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시선] 반지하의 비극과 추모의 양극화

입력 2022.08.11 (11:46) 수정 2022.08.1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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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영화 ‘기생충’ 사진 : 영화 ‘기생충’

영화 〈기생충〉에서 짧은 일탈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가는 주인공 가족은 자꾸만, 자꾸만 '아래'로 내려간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고, 경사진 골목을 내달리고, 폭우 속 그들의 다급한 '내리막' 여정을 따라 빗물도 함께 내려간다. 그렇게 낮은 곳으로 고여든 물은 주인공의 집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변기의 오물을 역류시키고, 가장 안온해야 할 집을 생지옥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뒤늦게 이 아수라장을 목격한 황망함이야 이루 말할 것이 없겠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나마 대피라든가 탈출 상황 같은 생사의 위기는 모면한 셈이다. 그 사태를 현실로 맞닥뜨렸고, 대피와 탈출에 실패한 사례들이 지난 8일 밤 속출했다. 네 명이 반지하 주택에서 사망했다.

서울 동작구에서 숨진 50대 여성은 기초생활수급권자였다. 침수된 반지하 방으로 반려동물을 구하러 들어갔다 돌아 나오지 못했다. 처음엔 피신했지만, 미처 데리고 나오지 못한 동물 가족을 구하러 발길을 되돌렸다가 변을 당했다. 취재진이 찾은 현장에서,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온갖 집기로 어지러져 있었고 현관은 도로보다 1미터 가량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바깥 도로에 물이 차면 언제든 흘러내릴 수 있는 구조다. 그 물을 막아줄 방비가 전혀 안 되어있던 집에서, 서로에게 의지하고 살았을 반려 가족은 참극으로 생을 마감했다.

관악구에서 숨진 40대 자매와 10대 자녀는 탈출 자체에 실패했다. 기초생활수급자권와 발달장애인이 포함된, 마찬가지로 사정이 어려운 가구였다. 물이 차오를 때 그들의 반지하 방 현관은 바깥으로 열리지 않았고, 일가족은 꼼짝없이 갇힌 채 문틈으로 들이치는 물줄기를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 이웃들이 달려와 필사적으로 방범창을 뜯어내려 했으나 힘에 부쳤다. 기록적인 폭우로 신고가 쇄도한 119는 전화 연결도 잘 되지 않았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물은 반 지하층 천장까지 들어찬 뒤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튿날 현장을 방문해 창살 너머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참사의 주인공들은 거기 없었고, 그 자리엔 미처 빠지지 못한 황토물만 고여 있었다.

KBS 뉴스 화면KBS 뉴스 화면

이 모든 비극은 '낮은' 곳에서 벌어졌다. 지하와 반지하 주택은 전국에 32만 호로 추산되며 지상에 비해 저렴한 만큼 주로 저소득층이 거주한다. 자연은 순리(順理) 그 자체이면서도 한없이 냉혹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은 인간의 사정을 따지지 않고 법칙대로 움직인다. 그 이치를 거스르지 못한 것은 희생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기록을 갈아엎을 정도로 큰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그들을 대피시키거나 구해내지 못한 건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

영국 BBC는 한국의 이 참사를 뉴스로 전하면서, "영화보다 현실은 더 비극이었다…" 라고 평가했다. 영화 <기생충>이 세계를 휩쓸며 '문화강국 코리아'를 만방에 떨칠 때, 그 영화 속 소재로 다뤄진 '반지하'는 여전히 비극의 불씨를 잉태하고 있었다. 수해라는 것이 불가항력의 재난이긴 하지만, 반지하 주택은 그 '시설' 상의 열악함으로 인해 지상 주택에 비해 항력(抗力)이 훨씬 약할 수밖에 없다. 김진유 경기대학교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KBS뉴스 인터뷰에서, "반지하는 기본적으로 통풍, 환기, 침수·화재(대비)에 취약한 구조기 때문에 정부나 지자체가 보조금 등을 통해 차수문(홍수 시 긴급 물막이 시설) 등을 설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앞서 정부는 영화 <기생충>이 한창 화제일 때 반지하 주택 일제 점검을 약속한 바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없던 일처럼 되어버렸다.

 사진: 영화 ‘기생충’ 사진: 영화 ‘기생충’

물에 빠져 숨을 거두는 사람의 고통은 차마 가늠키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사고 장소가 예상치 못한 '일상적' 공간이었을 때, 그 역설적 비극을 접하는 안타까움과 슬픔은 증폭되고 만다. 예컨대 지난해 봄 서울 한강에서 발생한 의대생 실종·사망 사건. 서울시민 누구나 편하게 즐겨 찾던 공원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하자, 그 의외성으로 충격파는 배가 됐다. 풀리지 않은 여러 의문들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당시 많은 시민들이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한동안 추모 열기를 이어갔다.

