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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자격증에 비밀 암호까지…‘의심스런’ 기업평가
입력 2022.11.19 (09:23) 취재K

위 사진을 볼까요. 어느 자동차 정비업체의 기업평가보고서입니다. 기술신용등급 BB- 라는 점수가 눈에 띕니다.

아마도 대부분 꽤 큰 회사겠구나 생각하실 겁니다. 평가등급까지 받을 정도니까 말이죠. 이 보고서를 낸 곳은 '한국평가데이터'라는 국내 유수의 신용평가회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업체, 실은 종업원이 단 2명입니다. BB- 라는 등급은 '뻥튀기'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영세한 자동차 정비업체가 왜 신용평가까지 받은 걸까, 의심스러운 평가보고서 속 숨은 속사정은 뭘까요.

■ 자격증을 훔친 이유, 기술금융

담보 자산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은행 '대출 문턱' 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국내 금융의 고질적 병폐였습니다. 그래서 생긴 제도가 '기술금융'입니다.

기술력만 탄탄하다면, 그 '기술' 자체를 신용 삼아서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겁니다. 2014년 시작해 어느덧 대출 잔액 340조 원에 이릅니다. 저변이 빠르게 넓어졌습니다.

기술금융의 핵심은 기술력 평가입니다. 정말 믿을만한 기술인지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래야 담보 대신 기술을 믿고 대출을 해줘도 문제가 안 생길테니 말입니다.

믿을 만한 기술인지를 평가하는 걸, 기술신용평가라고 합니다. 그걸 하도록 인가받은 곳은 국내 신용평가기관입니다. 6개 기관만 금융위원회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중 한 곳, 한국평가데이터가 반칙을 저지른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크게 두 가지 수법이 확인됐는데, 첫째는 자격증 훔치기입니다.

■ 업체도 자격증 주인도 '모르는 일'

자동차 정비 업체의 기술력을 인정할 가장 확실한 근거는 뭘까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탄탄한 자격증을 가진 직원이 근무한다는 사실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자동차 정비 분야의 가장 윗등급 자격증은 '기능장'입니다. 김성모 씨는 자동차 정비 기능장을 보유한 모 대학 교수입니다.

김성모 씨는 경기도 수원의 한 정비업체 기술신용평가 보고서에 등장했습니다. 김 씨가 근무하니 기술력 있는 회사라고 인정했습니다. 그걸 근거로 기술신용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파주의 다른 업체에도, 서울의 또 다른 업체에도, 심지어 제주까지 전국 6개 정비 업체의 직원으로 등재돼 있었습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도 아니고, 어찌 된 일일까요. 한국평가데이터가 김성모 씨의 자격증을 훔쳐다 전혀 상관도 없는 정비업체에 갖다 붙인 겁니다.

또 다른 기능장 정용관 씨 역시 경남 창원에서 30년 넘게 공업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수원 등 네 군데 정비 공업사의 기술신용평가서에 직원으로 둔갑해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한국평가데이터 측이 기술신용평가서를 작성하며 자격증을 첨부 자료로 넣어둔 것입니다. 이런 도용 건수는 취재진이 확인한 것만 수십 건에 이릅니다.

■ 기술금융 늘수록 수수료 수입 '짭짤'

왜 자격증 도용 반칙까지 서슴지 않았던 걸까요. 한국평가데이터는 "업계 출혈경쟁"이 있다고 했는데, 어떤 경쟁인지 합리적 추정은 가능합니다.

금융위원회는 기술금융 활성화를 정책적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기술금융을 많이 한 은행에는 인센티브를 주고 있습니다.

은행이 기술금융을 실행하려면, 기술신용평가가 꼭 필요합니다. 그 평가가 너무 엄격하다면, 은행은 달갑지 않을 겁니다. '헐겁지만 너그럽게' 해주는 평가기관이 반가울 겁니다.

[연관 기사] [단독] 자격증 도용해 기술평가 ‘뻥튀기’…평가기관이 주도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01178

한국평가데이터의 순 매출 중 30% 가량은 기술신용평가 수수료입니다.

이 수수료 수익을 놓고 평가기관 간 '출혈경쟁'이 있다보니 기술신용평가를 은행의 입맛에 맞게 해주었고, 그 방법의 하나로 자격증 도용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영업직원과 평가직원 간 비밀 암호까지

한국평가데이터는 기술신용평가 외에 기업신용평가도 합니다. 기업의 매출과 이익, 영업 전망 등을 따져서 등급을 매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기업신용평가 관련 문서에서 수상한 내용이 반복적으로 확인됐습니다. '3시 이전 전송 요청, 4시 이후 전송 요청' 따위의 문구가 계속 등장했습니다.

