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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채록 5·18] 故 문재학 열사 어머니 김길자…아들 따라 ‘민주주의’
입력 2023.01.26 (07:04) 취재K
5·18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 실제 주인공 故 문재학.
1980년 5·18 당시 고등학교 1학년.
전남도청 최후항쟁에서 산화한 고등학생 시민군.
KBS광주 「영상채록 5·18팀」이 문재학의 어머니 김길자 씨를 인터뷰했습니다.
5.18 당시 희생자들을 안치했던 ‘상무관’ -방송 화면5.18 당시 희생자들을 안치했던 ‘상무관’ -방송 화면

"시상에, 시체가 저렇게 많은데
무섭지도 않냐 겁도 많은 자석이"
"군인들이 무섭지,
죽은 사람들이 뭐가 무섭다고요"
-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중에서

KBS와 인터뷰 중인 故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씨KBS와 인터뷰 중인 故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씨

■ "네가 못다 이룬 민주주의, 엄마가 할게"

김길자 씨에게 아들(문재학)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고 물었더니 '민주주의'란 답이 돌아왔습니다. "나는 항상 그 말을 입에다 달고 사요. 네가 못다 이룬 민주주의, 네 뒤를 따라서 엄마·아빠가 할 것인게 걱정 말고 편안하게 있으라고."

아들이 주인공으로 나온 소설 『소년이 온다』를 본 소감도 그랬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생각에서 그렇게 도청을 지켰는데. 소설책까지 나왔으니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마음이 더 낫지요. 우리 재학이가 그래도 이렇게 했다는 것은 다 알고."

한강 작가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 故 문재학한강 작가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 故 문재학

2014년에 나온 한강 작가의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는 5·18 당시 최후 항쟁에서 희생된 고등학생 시민군 문재학이 주인공입니다. 5·18을 다룬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소년이 온다'는 항쟁의 기억과 정서에 주목한, 그래서 가장 슬픈 이야기로 각인됐습니다.
[연관 기사] 80년 5월에서 걸어온 소년의 이야기…한강 ‘소년이 온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313610

1980년 5·18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문재학이 시위에 나간 건 5월 21일. 매일같이 도청 앞을 나갔던 아들은 스스로 시민군이 되어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산화했습니다.

"21일 날 나가서 안 들어와 그러더니 저녁에 늦게 왔는데 목이 꽉 쉬어가지고 왔어요. 선배님들이 전두환 물러가고 김대중 석방하고 그러라고 외쳐서 저도 같이 했다는 거예요. 지 형이 그랬어요. 언제 계엄군이 올지 모르니까 인자 가지 마라. 그러니까 안 간다고 그러대요. 안 간다고 그랬는데."

"(재학이가) 25일 날도 (집에) 안 와. 그래서 점심 먹은 뒤에 아빠하고 나하고 둘이 도청을 갔어요. 문 밖에서 이러고 보고 있어서 민원실 2층에서 저도(재학이도) 우리를 봤어요. 가자 집에 가자 그러니까. '엄마 창근이가 꼭 죽어가지고 들어온 것 같은디.' 창근이라는 아이가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창근이를 어떻게 수습을 해놓고 이제 집에 가도 가야지. 이렇게 놔두고는 못 가겠다고. 그래서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럽디다. 그래도 친구가 죽었다는데 수습을 해놓고 오겠다는데 어떻게 데리고 올 수가 없어."

19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 시위 모습 -방송 자료화면19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 시위 모습 -방송 자료화면

■아들이 남긴 말 "학생들은 손 들면 안 죽인대요."

김길자 씨와 아들의 마지막 대화는 1980년 5월 26일 저녁 전화 통화였습니다. 전남도청에 계엄군 투입이 예고된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겠다며 아들이 남긴 말. '학생들은 손 들고 나가면 괜찮다고 했어요.'
"그때는 통행금지가 저녁 7시에요. 7시 차 타고 온나 그러고 약속을 했지요. 그랬는데 7시 넘어서 전화가 왔어요. '엄마, 차가 끊어져서 못 가겠다.' 그때는 다그쳤죠. 그러면 어쩌냐 오늘 저녁에는 틀림없이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하는디. 그러니까 '학생들은 손들면 안 죽인다고 한다'고 그래요."
"저녁 내 잠을 안 자고 있는데 아주 도청 쪽에서 콩 튀는 소리가 나요, 총소리가. 그래서 '오메, 도청 있는 사람들 이제 다 죽었네' 그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날이 샙디다."

