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한영자 할머니, 가슴 속에 묻은 아버지

입력 2022.10.06 (19:46) 수정 2022.10.06 (20:2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일흔 네 번째 순서입니다.

한영자 할머니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대구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고, 가족들은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한영자/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워낙 가난해서 집안이 가난해가지고 일본에서 공부해서 고향으로 와서 시험을 보고 공무원 합격을 하고 시내에 (살았다고 합니다.) 공무원 생활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말 기가 막히죠. 오빠 낳고 이제 돌 넘겨서 세 살이고 저는 임신이 돼서, 아버지가 저 임신된지를 몰랐다 그래요. 한 임신 3개월쯤 돼서. (아버지가 퇴근하지 않아 어머니가) 하루 종일 기다린 거죠. 간부라서 또 뭐 업무가 바빠서 안 오는가 이런 생각을 해서 기다렸는데 안 와서 그때야 이제 찾으려 하니까 뭐 세무서, 그때 당시에 세무서에 근무했다니까. 거기 가서 찾아봐도 없고, 누구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다 하고 찾을 길이 없잖아요, 그때는 잡아가면 그냥 총살할 때니까. 아버지가 이제 잡혀간 거는 모르고 어디 행방불명 돼버리니까 살길이 없잖아요."]

[한영자/4·3 희생자 유족 : "시집 쪽이 김녕이니까 이제 저 임신되고 오빠 데리고 이제 할머니 댁에 온 거죠. 오니까 할머니 댁은 또 워낙 가난해서 식구는 여섯 식구가 되고. 보리 수확하면 한 달 정도 먹고 없으면 어머니가 그때는 품팔이, 어디 남 일을 가서 밥을 주면 그건 안 먹고, 주머니에 싸가지고 와서 우리를 먹이고. 어머니가 송당에서 태어나가지고 해녀질을 못했는데 해녀질 하면서 우리 남매를 키우려고."]

[한영자/4·3 희생자 유족 : "1949년도에 대구형무소에 있다는 것, 형무소에 있다는 건 어머니가 알았죠. 대구형무소에서 이제 편지가 왔다 그래요. 편지가. 할머니한테 이제 편지가 오니까 어머니가 이제 답을 한 거죠. 이렇게 살고 있다 하니까 (아버지가) 걱정하지 말라고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갈 거니깐 걱정하지 말라고. (6·25 터지고 수형자들을) 끈으로 다 묶어가지고 그냥 웅덩이에다가 큰 웅덩이에다가 그냥 던졌다고 해서 아, 얼마나 그 죽는 순간에 얼마나 아버지가 가족을, 스물네 살이었거든요."]

[한영자/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내란죄로 15년형을 받았어요. 근데 어머니는 그런 사상 조금도 (없었다고) 오직 직장하고 집하고 아기, 그 아들 돌 넘겨서 세 살이니까 얼마나 귀엽겠어요. 그래서 아기만 너무 예뻐하고 오직 직장생활만 하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어머니는 믿어 지지가 않는 거예요. (2022년 9월13일 직권재심에서) 무죄로 판정됐으니까 그 이상 기쁜 게 없죠. 우리 자손들도 이제 떳떳하게 어디 가도 말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게 참 고마웠던 것 같아요. 만약에 살아계셨으면 어머니가 날(듯 기뻤을) 겁니다. 그 죄를 벗는다면 날 겁니다. 너무 기뻐가지고."]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4·3 증언] 한영자 할머니, 가슴 속에 묻은 아버지
    • 입력 2022-10-06 19:46:07
    • 수정2022-10-06 20:23:18
    뉴스7(제주)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일흔 네 번째 순서입니다.

한영자 할머니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대구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고, 가족들은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한영자/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워낙 가난해서 집안이 가난해가지고 일본에서 공부해서 고향으로 와서 시험을 보고 공무원 합격을 하고 시내에 (살았다고 합니다.) 공무원 생활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말 기가 막히죠. 오빠 낳고 이제 돌 넘겨서 세 살이고 저는 임신이 돼서, 아버지가 저 임신된지를 몰랐다 그래요. 한 임신 3개월쯤 돼서. (아버지가 퇴근하지 않아 어머니가) 하루 종일 기다린 거죠. 간부라서 또 뭐 업무가 바빠서 안 오는가 이런 생각을 해서 기다렸는데 안 와서 그때야 이제 찾으려 하니까 뭐 세무서, 그때 당시에 세무서에 근무했다니까. 거기 가서 찾아봐도 없고, 누구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다 하고 찾을 길이 없잖아요, 그때는 잡아가면 그냥 총살할 때니까. 아버지가 이제 잡혀간 거는 모르고 어디 행방불명 돼버리니까 살길이 없잖아요."]

[한영자/4·3 희생자 유족 : "시집 쪽이 김녕이니까 이제 저 임신되고 오빠 데리고 이제 할머니 댁에 온 거죠. 오니까 할머니 댁은 또 워낙 가난해서 식구는 여섯 식구가 되고. 보리 수확하면 한 달 정도 먹고 없으면 어머니가 그때는 품팔이, 어디 남 일을 가서 밥을 주면 그건 안 먹고, 주머니에 싸가지고 와서 우리를 먹이고. 어머니가 송당에서 태어나가지고 해녀질을 못했는데 해녀질 하면서 우리 남매를 키우려고."]

[한영자/4·3 희생자 유족 : "1949년도에 대구형무소에 있다는 것, 형무소에 있다는 건 어머니가 알았죠. 대구형무소에서 이제 편지가 왔다 그래요. 편지가. 할머니한테 이제 편지가 오니까 어머니가 이제 답을 한 거죠. 이렇게 살고 있다 하니까 (아버지가) 걱정하지 말라고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갈 거니깐 걱정하지 말라고. (6·25 터지고 수형자들을) 끈으로 다 묶어가지고 그냥 웅덩이에다가 큰 웅덩이에다가 그냥 던졌다고 해서 아, 얼마나 그 죽는 순간에 얼마나 아버지가 가족을, 스물네 살이었거든요."]

[한영자/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가) 내란죄로 15년형을 받았어요. 근데 어머니는 그런 사상 조금도 (없었다고) 오직 직장하고 집하고 아기, 그 아들 돌 넘겨서 세 살이니까 얼마나 귀엽겠어요. 그래서 아기만 너무 예뻐하고 오직 직장생활만 하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어머니는 믿어 지지가 않는 거예요. (2022년 9월13일 직권재심에서) 무죄로 판정됐으니까 그 이상 기쁜 게 없죠. 우리 자손들도 이제 떳떳하게 어디 가도 말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게 참 고마웠던 것 같아요. 만약에 살아계셨으면 어머니가 날(듯 기뻤을) 겁니다. 그 죄를 벗는다면 날 겁니다. 너무 기뻐가지고."]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제주-주요뉴스

더보기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2024 파리 패럴림픽 배너 이미지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