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건건이 만난 사람] ‘소금꽃’ 김진숙 “정규직과 비정규직 서로 적이 되며 연대정신 사라져”

입력 2022.06.10 (16:45) 수정 2022.06.1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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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지도위원)
1981년 대한조선공사 입사...'최초 여성 용접공'
노조 활동 이유로 1986년 해고 후 37년 만인 올해 2월 명예복직
"두들겨 맞지 않고 제 발로 회사 걸어들어가는 게 꿈이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 300일 넘게 크레인 투쟁 '희망버스' 노동자들 연대 힘 절감
과거 노동자 투쟁의 대상은 '군부독재' '악덕 재벌' 명확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서로 적이 되며 노동자 연대정신 사라져
사측 입장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 투쟁 무력화...역사적 비판 받아야

■ 방송시간 : 6월 10일(금) 16:00~17:00 KBS1
■ 진행 : 범기영 기자
■ 출연 : 이경호 KBS 해설위원


https://youtu.be/Tu4PG0t9a2M

◎범기영 금요일 사사건건은 현장으로 가죠? 사사건건이 만난 사람, 오늘은 소금꽃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의 지도위원 만나고 왔네요. 이경호 해설위원 만나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경호 안녕하세요?

◎범기영 복직 소식도 저희가 들었었고, 건강이 좀 안 좋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이경호 지금 여전히 암 투병 중이긴 한데요. 여전히 예전과 같이 차별금지법 제정 운영하는 시민단체를 도와준다거나 파리바게뜨 지회 노동자의 단식, 이런 걸 응원한다거나 예전과 같은 일상적인 투쟁 현장에 같이하고 있다고 합니다.

◎범기영 여전히 현장에 계시군요. 소개를 좀 해 주시죠, 혹시 모르는 분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이경호 김진숙 씨는 아시는 분은 아실 텐데요. 1981년 21살의 나이에 한진중공업 전신이죠? 대한조선공사의 용접공으로 입사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용접공인데요. 입사 이후에 민주노총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 측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해고 이후에 입사 당시 대한조선공사가 한진중공업으로 이미 바뀌었고요. 그 이후에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한진중공업이 지난해 HJ중공업으로 이름이 변경됐고요. 노사 화합 차원에서 복직에 동의를 해 주면서 37년 만에 해고 노동자에서 노동자 김진숙이 됐습니다.

◎범기영 37년 만에 해고자에서 노동자로. 소회가 어땠을까요?

제가 지난주죠? 지금은 HJ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뀐 구 한진중공업 공장이 바라다 보이는 부산항 여객터미널에서 직접 한번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좀 야위신 것 같네요, 전보다.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해고자 생활이 워낙 길었으니까. 그리고 또 제가 복직을 해서 일을 했으면 또 문제가 달라지는데 정년도 지난 복직이었고 그리고 제 건강상태나 이런 것들이 용접 일을 할 만큼의 체력이 안 되기 때문에 그날 복직했다가 그날 퇴직한 상태라 크게 일신상의 달라진 점은 없어요. 다만 이제 기분이 엄청 좋고 아침에 눈을 뜨면 스트레스가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복직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참 궁금했는데요. 끌려 나오지 않고서 스스로 걸어나오는 게 꿈이었다고 합니다.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회사 안에 한 발 들여놓는 게 불가능했었죠. 제 발로 들어갔다가 제 발로 걸어 나오는 일들, 그게 이제 한 사람의 소원이 될 만큼 간절한 일이었고 그런데 이제 (2월) 25일 복직행사를 하는 날, 저는 그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안 막히고, 안 두들겨 맞고 내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더라고요.

◎범기영 참 소박한 일상인데 그게 너무 신기했다. 사실 해고당한 뒤에 다른 직업 찾는 게 더 쉬울 것 같기도 한데 37년을 싸웠어요.

▼이경호 당시 1997년 IMF 전만 해도 한 번 들어가면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 이후에 평생직장 개념은 무너졌고요. 해고 사유가 회사 측에서는 당시에 무단결근이라고 했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노동 운동이었다는 그런 점에 확실한 신념이 있었고요. 또 그래서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또 몇 년 전 암 진단받으면서 이대로 죽으면 가장 아쉬울 게 무엇인가 생각해봤더니 바로 복직을 못 한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복직 투쟁을 절대 멈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디 보시죠.

◎범기영 들어보실까요?