얼핏, 처리 시한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일을 마감해 전송해달라는 요청 같아 보이죠.


실은 전혀 다른 뜻이 숨은 일종의 암호였습니다. 그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일종의 암호 해독표로 정리했습니다.


이 해독표에 따르면, 3시는 A, 이전은 마이너스(-) 입니다. 고로 '3시 이전 전송 요청'의 뜻은 A-일 겁니다. 실제로 이 문구가 붙은 기업은 신용평가 결과 A- 등급으로 평가됐습니다.
취재진이 확인한 10개 업체 모두 암호와 같은 등급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사내 직원들은 이런 암호를 메일로 주고받았고, "확인 후 반드시 삭제해달라"고 강조하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굳이 삭제하라고 강조한 이유? 떳떳한 일이었다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연관 기사] [단독] ‘짬짜미’ 기업 신용평가?…‘암호’ 써가며 등급 조율 의혹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02163

■ "잘못 인정한다…전수조사 착수해 시정할 것"

한국평가데이터 측은 기술신용평가에서 자격증을 도용한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타 평가기관과의 경쟁 과정에서, 무리하게 기술금융 요건에 맞도록 자격증을 도용했다는 겁니다.

다만 8월부터는 요건을 엄격하게 적용해 재직 증명서를 함께 첨부하도록 지침을 바꿨고, 전수조사를 통해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했습니다.

기업신용평가에서 암호를 사용한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직원들끼리 소통하는 방법으로 활용했다고 했습니다. 다만, 평가 자체는 객관적이었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한국평가데이터는 취재 이후 내부 감사에 착수했다고 밝혔습니다.

■ 금감원·금융위 "사실 관계 확인하겠다"

신용평가기관의 허가권을 쥐고 있는 것은 금융위원회지만, 이를 감독하고 검사할 권한은 금융감독원이 가지고 있습니다.

KBS의 취재가 시작되자 두 기관 모두 "사실 관계를 파악해 제재 수위를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신용정보법에 두 비위 행위와 딱 맞아 떨어지는 처벌 조항이 없어 어떤 제재를 가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윤희근 경찰청장 역시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관련 질의를 받고 "금융당국과 협의를 해 사실 관계 확인 후 필요한 조치를 신속하게 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신용 평가는 금융 업계 서비스의 토대입니다. 말뿐인 확인과 조사가 아닌, 업계 관행을 바로잡는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 유령 자격증에 비밀 암호까지…‘의심스런’ 기업평가
    • 입력 2022-11-19 09:23:06
    취재K

위 사진을 볼까요. 어느 자동차 정비업체의 기업평가보고서입니다. 기술신용등급 BB- 라는 점수가 눈에 띕니다.

아마도 대부분 꽤 큰 회사겠구나 생각하실 겁니다. 평가등급까지 받을 정도니까 말이죠. 이 보고서를 낸 곳은 '한국평가데이터'라는 국내 유수의 신용평가회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업체, 실은 종업원이 단 2명입니다. BB- 라는 등급은 '뻥튀기'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영세한 자동차 정비업체가 왜 신용평가까지 받은 걸까, 의심스러운 평가보고서 속 숨은 속사정은 뭘까요.

■ 자격증을 훔친 이유, 기술금융

담보 자산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은행 '대출 문턱' 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국내 금융의 고질적 병폐였습니다. 그래서 생긴 제도가 '기술금융'입니다.

기술력만 탄탄하다면, 그 '기술' 자체를 신용 삼아서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겁니다. 2014년 시작해 어느덧 대출 잔액 340조 원에 이릅니다. 저변이 빠르게 넓어졌습니다.

기술금융의 핵심은 기술력 평가입니다. 정말 믿을만한 기술인지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래야 담보 대신 기술을 믿고 대출을 해줘도 문제가 안 생길테니 말입니다.

믿을 만한 기술인지를 평가하는 걸, 기술신용평가라고 합니다. 그걸 하도록 인가받은 곳은 국내 신용평가기관입니다. 6개 기관만 금융위원회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중 한 곳, 한국평가데이터가 반칙을 저지른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크게 두 가지 수법이 확인됐는데, 첫째는 자격증 훔치기입니다.

■ 업체도 자격증 주인도 '모르는 일'

자동차 정비 업체의 기술력을 인정할 가장 확실한 근거는 뭘까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탄탄한 자격증을 가진 직원이 근무한다는 사실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자동차 정비 분야의 가장 윗등급 자격증은 '기능장'입니다. 김성모 씨는 자동차 정비 기능장을 보유한 모 대학 교수입니다.