도청 진압 후 발견된 시민군, 오른쪽이 고 문재학도청 진압 후 발견된 시민군, 오른쪽이 고 문재학

당시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직후 상황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는 기록 사진이 2021년 처음 일반에 공개됐는데 여기엔 고등학생 시민군 문재학도 포함돼 있습니다.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 서울지부 기자였던 노먼 소프가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연관 기사] 5·18 외신기자 ‘노먼 소프’ 미공개 사진 최초 공개(2021년 5월 6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179862

■ 계엄군 총에 맞아 싸늘한 주검이 된 아들

"날이 새서 아빠하고 외삼촌하고 도청을 갔어요. 언제 학생들이 그렇게 주둔을 하고 있었는가 싶게 깨끗하게 물청소 다 해버리고 아무것도 없어. 직원들만 하나 둘 그렇게 지나 다니고."

김길자 씨는 아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수소문했지만 결국 암매장된 싸늘한 주검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땅을 파지 못하게 막는 것을 물리치고 묘를 확인하면서도 아들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우리는 아니기를 바랐지. 재학이가 아니기를 바랐는데 다 기라고 해요. 다 부패가 되어서 못 알아보겠는데 (지닌) 교무수첩에 이만한 증명 사진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보고 다 기라고 해요, 재학이라고."

"담임 선생님이 검찰청에 가면 그 당시 죽은 사람들 사진이 있다고 재학이도 있는가 가보라고 해요. 가 봤더니 사진을 이렇게 다 내놓아요. 근데 우리 재학이가 거기에 있어. 재학이가 거기 있어. 그런데 어떻게 다 닦아 버렸는지 어디 총 맞은 데도 없어. 깨끗하니 집에서 신고 간 양말과 목에 면티, 교련복 바지."

김길자 씨가 아들(문재학)의 사진 액자를 닦고 있다김길자 씨가 아들(문재학)의 사진 액자를 닦고 있다

■ '폭도' 누명 벗기기 위해 투사가 된 어머니

"27일 새벽에 사망했다고 이름이랑 가르쳐줬더니, 재학이는 도청에서 총 들고 계엄군하고 같이 싸웠다고 폭도라고 해요.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운 것도 폭도라 하느냐고. 이제 아버지가 긴 책상에 있던 서류들을 싹 헤쳐버렸어. 계림동에 있었던 시청 마당에다가. 그러니까 서류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다 섞어져 버렸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폭도'로 매장된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자연스레 투사가 되어 갔습니다.

"그래 갖고 이제 내가 폭도 누명 벗기려고 이제 또 그때는 그러고 다녔지."

"(505 보안대에서) 소란 피우고 안 다닌다는 각서를 하나 써주라고 그래. 그래서 이걸 소란 피운다고 생각하냐고. 나는 내 자식 폭도 누명 벗길라고 이러고 다니지 소란 피운다고 생각은 안 한다고."

505 보안대는 당시 전두환이 사령관이던 보안사령부의 광주지구 직속부대입니다.
옛 505 보안대는 당시 고문이 자행되기도 했던 국가 폭력의 현장입니다. 현재는 옛 국군광주병원과 함께 5·18역사공원으로 조성돼 있습니다. 위치 :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대로956번길 16

■ '어머니'들의 5·18 유족회

"어딘지 모르고 따라갔는데 천주교 피정센터 거기를 가. 구속자 가족들 안성례, 이명자 그 사람들 한 다섯 사람인가 하고 우리하고 그렇게 만났어. '어떻게 뭉쳐서 가족들 석방시킬까' 이제 그런 것을 저녁 내 이야기 하고 집에 왔지."