Q. 37년간 복직 위해 계속 노력해온 이유?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제가 이제 해고될 때 그러니까 검은 보자기 덮어쓰고 일하다가 이제 끌려갔던 게 대공 분실이었고, 거기서 이제 이렇게 엎어놓고 이렇게 맞았거든요. 그래서 제 몸과 마음에는 그때 당시 (고문)당했던 일들이 그대로 다 남아있는데 이걸 그대로 덮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또 제가 암이 발병하고 이런 상태가 돼 보니까 암 병동에 입원해서도 제일 먼저 그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복직하지 못하면 그때는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죽고 나서 내가 뭘 가장 많이 아쉬워하고 어떤 걸 한으로 생각할까 그랬더니 복직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크더라고요. 복직을 통해서 다른 어떤 걸 꿈꿨다기보다는 내 발로 걸어 나오는, 쫓겨나오는, 잡혀 나온, 이게 아니라 내 발로 스스로 걸어 나오는 꿈이었기 때문에 그 꿈은 이룬 거죠.

◎범기영 쫓겨나는 게 아니라 내 발로 걸어 나오는. 김진숙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진 거는 2011년이었어요. 300일간 크레인에서 농성할 때.

▼이경호 그때 해고자, 해고 노동자, 동료 해고 노동자 복직을 주장하면서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 가지고 306일 동안 농성을 했는데요. 그때 사실 목숨을 걸고 올라갔는데 그 이후에 농성을 응원하기 위해서 일반 시민들이,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희망 버스라는 이름의 버스를 타고 이렇게 응원을 와주면서 그 힘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 내려올 수 있었고요. 또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복직 투쟁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제 인생은 2011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 큰 기점이 됐던 게 저는 희망버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크레인에 올라갈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분들이 연대를 오시고 응원을 해줄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었거든요. 그리고 그 크레인은 이미 2003년도에 저의 동료가 목을 맸던 크레인이고, 제가 크레인에 올라갈 때도 신변정리를 다 하고 올라갔었고, 그래서 살아서 내려온다는 희망 자체가 없었어요. 그런데 1차 희망버스가 오면서는 어쩌면 살아서 내려갈 수도 있겠다는 꿈을 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이후에 노동자들에게 연대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절감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제 청와대까지 '희망뚜벅이'를 할 때도 정말 많은 시민들이 오셨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힘들이 결국은 37년 만의 복직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범기영 37년 만의 출근, 마지막 퇴근 뒤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동료들의 묘역도 찾아가서 참배를 했고요. 이렇게 민주노총을 지켜왔는데, 김진숙 지도위원은. 사실 우리 사회의 일정 부분은 민주노총을 공공의 적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이경호 그렇죠. 민주노총의 사실 상징 같은 존재라고 하면 여전히 김진숙 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최근에 또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계속 늘어나고 있거든요? 그래서 최근 상황에 대해서 김진숙 위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그 의견을 들어봤습니다.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저는 사실은 민주노총이라는 어떤 틀에 갇힌 프레임들을 만들어 낸 건 언론의 역할들이 컸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민주노총, 귀족노조, 철밥통 그리고 오히려 그게 또 역설적으로 문재인 정권, 민주정권들을 거치면서는 더 강화됐던 것들이 있죠. 민주노총이 물론 비판받아야 되는 지점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도로공사라든지, 건강보험공단, 노조라든지, 이런 대기업들 투쟁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문제로 그렇게 투쟁하지를 않았어요. 오히려 구사대 역할을 했었던. 그러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는데 그걸 사측의 입장에서 이제 오히려 그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역할들을 정규직들이 해왔었던 게 많죠. 그래서 그런 것들은 저는 정말 역사적으로 상당히 비판받아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Q. 연대의 정신.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연대의 정신들이 사라지는 이유는 뭐라고 보세요?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적이 사라진 거예요, 제가 볼 때는 그러니까 옛날에는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대상이 명확했거든요. 군부독재, 그리고 악덕 재벌, 자본 이런 대상이 명확했는데 인제 정규직들의 적은 비정규직이 돼버리고, 비정규직들의 적은 정규직이 돼버린 거예요.

◎범기영 민주노총을 향한 쓴소리도 또 아끼지 않으시네요. 지금 이제 노동계를 향해서 혹은 정부를 향해서 가장 크게 호소하는 부분은 이런 거라고 들으셨습니까?

▼이경호 윤석열 정부가 새로 출범했는데요. 윤석열 정부가 검찰에서 출발한 정부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을 좀 범죄자 시각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대화를 많이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밝혔습니다.

