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살갑던 막내였는데…” 취업해 서울 간 아들딸 참변
입력 2022.11.01 (14:56)
수정 2022.11.0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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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막내딸은 너무 일찍, 너무 멀리 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국화꽃으로 둘러싸인 제단 구석에서 숨죽여 울었습니다. 영정사진 속 딸의 얼굴을 보고 또 봐도 이 세상을 떠나 곁에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태원 사고로 희생된 19살 A 씨는 올해 2월 전남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미용사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척박한 타향살이였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 일과를 재잘거렸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고향에 내려와 용돈 봉투를 건넸고, 아버지가 일하는 밭에 나가 일손을 거들기도 했습니다. A 씨는 가족들에게 언제나 살갑고, 애교가 많은 귀염둥이 막내딸이었습니다.
사고 하루 전 A 씨는 아버지에게 핼러윈 때 입을 거라며 사진 한 장을 보냈습니다. 그날 밤 A 씨는 직장동료 6명과 함께 이태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A 씨는 함께 간 동료 3명과 함께 참변을 당했습니다.
A 씨 아버지는 막내딸의 사망 소식을 듣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A씨 아버지는 "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작은 군 단위 행사에서도 경찰이 여기로 가라, 여기는 가지 마라 안내하는 게 상식"이라며 "왜 이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A 씨 아버지는 "막내딸이 꼭 잠들어 있는 것 같다"며 "사진을 봐도 믿기지 않고, 믿으려고 하면 눈물 먼저 나와버린다. 금방이라도 전화가 올 것 같다"면서 딸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A 씨 빈소엔 친구들의 발길도 이어졌습니다. A 씨는 '친구들의 고민도 잘 들어주고, 뭐든지 열심히 하는 친구'였습니다. A 씨 친구는 "꾸미는 걸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친구였다"며 "그 순간에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 "다음 주에 오려고 기차표까지 끊어뒀는데…" 고향 친구와 함께 참변
23살 B 씨는 사고 당일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녁 7시에 친구와 함께 이태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잘 놀다 오라고 했습니다. 그게 마지막 전화였습니다. 딸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TV에서 이태원 사고 소식이 흘러나오자 곧장 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연락 두절. 그렇게 새벽 3시,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서울로 가는 첫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다 딸깍, 갑자기 연결된 전화기 너머로 '용산경찰서'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딸의 휴대전화를 수거해 분실물로 가지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B 씨 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있다는 서울의 병원을 헤집고 다닐 때도 사망자 명단은 보지 않았습니다. 딸이 살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B 씨는 올해 초 어려운 취업 문을 뚫고 서울의 한 은행에 입사했습니다. 다음 주에 정규직 전환 시험을 치르러 고향에 내려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기차표까지 끊어뒀습니다. 하지만 딸은 이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부모 품으로 돌아왔고, 고향 친구와 같은 장례식장에 나란히 안치됐습니다.
B 씨 아버지는 딸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단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이런 사고가 반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B 씨 아버지는 취재진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 무슨 사고가 터지면 다음에 항상 하는 말이다. 이런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광주·전남 연고자 9명 숨져…빈소 '침통'
이태원 사고로 숨진 광주와 전남 연고자만 잠정적으로 9명입니다.
최근 취업에 성공해 서울 건설현장에서 번듯한 감리로 활동하던 20대 청년은 이태원에서 고교 동창들을 만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간호사가 되기 위해 목포의 한 대학에 입학한 뒤 친구와 이태원을 찾은 20대 여성도 그날 밤 희생됐습니다.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40대도 노모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고 아까운 목숨 들이 왜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규명하는 일은 이제 남겨진 사람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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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살갑던 막내였는데…” 취업해 서울 간 아들딸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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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2-11-01 14:56:43
- 수정2022-11-01 16:06:50
열아홉 막내딸은 너무 일찍, 너무 멀리 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국화꽃으로 둘러싸인 제단 구석에서 숨죽여 울었습니다. 영정사진 속 딸의 얼굴을 보고 또 봐도 이 세상을 떠나 곁에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태원 사고로 희생된 19살 A 씨는 올해 2월 전남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미용사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척박한 타향살이였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 일과를 재잘거렸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고향에 내려와 용돈 봉투를 건넸고, 아버지가 일하는 밭에 나가 일손을 거들기도 했습니다. A 씨는 가족들에게 언제나 살갑고, 애교가 많은 귀염둥이 막내딸이었습니다.
사고 하루 전 A 씨는 아버지에게 핼러윈 때 입을 거라며 사진 한 장을 보냈습니다. 그날 밤 A 씨는 직장동료 6명과 함께 이태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A 씨는 함께 간 동료 3명과 함께 참변을 당했습니다.
A 씨 아버지는 막내딸의 사망 소식을 듣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A씨 아버지는 "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작은 군 단위 행사에서도 경찰이 여기로 가라, 여기는 가지 마라 안내하는 게 상식"이라며 "왜 이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A 씨 아버지는 "막내딸이 꼭 잠들어 있는 것 같다"며 "사진을 봐도 믿기지 않고, 믿으려고 하면 눈물 먼저 나와버린다. 금방이라도 전화가 올 것 같다"면서 딸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A 씨 빈소엔 친구들의 발길도 이어졌습니다. A 씨는 '친구들의 고민도 잘 들어주고, 뭐든지 열심히 하는 친구'였습니다. A 씨 친구는 "꾸미는 걸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친구였다"며 "그 순간에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 "다음 주에 오려고 기차표까지 끊어뒀는데…" 고향 친구와 함께 참변
23살 B 씨는 사고 당일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녁 7시에 친구와 함께 이태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잘 놀다 오라고 했습니다. 그게 마지막 전화였습니다. 딸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TV에서 이태원 사고 소식이 흘러나오자 곧장 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연락 두절. 그렇게 새벽 3시,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서울로 가는 첫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다 딸깍, 갑자기 연결된 전화기 너머로 '용산경찰서'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딸의 휴대전화를 수거해 분실물로 가지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B 씨 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있다는 서울의 병원을 헤집고 다닐 때도 사망자 명단은 보지 않았습니다. 딸이 살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B 씨는 올해 초 어려운 취업 문을 뚫고 서울의 한 은행에 입사했습니다. 다음 주에 정규직 전환 시험을 치르러 고향에 내려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기차표까지 끊어뒀습니다. 하지만 딸은 이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부모 품으로 돌아왔고, 고향 친구와 같은 장례식장에 나란히 안치됐습니다.
B 씨 아버지는 딸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단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이런 사고가 반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B 씨 아버지는 취재진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 무슨 사고가 터지면 다음에 항상 하는 말이다. 이런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광주·전남 연고자 9명 숨져…빈소 '침통'
이태원 사고로 숨진 광주와 전남 연고자만 잠정적으로 9명입니다.
최근 취업에 성공해 서울 건설현장에서 번듯한 감리로 활동하던 20대 청년은 이태원에서 고교 동창들을 만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간호사가 되기 위해 목포의 한 대학에 입학한 뒤 친구와 이태원을 찾은 20대 여성도 그날 밤 희생됐습니다.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40대도 노모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고 아까운 목숨 들이 왜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규명하는 일은 이제 남겨진 사람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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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린 기자 thirst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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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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