 출처: 연합뉴스 출처: 연합뉴스

그런데, 이번엔 그런 추모의 물결도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인다. 의외성으로 따지자면야 '집'만 한 곳이 있으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집들이 이번 재난에서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날벼락 같은 참사의 주인공들이 되고 말았다. 최신식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남 일' 같아서일까? 좁은 골목 반지하에서 생을 마감한 희생자들 집 앞에는 꽃 한 송이 놓이지 않는다. 앞날을 촉망받던 꽃다운 의과대학생의 안갯속 같은 죽음도 물론 가슴 아팠지만, 낮은 곳에서 쓸쓸히 저물어간 죽음들에 대해선 너무 조용하다. 상대적으로 참, 조용하다. 이번에는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 박주경, KBS 사회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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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11 11:46:01
    • 수정2022-08-11 14:20:18
    취재K
사진 : 영화 ‘기생충’
영화 〈기생충〉에서 짧은 일탈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가는 주인공 가족은 자꾸만, 자꾸만 '아래'로 내려간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고, 경사진 골목을 내달리고, 폭우 속 그들의 다급한 '내리막' 여정을 따라 빗물도 함께 내려간다. 그렇게 낮은 곳으로 고여든 물은 주인공의 집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변기의 오물을 역류시키고, 가장 안온해야 할 집을 생지옥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뒤늦게 이 아수라장을 목격한 황망함이야 이루 말할 것이 없겠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나마 대피라든가 탈출 상황 같은 생사의 위기는 모면한 셈이다. 그 사태를 현실로 맞닥뜨렸고, 대피와 탈출에 실패한 사례들이 지난 8일 밤 속출했다. 네 명이 반지하 주택에서 사망했다.

서울 동작구에서 숨진 50대 여성은 기초생활수급권자였다. 침수된 반지하 방으로 반려동물을 구하러 들어갔다 돌아 나오지 못했다. 처음엔 피신했지만, 미처 데리고 나오지 못한 동물 가족을 구하러 발길을 되돌렸다가 변을 당했다. 취재진이 찾은 현장에서,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온갖 집기로 어지러져 있었고 현관은 도로보다 1미터 가량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바깥 도로에 물이 차면 언제든 흘러내릴 수 있는 구조다. 그 물을 막아줄 방비가 전혀 안 되어있던 집에서, 서로에게 의지하고 살았을 반려 가족은 참극으로 생을 마감했다.

관악구에서 숨진 40대 자매와 10대 자녀는 탈출 자체에 실패했다. 기초생활수급자권와 발달장애인이 포함된, 마찬가지로 사정이 어려운 가구였다. 물이 차오를 때 그들의 반지하 방 현관은 바깥으로 열리지 않았고, 일가족은 꼼짝없이 갇힌 채 문틈으로 들이치는 물줄기를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 이웃들이 달려와 필사적으로 방범창을 뜯어내려 했으나 힘에 부쳤다. 기록적인 폭우로 신고가 쇄도한 119는 전화 연결도 잘 되지 않았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물은 반 지하층 천장까지 들어찬 뒤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튿날 현장을 방문해 창살 너머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참사의 주인공들은 거기 없었고, 그 자리엔 미처 빠지지 못한 황토물만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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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비극은 '낮은' 곳에서 벌어졌다. 지하와 반지하 주택은 전국에 32만 호로 추산되며 지상에 비해 저렴한 만큼 주로 저소득층이 거주한다. 자연은 순리(順理) 그 자체이면서도 한없이 냉혹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은 인간의 사정을 따지지 않고 법칙대로 움직인다. 그 이치를 거스르지 못한 것은 희생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기록을 갈아엎을 정도로 큰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그들을 대피시키거나 구해내지 못한 건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

영국 BBC는 한국의 이 참사를 뉴스로 전하면서, "영화보다 현실은 더 비극이었다…" 라고 평가했다. 영화 <기생충>이 세계를 휩쓸며 '문화강국 코리아'를 만방에 떨칠 때, 그 영화 속 소재로 다뤄진 '반지하'는 여전히 비극의 불씨를 잉태하고 있었다. 수해라는 것이 불가항력의 재난이긴 하지만, 반지하 주택은 그 '시설' 상의 열악함으로 인해 지상 주택에 비해 항력(抗力)이 훨씬 약할 수밖에 없다. 김진유 경기대학교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KBS뉴스 인터뷰에서, "반지하는 기본적으로 통풍, 환기, 침수·화재(대비)에 취약한 구조기 때문에 정부나 지자체가 보조금 등을 통해 차수문(홍수 시 긴급 물막이 시설) 등을 설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앞서 정부는 영화 <기생충>이 한창 화제일 때 반지하 주택 일제 점검을 약속한 바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없던 일처럼 되어버렸다.

 사진: 영화 ‘기생충’
물에 빠져 숨을 거두는 사람의 고통은 차마 가늠키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사고 장소가 예상치 못한 '일상적' 공간이었을 때, 그 역설적 비극을 접하는 안타까움과 슬픔은 증폭되고 만다. 예컨대 지난해 봄 서울 한강에서 발생한 의대생 실종·사망 사건. 서울시민 누구나 편하게 즐겨 찾던 공원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하자, 그 의외성으로 충격파는 배가 됐다. 풀리지 않은 여러 의문들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당시 많은 시민들이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한동안 추모 열기를 이어갔다.

 출처: 연합뉴스
그런데, 이번엔 그런 추모의 물결도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인다. 의외성으로 따지자면야 '집'만 한 곳이 있으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집들이 이번 재난에서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날벼락 같은 참사의 주인공들이 되고 말았다. 최신식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남 일' 같아서일까? 좁은 골목 반지하에서 생을 마감한 희생자들 집 앞에는 꽃 한 송이 놓이지 않는다. 앞날을 촉망받던 꽃다운 의과대학생의 안갯속 같은 죽음도 물론 가슴 아팠지만, 낮은 곳에서 쓸쓸히 저물어간 죽음들에 대해선 너무 조용하다. 상대적으로 참, 조용하다. 이번에는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 박주경, KBS 사회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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