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사기공식]③ ‘일단’과 ‘혹시’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입력 2021.07.08 (08:00) 수정 2021.07.08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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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사기범이 피해자들을 어떻게 속이는지 알아보기 위해 KBS가 그들의 말을 분석했습니다. 금융감독원 홈페이지 ‘보이스피싱 지킴이’에 올라와 있는 대화 5백여 건, 120만 자를 모두 확인했습니다.

지난 기사에서는 사기범들이 즐겨 쓰는 단어를 명사 기준으로 알아봤는데요, 이번에는 사기범들이 대화의 의중을 전달하고 맥락을 강조하는 수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피해자들을 혹하게 하는 특정한 부사들이 있었습니다. 부사는 동사나 형용사, 문장을 꾸미는 품사인데요.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고 싶을 때 주로 쓰입니다. 어떤 말들에 피해자들이 속게 되는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대화 장벽 낮추는 ‘일단’...피해자 흔드는 ‘혹시’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의 대화에서 부사는 387개, 모두 2만 5,432번 등장했습니다. 사기범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부사 10개를 순위별로 나열해봤습니다. 이 가운데 두 가지 부사가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일단’과 ‘혹시’였는데요. 해당 부사들은 일반인보다 사기범들이 더 자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KBS는 보이스피싱범이 가장 많이 언급했던 부사들을 일반인이 자주 사용하는지 알아봤습니다.

일반인의 대화 어휘는 국립국어원의 어휘 의미 말뭉치 구어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해당 자료에서는 부사 1,730개가 모두 13만 7,595번 등장했습니다. 이 가운데 사기범들이 자주 사용한 부사들을 추려 특정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따져보는 ‘오즈비(Odds Ratio)’ 값을 측정했습니다. 해당 부사가 각 대화에서 같은 비율로 쓰였다면 오즈비 값이 1이 되고, 사기범이 더 자주 사용했다면 1보다 큽니다.

일단 지금 메모 가능 하십니까 고객님? 3천만 원에 9.7%, 20개월로 일단 서류 심사 나오셨어요.”
“지금 녹취 조사 되고 있으니까 일단 질문에 답변을 해주세요.”
“네, 지금 일단 심사결과는 나오셨는데요.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은 ‘일단’을 자주 썼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일단’의 뜻에 대해 ‘우선 먼저’, ‘우선 잠깐’, ‘만일에 한번’ 등의 의미로 풀이했는데요. 사기범들도 피해자에게 접근할 때 깊이 생각하지 말고 먼저 해보라는 의미로 ‘일단’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기범 대화에 나온 전체 부사들 가운데 1,300여 회 등장해 등장 횟수로는 3위였는데 오즈비 값은 11.9로 1위인 ‘지금’보다도 월등히 높았습니다. ‘지금’은 일반인들도 많이 사용하지만 ‘일단’은 사기범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부사라는 뜻입니다.

‘뭔가 또 다른 일이 있을 테니 이것 먼저 해두자’는 식으로 말할 때도 ‘일단’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실제 사기범의 대화를 보면 “지금 전화 상태는 끊으시면 안 되고 일단 검사님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실 거예요”라며 전화를 끊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출 사기에서도 “일단 본인의 진술이 필요한데 현재 사용하고 계시는 은행권이 있으면 상호 명을 진술해주시면 됩니다”처럼 짧게 끝날 수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당장 진술은 필요하다는 식으로 덫을 놓기도 했습니다.

혹시라도 은행에서 뭐 이 분이 어떤 관계냐 물어 보면 그냥 오빠, 친오빠라고 얘기하시고.”
“자, 본인께서 혹시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 운영하였던 만 35세 남성인 김OO이란 사람 아시는 겁니까?”
혹시라도 겁이 나서 은폐 또는 은닉을 하실 시에는 형법 155조 1-1항 증거인멸죄, 형법 152조 위증죄, 형법 132조 1항 공무집행방해죄가 추가된다는 점 명시를 해드리고.”

표준국어대사전은 ‘혹시’를 ‘그러할 리는 없지만 만일에’라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이 단어의 오즈비 값은 17.3으로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자주 사용한 부사들 10개 가운데서도 가장 높았습니다. 사기범들이 일반인보다 유독 자주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기관사칭 보이스피싱의 경우 ‘혹시’라는 단어를 이용해 피해자에게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혹시’는 어떤 가능성이나 여지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가 평정심을 잃도록 하는 데에도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전혀’와 ‘현재’도 사기범들이 많이 사용한 단어입니다.