◎범기영 노동계와도 대화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이야기했군요. 마무리하겠습니다. 이경호 해설위원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사건건은 월요일에 돌아옵니다. 다음 주에도 4시엔 사사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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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사건건이 만난 사람] ‘소금꽃’ 김진숙 “정규직과 비정규직 서로 적이 되며 연대정신 사라져”
    • 입력 2022-06-10 16:45:38
    • 수정2022-06-10 19:06:18
    사사건건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지도위원)<br />1981년 대한조선공사 입사...'최초 여성 용접공'<br />노조 활동 이유로 1986년 해고 후 37년 만인 올해 2월 명예복직<br />"두들겨 맞지 않고 제 발로 회사 걸어들어가는 게 꿈이었다"<br />2011년 한진중공업 300일 넘게 크레인 투쟁 '희망버스' 노동자들 연대 힘 절감<br />과거 노동자 투쟁의 대상은 '군부독재' '악덕 재벌' 명확<br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서로 적이 되며 노동자 연대정신 사라져<br />사측 입장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 투쟁 무력화...역사적 비판 받아야<br />
■ 방송시간 : 6월 10일(금) 16:00~17:00 KBS1
■ 진행 : 범기영 기자
■ 출연 : 이경호 KBS 해설위원


https://youtu.be/Tu4PG0t9a2M

◎범기영 금요일 사사건건은 현장으로 가죠? 사사건건이 만난 사람, 오늘은 소금꽃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의 지도위원 만나고 왔네요. 이경호 해설위원 만나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경호 안녕하세요?

◎범기영 복직 소식도 저희가 들었었고, 건강이 좀 안 좋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이경호 지금 여전히 암 투병 중이긴 한데요. 여전히 예전과 같이 차별금지법 제정 운영하는 시민단체를 도와준다거나 파리바게뜨 지회 노동자의 단식, 이런 걸 응원한다거나 예전과 같은 일상적인 투쟁 현장에 같이하고 있다고 합니다.

◎범기영 여전히 현장에 계시군요. 소개를 좀 해 주시죠, 혹시 모르는 분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이경호 김진숙 씨는 아시는 분은 아실 텐데요. 1981년 21살의 나이에 한진중공업 전신이죠? 대한조선공사의 용접공으로 입사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용접공인데요. 입사 이후에 민주노총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 측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해고 이후에 입사 당시 대한조선공사가 한진중공업으로 이미 바뀌었고요. 그 이후에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한진중공업이 지난해 HJ중공업으로 이름이 변경됐고요. 노사 화합 차원에서 복직에 동의를 해 주면서 37년 만에 해고 노동자에서 노동자 김진숙이 됐습니다.

◎범기영 37년 만에 해고자에서 노동자로. 소회가 어땠을까요?

제가 지난주죠? 지금은 HJ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뀐 구 한진중공업 공장이 바라다 보이는 부산항 여객터미널에서 직접 한번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좀 야위신 것 같네요, 전보다.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해고자 생활이 워낙 길었으니까. 그리고 또 제가 복직을 해서 일을 했으면 또 문제가 달라지는데 정년도 지난 복직이었고 그리고 제 건강상태나 이런 것들이 용접 일을 할 만큼의 체력이 안 되기 때문에 그날 복직했다가 그날 퇴직한 상태라 크게 일신상의 달라진 점은 없어요. 다만 이제 기분이 엄청 좋고 아침에 눈을 뜨면 스트레스가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복직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참 궁금했는데요. 끌려 나오지 않고서 스스로 걸어나오는 게 꿈이었다고 합니다.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회사 안에 한 발 들여놓는 게 불가능했었죠. 제 발로 들어갔다가 제 발로 걸어 나오는 일들, 그게 이제 한 사람의 소원이 될 만큼 간절한 일이었고 그런데 이제 (2월) 25일 복직행사를 하는 날, 저는 그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안 막히고, 안 두들겨 맞고 내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더라고요.

◎범기영 참 소박한 일상인데 그게 너무 신기했다. 사실 해고당한 뒤에 다른 직업 찾는 게 더 쉬울 것 같기도 한데 37년을 싸웠어요.

▼이경호 당시 1997년 IMF 전만 해도 한 번 들어가면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 이후에 평생직장 개념은 무너졌고요. 해고 사유가 회사 측에서는 당시에 무단결근이라고 했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노동 운동이었다는 그런 점에 확실한 신념이 있었고요. 또 그래서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또 몇 년 전 암 진단받으면서 이대로 죽으면 가장 아쉬울 게 무엇인가 생각해봤더니 바로 복직을 못 한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복직 투쟁을 절대 멈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디 보시죠.

◎범기영 들어보실까요?

