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4천만 원 챙긴 ‘그놈’…‘깡통 전세’ 사기 못 막나

입력 2022.04.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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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A씨가 보관하고 있는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피해자 A씨가 보관하고 있는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 학군 좋은 아파트 ‘깡통 전세’ 계약한 A씨.

경남 사천에서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 3명을 키우고 있는 40대 A씨.

올해 초,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보다 학군이 더 좋은 인근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었습니다.

A씨는 공인중개사의 소개로 지난 2월, 인근에 학교가 많은 한 아파트의 집주인인 B씨와 전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아파트의 전세가는 1억 4천5백만 원으로, 매매가인 1억 5천만 원과 불과 5백만 원 차이가 나는 ‘깡통 전세’.

깡통 전세는 선순위채권과 전세보증금을 합한 금액이 매매가의 80%를 넘는 전세 형태를 말합니다.

A씨는 공인중개사를 통해 계약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별다른 의심 없이 전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강원도 원주에 사는 집주인 B씨는 “자신의 사위가 경남 사천에 발령을 받아 이사 오려고 했지만, 발령 취소로 전세를 급하게 내놓게 됐다”라며 혼자 원주에서 사천으로 와 계약을 했습니다.

B씨가 부동산 컨설팅 실장이라는 남성으로부터 받은 문자.B씨가 부동산 컨설팅 실장이라는 남성으로부터 받은 문자.

■ 잔금 입금하자마자 알게 된 ‘전세 사기’

그런데 잔금을 치른 당일, 이사를 준비했던 A씨의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A씨는 잔금 1억여 원을 B씨의 계좌로 입금하고, 도배를 하기 위해 입주할 아파트를 방문했다가 이전 세입자와 마주쳤는데요.

이전 세입자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며 점유권을 행사하고 나서야 A씨는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당황한 A씨는 B씨에게 전화로 전세금이 왜 이전 세입자에게 입금되지 않았는지 따졌습니다.

B씨는 그제서야 “자신은 부동산 컨설팅 실장이라는 남성으로부터 자신의 장모 행세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매매와 전세 계약을 했을 뿐이다”라고 털어놓았는데요.

알고 보니, 무주택자인 B씨는 ‘아파트 시세 차익으로 돈을 벌어 배당금을 주겠다’라는 문자를 받고, 배당금을 받고 싶어서 이 남성에게 연락했던 겁니다.

B씨는 취재기자와의 통화에서 “남성이 아파트를 갭투자해 집값이 오르면, 되팔아서 번 돈을 나눠준다고 했다. 최대 5천만 원까지 줄 수 있다고 말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지 사장’ 집주인 B씨는 남성의 지시대로 아파트를 갭투자한 직후 깡통 전세 계약을 맺었다.‘바지 사장’ 집주인 B씨는 남성의 지시대로 아파트를 갭투자한 직후 깡통 전세 계약을 맺었다.

■ ‘바지 사장’ 집주인 내세워 계약…정체 알 수 없는 ‘그놈’

B씨는 이 남성의 지시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자신의 명으로 매매 계약을 맺었는데요.

아파트를 사들인 지 9일이 지나서 전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남성은 B씨가 두 번의 계약을 맺을 때 공인중개사와 전세 세입자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이 남성은 B씨의 계좌에 잔금이 입금된 당일, 서울에서 B씨로부터 전세금을 현금으로 건네받은 뒤 사라졌습니다.

‘바지 사장’인 가짜 집주인을 내세워 이전 세입자의 전세금 1억 4천만 원을 끼고 천만 원만 들여 아파트를 산 뒤 새로운 세입자를 받아 전세금을 가로챈 건데요.

애초에 전세금을 가로챌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파트가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가 크지 않은 ‘깡통전세’여서 전세 사기의 표적이 된 건데요.

이 사건을 접수한 경찰은 현재 전세금을 챙겨 달아난 이 남성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지 사장’ 집주인 B씨조차 정확히 이 남성이 누구인지 모르고, 공인중개사도 이 남성과 통화만 했기 때문에 남성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남성은 계약 체결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쉽게 알아낼 수 없도록 B씨의 휴대전화로만 공인중개사와 전화를 하고, 차량도 B씨가 렌터카 업체를 통해 빌리게 할 만큼 치밀하게 움직였습니다.

이 남성은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의 전세금을 받아 이전 세입자의 전세금을 돌려주는 관행의 허점을 노린 건데요.

애초 전세금이 이전 세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만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입니다.

피해자 A씨는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취재진과 만난 A씨는 ‘깡통전세’ 사기 행위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취재진과 만난 A씨는 ‘깡통전세’ 사기 행위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

■ 있으나 마나 한 ‘에스크로우 제도’

이런 부동산 거래 사고를 막기 위해 ‘에스크로우(Escrow) 제도’가 있는데요.

에스크로우 제도는 신뢰할 만한 중립적인 제3의 기관이 부동산 거래대금을 계약이 이행될 때까지 보관하는 계약이행 보증제도입니다.

이 사건에서 에스크로우 제도가 활용됐다면, 전세보증금을 보관하는 기관은 이 보증금을 임대인에게 주는 대신 이전 세입자에게 지급하거나 집주인이 이전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줘야만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전달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새로운 세입자의 전세금이 ‘바지 사장’ 집주인을 통해 누군지도 모르는 남성의 손으로 들어가지 않았을텐데요.

에스크로우 제도는 공인중개사법 제31조와 같은 법 시행령 제27조를 통해 활용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도 보장되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도 2016년, 부동산 거래 시 안전성을 제고 하기 위해 에스크로우 제도를 활성화하는 ‘부동산 안심거래 서비스 도입 방안’을 마련했는데요.