안성례 씨는 오월어머니회(옛 오월어머니집) 초대 회장이고 이명자 씨도 회장을 지냈습니다. 오월어머니회는 1980년 10월 결성된 구속자 가족모임이 그 시작입니다.
[연관 기사] [영상채록 5·18] 간호사에서 ‘오월어머니’로 안성례(2023년 1월 5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6782687

'폭도' 누명을 벗기 위해, 구속된 자식을 석방 시키기 위해 그렇게 어머니들은 지난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현충일 때 망월동에서 유족회 결성을 했다고 그래요. 나는 그때 안 갔었는데. 관제 유족회에요. 관에서 하라는 대로만 그 사람들은 하지 우리 생각대로 안 해. "

"남자들이 회장 하면 관에서 너무 탄압이 심해서 안 되겠다. 여자들이 하자 우리들이. 그래서 여자들 한 다섯이서. 금남로에 별세계 다방이라고 있었어요. 그 2층에 유족회 사무실이 있었는데 우리가 유족회 간판을 떼어 왔어요."

경찰 무전기에 맞아 다친 김길자 씨(오른쪽은 현재 모습)경찰 무전기에 맞아 다친 김길자 씨(오른쪽은 현재 모습)

"84년이 됐는가. 이제 젊은 사람들까지 2세들 모임을 하자고. YWCA에서 모임 창설하는 날이야. 이제 우리 딸이 설명서도 쓰고. 그런데 거기를 못 가게 경찰이 아주 막고 못 가게 해요. 내가 이렇게 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무전기로 나를 때려버렸어. 그래갖고 피가 아주 다 흘러서 옷조차 다 버렸어. 여덟 바늘인가 꿰매고 그랬어."

■ 망월동 묘역을 지키다

"1983년에 교황님이 우리나라에 오셨어요. 교황님이 오시면 틀림없이 망월동을 가실 것이다. 그 안에 이 묘들을 다 없애버리려고 한다."

1980년 5·18 직후 희생자들이 집단 매장됐던 광주 망월동. 김길자 씨는 망월동 묘지를 지키는 데도 앞장 섰습니다.

"그 묘를 파낸 사람은 돈 주면서 고향에다 이렇게 모셔다 놓고. 안 판 사람들은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면 누구 것인지 모르고 뼈도 못 추린다고. 26기까지 파냈는데 묘지에 가서 못 파내게 지켰더니 그 뒤로는 안 파냈어요."

"우리는 두들겨 맞아가면서 투쟁해서 이렇게 묘지를 지켜놨는데. 그때 돈 받고 판 사람들도 같이 이렇게 국립묘지로 다 왔잖아요. 그것이 성질납디다. 그것이 성질나."

505보안대는 5·18 이후 유족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이른바 '비둘기 시행계획'을 수행했습니다. 그 하나로 망월동 묘지를 파내 개별 묘지로 이장 시켰습니다. 망월동이 유족들의 투쟁 거점이 될 것을 우려해 묘지를 강제로 분산시키려 한 겁니다.

■ 전두환 독재정권과 싸우다

"아기 기저귀 천에다가 빨간 매직으로 '내 자식 살려내라' '전두환 물러나라' 우리가 썼지."

김길자 씨는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 하에서 수없이 시위하고 경찰서를 드나들었습니다. 청와대 앞까지 가서 '아들을 살려내라'며 현수막을 펼쳐 들기도 했습니다.

"(광화문 앞)도로에 우리가 그 프랑카드를 펴고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죽는 것이 하나 두렵지 않았어. 죽으면 어쩔까 생각을 하면 그라고 못 뛰어들지. 한 5분이 되었을까 경찰차가 왔어요. 머리끄댕이 잡고 질질 끌고 데리고 가요. '전두환이 잡으러 왔다고, 내 자식 죽인 전두환이 잡으러 왔다'고 막 악을 쓰고 난리를 쳤죠."

"만천하가 전두환이 지가 이렇게 해서 된 줄 알잖아요. 그러면 말 한마디라도 자기가 그렇게 밝히고만 갔으면. 아무리 내 자식 죽인 죄인이지만 우리도 용서해 줄 수도 있어. 그런데 그라고 가야 쓰겠어. 못된 사람이지. 그 자식들도 똑같습니다."