Q. 37년간 복직 위해 계속 노력해온 이유?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제가 이제 해고될 때 그러니까 검은 보자기 덮어쓰고 일하다가 이제 끌려갔던 게 대공 분실이었고, 거기서 이제 이렇게 엎어놓고 이렇게 맞았거든요. 그래서 제 몸과 마음에는 그때 당시 (고문)당했던 일들이 그대로 다 남아있는데 이걸 그대로 덮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또 제가 암이 발병하고 이런 상태가 돼 보니까 암 병동에 입원해서도 제일 먼저 그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복직하지 못하면 그때는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죽고 나서 내가 뭘 가장 많이 아쉬워하고 어떤 걸 한으로 생각할까 그랬더니 복직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크더라고요. 복직을 통해서 다른 어떤 걸 꿈꿨다기보다는 내 발로 걸어 나오는, 쫓겨나오는, 잡혀 나온, 이게 아니라 내 발로 스스로 걸어 나오는 꿈이었기 때문에 그 꿈은 이룬 거죠.

◎범기영 쫓겨나는 게 아니라 내 발로 걸어 나오는. 김진숙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진 거는 2011년이었어요. 300일간 크레인에서 농성할 때.

▼이경호 그때 해고자, 해고 노동자, 동료 해고 노동자 복직을 주장하면서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 가지고 306일 동안 농성을 했는데요. 그때 사실 목숨을 걸고 올라갔는데 그 이후에 농성을 응원하기 위해서 일반 시민들이,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희망 버스라는 이름의 버스를 타고 이렇게 응원을 와주면서 그 힘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 내려올 수 있었고요. 또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복직 투쟁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제 인생은 2011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 큰 기점이 됐던 게 저는 희망버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크레인에 올라갈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분들이 연대를 오시고 응원을 해줄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었거든요. 그리고 그 크레인은 이미 2003년도에 저의 동료가 목을 맸던 크레인이고, 제가 크레인에 올라갈 때도 신변정리를 다 하고 올라갔었고, 그래서 살아서 내려온다는 희망 자체가 없었어요. 그런데 1차 희망버스가 오면서는 어쩌면 살아서 내려갈 수도 있겠다는 꿈을 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이후에 노동자들에게 연대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절감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제 청와대까지 '희망뚜벅이'를 할 때도 정말 많은 시민들이 오셨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힘들이 결국은 37년 만의 복직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범기영 37년 만의 출근, 마지막 퇴근 뒤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동료들의 묘역도 찾아가서 참배를 했고요. 이렇게 민주노총을 지켜왔는데, 김진숙 지도위원은. 사실 우리 사회의 일정 부분은 민주노총을 공공의 적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이경호 그렇죠. 민주노총의 사실 상징 같은 존재라고 하면 여전히 김진숙 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최근에 또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계속 늘어나고 있거든요? 그래서 최근 상황에 대해서 김진숙 위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그 의견을 들어봤습니다.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저는 사실은 민주노총이라는 어떤 틀에 갇힌 프레임들을 만들어 낸 건 언론의 역할들이 컸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민주노총, 귀족노조, 철밥통 그리고 오히려 그게 또 역설적으로 문재인 정권, 민주정권들을 거치면서는 더 강화됐던 것들이 있죠. 민주노총이 물론 비판받아야 되는 지점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도로공사라든지, 건강보험공단, 노조라든지, 이런 대기업들 투쟁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문제로 그렇게 투쟁하지를 않았어요. 오히려 구사대 역할을 했었던. 그러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는데 그걸 사측의 입장에서 이제 오히려 그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역할들을 정규직들이 해왔었던 게 많죠. 그래서 그런 것들은 저는 정말 역사적으로 상당히 비판받아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Q. 연대의 정신.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연대의 정신들이 사라지는 이유는 뭐라고 보세요?
<녹취> 김진숙 / 민주노총 지도위원
적이 사라진 거예요, 제가 볼 때는 그러니까 옛날에는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대상이 명확했거든요. 군부독재, 그리고 악덕 재벌, 자본 이런 대상이 명확했는데 인제 정규직들의 적은 비정규직이 돼버리고, 비정규직들의 적은 정규직이 돼버린 거예요.

◎범기영 민주노총을 향한 쓴소리도 또 아끼지 않으시네요. 지금 이제 노동계를 향해서 혹은 정부를 향해서 가장 크게 호소하는 부분은 이런 거라고 들으셨습니까?

▼이경호 윤석열 정부가 새로 출범했는데요. 윤석열 정부가 검찰에서 출발한 정부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을 좀 범죄자 시각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대화를 많이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밝혔습니다.

◎범기영 노동계와도 대화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이야기했군요. 마무리하겠습니다. 이경호 해설위원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사건건은 월요일에 돌아옵니다. 다음 주에도 4시엔 사사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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