 문서 제목도 알아서 찾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 "국정원 감찰 결과 보고서 공개하겠다"더니..감감 무소식

국정원이 정보를 공개하기로 하고 이를 지키지 않은 적은 또 있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활동을 종료하면서 △간첩증거 조작사건 수사방해, △4대강 사업 민간인 사찰, △노조파괴 공작 관여 등 7가지 의혹에 대해 감찰하도록 했습니다. 국정원은 감찰실에서 조사를 마치는 대로 결과를 공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감찰 결과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왜 여태 공개하지 않느냐는 취재진의 질의에 국정원은 "감찰결과를 2018년 3~5월 정보위원장과 여야 위원들에게 보고했고, 전체 위원들이 열람하도록 정보위에 비치한 바 있다"며, "다만 감찰 결과 중 당시 검찰 수사 중인 사안이 있어 수사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음을 감안해 관련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정보공개 청구에 적극 협력하겠다"던 박지원 국정원장의 말은 지금까지 결과로 봤을 때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국정원은 여전히 정보공개에 방어적, 폐쇄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국정원을 상대로 한 정보공개 청구는 계속될 것입니다. '내놔라 내파일'은 26일, 정보공개 청구로 받은 국정원 사찰 관련 추가 문건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