■ 아들의 '폭도' 누명은 벗겼지만…지난한 '민주주의'의 길

"아쉬운 점이 진짜 많지. 지금이라도 여기 내려왔던 군인들. 공수부대원들 자기들이 한 것 좀 몇몇 사람은 증언도 했지만 더 나와서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누가 시켜서 했고 그런 것 좀 말 좀 해줬으면 좋겠어."

그날(1980년 5월 26일) 아들을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을 계속 후회했다는 김길자 씨.

"그때 내가 끌고 나왔으면. 저 아니어도 민주주의를 다 이룰 것인데. 멱살이라도 끌고 나왔으면 자기 목숨은 살 것 아니냐고 그랬어요. 그렇게 못해서 이렇게 못난 엄마, 아빠가 되었다고."

"못난 아버지, 못난 어머니가 아니라 훌륭한 어머니 아버지라고. 우리가 다 아이들한테 가르쳐서 앞으로 재학이 뒤를 이어서 민주주의 하게끔 할 것이라고. 걱정 마시라고. 나중에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새끼들이 죽기 살기로 이뤄 놓은 민주주의가 후퇴해야 쓰겠어요? 엄마랑 다른 아버지들이랑 다 살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 재학이 소원대로 나는 할 것이에요. 소원대로 못 해주면 (재학이가) 엄마는 뭐하고 있냐고 그럴거야."

아들 사진을 보고 있는 김길자 씨아들 사진을 보고 있는 김길자 씨

■ "진작 오지 그랬어"

"진작 오지 그랬어. 내가 빼먹은 말은 남편이 보충도 하고 해줬을 텐데."

1941년생, 올해 83살인 김길자 씨. 이제는 아픈 곳도 많고 몸이 불편해 아들 보러 5·18 묘지에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김 씨는 남편에 대한 질문을 하자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1980년 이후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싸우며 고초를 겪었던 남편, 문재학의 아버지도 최근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1980년 이후 40여 년. KBS광주 「영상채록 5·18팀」이 지난해 인터뷰 기획 보도를 시작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가려는 이유입니다.
  • [영상채록 5·18] 故 문재학 열사 어머니 김길자…아들 따라 ‘민주주의’
    • 입력 2023-01-26 07:04:49
    취재K
5·18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 실제 주인공 故 문재학.<br />1980년 5·18 당시 고등학교 1학년.<br />전남도청 최후항쟁에서 산화한 고등학생 시민군.<br />KBS광주 「영상채록 5·18팀」이 문재학의 어머니 김길자 씨를 인터뷰했습니다. <br />
5.18 당시 희생자들을 안치했던 ‘상무관’ -방송 화면5.18 당시 희생자들을 안치했던 ‘상무관’ -방송 화면

"시상에, 시체가 저렇게 많은데
무섭지도 않냐 겁도 많은 자석이"
"군인들이 무섭지,
죽은 사람들이 뭐가 무섭다고요"
-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중에서

KBS와 인터뷰 중인 故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씨KBS와 인터뷰 중인 故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씨

■ "네가 못다 이룬 민주주의, 엄마가 할게"

김길자 씨에게 아들(문재학)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고 물었더니 '민주주의'란 답이 돌아왔습니다. "나는 항상 그 말을 입에다 달고 사요. 네가 못다 이룬 민주주의, 네 뒤를 따라서 엄마·아빠가 할 것인게 걱정 말고 편안하게 있으라고."

아들이 주인공으로 나온 소설 『소년이 온다』를 본 소감도 그랬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생각에서 그렇게 도청을 지켰는데. 소설책까지 나왔으니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마음이 더 낫지요. 우리 재학이가 그래도 이렇게 했다는 것은 다 알고."

한강 작가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 故 문재학한강 작가 소설 ‘소년이 온다’의 실제 주인공 故 문재학

2014년에 나온 한강 작가의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는 5·18 당시 최후 항쟁에서 희생된 고등학생 시민군 문재학이 주인공입니다. 5·18을 다룬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소년이 온다'는 항쟁의 기억과 정서에 주목한, 그래서 가장 슬픈 이야기로 각인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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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문재학이 시위에 나간 건 5월 21일. 매일같이 도청 앞을 나갔던 아들은 스스로 시민군이 되어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산화했습니다.