‘전혀’는 기관사칭 보이스피싱 사기범이 피해자에게 “대포 통장에 대해 전혀 모르고 계셨어요”라고 다그칠 때, 그리고 대출사기범이 “일단 고객님께 손해 가시는 거 전혀 없으세요”라고 피해자를 안심시킬 때 등장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현재’도 많이 사용됐는데요. 사기범은 “현재 범죄 연루된 개인정보 유출 건으로 연락했다” 또는 “현재 정상 승인은 아니고, 좀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 조건부 승인으로 나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사기범은 피해자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고 통화 결과에 따라 피해자의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암시하는 대화에서 ‘현재’가 사용됐습니다.

■ 방어막 ‘해제’ 노리는 사기범들... ‘일단’ 전화를 끊어야 하는 이유는?

이에 대해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조심성 있는 사람들도 사기범의 첫 번째의 요구에 승낙을 하고 그 지시에 따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사기범의 또 다른 요구도 큰 의심 없이 응할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범죄학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을 문턱 효과(threshold effect)라고 표현하는데요. 사기범이 피해자가 설정해 놓은 첫 번째 방어막(문턱), 즉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되는 전화가 오면 아무 대응을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한번 뛰어넘기만 하면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기범의 ‘일단 한번 해보시라’는 말이 속임수의 시작인 셈입니다.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전화를 걸어 ‘혹시 이렇지 않냐, 저렇지 않냐’고 물어보고 유혹을 해도 처음부터 흔들려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금감원이나 경찰 등도 보이스피싱으로 의심이 되면 바로 전화를 끊으라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기범들은 ‘일단’ 전화를 받으라고 유혹을 하고 있지만 의심되는 전화를 받게 되면 ’일단‘ 전화를 끊는 게 가장 현명한 대처법인 셈입니다.

이처럼 사기범들은 수사기관과 은행에서 사용하는 각종 명사뿐 아니라, ‘일단’이나 ‘혹시’와 같은 특정 부사를 자주 활용해 전화 통화를 길게 이어가고 피해자들을 현혹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사기범들의 대화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문장들을 집중 분석해 보도하겠습니다.
이미지 클릭(일부 포털사이트 제한), 또는 링크 주소(https://news.kbs.co.kr/special/voicephishing/index.html)를 주소창에 입력하면, 인터랙티브 ‘사기범 대화 120만 자 분석, 그들의 사기공식’ 페이지로 이동합니다.이미지 클릭(일부 포털사이트 제한), 또는 링크 주소(https://news.kbs.co.kr/special/voicephishing/index.html)를 주소창에 입력하면, 인터랙티브 ‘사기범 대화 120만 자 분석, 그들의 사기공식’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보이스피싱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KBS 1TV 시사기획 창 <그들의 사기공식> 유튜브를 통해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e-cs_noV2xA

데이터 수집·분석: 윤지희,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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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의 사기공식]③ ‘일단’과 ‘혹시’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 입력 2021-07-08 08:00:36
    • 수정2021-07-08 08: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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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사기범이 피해자들을 어떻게 속이는지 알아보기 위해 KBS가 그들의 말을 분석했습니다. 금융감독원 홈페이지 ‘보이스피싱 지킴이’에 올라와 있는 대화 5백여 건, 120만 자를 모두 확인했습니다.

지난 기사에서는 사기범들이 즐겨 쓰는 단어를 명사 기준으로 알아봤는데요, 이번에는 사기범들이 대화의 의중을 전달하고 맥락을 강조하는 수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피해자들을 혹하게 하는 특정한 부사들이 있었습니다. 부사는 동사나 형용사, 문장을 꾸미는 품사인데요.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고 싶을 때 주로 쓰입니다. 어떤 말들에 피해자들이 속게 되는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대화 장벽 낮추는 ‘일단’...피해자 흔드는 ‘혹시’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의 대화에서 부사는 387개, 모두 2만 5,432번 등장했습니다. 사기범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부사 10개를 순위별로 나열해봤습니다. 이 가운데 두 가지 부사가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일단’과 ‘혹시’였는데요. 해당 부사들은 일반인보다 사기범들이 더 자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KBS는 보이스피싱범이 가장 많이 언급했던 부사들을 일반인이 자주 사용하는지 알아봤습니다.

일반인의 대화 어휘는 국립국어원의 어휘 의미 말뭉치 구어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해당 자료에서는 부사 1,730개가 모두 13만 7,595번 등장했습니다. 이 가운데 사기범들이 자주 사용한 부사들을 추려 특정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따져보는 ‘오즈비(Odds Ratio)’ 값을 측정했습니다. 해당 부사가 각 대화에서 같은 비율로 쓰였다면 오즈비 값이 1이 되고, 사기범이 더 자주 사용했다면 1보다 큽니다.

