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소설]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우리네 삶…서정인 ‘강’

입력 2022.02.14 (06:42) 수정 2022.02.14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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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우리 시대를 빛낸 소설 50편을 만나보는 시간, 어느덧 마지막 순서입니다.

그 대미를 장식할 작품은 서정인 작가가 196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강'입니다.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우리네 삶을 담아내 한국 단편 문학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정연욱 기자입니다.

[리포트]

1962년, 단편소설 '후송'을 시작으로 장장 60년 동안 소설을 써온 노작가.

87살이 된 지금도 낡은 책더미에 둘러싸인 '글 감옥'에 머물러 있지만, 그래도 마감에 쫓기던 젊은 시절보다는 한결 편해졌다고 말합니다.

[서정인/소설가 : "그때는 우체국에 가야 되거든요. 그러면 우체국에 막 쫓아가요, 마감 시간에. 그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쓰지, 좀 넉넉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렇게 안 돼요. 요즘에는 쓰라는 데가 없으니까 편해요."]

1968년에 발표한 단편 '강'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군하리'란 강변 마을로 향하는 평범한 세 남자의 여정으로 시작합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내리는 진눈깨비를 보고 군에 입대하던 날을 함께 회상하지만, 세 남자의 마음속에선 전혀 다른 생각이 교차합니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든,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들입니다.

[서정인/소설가 : "옛날에 서울 돈암동에 있는 학교에 근무하면서 실제로 갔습니다, 그때. 가서 보고 야 이 배경이 참 좋은데..."]

결혼식이 끝난 뒤.

늙은 대학생 김 씨는 여인숙에서 만난 소년이 반에서 1등을 했다고 자랑하자, 한때 수재였지만 지금은 낙오자가 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세상을 향해 냉소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감정.

소설은 이렇게 옛날이든 지금이든, 특별하든 평범하든, 언제나, 누구에게나, 잔잔한 강물처럼 흘러가는 대화와 생각들을 생생하게 재현해냅니다.

[서정인/소설가 : "나는 경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안 썼다. 전부 경험한 것을 썼단 얘기에요. 그러나 경험한대로는 한 줄도 안 썼다. 007이 살인면허를 갖고 있다는 데 소설가는 거짓말 면허를 갖고 있어요."]

초기에는 소시민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한 풍속화 같은 단편을 잇따라 발표한 작가는 주로 격동의 역사와 맞선 개인의 투쟁을 조명한 동시대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각인했습니다.

[신수정/문학평론가 :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는 것. 일반인 보통인들의 삶, 그 삶에 대한 인식이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 아니냐. 60년대의 옹색한 삶을 위안하고 위로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1980년대부터는 판소리와 소설을 접목한 파격적인 형식의 장편 '달궁'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천착했습니다.

[서정인/1994년 인터뷰 : "예술에서 모방이란 것은 아류거든요.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했더라도 다음번에는 또 깨뜨려야 됩니다. 저는 그런 노력의 일환이지..."]

소설이란 무엇이고, 소설가는 어떤 존재인가.

KBS의 연중기획 '우리 시대의 소설'이 9개월에 이르는 여정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 서정인 작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서정인/소설가 : "문학, 소설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모습을. 이게 엄청 어려워요. 시지프스 신화처럼. 밀고 올라갔다 또 떨어지고. 불가능해요 그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단 이야기에요."]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촬영기자:김용모 류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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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2-02-14 06: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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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를 빛낸 소설 50편을 만나보는 시간, 어느덧 마지막 순서입니다.

그 대미를 장식할 작품은 서정인 작가가 196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강'입니다.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우리네 삶을 담아내 한국 단편 문학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정연욱 기자입니다.

[리포트]

1962년, 단편소설 '후송'을 시작으로 장장 60년 동안 소설을 써온 노작가.

87살이 된 지금도 낡은 책더미에 둘러싸인 '글 감옥'에 머물러 있지만, 그래도 마감에 쫓기던 젊은 시절보다는 한결 편해졌다고 말합니다.

[서정인/소설가 : "그때는 우체국에 가야 되거든요. 그러면 우체국에 막 쫓아가요, 마감 시간에. 그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쓰지, 좀 넉넉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렇게 안 돼요. 요즘에는 쓰라는 데가 없으니까 편해요."]

1968년에 발표한 단편 '강'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군하리'란 강변 마을로 향하는 평범한 세 남자의 여정으로 시작합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내리는 진눈깨비를 보고 군에 입대하던 날을 함께 회상하지만, 세 남자의 마음속에선 전혀 다른 생각이 교차합니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든,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들입니다.

[서정인/소설가 : "옛날에 서울 돈암동에 있는 학교에 근무하면서 실제로 갔습니다, 그때. 가서 보고 야 이 배경이 참 좋은데..."]

결혼식이 끝난 뒤.

늙은 대학생 김 씨는 여인숙에서 만난 소년이 반에서 1등을 했다고 자랑하자, 한때 수재였지만 지금은 낙오자가 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세상을 향해 냉소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감정.

소설은 이렇게 옛날이든 지금이든, 특별하든 평범하든, 언제나, 누구에게나, 잔잔한 강물처럼 흘러가는 대화와 생각들을 생생하게 재현해냅니다.

[서정인/소설가 : "나는 경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안 썼다. 전부 경험한 것을 썼단 얘기에요. 그러나 경험한대로는 한 줄도 안 썼다. 007이 살인면허를 갖고 있다는 데 소설가는 거짓말 면허를 갖고 있어요."]

초기에는 소시민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한 풍속화 같은 단편을 잇따라 발표한 작가는 주로 격동의 역사와 맞선 개인의 투쟁을 조명한 동시대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각인했습니다.

[신수정/문학평론가 :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는 것. 일반인 보통인들의 삶, 그 삶에 대한 인식이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 아니냐. 60년대의 옹색한 삶을 위안하고 위로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1980년대부터는 판소리와 소설을 접목한 파격적인 형식의 장편 '달궁'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천착했습니다.

[서정인/1994년 인터뷰 : "예술에서 모방이란 것은 아류거든요.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했더라도 다음번에는 또 깨뜨려야 됩니다. 저는 그런 노력의 일환이지..."]

소설이란 무엇이고, 소설가는 어떤 존재인가.

KBS의 연중기획 '우리 시대의 소설'이 9개월에 이르는 여정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 서정인 작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서정인/소설가 : "문학, 소설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모습을. 이게 엄청 어려워요. 시지프스 신화처럼. 밀고 올라갔다 또 떨어지고. 불가능해요 그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단 이야기에요."]

KBS 뉴스 정연욱입니다.

촬영기자:김용모 류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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