"21일 날 나가서 안 들어와 그러더니 저녁에 늦게 왔는데 목이 꽉 쉬어가지고 왔어요. 선배님들이 전두환 물러가고 김대중 석방하고 그러라고 외쳐서 저도 같이 했다는 거예요. 지 형이 그랬어요. 언제 계엄군이 올지 모르니까 인자 가지 마라. 그러니까 안 간다고 그러대요. 안 간다고 그랬는데."

"(재학이가) 25일 날도 (집에) 안 와. 그래서 점심 먹은 뒤에 아빠하고 나하고 둘이 도청을 갔어요. 문 밖에서 이러고 보고 있어서 민원실 2층에서 저도(재학이도) 우리를 봤어요. 가자 집에 가자 그러니까. '엄마 창근이가 꼭 죽어가지고 들어온 것 같은디.' 창근이라는 아이가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창근이를 어떻게 수습을 해놓고 이제 집에 가도 가야지. 이렇게 놔두고는 못 가겠다고. 그래서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럽디다. 그래도 친구가 죽었다는데 수습을 해놓고 오겠다는데 어떻게 데리고 올 수가 없어."

19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 시위 모습 -방송 자료화면19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 시위 모습 -방송 자료화면

■아들이 남긴 말 "학생들은 손 들면 안 죽인대요."

김길자 씨와 아들의 마지막 대화는 1980년 5월 26일 저녁 전화 통화였습니다. 전남도청에 계엄군 투입이 예고된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겠다며 아들이 남긴 말. '학생들은 손 들고 나가면 괜찮다고 했어요.'
"그때는 통행금지가 저녁 7시에요. 7시 차 타고 온나 그러고 약속을 했지요. 그랬는데 7시 넘어서 전화가 왔어요. '엄마, 차가 끊어져서 못 가겠다.' 그때는 다그쳤죠. 그러면 어쩌냐 오늘 저녁에는 틀림없이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하는디. 그러니까 '학생들은 손들면 안 죽인다고 한다'고 그래요."
"저녁 내 잠을 안 자고 있는데 아주 도청 쪽에서 콩 튀는 소리가 나요, 총소리가. 그래서 '오메, 도청 있는 사람들 이제 다 죽었네' 그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날이 샙디다."

도청 진압 후 발견된 시민군, 오른쪽이 고 문재학도청 진압 후 발견된 시민군, 오른쪽이 고 문재학

당시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직후 상황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는 기록 사진이 2021년 처음 일반에 공개됐는데 여기엔 고등학생 시민군 문재학도 포함돼 있습니다.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 서울지부 기자였던 노먼 소프가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연관 기사] 5·18 외신기자 ‘노먼 소프’ 미공개 사진 최초 공개(2021년 5월 6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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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엄군 총에 맞아 싸늘한 주검이 된 아들

"날이 새서 아빠하고 외삼촌하고 도청을 갔어요. 언제 학생들이 그렇게 주둔을 하고 있었는가 싶게 깨끗하게 물청소 다 해버리고 아무것도 없어. 직원들만 하나 둘 그렇게 지나 다니고."

김길자 씨는 아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수소문했지만 결국 암매장된 싸늘한 주검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땅을 파지 못하게 막는 것을 물리치고 묘를 확인하면서도 아들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우리는 아니기를 바랐지. 재학이가 아니기를 바랐는데 다 기라고 해요. 다 부패가 되어서 못 알아보겠는데 (지닌) 교무수첩에 이만한 증명 사진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보고 다 기라고 해요, 재학이라고."

"담임 선생님이 검찰청에 가면 그 당시 죽은 사람들 사진이 있다고 재학이도 있는가 가보라고 해요. 가 봤더니 사진을 이렇게 다 내놓아요. 근데 우리 재학이가 거기에 있어. 재학이가 거기 있어. 그런데 어떻게 다 닦아 버렸는지 어디 총 맞은 데도 없어. 깨끗하니 집에서 신고 간 양말과 목에 면티, 교련복 바지."