하지만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넘어도 홍보 부족과 높은 수수료 등으로 아직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수법의 전세 사기 피해자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에스크로우 제도 활성화가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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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억 4천만 원 챙긴 ‘그놈’…‘깡통 전세’ 사기 못 막나
    • 입력 2022-04-07 07:00:23
    취재K
피해자 A씨가 보관하고 있는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 학군 좋은 아파트 ‘깡통 전세’ 계약한 A씨.

경남 사천에서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 3명을 키우고 있는 40대 A씨.

올해 초,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보다 학군이 더 좋은 인근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었습니다.

A씨는 공인중개사의 소개로 지난 2월, 인근에 학교가 많은 한 아파트의 집주인인 B씨와 전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아파트의 전세가는 1억 4천5백만 원으로, 매매가인 1억 5천만 원과 불과 5백만 원 차이가 나는 ‘깡통 전세’.

깡통 전세는 선순위채권과 전세보증금을 합한 금액이 매매가의 80%를 넘는 전세 형태를 말합니다.

A씨는 공인중개사를 통해 계약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별다른 의심 없이 전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강원도 원주에 사는 집주인 B씨는 “자신의 사위가 경남 사천에 발령을 받아 이사 오려고 했지만, 발령 취소로 전세를 급하게 내놓게 됐다”라며 혼자 원주에서 사천으로 와 계약을 했습니다.

B씨가 부동산 컨설팅 실장이라는 남성으로부터 받은 문자.
■ 잔금 입금하자마자 알게 된 ‘전세 사기’

그런데 잔금을 치른 당일, 이사를 준비했던 A씨의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A씨는 잔금 1억여 원을 B씨의 계좌로 입금하고, 도배를 하기 위해 입주할 아파트를 방문했다가 이전 세입자와 마주쳤는데요.

이전 세입자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며 점유권을 행사하고 나서야 A씨는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당황한 A씨는 B씨에게 전화로 전세금이 왜 이전 세입자에게 입금되지 않았는지 따졌습니다.

B씨는 그제서야 “자신은 부동산 컨설팅 실장이라는 남성으로부터 자신의 장모 행세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매매와 전세 계약을 했을 뿐이다”라고 털어놓았는데요.

알고 보니, 무주택자인 B씨는 ‘아파트 시세 차익으로 돈을 벌어 배당금을 주겠다’라는 문자를 받고, 배당금을 받고 싶어서 이 남성에게 연락했던 겁니다.

B씨는 취재기자와의 통화에서 “남성이 아파트를 갭투자해 집값이 오르면, 되팔아서 번 돈을 나눠준다고 했다. 최대 5천만 원까지 줄 수 있다고 말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지 사장’ 집주인 B씨는 남성의 지시대로 아파트를 갭투자한 직후 깡통 전세 계약을 맺었다.
■ ‘바지 사장’ 집주인 내세워 계약…정체 알 수 없는 ‘그놈’

B씨는 이 남성의 지시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자신의 명으로 매매 계약을 맺었는데요.

아파트를 사들인 지 9일이 지나서 전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남성은 B씨가 두 번의 계약을 맺을 때 공인중개사와 전세 세입자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이 남성은 B씨의 계좌에 잔금이 입금된 당일, 서울에서 B씨로부터 전세금을 현금으로 건네받은 뒤 사라졌습니다.

‘바지 사장’인 가짜 집주인을 내세워 이전 세입자의 전세금 1억 4천만 원을 끼고 천만 원만 들여 아파트를 산 뒤 새로운 세입자를 받아 전세금을 가로챈 건데요.

애초에 전세금을 가로챌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파트가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가 크지 않은 ‘깡통전세’여서 전세 사기의 표적이 된 건데요.

이 사건을 접수한 경찰은 현재 전세금을 챙겨 달아난 이 남성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지 사장’ 집주인 B씨조차 정확히 이 남성이 누구인지 모르고, 공인중개사도 이 남성과 통화만 했기 때문에 남성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남성은 계약 체결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쉽게 알아낼 수 없도록 B씨의 휴대전화로만 공인중개사와 전화를 하고, 차량도 B씨가 렌터카 업체를 통해 빌리게 할 만큼 치밀하게 움직였습니다.

이 남성은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의 전세금을 받아 이전 세입자의 전세금을 돌려주는 관행의 허점을 노린 건데요.

애초 전세금이 이전 세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만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입니다.

피해자 A씨는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취재진과 만난 A씨는 ‘깡통전세’ 사기 행위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
■ 있으나 마나 한 ‘에스크로우 제도’

이런 부동산 거래 사고를 막기 위해 ‘에스크로우(Escrow) 제도’가 있는데요.

에스크로우 제도는 신뢰할 만한 중립적인 제3의 기관이 부동산 거래대금을 계약이 이행될 때까지 보관하는 계약이행 보증제도입니다.

이 사건에서 에스크로우 제도가 활용됐다면, 전세보증금을 보관하는 기관은 이 보증금을 임대인에게 주는 대신 이전 세입자에게 지급하거나 집주인이 이전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줘야만 집주인에게 전세금을 전달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새로운 세입자의 전세금이 ‘바지 사장’ 집주인을 통해 누군지도 모르는 남성의 손으로 들어가지 않았을텐데요.

에스크로우 제도는 공인중개사법 제31조와 같은 법 시행령 제27조를 통해 활용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도 보장되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도 2016년, 부동산 거래 시 안전성을 제고 하기 위해 에스크로우 제도를 활성화하는 ‘부동산 안심거래 서비스 도입 방안’을 마련했는데요.

하지만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넘어도 홍보 부족과 높은 수수료 등으로 아직까지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수법의 전세 사기 피해자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에스크로우 제도 활성화가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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