김성모 씨는 경기도 수원의 한 정비업체 기술신용평가 보고서에 등장했습니다. 김 씨가 근무하니 기술력 있는 회사라고 인정했습니다. 그걸 근거로 기술신용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파주의 다른 업체에도, 서울의 또 다른 업체에도, 심지어 제주까지 전국 6개 정비 업체의 직원으로 등재돼 있었습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도 아니고, 어찌 된 일일까요. 한국평가데이터가 김성모 씨의 자격증을 훔쳐다 전혀 상관도 없는 정비업체에 갖다 붙인 겁니다.

또 다른 기능장 정용관 씨 역시 경남 창원에서 30년 넘게 공업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수원 등 네 군데 정비 공업사의 기술신용평가서에 직원으로 둔갑해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한국평가데이터 측이 기술신용평가서를 작성하며 자격증을 첨부 자료로 넣어둔 것입니다. 이런 도용 건수는 취재진이 확인한 것만 수십 건에 이릅니다.

■ 기술금융 늘수록 수수료 수입 '짭짤'

왜 자격증 도용 반칙까지 서슴지 않았던 걸까요. 한국평가데이터는 "업계 출혈경쟁"이 있다고 했는데, 어떤 경쟁인지 합리적 추정은 가능합니다.

금융위원회는 기술금융 활성화를 정책적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기술금융을 많이 한 은행에는 인센티브를 주고 있습니다.

은행이 기술금융을 실행하려면, 기술신용평가가 꼭 필요합니다. 그 평가가 너무 엄격하다면, 은행은 달갑지 않을 겁니다. '헐겁지만 너그럽게' 해주는 평가기관이 반가울 겁니다.

[연관 기사] [단독] 자격증 도용해 기술평가 ‘뻥튀기’…평가기관이 주도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01178

한국평가데이터의 순 매출 중 30% 가량은 기술신용평가 수수료입니다.

이 수수료 수익을 놓고 평가기관 간 '출혈경쟁'이 있다보니 기술신용평가를 은행의 입맛에 맞게 해주었고, 그 방법의 하나로 자격증 도용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영업직원과 평가직원 간 비밀 암호까지

한국평가데이터는 기술신용평가 외에 기업신용평가도 합니다. 기업의 매출과 이익, 영업 전망 등을 따져서 등급을 매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기업신용평가 관련 문서에서 수상한 내용이 반복적으로 확인됐습니다. '3시 이전 전송 요청, 4시 이후 전송 요청' 따위의 문구가 계속 등장했습니다.

얼핏, 처리 시한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일을 마감해 전송해달라는 요청 같아 보이죠.


실은 전혀 다른 뜻이 숨은 일종의 암호였습니다. 그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일종의 암호 해독표로 정리했습니다.


이 해독표에 따르면, 3시는 A, 이전은 마이너스(-) 입니다. 고로 '3시 이전 전송 요청'의 뜻은 A-일 겁니다. 실제로 이 문구가 붙은 기업은 신용평가 결과 A- 등급으로 평가됐습니다.
취재진이 확인한 10개 업체 모두 암호와 같은 등급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사내 직원들은 이런 암호를 메일로 주고받았고, "확인 후 반드시 삭제해달라"고 강조하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굳이 삭제하라고 강조한 이유? 떳떳한 일이었다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연관 기사] [단독] ‘짬짜미’ 기업 신용평가?…‘암호’ 써가며 등급 조율 의혹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02163

■ "잘못 인정한다…전수조사 착수해 시정할 것"

한국평가데이터 측은 기술신용평가에서 자격증을 도용한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타 평가기관과의 경쟁 과정에서, 무리하게 기술금융 요건에 맞도록 자격증을 도용했다는 겁니다.

다만 8월부터는 요건을 엄격하게 적용해 재직 증명서를 함께 첨부하도록 지침을 바꿨고, 전수조사를 통해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했습니다.

기업신용평가에서 암호를 사용한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직원들끼리 소통하는 방법으로 활용했다고 했습니다. 다만, 평가 자체는 객관적이었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한국평가데이터는 취재 이후 내부 감사에 착수했다고 밝혔습니다.

■ 금감원·금융위 "사실 관계 확인하겠다"

신용평가기관의 허가권을 쥐고 있는 것은 금융위원회지만, 이를 감독하고 검사할 권한은 금융감독원이 가지고 있습니다.

KBS의 취재가 시작되자 두 기관 모두 "사실 관계를 파악해 제재 수위를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신용정보법에 두 비위 행위와 딱 맞아 떨어지는 처벌 조항이 없어 어떤 제재를 가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윤희근 경찰청장 역시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관련 질의를 받고 "금융당국과 협의를 해 사실 관계 확인 후 필요한 조치를 신속하게 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신용 평가는 금융 업계 서비스의 토대입니다. 말뿐인 확인과 조사가 아닌, 업계 관행을 바로잡는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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