김길자 씨가 아들(문재학)의 사진 액자를 닦고 있다김길자 씨가 아들(문재학)의 사진 액자를 닦고 있다

■ '폭도' 누명 벗기기 위해 투사가 된 어머니

"27일 새벽에 사망했다고 이름이랑 가르쳐줬더니, 재학이는 도청에서 총 들고 계엄군하고 같이 싸웠다고 폭도라고 해요.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운 것도 폭도라 하느냐고. 이제 아버지가 긴 책상에 있던 서류들을 싹 헤쳐버렸어. 계림동에 있었던 시청 마당에다가. 그러니까 서류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다 섞어져 버렸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폭도'로 매장된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자연스레 투사가 되어 갔습니다.

"그래 갖고 이제 내가 폭도 누명 벗기려고 이제 또 그때는 그러고 다녔지."

"(505 보안대에서) 소란 피우고 안 다닌다는 각서를 하나 써주라고 그래. 그래서 이걸 소란 피운다고 생각하냐고. 나는 내 자식 폭도 누명 벗길라고 이러고 다니지 소란 피운다고 생각은 안 한다고."

505 보안대는 당시 전두환이 사령관이던 보안사령부의 광주지구 직속부대입니다.
옛 505 보안대는 당시 고문이 자행되기도 했던 국가 폭력의 현장입니다. 현재는 옛 국군광주병원과 함께 5·18역사공원으로 조성돼 있습니다. 위치 :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대로956번길 16

■ '어머니'들의 5·18 유족회

"어딘지 모르고 따라갔는데 천주교 피정센터 거기를 가. 구속자 가족들 안성례, 이명자 그 사람들 한 다섯 사람인가 하고 우리하고 그렇게 만났어. '어떻게 뭉쳐서 가족들 석방시킬까' 이제 그런 것을 저녁 내 이야기 하고 집에 왔지."

안성례 씨는 오월어머니회(옛 오월어머니집) 초대 회장이고 이명자 씨도 회장을 지냈습니다. 오월어머니회는 1980년 10월 결성된 구속자 가족모임이 그 시작입니다.
[연관 기사] [영상채록 5·18] 간호사에서 ‘오월어머니’로 안성례(2023년 1월 5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6782687

'폭도' 누명을 벗기 위해, 구속된 자식을 석방 시키기 위해 그렇게 어머니들은 지난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현충일 때 망월동에서 유족회 결성을 했다고 그래요. 나는 그때 안 갔었는데. 관제 유족회에요. 관에서 하라는 대로만 그 사람들은 하지 우리 생각대로 안 해. "

"남자들이 회장 하면 관에서 너무 탄압이 심해서 안 되겠다. 여자들이 하자 우리들이. 그래서 여자들 한 다섯이서. 금남로에 별세계 다방이라고 있었어요. 그 2층에 유족회 사무실이 있었는데 우리가 유족회 간판을 떼어 왔어요."

경찰 무전기에 맞아 다친 김길자 씨(오른쪽은 현재 모습)경찰 무전기에 맞아 다친 김길자 씨(오른쪽은 현재 모습)

"84년이 됐는가. 이제 젊은 사람들까지 2세들 모임을 하자고. YWCA에서 모임 창설하는 날이야. 이제 우리 딸이 설명서도 쓰고. 그런데 거기를 못 가게 경찰이 아주 막고 못 가게 해요. 내가 이렇게 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무전기로 나를 때려버렸어. 그래갖고 피가 아주 다 흘러서 옷조차 다 버렸어. 여덟 바늘인가 꿰매고 그랬어."

■ 망월동 묘역을 지키다

"1983년에 교황님이 우리나라에 오셨어요. 교황님이 오시면 틀림없이 망월동을 가실 것이다. 그 안에 이 묘들을 다 없애버리려고 한다."

1980년 5·18 직후 희생자들이 집단 매장됐던 광주 망월동. 김길자 씨는 망월동 묘지를 지키는 데도 앞장 섰습니다.