일단 지금 메모 가능 하십니까 고객님? 3천만 원에 9.7%, 20개월로 일단 서류 심사 나오셨어요.”
“지금 녹취 조사 되고 있으니까 일단 질문에 답변을 해주세요.”
“네, 지금 일단 심사결과는 나오셨는데요.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은 ‘일단’을 자주 썼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일단’의 뜻에 대해 ‘우선 먼저’, ‘우선 잠깐’, ‘만일에 한번’ 등의 의미로 풀이했는데요. 사기범들도 피해자에게 접근할 때 깊이 생각하지 말고 먼저 해보라는 의미로 ‘일단’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기범 대화에 나온 전체 부사들 가운데 1,300여 회 등장해 등장 횟수로는 3위였는데 오즈비 값은 11.9로 1위인 ‘지금’보다도 월등히 높았습니다. ‘지금’은 일반인들도 많이 사용하지만 ‘일단’은 사기범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부사라는 뜻입니다.

‘뭔가 또 다른 일이 있을 테니 이것 먼저 해두자’는 식으로 말할 때도 ‘일단’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실제 사기범의 대화를 보면 “지금 전화 상태는 끊으시면 안 되고 일단 검사님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실 거예요”라며 전화를 끊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출 사기에서도 “일단 본인의 진술이 필요한데 현재 사용하고 계시는 은행권이 있으면 상호 명을 진술해주시면 됩니다”처럼 짧게 끝날 수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당장 진술은 필요하다는 식으로 덫을 놓기도 했습니다.

혹시라도 은행에서 뭐 이 분이 어떤 관계냐 물어 보면 그냥 오빠, 친오빠라고 얘기하시고.”
“자, 본인께서 혹시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 운영하였던 만 35세 남성인 김OO이란 사람 아시는 겁니까?”
혹시라도 겁이 나서 은폐 또는 은닉을 하실 시에는 형법 155조 1-1항 증거인멸죄, 형법 152조 위증죄, 형법 132조 1항 공무집행방해죄가 추가된다는 점 명시를 해드리고.”

표준국어대사전은 ‘혹시’를 ‘그러할 리는 없지만 만일에’라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이 단어의 오즈비 값은 17.3으로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자주 사용한 부사들 10개 가운데서도 가장 높았습니다. 사기범들이 일반인보다 유독 자주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기관사칭 보이스피싱의 경우 ‘혹시’라는 단어를 이용해 피해자에게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혹시’는 어떤 가능성이나 여지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가 평정심을 잃도록 하는 데에도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전혀’와 ‘현재’도 사기범들이 많이 사용한 단어입니다.

‘전혀’는 기관사칭 보이스피싱 사기범이 피해자에게 “대포 통장에 대해 전혀 모르고 계셨어요”라고 다그칠 때, 그리고 대출사기범이 “일단 고객님께 손해 가시는 거 전혀 없으세요”라고 피해자를 안심시킬 때 등장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현재’도 많이 사용됐는데요. 사기범은 “현재 범죄 연루된 개인정보 유출 건으로 연락했다” 또는 “현재 정상 승인은 아니고, 좀 죄송한 말씀이지만 지금 조건부 승인으로 나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사기범은 피해자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고 통화 결과에 따라 피해자의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암시하는 대화에서 ‘현재’가 사용됐습니다.

■ 방어막 ‘해제’ 노리는 사기범들... ‘일단’ 전화를 끊어야 하는 이유는?

이에 대해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조심성 있는 사람들도 사기범의 첫 번째의 요구에 승낙을 하고 그 지시에 따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사기범의 또 다른 요구도 큰 의심 없이 응할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범죄학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을 문턱 효과(threshold effect)라고 표현하는데요. 사기범이 피해자가 설정해 놓은 첫 번째 방어막(문턱), 즉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되는 전화가 오면 아무 대응을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한번 뛰어넘기만 하면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기범의 ‘일단 한번 해보시라’는 말이 속임수의 시작인 셈입니다.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전화를 걸어 ‘혹시 이렇지 않냐, 저렇지 않냐’고 물어보고 유혹을 해도 처음부터 흔들려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금감원이나 경찰 등도 보이스피싱으로 의심이 되면 바로 전화를 끊으라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기범들은 ‘일단’ 전화를 받으라고 유혹을 하고 있지만 의심되는 전화를 받게 되면 ’일단‘ 전화를 끊는 게 가장 현명한 대처법인 셈입니다.

이처럼 사기범들은 수사기관과 은행에서 사용하는 각종 명사뿐 아니라, ‘일단’이나 ‘혹시’와 같은 특정 부사를 자주 활용해 전화 통화를 길게 이어가고 피해자들을 현혹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사기범들의 대화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문장들을 집중 분석해 보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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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KBS 1TV 시사기획 창 <그들의 사기공식> 유튜브를 통해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e-cs_noV2xA

데이터 수집·분석: 윤지희,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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