"그 묘를 파낸 사람은 돈 주면서 고향에다 이렇게 모셔다 놓고. 안 판 사람들은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면 누구 것인지 모르고 뼈도 못 추린다고. 26기까지 파냈는데 묘지에 가서 못 파내게 지켰더니 그 뒤로는 안 파냈어요."

"우리는 두들겨 맞아가면서 투쟁해서 이렇게 묘지를 지켜놨는데. 그때 돈 받고 판 사람들도 같이 이렇게 국립묘지로 다 왔잖아요. 그것이 성질납디다. 그것이 성질나."

505보안대는 5·18 이후 유족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이른바 '비둘기 시행계획'을 수행했습니다. 그 하나로 망월동 묘지를 파내 개별 묘지로 이장 시켰습니다. 망월동이 유족들의 투쟁 거점이 될 것을 우려해 묘지를 강제로 분산시키려 한 겁니다.

■ 전두환 독재정권과 싸우다

"아기 기저귀 천에다가 빨간 매직으로 '내 자식 살려내라' '전두환 물러나라' 우리가 썼지."

김길자 씨는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 하에서 수없이 시위하고 경찰서를 드나들었습니다. 청와대 앞까지 가서 '아들을 살려내라'며 현수막을 펼쳐 들기도 했습니다.

"(광화문 앞)도로에 우리가 그 프랑카드를 펴고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죽는 것이 하나 두렵지 않았어. 죽으면 어쩔까 생각을 하면 그라고 못 뛰어들지. 한 5분이 되었을까 경찰차가 왔어요. 머리끄댕이 잡고 질질 끌고 데리고 가요. '전두환이 잡으러 왔다고, 내 자식 죽인 전두환이 잡으러 왔다'고 막 악을 쓰고 난리를 쳤죠."

"만천하가 전두환이 지가 이렇게 해서 된 줄 알잖아요. 그러면 말 한마디라도 자기가 그렇게 밝히고만 갔으면. 아무리 내 자식 죽인 죄인이지만 우리도 용서해 줄 수도 있어. 그런데 그라고 가야 쓰겠어. 못된 사람이지. 그 자식들도 똑같습니다."

■ 아들의 '폭도' 누명은 벗겼지만…지난한 '민주주의'의 길

"아쉬운 점이 진짜 많지. 지금이라도 여기 내려왔던 군인들. 공수부대원들 자기들이 한 것 좀 몇몇 사람은 증언도 했지만 더 나와서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누가 시켜서 했고 그런 것 좀 말 좀 해줬으면 좋겠어."

그날(1980년 5월 26일) 아들을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을 계속 후회했다는 김길자 씨.

"그때 내가 끌고 나왔으면. 저 아니어도 민주주의를 다 이룰 것인데. 멱살이라도 끌고 나왔으면 자기 목숨은 살 것 아니냐고 그랬어요. 그렇게 못해서 이렇게 못난 엄마, 아빠가 되었다고."

"못난 아버지, 못난 어머니가 아니라 훌륭한 어머니 아버지라고. 우리가 다 아이들한테 가르쳐서 앞으로 재학이 뒤를 이어서 민주주의 하게끔 할 것이라고. 걱정 마시라고. 나중에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새끼들이 죽기 살기로 이뤄 놓은 민주주의가 후퇴해야 쓰겠어요? 엄마랑 다른 아버지들이랑 다 살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 재학이 소원대로 나는 할 것이에요. 소원대로 못 해주면 (재학이가) 엄마는 뭐하고 있냐고 그럴거야."

아들 사진을 보고 있는 김길자 씨아들 사진을 보고 있는 김길자 씨

■ "진작 오지 그랬어"

"진작 오지 그랬어. 내가 빼먹은 말은 남편이 보충도 하고 해줬을 텐데."

1941년생, 올해 83살인 김길자 씨. 이제는 아픈 곳도 많고 몸이 불편해 아들 보러 5·18 묘지에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김 씨는 남편에 대한 질문을 하자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1980년 이후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싸우며 고초를 겪었던 남편, 문재학의 아버지도 최근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1980년 이후 40여 년. KBS광주 「영상채록 5·18팀」이 지난해 인터뷰 기획 보도를 시작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가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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